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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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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②]"삼별초·홍길동, 오키나와에 아라리 전파했다"

등록 2015-02-16 16:21:29  |  수정 2016-12-28 14: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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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일본의 고대 음악·무용 연구서인「가무음악약사」(歌舞音樂略史)는 일본의 고대 답가(踏歌) 밭매는 소리 ‘아라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놀라운 기록이다. 아라리의 교류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큐(琉球)의 밭매는 소리 아라리는 류쿠어로 ‘새가 소리를 내다’ 또는 새가 ‘울다(鳴)’라는 의미인데, 조선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아라리’는 오키나와((琉球国 Rūchū kuku 1429~1879)와 닿고 있다. 이 ‘아라리’의 오키나와 전파는 우리와의 역사적 교류가 깊음을 알게 한다. 아라리는 청동기 후기 쯤, 육로와 해로를 통해 소금길이 열린 백두대간 강원·경북 일대에 예·맥·한족(濊貊韓族)의 결합 종족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단조로운 몇 마디 말을 단순한 리듬에 얹어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다 리듬을 형성하고, 주술성(呪術性)과 신호성(信號性)을 담아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형성된 노래다.

 곧 산의 반향음인 ‘메(山)아리’로서 산신(山神)의 화답으로 인식하여 확산되며 불렸다. ‘아~리~’ 또는 ‘아~라~리’를 되풀이한 것이고, 이 ‘아리’ 또는 ‘아라리’는 원초적이고 단순한 ‘소리’·‘노래’·‘말’의 뜻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부연하면 ‘옹+아리’(어린 아이 말 배우는 ‘소리’), ‘벙+어리’(‘말’ 하지 못하는 사람), ‘뫼(메)+아리’(산+‘반향음’), ‘아니리’(판소리의 ‘말’로 하는 형식)라는 례(例)에서 확인된다. 이 ‘아리’ 또는 ‘아라리’가 세월이 흘러 한국인이 좋아하는 ‘ㅏ’·‘l'·'ㄹ’음에 ‘o'(ŋ)음이 첨가되어 롱·렁·성·랑 등과 결합하여 오늘의 ‘아리랑’이 된 것이니, ‘아라리’는 17세에 들어서기 전의 명칭이다.

 오늘날 강원·경상지역 음악적 특징을 말할 때 ‘메나리토리’라고 한다. 이 때 <메나리>는 강원·경상지역 김매기하는 소리인데, 구성음은 상행 선율에서는 미·라·도·레·미이며, 하행 선율에서는 미·레·도·라·솔·미이다. 선율의 골격음은 미·라·도의 3음이다.  

 결국 ①김매기 소리 곡명 ‘메나리’⟶ ②강원·경상지역 ‘아라리’⟶ ③아라리의 통속화로 ‘아리랑’이 된 것으로, 기층성의 경고함으로 오늘날 그 경과적 명칭이 확인이 된다. 그러므로 오키나와에 전파된 아라리는 ②강원·경상지역 ‘아라리’ 단계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적어도 17세기 이전에 전파된 것이 된다.

 구비전승체인 노래의 인류문화학적 전파계기는 집단이주(集團移住)이다. 이주해서도 일정 규모로 집단을 이뤄 이주지에 흡수 동화되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라리는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계기로 전파되었을까? 이를 추적하는데는 문헌기록, 유물, 설화 등에서 단서를 찾아야 하는데,「고려사」에는 첫 공식 교류가 1389년 유구국의 중산왕 찰도가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 조선시대「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말기까지 수십 차례 사절을 파견하여 진귀한 물산을 바치고 표류자들을 교환했다고 하며, 세조 3년(1457)부터 순조 32년(1831)까지 약 400년간 20여 차례의 표류 기록이 확인된다. 제주도와 류큐국 사이 무수한 표류민 송환 기록이 실려 있고, 드물게 진도에 표류해온 유구국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유구국 사절에 넘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 선조 23년(1590) 조에는 “유구국 사람 요우 등이 표류하여 본국 해변에 닿아서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요동으로 돌려 보냈다”라고 했다. 이 사실은 6년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민여경이 유구국 사신으로부터 서찰을 받아 임금에게 올렸다.

 “이웃 나라와 우호를 도탑게 하고 후의에 보답하기 위해 글을 올립니다. 한 천지간에 살고 있으나 땅이 남북으로 떨어져 있으니 비록 한 장소에 모여 만나지는 못하나 실로 가슴속 깊이 사모하고 이 정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만력 18년에 본국에 소속된 요우 등이 쌀과 포를 운반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되어 귀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유구의 백성인 것을 조사해 알고는 후하게 구휼하여 요동으로 보내어 북경으로 나아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어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습니다. 후면에 기록된 비단과 보물을 공손히 사자에게 부탁하여 가지고 돌아가 바치게 하여 조그마한 정성을 표시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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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에 도착, 현지 주민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이후 수많은 표류자 처리가 양국 기록에 빈번히 나타난다. 해석상으로 유구국은 중국(명과 청)과 조선에 조공했던 나라로서 국제외교상 우호적인 교린관계를 유지한 ‘적례국’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표류해 들어온 상대 국민을 자기네 백성처럼 후대한 뒤 송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해류 때문에 표류자가 많았고, 숱한 표류자 송환 교섭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사이가 되었다. 실제 태조 1394년 세력 간 다툼으로 쫓겨난 남산왕이 조선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고, 중산왕이 송환을 요구하는 기사도「조선왕조실록」에 있다.(조선은 송환을 거부하고 남산왕은 4년 뒤 병사했다)

 그런데 실록의 임진왜란 관련 기사는 유구국과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조선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유구와 규슈 남쪽의 사쓰마 번(현 가고시마)을 통해 군량미 비축과 군사적 도움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구왕은 단박에 거절하고, 왕을 책봉해 준 명나라 조정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정보를 전해준다. 일본이 조선에서 쫓겨 간 뒤에도 사쓰마번은 에도 막부와 명나라의 화평 중재를 유구국에 요구했으나, 유구국은 다시 거부한다.

 그러자 사쓰마번은 보복을 했다. 무력 침공을 당해 오키나와 열도의 위쪽 부분을 빼앗기고 사실상 유구국은 일본에 복속되는 길을 걷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와의 공식 교류는 끊어지고, 표류민 송환만 되풀이됐다.

 그런데 2007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개최된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탐라와 유구왕국>(7월17일~8월26일)이란 전시회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키나와에서 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수막새 기와 두 쪽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 유물은 이미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닌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고 결정적으로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암기와에서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 명문이 확인된 것이니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13세기 고려 명문 기와! 이 기와가 고려 삼별초 군이 쌓은 진도 용장산성 출토 기와와 같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에 집단적인 이주가 있었다? 이주를 할 수밖에 없는 특수 집단이다? 

 이 의문에서 떠오르는 것은 삼별초와 이들의 집단이주이다. 그동안 우리는 삼별초 최후에 대해「고려사」의 내용을 의심해 왔다. 즉, 지금까지 교과서는 삼별초가 800여년 전 몽골 침략군에 끝까지 싸우다 1271년 진도에서 배중손이 진압되고, 잔여 세력이 제주도로 갔으나 1273년 김통적 세력마저 소탕되어 진압되었다고 했다.

 우리가 가슴 속에 지녀 온 삼별초란 누구인가? 민족의 전사, 야습(夜襲)·복병(伏兵)·협격(俠擊)의 빨치산 역사 원조, 고려 무장 사병집단이 아닌가? 이런 삼별초군이 진압당하여 흔적도 없이 섬멸되었다? 이는 믿기지 않는 기록이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유년(1273)에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군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것이 된다. 표류기록을 통해 추정하면 제주도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다. 동서로 1000㎞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 떨어져 있다.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 이 뱃길을 이 시기에 건너가 새로운 삶을 꾸렸을 집단은 바로 삼별초군이 아닐 수 없다.

 주목되는 것은 삼별초군의 조력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구스쿠라 같은 큰 성의 축성과 비로소 본격적인 국가체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구도 적고 범위가 작은 섬에서 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사실은 축성술과 전쟁술에 능한 외부 세력에 자극을 받은 결과로 본다. 왜냐하면 유구국의 역사 시대는 800년부터라고는 하나 류구국 사서에 나오는 왕조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3세기 이전에는 이런 기반이 미약했다는 것으로. 자극을 준 이들과 기술을 전해준 이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바로 삼별초군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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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주민들은 이곳을 아리랑고개라고 부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한이 서린 언덕이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삼별초군의 오키나와 이주, 이는 우리 역사에서 보여지는 극적인 엑소더스(Exodus)요, 디아스포라(Diaspora)이다. 엑소더스나 디아스포라는 분노(憤怒)와 한(恨)의 분출이니, 진도와 제주의 역사나 삼별초의 존재는 섬나라로, 본토와 격리된 섬의 운명, 오키나와의 운명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로 간 삼별초군의 인적구성은 어떠한가? 삼별초는 무신들의 사병으로 시작되어 고려-몽골 전쟁이 끝나 대몽강화(對蒙講和)가 이뤄지자 조정에 의한 해체 위기에 원나라에 입조하고 돌아 온 원종이 마치 몽고군이 파견한 식민지 담당 총독처럼 행세하는 것에 반발하여 배중손을 우두머리로 하여 몽골(원나라)과 고려 왕조에 대항하였다. 삼별초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왕족 승화후 온(昇化候 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 일부 노비와 개경으로 가지 않은 귀족들이 참여하여 1000여 함선을 징발, 진도(珍島)로 가 용장산에 행궁을 마련하고 산성을 쌓아 본거지로 삼았다.

 민중들의 호응도 있었다. 경상도 밀성(밀양)의 군민들이 봉기하여 수령을 죽이고 진도 정부에 호응하였고, 개경에서는 관노가 일어나 다루가치와 고려 고위관리를 죽이고 진도 정부에 투항하였으며, 경기도 대부도(大部島) 주민들은 몽고인 6인을 죽이고 진도 정부와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진도 정부’가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자 멀고 가까운 여러 지방의 관원들이 진도에 들어가 고려황제 온을 알현하려고할 정도였다  

 이후 3년간 항쟁하다 배중손과 승화후 온이 남도석성에서 전사했다. 이로써 김통정이 우두머리가 되어 제주도로 가 1273년까지 고려·몽골 연합군과 항전하다 일본정벌 정책을 준비한 1만여 여·몽 연합군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크게 패했다. 항파두리 북쪽 바굼지(破軍峰)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3년 간의 대몽항쟁은 외세 침략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한 호국 항쟁의 영웅적 활동이었다. 각 계층의 사람들이 대열에 참여했고, 대다수가 저항의식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제주에서 진압되었다 해도 이들의 성향은 어떤 형태로든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잔족 세력의 최후와 처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이는 완전한 진압의 결과가 아니라 집단이주의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삼별초군의 오키나와 집단이주는 축성술과 전투술과 기와 제작술 뿐만 아니라 아라리도 전파시켰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오키나와에 집단이주한 이들은 삼별초군 만이었을까? 또 있다. 춘향전 연구의 대가인 연세대 설성경 교수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 두 권의 논문집을 냈다”고 했다. 그 단 한 줄의 문장은 바로 “홍길동이 오키나와에 갔다”이다. 실존인물 홍길동이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주장이다.  

 홍길동(洪吉童 洪吉同 1440~1510)은 전남 장성군 황용면 아차실(亞次谷)에서 홍상직(洪尙直)과 관기 옥영향(玉英香 소설에는 관비 춘섬) 사이에서 난 서자로, 1500년까지 충청도 공주 무성산(公州 茂盛山)을 근거지로 의협(義俠) 활동을 한 인물이다. 소설에서는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이라 역설하였다. 허균(許筠 1569-1618)은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 불만이 쌓인 원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으로 나누었으며, 홍길동을 호민이라고 하였다. 주인공을 집권층에 항거한 의적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태백산 사고본 연산 6년(1500) 10월22일조는 다음과 같다.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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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에 도착, 현지 주민에게 아리랑 음반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홍길동이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자칭하며 무리를 이끌고 관가에 들어가 기탄없이 강도 행각을 했다며, 조정은 홍길동에게 강상죄를 적용하였다. 더불어 조정은 홍길동의 이러한 행동이 지방 관리와 유향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를 넘긴 1501년까지 관련자를 잡아 국문하였다. 홍길동을 도운 죄로 잡힌 지방 관리 엄귀순은 끝까지 국문에 승복하지 않았다가 옥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홍길동을 잡았다는 기사 이외에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한 기사가 없다. 이익의「성호사설」에서도 조선 시대의 3대 도둑으로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홍길동을 논하면서 이들의 이름이 장사꾼이 맹세하는 구호에까지 들어와 있다고만 적고 있다.「연산군일기」가 시대 상황으로 인해 일부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는 하나 다른 기록이 상세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런 기록 태도는 강상죄목으로 구금되었다가 최후를 맞았거나 탈옥을 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의 홍길동 연구 결과는 홍길동이 조선에서 죽은 흔적이 없고, 이후 야사나 소설에서는 홍길동의 해외 출국의 이야기를 직접 또는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1500년 홍길동의 의금부 체포 당시는 가뭄으로 도둑들의 피해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공물을 감해주고, 감옥의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대책을 세웠다. 홍길동 집단을 해외 이주시키는 선택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1500년에 유구왕 상진(尙眞)이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빙례(聘禮)를 올리고 토산품을 바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성희안(成希顔)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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