신문방송 뉴스목록
-
[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1:06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이어 나하(那覇)로 돌아와 평화로서의 아리랑을 논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일본군 위안부(日本軍 慰安婦), 역사의 산 증인이며 평화의 각성자!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 9월18일)을 일으킨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설치한 ‘위안소’에 강제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문헌과 증언 속에서는 위안부가 작부, 특수부녀, 추업부(醜業婦), 예기, 창기, 여급 등의 호칭으로 나타난다. 일본군의 위안소도 육군오락소, 구락부, 군인회관, 조선요리옥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이런 위안부의 총수는 최소 3만명에서 최대 40만명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 최소 8만, 최대 20만으로 추정한다.(요시미 요시아키 吉見義明) 주목되는 것은 전체의 절반 이상이 우리 누이들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조선과 타이완 여성들을 주로 동원하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점령지인 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 거주 네덜란드인 여성들도 강제 동원되었다. 지금까지 증언록『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나 북한 박영심 할머니(2006년 작고)가 중국 숭산 등지에서 ‘위안부’로서 겪었던 참상을 담은 중국 운난성 쿤밍의 미군관할 포로수용소 미국정보당국 보고서, 그리고 운난성 전 일본군 하야미 마사노리의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위안부 동원 방식은 취업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동원하였다. ‘위안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나가기도 하였으나 근무 내용을 분명히 고지하지 않았고 당시 신문 구독상태나 여성의 문자해독율을 고려할 때 여성에게 직접 모집 광고가 전달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본다. 일본군 당국이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였고, 일본군과 경찰 역시 동원 과정에 협조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였다.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력과 폭력을 이용하여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하기도 했다. 총동원체제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군의 요구가 이러한 물리적 폭력을 허용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1941) 이전에는 ‘도항증명서’를 받아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수속에 필요한 절차는 모집인이 공권력의 협조를 받아 도맡아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적이 위조되는 일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증명서’를 통해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군증명서는 모집인이나 인솔자가 소지했으며 일본군은 이동에 필요한 각종 편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위안부 할머니를 말할 때면 언제나 아리랑을 연관 지어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이 슬퍼서인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슬퍼서인가? 검색어 아리랑 또는 위안부를 치면 ‘위안부영화 아리랑 국악 신동···’, ‘위안부 할머니 주제가 소녀아리랑’,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아리랑’, ‘수필, 아리랑 위안부·마루타 생체···’, ‘아리랑의 눈물(Tears of Arirang) & 미국 비밀문서 일본 위안부···’ 등 너무나 많다. 이 중 ‘하늘로 간 아리랑’은 21살이던 1942년 부산 영도다리 근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 일본군에 끌려가 가족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싱가포르와 태국으로 끌려 다니며 3년간 위안부로 고통을 겪었던 노수복 할머니의 운명 보도 기사 제목이다. 1945년 일본군 패전 뒤 태국 유엔포로수용소에 잠시 수용됐다 탈출, 말레이시아를 거쳐 태국 최남단인 핫야이까지 도망쳐 살았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태국에서 식모,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결국 모국어도 잊어버렸다. 세상을 뜨기 전 그가 기억한 한국말은 ‘안녕하세요’와 고향 주소인 ‘경북 안동군 풍천면’, 그리고 아리랑이었다. 1984년 중앙일보 기자에게 “아리랑이 나를 살렸지, 왜놈 밑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견뎠지···”라고 말했다. 이 기사 이후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의 가족을 찾아달라고 요청하면서, 42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1991년 한국을 다시 한번 방문했고, 2011년 광복절을 앞두고 정대협 초청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휠체어에 앉은 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참가했다. 그리고 아리랑을 부르고 “메이디 막 막”(너무 너무 나쁘다)이라며 눈물지었다. 그해 14명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셨다. 이후 1998년 50년만에 귀국한 훈 할머니 등 우리말을 잊었지만 아리랑은 부른다는 해외 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언이 잇따랐다. 재일동포 박수남 감독의 <오키나와로부터의 편지-아리랑 노래> 등에는 일본 내 수십 곳의 위안부 사연과 아리랑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 <오키나와로부터의 편지-아리랑 노래>에는 1944년 10월10일, 일본의 남서제도인 오키나와 본섬을 중심으로, 미군 함재기에 의한 무차별 폭격이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져 수도격인 나하(那覇)시 가옥의 90%가 파괴됐고 사망자 600명, 부상자가 900여명에 이르렀고, 1945년 3월26일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 인근 게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 최초의 지상전에서 일본군과 미군은 물론 오키나와 원주민, 조선인 군부, 종군위안부 등 다수가 사망하거나 부상했음을 밝히고 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과 조선인 군부들을 스파이 혐의로 학살했고, 특히 현지 주민들에 대해서는 ‘강제집단사(집단자결)’를 강요하고 실행했다. 이 오키나와 전쟁은 6월22일 일본 남서제도를 담당했던 32군 대장의 옥쇄로 종결되었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잔류 일본군은 8월15일 이후까지 류쿠 열도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해 많은 주민들의 희생시켰다. 희생자는 일본군 9만8000명, 미군 1만4000명, 조선인 군부 및 종군위안부 1만명, 오키나와 주민 9만8000명이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방문,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한국인 위안부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아! 오키나와 아라시로 토시아키 평화기념공원의 오키나와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평화의 초석>(2009)에는 희생자의 이름들이 인각되어 있다. 오키나와 현민 14만9171명, 미군 1만4009명, 영국군 82명, 대만인 34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82명, 대한민국인 364명, 총 24만명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전쟁에서 조선인은 얼마나 희생되었는가. 아라시로 토시아키나 아라사키 모리테루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1만여 명의 조선인이 희생당했다. 그 희생자 속에는 오키나와로 징병된 학병(전문학교 재학 이상 학력의 징병자), 지원병, 군부, 위안부, 이전부터 오키나와에 체류했던 민간인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왜 오키나와전쟁에서 1만여명 이상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에 새겨진 숫자는 겨우 446명뿐일까? 그 이유는 첫째, 조선인 출신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비극적 죽음을 맞은 굴욕적 장소에 이름이 ‘각명’되는 것을 유족들이 거부한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 둘째, 일본의 정치 세력이 체계적으로 전쟁책임과 전후배상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희생자의 이름을 각명할 수 없다는 점. 셋째, 조선인 희생자의 유해 발굴 및 조사를 일본정부 및 오키나와 현정이 사실상 방기함으로써 죽음의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 더 이상한 것은 1945년 이전은 국적이 모두 조선이어야 하는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산으로 숫자를 줄이고, 배상에서 차이를 두겠다는 속셈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장에서 각오해야하는 사실은 오키나와전쟁에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비극을 해원(解寃)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일본, 오키나와 모두의 합동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특히 이런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남북이 일치된 견해와 행동력을 수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시 오키나와 위안부 문제로 들어가 본다. 오키나와전쟁의 막바지에 패전을 확신한 32군 사령부는 관련 서류 일체를 소각했다. 어쩔 수 없이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밝혀야 할 것이지만 오키나와 본섬에만 대략 130여 군데의 위안소가 있었고, 조선인 종군위안부가 있었다고 확인된 위안소는 41개소이다. 위안소 시설당 대체로 7~10명의 위안부가 있었음을 추정하면 최소 287명(41×7), 최대 410명(41×10) 정도가 오키나와 본섬에 강제 연행되어 체류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강제연행한 위안부 중 조선인 51%, 중국인 36%, 일본인 12%라는 기록에 견주면 조선 출신 위안부는 최소 460명, 최대 660여명에 이른다. 다시 주목한다. 이상의 추정 숫자는 오키나와 본섬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류큐제도에 속해 있는 미야코나 야에야마 제도에도 일본 32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오키나와 본섬과 마찬가지의 군 위안소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숫자는 1000여 명 가까이로 늘어나게 된다. 다큐멘터리영화 <오키나와전의 증언>(자나모토 케이후쿠 謝名元慶福 감독, 1피트운동회, 2005)은 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가 1000명 이상 오키나와로 ‘강제연행’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1991년 오키나와전쟁 당시의 조선인 강제연행 문제를 <아리랑의노래>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 재일조선인 박수남 감독의 증언집 <아리랑의 노래>는 이들의 수보다 더 큰 아픔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다섯살 때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의 프롤로그를 맡은 박주빈(7)군이 술을 올리고 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1944년 7월9일. 경상북도 농촌지역에서 강제징용 명령장을 받은 일군의 조선인 청년들은 그들이 속한 면사무소에 강제연행된 후 기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한다. 이들은 숙영지였던 대구사범학교에서 며칠을 머문 후 열차 편으로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으며, 여기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7시간의 항해 끝에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다. 이들이 북규슈(九州)의 모지항(門司港)에 도착한 것은 7월22일이었으며,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3000여명이었다. 그곳에서 일본군 12만명과 함께, 26쌍의 거선(巨船)을 타고 항해를 다시 시작한 것은 7월30일. 거친 풍랑과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피해 8월1일 가고시마(鹿兒島)현에 도착했다. 8월3일 가고시마항 출항. 8월5일 파파야와 야자수가 출렁거리는 아마미 제도에 도착. 그곳에서 4개월여 체류하면서 군부로서 진지공사를 한 후에 다시 출항한 것이 12월16일이었다. 항로는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德之島)였다. 오키나와가 가까워졌다. 12월21일 도쿠노시마를 출발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오키나와현의 수도 격인 나하항에 도착했다. 이날로부터 오키나와전쟁이 사실상 종료되는 8월15일까지, 조선인 군부 조장이었던 김원영은 고스란히 전쟁의 희비극을 체험한 후, 전쟁 말기에 미군에 항복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어떤 경로를 거쳐 오키나와에 입도했는가. 근로정신대로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연행된 여성들은 군부들의 이동 경로와 유사한 방식으로 오키나와에 왔을 것이다. 다만 군부들이 대체로 경상북도 촌 출신이었다면, 조선에서 연행된 종군위안부들은 대체로 16~19세의 전라도, 충청도 출신이었다는 증언이 눈에 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군과 민간이 결합한 형태로 진지에 위안소를 만들었으며, 이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조선인 위안부들을 ‘강제연행’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1944년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위안부로서 만주 및 중국 전선에 있었던 조선인 위안부들은 오키나와로 재배치된 일본군 제9, 24, 28, 62연대와 함께 오키나와 본도 및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로 흩어졌을 것이다. 일본 본도 및 대만 그리고 남양에 흩어져 있던 종군위안부 역시 패퇴하는 혹은 오키나와로 재배치된 일본의 육해군 부대나 학병, 특별간부후보생(특공하사관)과 함께 오키나와 본도 및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로 연행되었다. 군부(軍夫)는 군속(軍屬)의 최말단 노무자로 일본군 작업복을 입었지만 무기는 지급되지 않았다. 물론 전쟁 막바지의 옥쇄투쟁 과정에서는 일본군 부대장이 죽창으로라도 미군과 싸우라는 지시를 했지만, 그런 명령을 내린 자들은 물론 군부 역시 자연 가마(오키나와에서 ‘동굴’을 이르는 말) 방공호 입구에서 대변을 보다가 폭사(暴死)하기도 하는 등 삶은 비참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한 군부들은 조장(軍夫頭)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해상자살특공대의 2인용 선박인 말레를 은폐하기 위한 기지 건설에 동원되었고, 평온할 때는 식량 공출이나 종군 위안부 위안소 건설에 동원되기도 했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를 방문, 현지 주민과 평화의 악수를 나눴다. 아리랑 음반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같은 조선인으로 만났을 때 얼마나 비참함을 느꼈을까? 그런데 조선인 군부들은 면사무소에 입소하여 오키나와에 올 때까지 여러 차례에 탈영을 했다고 한다. 대개는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는데, 탈영하다가 붙잡힌 조선인 군부를 각 조원 70명이 죽봉으로 힘을 다해 구타하라는 끔직한 형벌이 있었다. 이렇게 살아 오키나와까지 와서 한 곳에서 폭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것이다. 위안부들의 생활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위안소 건물도 없었기에 군부들이 위안소를 건설할 때까지는 오키나와 원주민의 집에 일시 거주하기도 했지만, 위안부 다수가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실정이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이 어딘지도 몰랐다고 할 정도이다. 오키나와 현지인들에게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의 이미지는 치마저고리와 조선 민요 아리랑으로 기억된다. 괴로울 때면 위안부들은 조선 민요 아리랑을 불렀고(군부 역시 그랬다고 김원영은 증언한다), 식량증산을 위해 야산에 동원되었을 때도 아리랑을 불렀다. 산속에서 우연히 아리랑 민요를 듣게 된 조선인 군부들은 이곳에도 조선 처자가 있구나, 놀랐다고 하는데 나중에야 그들이 위안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군 병사들에게 위안소 출입은 월 4회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장교들에게는 이러한 출입제한이 없었다. 위안소 이용은 일요일로 제한되었는데, 1회 이용 금액은 1엔(당시 병대 월급은 7엔)이었고, 휴가나 휴일이 되면 병사들에게 군 당국은 ‘돌격1번’이라는 콘돔을 지급했다. 위안부 1인에게 대략 70여명의 병사가 계급과 무관하게 줄을 섰다. 장교들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다. 중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은 위안부들을 ‘전속’으로 소유하려 했으며, 전쟁 말기까지 위안부들을 극한 전쟁터로 끌고 다녔으며, 위안부와 함께 자결하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의 일본군은 “살아서 치욕을 겪지 말라”는 ‘전진훈’에 따라 자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키나와인들과 조선인들을 향해서는, 미군에 항복하게 되면 “남성은 탱크로 깔아뭉개 죽이고, 여성은 강간한 후 죽일 것이다”라는 괴담을 유포시켰는데, 이 때문에 오키나와인과 조선인들은 미군에 항복하는 선택 대신 수류탄으로 집단자결(집당강제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군 병사들이 위안소에 지불한 돈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위안소를 관리하던 일본인이나 포주에게 갔을 것이다. 기록을 읽어보면 위안소의 점주나 포주들은 대개가 일본군 상급 장교와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여성들로, 대체로 그 연령대는 30대 중반 이상으로 위안부 출신인 경우도 있었지만, 조선인 출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밝혀진 바 없다.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 위안부의 성병 관리는 일본군이 책임졌다. 하지만 위안소 운영을 통해 획득된 자산이 어디로 갔는가는 아직까지 뚜렷한 종착역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전쟁 과정에서 군부와 위안부는 여러 비극에 노출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군부가 죽는 것이야 능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막상 한계상황이 오자 일본군이 조선인 군부를 ‘스파이 혐의’로 의심하고 처단-학살하는 일이 잦아졌다. 오키나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파이 혐의로 붙잡힌 조선인 군부를 처형하고자 했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마디 하고 죽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텐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이렇게 외친 후 즉각 총살당했다. 오키나와인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패색이 명백해지자 조선인 군부의 조장은 “우리는 조선인이다, 이제 각자 헤어져 살길을 도모하자”하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 가마(동굴) 속의 군부들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미군에 항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모두 옷을 벗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길을 선택했지만, 등 뒤 일본군의 기총소사로 죽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전쟁 말기 대다수의 일본군 위안부들은 간호부가 되었다. 일본군에 강제연행되었던 위안부들은 전황이 안정화되어 있을 때는 성노예로, 전황이 악화되었을 때는 간호부로서의 이중역할을 강제당했다. 일본어도 몰랐고 오키나와어도 몰랐던 대다수 조선의 위안부들은, 마지막까지 일본군이 대피했던 가마에서 피 묻은 군복을 빨거나 가마 안에 사람이 가득한 데도 일본군 장교의 ‘성욕’에 고스란히 응해야만 했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스파이 혐의나 오키나와 주민들이 경험했던 ‘집단강제사’의 비극을 겪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미군의 기총소사나 폭격에 희생되기도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모든 옷을 벗고 두 손을 든 후, 뒤에 따르는 조선인 군부와 일본군을 선도해 미군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군부와 위안부 모두 전쟁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의 삶은 다른 경로로 전개되었다. 조선인 군부는 2차대전의 종전 소식을 포로수용소에서 들었다. 오키나와의 포로수용소는 민족별로 분류되어 분리 수용되었으며, 조선인들의 경우 하와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변화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조선인들의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노골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은 또 다른 비극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의 지프차를 타고 일본군과 조선인 군부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살아있었군요”라고 말한 후 포로수용소를 떠났지만, 일부는 오키나와에 은둔하는 길을 택했다. 해방된 조국으로의 귀국을 위안부들이 두려워하거나 포기한 것은 아마도 ‘가부장적 남근주의’가 지배적이던 조국에서 ‘환향녀’의 비난을 무릅쓰는 일의 공포와 함께, 위안부로서 삶의 존엄을 완전히 상실해 스스로를 긍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1972년 종군 위안부임을 최초로 밝힌 두 분을 주목하고자 한다. 1972년, 오키나와에서 ‘종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폭로한 이는 배봉기 할머니였다. 1972년은 오키나와가 미국의 점령지배 체제에서 일본으로 이른바 ‘조국 복귀’를 한 해였다. 일본의 행정당국은 1945년 이후 일본 본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구(舊)일본국민이었던 조선인들을 무국적자로 처리했다. 이 와중에 배봉기 역시 졸지에 무국적자가 된 것이다. 당시 오키나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배봉기는 자신이 일본을 위해 ‘애국’을 했다고 말하면서 “한국으로 갈 수 없다. 생활보조금이 끊기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게 애국의 대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이로서 위안부 존재가 부각되었다. 배할머니는 정치적 집단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좌파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잔인성’을 고발하고자 했고, 우파들은 온몸으로 ‘애국’한 구일본국민의 ‘국가에 대한 헌신’을 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누구도 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외쳤다. “나는 버림받았다. 조선에서도 또 일본에서도, 심지어 오키나와에서도.” 1984년 한국의 신문 기자에 의해 태국 한식당에서 손자의 자장가로 아리랑을 부른 노수복 할머니의 존재가 보도되었다. 이로부터 여자 정신대(위안부) 문제가 국내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한 상황에 처했던 위안부와 군부들은 왜 아리랑을 불렀을까? 앞에서도 제기했지만 아리랑이 슬퍼서도, 자신들의 처지가 슬퍼서도 아니었다. 자기 치유였다. 아니, 조선인이라는 공동체적 집단 치유였다. 신생아실(新生兒室)에서 한 아이가 울면 따라 우는데, 한 아이를 떼어 놓고 자신의 울음소리를 녹음하여 들려주었을 때는 따라 울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여 반응하는 심리(이타심 활성화)가 내재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영웅성, 선행을 따라하는 심리를 파악한 연구결과의 파생이론인데, 이를 ‘신생아성 반응현상’(新生兒性 反應 울음 現像)이라고 한다. 군부나 위안부들의 아리랑 부르기는 바로 이 현상과 같다는 것이다. 서로의 극한 처지를 아리랑을 통해 공감하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 속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sympathy)이야말로 아리랑이 간직해 온 미덕이 아니던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들 군부와 위안부들의 아리랑을 가슴에 담았다면 결코 서정민요라고 해서는 안된다. 아픈 역사를 견뎌 낸 치유의 노래이고, 고개를 넘는 힘의 노래이고, 그래서 아리랑은 서사민요인 것이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
[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 등록 2015-02-16 16:21:29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일본의 고대 음악·무용 연구서인「가무음악약사」(歌舞音樂略史)는 일본의 고대 답가(踏歌) 밭매는 소리 ‘아라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놀라운 기록이다. 아라리의 교류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큐(琉球)의 밭매는 소리 아라리는 류쿠어로 ‘새가 소리를 내다’ 또는 새가 ‘울다(鳴)’라는 의미인데, 조선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아라리’는 오키나와((琉球国 Rūchū kuku 1429~1879)와 닿고 있다. 이 ‘아라리’의 오키나와 전파는 우리와의 역사적 교류가 깊음을 알게 한다. 아라리는 청동기 후기 쯤, 육로와 해로를 통해 소금길이 열린 백두대간 강원·경북 일대에 예·맥·한족(濊貊韓族)의 결합 종족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단조로운 몇 마디 말을 단순한 리듬에 얹어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다 리듬을 형성하고, 주술성(呪術性)과 신호성(信號性)을 담아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형성된 노래다. 곧 산의 반향음인 ‘메(山)아리’로서 산신(山神)의 화답으로 인식하여 확산되며 불렸다. ‘아~리~’ 또는 ‘아~라~리’를 되풀이한 것이고, 이 ‘아리’ 또는 ‘아라리’는 원초적이고 단순한 ‘소리’·‘노래’·‘말’의 뜻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부연하면 ‘옹+아리’(어린 아이 말 배우는 ‘소리’), ‘벙+어리’(‘말’ 하지 못하는 사람), ‘뫼(메)+아리’(산+‘반향음’), ‘아니리’(판소리의 ‘말’로 하는 형식)라는 례(例)에서 확인된다. 이 ‘아리’ 또는 ‘아라리’가 세월이 흘러 한국인이 좋아하는 ‘ㅏ’·‘l'·'ㄹ’음에 ‘o'(ŋ)음이 첨가되어 롱·렁·성·랑 등과 결합하여 오늘의 ‘아리랑’이 된 것이니, ‘아라리’는 17세에 들어서기 전의 명칭이다. 오늘날 강원·경상지역 음악적 특징을 말할 때 ‘메나리토리’라고 한다. 이 때 <메나리>는 강원·경상지역 김매기하는 소리인데, 구성음은 상행 선율에서는 미·라·도·레·미이며, 하행 선율에서는 미·레·도·라·솔·미이다. 선율의 골격음은 미·라·도의 3음이다. 결국 ①김매기 소리 곡명 ‘메나리’⟶ ②강원·경상지역 ‘아라리’⟶ ③아라리의 통속화로 ‘아리랑’이 된 것으로, 기층성의 경고함으로 오늘날 그 경과적 명칭이 확인이 된다. 그러므로 오키나와에 전파된 아라리는 ②강원·경상지역 ‘아라리’ 단계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적어도 17세기 이전에 전파된 것이 된다. 구비전승체인 노래의 인류문화학적 전파계기는 집단이주(集團移住)이다. 이주해서도 일정 규모로 집단을 이뤄 이주지에 흡수 동화되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라리는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계기로 전파되었을까? 이를 추적하는데는 문헌기록, 유물, 설화 등에서 단서를 찾아야 하는데,「고려사」에는 첫 공식 교류가 1389년 유구국의 중산왕 찰도가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 조선시대「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말기까지 수십 차례 사절을 파견하여 진귀한 물산을 바치고 표류자들을 교환했다고 하며, 세조 3년(1457)부터 순조 32년(1831)까지 약 400년간 20여 차례의 표류 기록이 확인된다. 제주도와 류큐국 사이 무수한 표류민 송환 기록이 실려 있고, 드물게 진도에 표류해온 유구국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유구국 사절에 넘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 선조 23년(1590) 조에는 “유구국 사람 요우 등이 표류하여 본국 해변에 닿아서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요동으로 돌려 보냈다”라고 했다. 이 사실은 6년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민여경이 유구국 사신으로부터 서찰을 받아 임금에게 올렸다. “이웃 나라와 우호를 도탑게 하고 후의에 보답하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한 천지간에 살고 있으나 땅이 남북으로 떨어져 있으니 비록 한 장소에 모여 만나지는 못하나 실로 가슴속 깊이 사모하고 이 정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만력 18년에 본국에 소속된 요우 등이 쌀과 포를 운반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귀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유구의 백성인 것을 조사해 알고는 후하게 구휼하여 요동으로 보내어 북경으로 나아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어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습니다. 후면에 기록된 비단과 보물을 공손히 사자에게 부탁하여 가지고 돌아가 바치게 하여 조그마한 정성을 표시하나이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에 도착, 현지 주민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이후 수많은 표류자 처리가 양국 기록에 빈번히 나타난다. 해석상으로 유구국은 중국(명과 청)과 조선에 조공했던 나라로서 국제외교상 우호적인 교린관계를 유지한 ‘적례국’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표류해 들어온 상대 국민을 자기네 백성처럼 후대한 뒤 송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해류 때문에 표류자가 많았고, 숱한 표류자 송환 교섭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사이가 되었다. 실제 태조 1394년 세력 간 다툼으로 쫓겨난 남산왕이 조선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고, 중산왕이 송환을 요구하는 기사도「조선왕조실록」에 있다.(조선은 송환을 거부하고 남산왕은 4년 뒤 병사했다) 그런데 실록의 임진왜란 관련 기사는 유구국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조선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유구와 규슈 남쪽의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을 통해 군량미 비축과 군사적 도움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구왕은 단박에 거절하고, 왕을 책봉해 준 명나라 조정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정보를 전해준다. 일본이 조선에서 쫓겨 간 뒤에도 사쓰마번은 에도 막부와 명나라의 화평 중재를 유구국에 요구했으나, 유구국은 다시 거부한다. 그러자 사쓰마번은 보복을 했다. 무력 침공을 당해 오키나와 열도의 위쪽 부분을 빼앗기고 사실상 유구국은 일본에 복속되는 길을 걷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와의 공식 교류는 끊어지고, 표류민 송환만 되풀이됐다. 그런데 2007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개최된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탐라와 유구왕국>(7월17일~8월26일)이란 전시회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키나와에서 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수막새 기와 두 쪽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 유물은 이미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닌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고 결정적으로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암기와에서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 명문이 확인된 것이니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13세기 고려 명문 기와! 이 기와가 고려 삼별초 군이 쌓은 진도 용장산성 출토 기와와 같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에 집단적인 이주가 있었다? 이주를 할 수밖에 없는 특수 집단이다? 이 의문에서 떠오르는 것은 삼별초와 이들의 집단이주이다. 그동안 우리는 삼별초 최후에 대해「고려사」의 내용을 의심해 왔다. 즉, 지금까지 교과서는 삼별초가 800여년 전 몽골 침략군에 끝까지 싸우다 1271년 진도에서 배중손이 진압되고, 잔여 세력이 제주도로 갔으나 1273년 김통적 세력마저 소탕되어 진압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가슴 속에 지녀 온 삼별초란 누구인가? 민족의 전사, 야습(夜襲)·복병(伏兵)·협격(俠擊)의 빨치산 역사 원조, 고려 무장 사병집단이 아닌가? 이런 삼별초군이 진압당하여 흔적도 없이 섬멸되었다? 이는 믿기지 않는 기록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유년(1273)에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군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이 된다. 표류기록을 통해 추정하면 제주도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다. 동서로 1000㎞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 떨어져 있다.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 이 뱃길을 이 시기에 건너가 새로운 삶을 꾸렸을 집단은 바로 삼별초군이 아닐 수 없다. 주목되는 것은 삼별초군의 조력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구스쿠라 같은 큰 성의 축성과 비로소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구도 적고 범위가 작은 섬에서 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사실은 축성술과 전쟁술에 능한 외부 세력에 자극을 받은 결과로 본다. 왜냐하면 유구국의 역사 시대는 800년부터라고는 하나 류구국 사서에 나오는 왕조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3세기 이전에는 이런 기반이 미약했다는 것으로. 자극을 준 이들과 기술을 전해준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바로 삼별초군이라는 것이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주민들은 이곳을 아리랑고개라고 부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이 서린 언덕이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삼별초군의 오키나와 이주, 이는 우리 역사에서 보여지는 극적인 엑소더스(Exodus)요, 디아스포라(Diaspora)이다. 엑소더스나 디아스포라는 분노(憤怒)와 한(恨)의 분출이니, 진도와 제주의 역사나 삼별초의 존재는 섬나라로, 본토와 격리된 섬의 운명, 오키나와의 운명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로 간 삼별초군의 인적구성은 어떠한가? 삼별초는 무신들의 사병으로 시작되어 고려-몽골 전쟁이 끝나 대몽강화(對蒙講和)가 이뤄지자 조정에 의한 해체 위기에 원나라에 입조하고 돌아 온 원종이 마치 몽고군이 파견한 식민지 담당 총독처럼 행세하는 것에 반발하여 배중손을 우두머리로 하여 몽골(원나라)과 고려 왕조에 대항하였다. 삼별초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왕족 승화후 온(昇化候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 일부 노비와 개경으로 가지 않은 귀족들이 참여하여 1000여 함선을 징발, 진도(珍島)로 가 용장산에 행궁을 마련하고 산성을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민중들의 호응도 있었다. 경상도 밀성(밀양)의 군민들이 봉기하여 수령을 죽이고 진도 정부에 호응하였고, 개경에서는 관노가 일어나 다루가치와 고려 고위관리를 죽이고 진도 정부에 투항하였으며, 경기도 대부도(大部島) 주민들은 몽고인 6인을 죽이고 진도 정부와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진도 정부’가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자 멀고 가까운 여러 지방의 관원들이 진도에 들어가 고려황제 온을 알현하려고할 정도였다 이후 3년간 항쟁하다 배중손과 승화후 온이 남도석성에서 전사했다. 이로써 김통정이 우두머리가 되어 제주도로 가 1273년까지 고려·몽골 연합군과 항전하다 일본정벌 정책을 준비한 1만여 여·몽 연합군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크게 패했다. 항파두리 북쪽 바굼지(破軍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3년 간의 대몽항쟁은 외세 침략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한 호국 항쟁의 영웅적 활동이었다. 각 계층의 사람들이 대열에 참여했고, 대다수가 저항의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제주에서 진압되었다 해도 이들의 성향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잔족 세력의 최후와 처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는 완전한 진압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이주의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삼별초군의 오키나와 집단이주는 축성술과 전투술과 기와 제작술 뿐만 아니라 아라리도 전파시켰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에 집단이주한 이들은 삼별초군 만이었을까? 또 있다. 춘향전 연구의 대가인 연세대 설성경 교수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 두 권의 논문집을 냈다”고 했다. 그 단 한 줄의 문장은 바로 “홍길동이 오키나와에 갔다”이다. 실존인물 홍길동이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주장이다. 홍길동(洪吉童 洪吉同 1440~1510)은 전남 장성군 황용면 아차실(亞次谷)에서 홍상직(洪尙直)과 관기 옥영향(玉英香 소설에는 관비 춘섬) 사이에서 난 서자로, 1500년까지 충청도 공주 무성산(公州 茂盛山)을 근거지로 의협(義俠) 활동을 한 인물이다. 소설에서는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이라 역설하였다. 허균(許筠 1569-1618)은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 불만이 쌓인 원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으로 나누었으며, 홍길동을 호민이라고 하였다. 주인공을 집권층에 항거한 의적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태백산 사고본 연산 6년(1500) 10월22일조는 다음과 같다.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에 도착, 현지 주민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홍길동이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자칭하며 무리를 이끌고 관가에 들어가 기탄없이 강도 행각을 했다며, 조정은 홍길동에게 강상죄를 적용하였다. 더불어 조정은 홍길동의 이러한 행동이 지방 관리와 유향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를 넘긴 1501년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하였다. 홍길동을 도운 죄로 잡힌 지방 관리 엄귀순은 끝까지 국문에 승복하지 않았다가 옥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홍길동을 잡았다는 기사 이외에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기사가 없다. 이익의「성호사설」에서도 조선 시대의 3대 도둑으로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홍길동을 논하면서 이들의 이름이 장사꾼이 맹세하는 구호에까지 들어와 있다고만 적고 있다.「연산군일기」가 시대 상황으로 인해 일부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는 하나 다른 기록이 상세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런 기록 태도는 강상죄목으로 구금되었다가 최후를 맞았거나 탈옥을 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의 홍길동 연구 결과는 홍길동이 조선에서 죽은 흔적이 없고, 이후 야사나 소설에서는 홍길동의 해외 출국의 이야기를 직접 또는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1500년 홍길동의 의금부 체포 당시는 가뭄으로 도둑들의 피해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공물을 감해주고, 감옥의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대책을 세웠다. 홍길동 집단을 해외 이주시키는 선택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1500년에 유구왕 상진(尙眞)이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빙례(聘禮)를 올리고 토산품을 바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성희안(成希顔)을 통해
-
[아카지마 아리랑⑤]일본의 사죄, 오카모토 ‘분야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사회 > 사회일반 [아카지마 아리랑⑤]일본의 사죄, 오카모토 ‘분야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0:11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 섬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현지 주민들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오카모토 분야(岡本文彌)의 신나이 부시(新內節 sinnai busi) ‘분야 아리랑’이 있다. 1992년 일본 전통 창(唱) 장르인 신나이부시 기능보유자 오카모토 분야(1895~1999)가 97세에 창작, 공연한 작품이다. ‘종군 위안부 사죄의 노래’란 부제가 알려주듯 의미있는 작품이다. 1992년 전국 순회공연 중 당국의 제지로 더 이상 연주되지 못했다. ‘신나이부시’란 1700년대 말 성행한 일본 전통 창으로 당시 무사계층에서 향유되다 차츰 서민들에게 확대되어 오늘에 이른 장르이다. 오카모토 분야는 1957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활동하다 103세인 1999년 작고했다. 일본 내 저항적인 예인으로 활동했다. 1968년 ‘시주호쇼’상을 수상하는 등 이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소화(昭和) 초기 ‘짖어라 백성이여’로부터 많은 작품을 지어 불렀고 ‘나의 아리랑’은 1992년 작이다. 오카모토는 “1940년대 초 조선방송협회(JODK·현KBS) 출연을 위해 방한한 바 있는데 당시 남대문에 있는 한 요릿집에서 이수정(李水晶)이란 기생으로부터 아리랑을 듣게 되어 그 정감을 내내 잊지 못했다. 그러던 터에 일본 정부가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정정당당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라도 이 문제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어 그 사죄의 마음을 아리랑에 연결하여 지은 것”이라고 했다. 위안부의 한스런 회한을 1인칭으로 하여 시작하는 창은 역시 한·일 관계사의 구체적인 증언이 아닐 수 없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 섬의 조선인 위안부 숙소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분야 아리랑 (내레이션) 나는 1940년 16세 때 조선학교에서 담임인 일본인 교사와 함께 경찰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헌병에게 ‘위로부터의 명령이다. 명령에 거역하면 죽을 줄 알라’고 협박을 받아 몸이 더렵혀진 위안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일본 병사들에게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 저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결혼할 수 없고 아이도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그 누구 때문에 제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어 버렸단 말입니까? 밉습니다! 분합니다! 밉습니다! 분합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노래) 아리랑 고개 한가운데에서 나아갈까 되돌아갈까 망설이며 울었습니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고향 땅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이시여. 귀여운 남동생이 그곳에 있소. 사랑스런 여동생도 기다리고 있소. 만나고픈 심정은 산과 같으나 이런 비참한 몸으로 어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요. 한밤의 별이 밝게 빛나건만 이 내 가슴 고통은 가실 길 모르오. 밤하늘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나. 나의 님은 어디에. 나만 남아 있는 이 타국 땅. 남쪽 나라까지 손을 뻗어. 처녀 여인 분별없이 붙잡혀서 얼굴도 모를 ‘병사’에게 먹이가 되어. 무정비도(無情非道)의 반복이었소. 모르는 척 하는 게 그 어느 나라 도리인가요. 천 년 만 년 조약돌이 바위가 되어,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 이 분함은 잊을 길이 없다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오카모토 분야 창·김경원 역)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 섬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래고 나하 항으로 돌아왔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이 아리랑은 일본 속의 아리랑 중 매우 특이하고 아리랑다운 작품이다. 한일관계 상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의미있는 일본 음악인의 용서와 사죄의 아리랑이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
[뉴시스] 아카지마아리랑 기사모움뉴시스2015.01.29.네이버뉴스 "왜 우리는 일본의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로 가는가" 【서울=뉴시스】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이 문경새재를 찾았다.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송옥자 회장과 회원들, 아리랑홍보대사 송미진, 문경아리랑경창대회 최연소 수상자 박주빈(당시 3세), 상여소리 명창... 뉴시스2015.02.16.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위령제를 올렸다. 유일한 20대 단원 송미진씨가 당시 위안부 숙소 앞에서 오열했다. 사진... 뉴시스2015.02.13.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이어 나하(那覇)로 돌아와 평화로서의 아리랑을 논했다.... 뉴시스2015.02.14.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④]일제 음반으로 아리랑 접한 미군, 아이러니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한국인 위안부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사진= 엄문희... 뉴시스2015.02.14.네이버뉴스[신동립 잡기노트]경북문경·日오키나와, 슬픈 평화…‘아리랑’ 뉴시스2015.02.12.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 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뉴시스2015.02.15.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⑤]일본의 사죄, 오카모토 ‘분야 아리랑’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 섬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현지 주민들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뉴시스2015.02.06.네이버뉴스 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 【서울=뉴시스】 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뉴시스2015.02.11.네이버뉴스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인조(1623~1649) 때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그 왕을 잡아 갔다. 이에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떠났는데 배가... 제주의소리2010.03.22. 일본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서 부르는 평화의 노래 1945년, 일본 아카지마섬 '아리랑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한 무리의 여인들이 고개를 넘다말고 먼 바다를 바라본다. '저기 어디메쯤이 내 고향이겠지...' 이들이 바라본 곳은 현해탄 너머의...
-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사회 > 사회일반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1:54 | 수정 2016-12-28 14:35:26 【오키나와=뉴시스】평화의 초석.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1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외침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오시비앵침(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돼선 안 된다고 결의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년을 맞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태인을 비롯한 정치범, 전쟁 포로 등에 대한 집단 학살)를 자행한 곳인데, 1945년 1월 27일 옛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1947년 박물관으로 개관되어 처참한 히틀러의 만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박물관 입구에 쓰인 경구(警句)가 바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 된다’이다. 오늘의 우리가 역사유적지를 답사하는 이유가 이 경구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박물관 앞에서 한 말이다. 아마도 이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이나 기념비를 세운 분들도 같은 말을 하였을 것이다. 가해든 피해든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결의의 징표가 바로 이런 박물관이고 기념표식이기에 이를 건립하며 똑같은 염원을 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참혹하고, 반인륜적(反人倫的)이었던가를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지옥 상항을 벌린 인간들이 무슨 염치로 사랑을, 평화를, 꿈을 이야기 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엄중한 질책이다. 이제 시인은 이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역사기록으로서의 서사시를 써야 한다는 자성이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깊은 자성을 우리도 이곳 오키나와에서 엄숙하게 수용해야 한다. 【오키나와=뉴시스】평화기념공원.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1944년 일본해군 ‘특설수상근무대’(特設水上勤務隊)로 끌려온 350명의 조선인 군부 우리 오빠 형들이 일본군의 교쿠사이(玉碎)로, 폭약을 묶어 미군 전차로 밀어 넣어 죽고, 미군의 폭격에 죽었고, 52명의 종군 위안부 우리 누이 언니들이 위안소에서 또한 요나구니지마 구부라항 이동 중인 배 안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이들이 바다 건너 조선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가 아리랑이었음을 확인한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아리랑을 서정민요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마다 조선인 희생자의 수는 다르다. 더욱이 오랜 세월이 지난 2010년대에 들어 동북아역사재단이 조사한 증언·공문서 등 각종문서 상세조사에 의한「일본군 위안소 지도」에 의하면 오키나와에서 채록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237명이 산출되었으니 이 섬에서의 우리 아리랑은 통곡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1970년 7월 8일, 도쿄타워 인질 사건 “나는 우치난추 도미무라 준이치다. 20세 이하 청소년은 풀어주겠다. 조선인과 우치난추는 풀어주겠다. 하지만 미국인과 일본인은 풀어주지 않겠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 천황은 사죄하라!” ‘일본인들이여, 오키나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은 도미무라 준이치(富村順一)가 칼 두 자루를 들고 도쿄타워에 들어가 미국인 선교사의 목에 대고 외친 말이다. 1930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고, 1940년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를 거부, 소학교에서 쫓겨났고, 1954년에는 나하(那覇) 형무소 폭동에 참가했으며, 1955년에 일본 본토로 건너와 각종 운동에 참가했고,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자 위령탑 건설 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다. ‘야마톤추’(일본인이라는 오키나와 말)에게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의 통한을 외친 인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외침 속에 ‘조선인’이 들어 있다. 우치난추의 통한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조선인(일본군 군부·군속·위안부)들의 통한을 일본인들에게 전한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오키나와에 건립된 <아리랑비>, <조선인 희생자위령탑> 등 건립을 추동하였다. 이 외침은 동서 1000㎞ 남북 400㎞ 해역에 160여개의 섬(유인도는 약 50개)으로 구성된 류큐(琉球) 왕국(1429년 호족세력 통합-일본·중국·조선 중개무역국)을1879년 일본 사쓰마번이 강제합병(1차 유쿠처분)시키고, 1872년 일본 야마토(大和)정부가 통합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군의 일본 본토 육상전을 저지시키는 사석(捨石戰)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1945년 종전 후에 미국 군정으로 넘기고, 1972년에는 일본에 흡수하면서도 미군기지로 남겨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오키나와=뉴시스】히메유리의 탑.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우리도 1905년 보호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제한하고 1910년 합병시켜 45년까지 식민지화 하여 수탈하고,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게 했고, 1948년 분단을 시킨 것이 일본이니 같은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강영훈 육군소장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런 지시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관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 발언이긴 하다. 그러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동정어린 발언이기 보다는 불완전한 독립을 마치 완전한 독립인 것처럼 거만함이 묻어있다. #3 ‘미안하오 유구왕자여 슬프구나’(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동야휘집』·『광해군일기』·『인조실록』·『택리지』·『연려실기술』·『열하일기』, 그리고 『담옹유고(藫翁遺藁)』같은 야담집이나 실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구국 왕자의 슬픈 죽음에 대한 것으로 김려(金鑢)가 담옹유고에 기록한 <유구왕세자외전>이 그것이다. 김려는 <미안하오, 유구 옹세자여! 정말 미안하오>(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 悲夫哀哉)라는 제목으로 애도의 글을 남겼다. 인조(1623~1649) 때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그 왕을 잡아 갔다. 이에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떠났는데 배가 표류하였다. 표착지는 제주 바닷가. 이 사실을 안 제주목사(濟州牧使) 이기빈(李其賓) 또는이란(李灤)은 배 안을 정탐하고 흰 앵무새 1쌍, 수정 알 2매(枚)의 보물과 술을 만드는 돌(酒泉石)이 있어 욕심이 났다. 4각의 돌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부으면 술이 되는 신기한 물건이고, 앵무새는 왼 발톱으로 비파를 켤 수 있다고 했고, 수정 알은 밤에 환하게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란은 왕자에게 요구했다. 이 보물들을 주면 유국구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그러자 왕자는 눈물로 호소했다.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내가 보물을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부왕께서 힘없이 붙잡혀 갇혀 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부왕을 풀어 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대부(大夫)는 이를 슬퍼하소서.” 이에 이란은 세 번씩이나 보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왕자는 눈물로 사정을 했다. 그리고 왕자는 이란의 욕심으로는 물건을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그럴 바에는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고 각오하고 혈서를 썼다. 절명시(絶命詩)인 것이다. “세 어진에 순장(殉葬)을 대속(代贖)할 이 누구인가/ 두 아들 배를 탈 때 도적이 불인(不仁)했도다/ 모래벌판 해골에 잡초가 얽히리니/ 이내 혼 고국(古國) 간들 슬퍼할 친지 있을까/ 제주도 앞 바닷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남은 원한 선명하여 만 년간 오열하리.” 기어이 이란은 보물을 빼앗으려고 배를 포위했고, 위협에서 왕저의 보물을 보호하려는 종자 한 명은 돌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에 이란의 수군은 이를 빼앗으려 달려들고 배안을 급습하여 모든 보물을 약탈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13명의 시종과 왕자까지도 죽이고 말았다. 이란은 조정에 왕자의 배가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속여 아뢰었고, 강탈한 재물을 모두 소유했다. 그러나 앵무새가 땅을 밟자마자 죽는가 하면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포된 이란은 큰 벌도 받지 않고 방면되었다. 이 사실은 많은 문인들에게 유구국의 부왕과 왕자를 애도하는 글을 쓰게 했다. 대표적인 글이 김려가 쓴 글로 <미안하오 유구왕자여>가 있다. 이 번역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슬프고 슬프구나. 유구 세자의 일이 슬프고 슬프구나. 세상에는 ‘세자가 작은 보물을 아껴 위로 임금을 맞이하지 못했고, 아래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족히 일컬을 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지나친 말이다. 이란의 형세를 보건대 보물을 주었어도 죽었고 보물을 주지 않았어도 죽었을 것이다. 똑같이 죽는 것인데 하필 보물을 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자처럼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명철한 사람이 어찌 차마 보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신이 살면 임금을 맞이할 수 있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음에랴! 그러나 세자는 반드시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릇 이란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재물을 탐내 사람을 죽인 것이 첫 번째이다. 이웃 나라와의 외교를 망가뜨린 것이 두 번째이다. 임금을 속인 것이 세 번째이다. 신하가 이 가운데 한 가지 죄라도 있으면 마땅히 형을 받아 죽어야 하거늘 당시 군자가 그 죄를 성토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내지 않아 포악한 난신(亂臣)이 편안히 복을 누리고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유구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 건너 서쪽을 향해 두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어떤 말로 대답할 것인가? 이란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충분한 일인가? 단지 다행히 유구가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 바야흐로 왜놈의 난리 때문에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로부터 유구의 통신사가 끊어졌으니, 아, 이웃 나라에 들려 줄 이야기가 아니다.” 1612년 사헌부 기록과「조선왕조실록」제27권 <광해군일기> 2월조에도 있고, 얼마나 애석했던지 지리서인「택리지」제주 대목에도 인용되어 있다. 와전되어 설화적인 요소가 보이긴 하지만 왕자의 제주 표착과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재물을 취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후 우리 조정은 유구국 표류자에 대해서는 어명으로 편의를 봐주는 조치를 취했지만, 외교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유구에 진 여러 빚 중에 가장 큰 빚이다. 바로 김려의 위의 글은 분명 이 빚을 후손들이 꼭 갚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긴 것일 것이다. 【서울=뉴시스】김연갑, 아리랑 권위자 역사에 대한 미안함을 갖는 것, 선린을 추구하는 진정한 자세이며 외교상 지성사의 전통이 아닌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는 창조되는 것이 아닌가? #4 아라리의 고려말 확산 “이 노래는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는 노래로서 지금으로부터 580년 전 고려조가 망하게 되자 이제까지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이를 비관하고 송도(松都 개성의 고려 수도)에서 두문불출 은신하다가 정선에 숨어들어 지금의 거칠현동(居七賢洞)과 백이산(伯夷山)을 소요하면서, 이제까지 섬기던 고려왕조가 그냥 망하고 말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계승될 것인지, 송도에는 험악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는 이러한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데 연유한 것이다. 본래는 ‘아라리’(我羅理)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연유된 듯하더라. 당시 몇몇의 고려유신과 함께 거칠현동과 백이산에서 고려조를 위한 충의로웠던 마음씨를 읊은 칠현들의 시는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정선아리랑비> 음기(陰記)의 일부이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발행되는 모든 자료에 유사하게 전해지는 내용이다. 고려말 상황으로 이성계의 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여 관직에 오르지 않고, 충절을 지키려 정선에 은거하며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는 신세 한탄의 시를 읊었다. ‘아라리’가 오늘의 ‘아리랑’으로 음전(音轉)되었다는 논점이 주목된다. 이상에서 제시한 네 가지 상황, 우리와 오키나와는 일본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우리가 미안함을 가져야 사실도 있으니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를 전제하여 아리랑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를 유념하여 오키나와 속의 아리랑 층위를 살펴보기로 한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
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기미양)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 등록 2015-02-06 10:35:35 | 수정 2016-12-28 14:32:33 【서울=뉴시스】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상황이라는 다층적 관계로 오키나와는 깊은 관계이다. 이 관계의 상징이 아카지마(阿嘉島)에 있는 ‘아리랑 고개’와 그 사연이다. ‘고개의 노래’라는 아리랑이 이 오키나와 외딴 섬에서 불렸다는 아픈 사연을 전해 주는 아리랑고개는 분명 세계지도에 없는 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와 사연을 우리 아리랑사(史)에 기꺼이 편입시키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에 두 진객이 함께 한다. 박주빈(7)군과 송미진(25)양이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참가단 15명의 일원인데, 박군은 5세 때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음반 프롤로그를 장식한 꼬마 소리꾼이고, 송양은 문경아리랑의 전설적 소리꾼인 고 송영철 선생의 손녀이다. 2012년 문경시가 제작한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은 명창 송옥자(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이사장과 송영철(1917~2002) 선생이 생전에 남긴 문경아리랑 녹음 자료를 수록한 CD 2장이다. 첫 트랙에 귀여운 산골 어린이의 서툰 발음으로 부른 문경아리랑을 수록, 3세대의 소리를 장식한 문경아리랑경창대회 금상 수상 어린이 명창 박군이다. 이번 참가는 외할머니인 문경아리랑보존회 총무 이경숙 여사와의 동행으로 소리를 좋아하여 선뜻 가겠다고 했다. 추진단은 소리꾼으로서의 자질을 발휘하는 것이라며 환영하였고, 11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에게 올리는 ‘헌가(獻歌) 아리랑’을 맡기로 했다. 【서울=뉴시스】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상황이라는 다층적 관계로 오키나와는 깊은 관계이다. 이 관계의 상징이 아카지마(阿嘉島)에 있는 ‘아리랑 고개’와 그 사연이다. ‘고개의 노래’라는 아리랑이 이 오키나와 외딴 섬에서 불렸다는 아픈 사연을 전해 주는 아리랑고개는 분명 세계지도에 없는 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와 사연을 우리 아리랑사(史)에 기꺼이 편입시키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에 두 진객이 함께 한다. 박주빈(7)군과 송미진(25)양이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참가단 15명의 일원인데, 박군은 5세 때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음반 프롤로그를 장식한 꼬마 소리꾼이고, 송양은 문경아리랑의 전설적 소리꾼인 고 송영철 선생의 손녀이다. www.arirang21.org 송양은 10대 때 문경의 대표적인 소리꾼이었던 할아버지(당시 27세)로부터 1943년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아 귀국한 사연과 함께 아리랑을 듣고 배웠다. 이후 성장하며 소리에 소질이 있음을 자각하고 본격적으로 할아버지 소리를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평생 산 문경읍 하초리가 작년에 ‘문경새재아리랑마을’로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되어, 송옥자 선생을 스승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소리길을 걷기로 했다. 문경에서는 격대(隔代) 소리꾼의 탄생이라며 축하해 주었다. 어머니 김순옥 여사와 동행하는데, 특별히 할아버지 유품 중에 징용 때 휴대했던 소지품을 가지고 가서 할아버지를 회고하기로 했다. 그 진품은 현장에서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번 답사에서는 할아버지 무릎에서 늘 듣고 자란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을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서 희생당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헌사할 예정이다.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은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가 주축이 되어 실재적 아리랑고개인 ‘문경새재’와 역사적 아리랑고개인 ‘아카지마아리랑고개’의 역사적 만남을 통해, 아리랑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느끼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답사이다. 이런 행사에 박군과 송양의 참여는 매우 뜻깊다 하겠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
[경향] 아리랑박사 김연갑
-
[뉴시스] 기미양, 내가 만난 ‘아리랑 축제’ 현장·현장·현장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41212_0013353594#_DYAD 유네스코는 인류문화유산 '서정민요 아리랑'(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의 다양성. 공동체성, 창조성에 주목했다. 이러한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주년 기념행사가 전국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중 필자는 지난 4~5일 바쁘게 세 곳의 행사에 참여했다. 상주아리랑축제, 문경아리랑전수관 오픈식, 춘천의병아리랑 우석여중 공연이다. 모두 나름의 주제 하에서 자발적 전승을 실천하는 현장이었다. ◇상주아리랑, 영남아리랑과의 새로운 융합 현장 유네스코는 아리랑이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는 '창조적 계승'에 주목했다. 아리랑 역사에서 창조적 계승 작품을 시대적으로 꼽는다면 그 첫째가 1926년 영화주제가 아리랑, 둘째가 1950년대 김옥심제 정선아리랑, 셋째가 1980년초 김소희에 의해 작창된 상주아리랑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상주아리랑이 목하 주목을 받고 있다. 무용음악(김영희 작 '고난의 꽃 아리랑')으로의 장르 확산은 물론 통일아리랑(이광수 소리), 북간도아리랑(남은혜 소리) 등으로 '노가바'되고 있다. 메나리조에 육자배기조 융합의 묘가 이런 장르 확산현상을 낳고 있는 것이다. 상주아리랑축제는 이번이 세 번째로 1997년부터 김동숙 회장(69)을 중심으로 30여명의 회원으로 보존회가 구성되어 2008년 첫 행사를 개최했고, 2012년 12월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일인 12월5일 두 번째 행사를 개최했고, 금년 등재 2주년 기념으로 12월4일 세 번째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사단법인 영남아리랑보존회 6개 지부(상주·영천·대구·부산·봉화·성주)와 함께 하여 상주아리랑과 영남지역 아리랑의 새로운 융합을 꾀하였다. 상주시민과 영남 지역 아리랑의 이해와 자극을 통해 상주아리랑의 위상 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특히 관객과 소통하고 이해를 위해 해설이 있는 공연으로 필자가 맡아 진행했다. 나름으로는 상주아리랑의 융합정신을 시대정신으로 제시하려 노력했다. 행사는 '난타아리랑'으로 막을 열어 김동숙 회장의 상주아리랑으로 시작했다. 이어 사단법인 영남아리랑보존회 정은하 회장이 1936년의 대구아리랑과 2003년 자신이 작창한 대구아리랑을 열창했다. 이어 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회장과 회원들의 영천아리랑, 조순분과 임옥자의 봉화아리랑과 성주아리랑, 부산아리랑보존회 김희은의 동래아리랑까지 이어졌다. 이외에도 북한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서도아리랑·영천아리랑·경상도아리랑·해주아리랑을 선보였다. 창작 아리랑으로는 독도아리랑, 부산아리랑, 달성아리랑이 소개되었다. 이렇게 상주를 중심으로 하여 영남의 아리랑 전승 활동이 역동적으로 융합하는 현장에 있었다. 2014 제3회 상주아리랑축제는 새로운 융합을 모색하는 아리랑시대의 한복판이었다. ◇문경아리랑 전수관 준공식 2010년대 들어 존재 부각에 성공한 지역 브랜드 중 문경아리랑은 수위로 꼽힌다. 이 과정에 오랫동안 문경아리랑을 전승해 온 송옥자의 존재는 분명하다. 박달나무가 문경새재를 상징했듯 문경아리랑은 송옥자(63·단법인 문경아리랑보존회 이사장)가 상징해왔다. 그래서 문경시는 2013년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취입으로 송옥자의 위상을 인정했고, 이번 12월5일 문경아리랑보존회(회원 40여명)를 전승 단체로 인정하여 전수관을 준공, 기념식과 공연을 하게 되었다. 필자는 상주 행사를 마치고 다음날 문경으로 넘어와 전수관 준공식에 참석했다. 송옥자 이사장은 축사에서 "오늘 아리랑 등재 2주년 기념일에 오랜 꿈이었던 전수관의 준공식을 갖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라고 했다. 고윤환 시장도 축사에서 "국립아리랑박물관건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여 그 열기를 확인했다. 이 열기 속에는 문경아리랑보존회의 견고한 공동체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알고 있다. 문경아리랑보존회의 견고한 공동체성은 이날 기념식에서도 확인되었다. 회원 모두가 잔치음식을 집에서 손수 마련해 와서 함께 한 것인데 도토리묵과 두부가 양념장으로 맛을 더했고, 북어찜과 닭발찜이 특별 잔치임을 알렸다. 배추전, 식혜, 시루떡도 푸짐했다. 문경아리랑의 전승 의지에 답한 아리랑전수관 준공, 이에 다시 화답한 것이다. 이만한 잔치상이 또 있겠는가? 각박한 서울살이에 쪼들린 필자의 지나친 감상만은 아닐 것이다. 전국의 이런 저런 많은 전승 단체를 겪어온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이 공동체성은 소중한 아리랑정신의 하나인 대동정신의 바탕일 것이다. ◇의병아리랑보존회의 의로운 활동 강원과 경북 일대에서 불려지는 아라리에는 지명과 서사가 있는 사설이 있다. 의병사를 입증하는 구비(口碑) 사설 6수이다.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춘천의 봉의산아 너잘있거라/ 신연강 뱃터가 하직일다 【서울=뉴시스】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송옥자 명창. 2010 한국구비문학대계 문경 편에서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민속아카이브 작업을 위해 문경새재아리랑 108수를 불렀다. ②귀약통 납날개 양총을 매고/ 벌업산 접전에 승전을 했네 ③우리나 부모가 날기르실제/ 성대장 줄려고 날길렀나 ④할미성(고모성) 꼭대기 진을치고/ 왜병정 오기만 기다린다 ⑤마고자 실갑에 양총을메고/ 북망산 접전을 가네 ⑥고부백산 접전시에/ 알뜰한 군병이 다죽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싸 아라리야 이 사설을 독립시켜 의병아리랑이라고 부른다. 아리랑으로서의 연속성(continuity)을 갖고,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직손 기연옥의 창조적 수용에 의한 변이(variation)로, 의병정신을 선택(selection)하여 부르는 것이다. 3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의병아리랑보존회 기연옥(62) 이사장이 2010년대 들어 차근차근 보급시키고 있다. 강원도와 춘천시의 후원으로 '2014 해설이 있는 의병아리랑' 순회공연을 종료하고, 유네스코 등재 2주년 기념으로 양구여중에서 특별공연을 가졌다. 체육관 조명과 음향의 부족함을 똘망한 여중생들의 눈빛으로 밝히며 유인석 의병장과 윤희순 여성 의병장의 활동상과 아리랑의 인류문화유산적 보편가치를 전했다. 의병아리랑·윤희순아리랑·춘천아리랑·의병살풀이 등을 20여 회원들의 자원(自願) 무료공연, 의로운 재능기부 활동이다. 강원지역 전계층에 보급을 넘어 제천, 문경, 장성 지역은 물론 중국 하얼빈과 러시아 연해주 동포사회까지 보급을 준비하고 있다. 금년의 강원도 10개 시군 순회공연을 통해 내용과 규모를 조정해왔다. 멀리뛰기를 준비한 것이다. 승용차로, 고속버스로 2박3일을 경북에서 강원도를 오르내렸다. 관객으로 또는 해설자로 만난 세 곳의 현장, 참으로 벅차게 마주했다. 이런 벅찬 현장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갈 것이다. 아! 아리랑,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박3일만 같아라! www.arirang21.org
-
[신동립 잡기노트]유지숙, 아리랑에 새 활력…14곡 첫선【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78>방방곡곡 아리랑은 많다. 원산아리랑, 문경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서울아리랑, 영일아리랑, 서산아리랑, 하동아리랑, 정읍아리랑, 순창아리랑, 공주아리랑, 양양아리랑, 안주아리랑, 창령아리랑, 구례아리랑, 남원아리랑…. 아리랑이 없는 곳도 많다.‘우리 아리랑’ 14곡이 새로 탄생한 이유다. 1차 작업의 결실들이다. 2, 3차 창작 아리랑들이 계속 나온다는 얘기다. 이상균 교수(56·세한대 전통연희학)가 열 네 곡을 작사·작곡하고, 유지숙(51) 명창이 불렀다. 유 명창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전수조교 겸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악장이다.이상균 교수는 곡마다 8절의 노랫말을 지었다. 모두 112절이다. 문화권역에 따른 음악어법인 지역의 보편적 음악스토리를 중시해 곡을 썼다. 지역마다의 모내기소리, 김매기소리 등 일상의 민요토리가 토대다. 일반적인 장단 틀에 해당하는 자진타령장단(볶음타령), 세마치장단, 자진모리장단, 엇모리장단 등의 리듬을 택했다. 후렴구와 노랫구 각 4~8장단 내외로, 메기고 받는 악곡 형식이다.‘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고/ 쓰리랑 쓰리랑 쓰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강화도라 마니산 인의예지를 품은 산/ 하늘 땅 4해를 돌아 만고에 길지로다’(강화아리랑 1절)‘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고/ 쓰리랑 칭이나 칭칭 쓰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경산 금호강 물결은 은빛 금빛 자랑하고/ 용성 자인 진량에 금박산이 둘러있네’(경산아리랑 2절)‘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 너머로 나를 넘겨주소/ 삼차강 물결이 잔잔하구려/ 돛단배 띄워라 뱃놀이 가세’(김해아리랑 3절)’‘아리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 쓰리랑/ 남한산성 고갯마루 에루화 상사로다/ 국사봉에 사랑나무 연리근이라 일러있고/ 왕기봉에 사랑나무 연리목이라 하더이다’(남한산성아리랑 4절)‘에헤야 좋을시고 풍광 좋은 우리 대전/ 가세 가세 놀이를 가세 대전 8경이 좋을시고/ 먼 날을 내다보고 과학공원에 꿈놀이 가세/ 우리 모두 손을 잡고 계족산으로 꽃놀이 가세’(대전8경아리랑 3절)‘아리 아리 얼쑤 아리로구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부천 송내 성주산 소담도 하고/ 원미공원 고향동산 아담도 하네’(복사골아리랑 5절)‘아리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 쓰리랑/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소/ 청담 맑은 물 도락 칠봉 감돌고/ 단풍 사이 기암괴석 병풍 같아 금병산’(양주아리랑 6절)‘아리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 쓰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늠내 길 걸으면 다정도 하고/ 연성은 시흥하여 배곧을 이뤘으니 신명이 절로 나네’(연성아리랑 8절)‘아리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 쓰리랑/ 청강에 배 띄워라 임 맞이 가잔다/ 광나루 하진참은 쉬는 나루/ 암사 구천 여울목은 묵어가는 뱃나루’(강동아리랑 7절) ‘아리 아리 아라리로구려(얼씨구나 넘어갑서)/ 쓰리 쓰리 쓰라리로구려(절씨구나 넘어갑서) 놀멍 쉬멍 넘어갑서/ 제주라 한락산 님 따라 오른 산/ 철 따라 피는 꽃 빙새기 웃는구려’(제주아리랑 1절)‘아리아리 아리랑 아라리로구려/ 에라 뒤여라 아리랑 타령이 절로 나네/ 에헤 버드나무 지팡이 쿡 꽂아놓고/ 잎이 피면 오신다던 우리 임’(천안아리랑 2절)‘아리아리 얼씨구 아라리가 났네/ 쓰리쓰리 절씨구 아라리로구나/ 안현과 서정이 안정이라면/ 두곡 월정은 두정이더냐’(평택아리랑 7절)‘아리 아리 아라리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고/ 쓰리 쓰리 쓰리랑 쓰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명성산 저 두견이 지새워 슬피 울고/ 장탄식 눈물 되어 한탄강 흘러 있네’(포천아리랑 3절)‘아리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 쓰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 넘어간다/ 신선봉 반석에 장기판 훈수하다/ 아차하는 순간에 반백년이 지났구려’(한밭아리랑 5절)유지숙 명창은 "아리랑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후 아리랑 부르기가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민요를 가사만 개사해 부르는 경우가 많다. 각 지역의 아리랑을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우리아리랑’을 내게 됐다. 그 지방의 역사와 특징, 자랑거리, 정서 등을 찾아 역시 그 지역의 선율을 얹은 신민요풍으로 누구나 들으면 금방 따라부를 수 있도록 쉽고 편한 아리랑들”이라고 밝혔다."서도소리와 경기소리가 섞여있는 지방이라서 강화아리랑을 그 선율에 얹었다. 제주아리랑은 제주의 독특한 선율과 방언을 가사로 만들어 이질감 없이 자연스런 아리랑이 되도록 했다. 제주도청이 관심을 갖고 방언을 감수했고 탐라문화제 때 초청해 부르도록 해줬다.” 유 명창은 제주아리랑을 CD 1000여장으로 제작해 제주국악협회, 제주도청, 각 문화원에 전달하기도 했다. 반주도 함께 녹음, 누구나 따라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음반이다.유 명창의 고향은 강화도다. "군수가 추천사도 써줬다. 제주도와 똑같은 방법으로 강화도민들에게 CD를 선물했다. 다른 지역들에서도 ‘우리아리랑’에 들어 있는 자기 고향의 아리랑을 적극 알리면서 노래하고 있다.”‘우리아리랑’을 더욱 확실히 전파하고자 유 명창은 4일 오후 2시 서울 구기동 이북5도청으로 지자체장들을 초청, 수록곡들을 초연한다. 해설하고 노래하는 미니 세미나식 렉처 아리랑 무대다.이렇게 유 명창은 아리랑을 현재진행형으로 바꿔놓고 있다. ‘인간과 주변 환경, 자연의 교류 및 역사 변천 과정에서 공동체 및 집단을 통해 끊임없이 재창조’라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의 특징이 아리랑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저항·대동·상생의 아리랑은 소비재가 아니라 상징재라는 점도 새삼 확인했다.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빅3도 처음에는 창작품이었다. 유지숙의 ‘우리아리랑’들이 각 지역 대표곡을 대체할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의 푸른밤’ 대신 ‘제주아리랑’을 흥얼거리는 식으로.온라인편집부장 reap@newsis.com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3/0006226240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부르는 아리랑 ㅣ KBS방송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부르는 아리랑 ㅣ KBS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