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맑음속초10.2℃
  • 황사4.1℃
  • 흐림철원5.0℃
  • 흐림동두천5.0℃
  • 흐림파주5.4℃
  • 맑음대관령1.1℃
  • 흐림춘천6.1℃
  • 천둥번개백령도6.5℃
  • 황사북강릉9.4℃
  • 맑음강릉9.5℃
  • 맑음동해8.2℃
  • 황사서울5.7℃
  • 황사인천5.9℃
  • 맑음원주5.2℃
  • 맑음울릉도9.1℃
  • 황사수원5.2℃
  • 맑음영월3.6℃
  • 맑음충주3.0℃
  • 맑음서산5.2℃
  • 맑음울진8.6℃
  • 박무청주6.5℃
  • 황사대전6.2℃
  • 맑음추풍령3.9℃
  • 맑음안동3.4℃
  • 맑음상주6.0℃
  • 맑음포항8.8℃
  • 맑음군산5.8℃
  • 박무대구5.6℃
  • 박무전주6.3℃
  • 맑음울산7.7℃
  • 맑음창원5.6℃
  • 박무광주7.4℃
  • 맑음부산9.4℃
  • 맑음통영7.8℃
  • 맑음목포7.8℃
  • 맑음여수8.5℃
  • 박무흑산도8.4℃
  • 맑음완도6.5℃
  • 맑음고창6.4℃
  • 맑음순천4.5℃
  • 황사홍성(예)5.7℃
  • 구름조금5.2℃
  • 맑음제주9.7℃
  • 맑음고산11.1℃
  • 맑음성산6.6℃
  • 맑음서귀포10.1℃
  • 맑음진주5.1℃
  • 구름많음강화5.8℃
  • 흐림양평4.7℃
  • 흐림이천4.7℃
  • 구름조금인제5.9℃
  • 구름많음홍천3.2℃
  • 맑음태백3.4℃
  • 맑음정선군2.7℃
  • 맑음제천1.9℃
  • 맑음보은2.5℃
  • 흐림천안3.4℃
  • 흐림보령6.8℃
  • 구름많음부여5.8℃
  • 맑음금산2.4℃
  • 맑음5.7℃
  • 맑음부안7.3℃
  • 맑음임실3.2℃
  • 맑음정읍5.0℃
  • 맑음남원4.3℃
  • 맑음장수1.2℃
  • 맑음고창군5.4℃
  • 맑음영광군7.4℃
  • 맑음김해시7.3℃
  • 맑음순창군4.9℃
  • 맑음북창원7.0℃
  • 맑음양산시7.5℃
  • 맑음보성군6.8℃
  • 맑음강진군5.5℃
  • 맑음장흥4.8℃
  • 맑음해남6.2℃
  • 맑음고흥5.9℃
  • 맑음의령군3.7℃
  • 맑음함양군3.6℃
  • 맑음광양시7.5℃
  • 맑음진도군7.0℃
  • 맑음봉화2.2℃
  • 맑음영주5.0℃
  • 맑음문경3.8℃
  • 맑음청송군3.2℃
  • 맑음영덕9.3℃
  • 맑음의성4.0℃
  • 맑음구미4.0℃
  • 맑음영천4.5℃
  • 맑음경주시5.6℃
  • 맑음거창2.2℃
  • 맑음합천3.9℃
  • 맑음밀양6.2℃
  • 맑음산청4.7℃
  • 맑음거제7.3℃
  • 맑음남해9.8℃
  • 맑음5.9℃
[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

공감언론 뉴시스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③]일본으로 끌려간 한국남녀, 군부·위안부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1:06  |  수정 2016-12-28 14:35:25
associate_pic1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이어 나하(那覇)로 돌아와 평화로서의 아리랑을 논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일본군 위안부(日本軍 慰安婦), 역사의 산 증인이며 평화의 각성자!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 9월18일)을 일으킨 이후부터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설치한 ‘위안소’에 강제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문헌과 증언 속에서는 위안부가 작부, 특수부녀, 추업부(醜業婦), 예기, 창기, 여급 등의 호칭으로 나타난다. 일본군의 위안소도 육군오락소, 구락부, 군인회관, 조선요리옥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이런 위안부의 총수는 최소 3만명에서 최대 40만명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 최소 8만, 최대 20만으로 추정한다.(요시미 요시아키 吉見義明)

 주목되는 것은 전체의 절반 이상이 우리 누이들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조선과 타이완 여성들을 주로 동원하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점령지인 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 거주 네덜란드인 여성들도 강제 동원되었다.

 지금까지 증언록『들리나요? 열두소녀의 이야기』나 북한 박영심 할머니(2006년 작고)가 중국 숭산 등지에서 ‘위안부’로서 겪었던 참상을 담은 중국 운난성 쿤밍의 미군관할 포로수용소 미국정보당국 보고서, 그리고 운난성 전 일본군 하야미 마사노리의 증언 등을 통해 확인된 위안부 동원 방식은 취업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 동원하였다. ‘위안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나가기도 하였으나 근무 내용을 분명히 고지하지 않았고 당시 신문 구독상태나 여성의 문자해독율을 고려할 때 여성에게 직접 모집 광고가 전달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본다.

 일본군 당국이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였고, 일본군과 경찰 역시 동원 과정에 협조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하였다.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력과 폭력을 이용하여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납치하기도 했다. 총동원체제와 전쟁을 수행하는 데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군의 요구가 이러한 물리적 폭력을 허용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1941) 이전에는 ‘도항증명서’를 받아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수속에 필요한 절차는 모집인이 공권력의 협조를 받아 도맡아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적이 위조되는 일도 있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군증명서’를 통해 국외의 위안소로 이동하였다. 군증명서는 모집인이나 인솔자가 소지했으며 일본군은 이동에 필요한 각종 편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위안부 할머니를 말할 때면 언제나 아리랑을 연관 지어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이 슬퍼서인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슬퍼서인가? 검색어 아리랑 또는 위안부를 치면 ‘위안부영화 아리랑 국악 신동···’, ‘위안부 할머니 주제가 소녀아리랑’,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아리랑’, ‘수필, 아리랑 위안부·마루타 생체···’, ‘아리랑의 눈물(Tears of Arirang) & 미국 비밀문서 일본 위안부···’ 등 너무나 많다.

 이 중 ‘하늘로 간 아리랑’은  21살이던 1942년 부산 영도다리 근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 일본군에 끌려가 가족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싱가포르와 태국으로 끌려 다니며 3년간 위안부로 고통을 겪었던 노수복 할머니의 운명 보도 기사 제목이다.  1945년 일본군 패전 뒤 태국 유엔포로수용소에 잠시 수용됐다 탈출, 말레이시아를 거쳐 태국 최남단인 핫야이까지 도망쳐 살았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태국에서 식모,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하며 갖은 고생을 했다. 결국 모국어도 잊어버렸다. 세상을 뜨기 전 그가 기억한 한국말은 ‘안녕하세요’와 고향 주소인 ‘경북 안동군 풍천면’, 그리고 아리랑이었다. 1984년 중앙일보 기자에게 “아리랑이 나를 살렸지, 왜놈 밑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견뎠지···”라고 말했다.

 이 기사 이후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의 가족을 찾아달라고 요청하면서, 42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1991년 한국을 다시 한번 방문했고, 2011년 광복절을 앞두고 정대협 초청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휠체어에 앉은 채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참가했다. 그리고 아리랑을 부르고 “메이디 막 막”(너무 너무 나쁘다)이라며 눈물지었다. 그해 14명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셨다. 이후 1998년 50년만에 귀국한 훈 할머니 등 우리말을 잊었지만 아리랑은 부른다는 해외 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언이 잇따랐다.

 재일동포 박수남 감독의 <오키나와로부터의 편지-아리랑 노래> 등에는 일본 내 수십 곳의 위안부 사연과 아리랑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 <오키나와로부터의 편지-아리랑 노래>에는 1944년 10월10일, 일본의 남서제도인 오키나와 본섬을 중심으로, 미군 함재기에 의한 무차별 폭격이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져 수도격인 나하(那覇)시 가옥의 90%가 파괴됐고 사망자 600명, 부상자가 900여명에 이르렀고, 1945년 3월26일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 인근 게라마(慶良間) 제도에 상륙, 최초의 지상전에서 일본군과 미군은 물론 오키나와 원주민, 조선인 군부, 종군위안부 등 다수가 사망하거나 부상했음을 밝히고 있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과 조선인 군부들을 스파이 혐의로 학살했고, 특히 현지 주민들에 대해서는 ‘강제집단사(집단자결)’를 강요하고 실행했다.

 이 오키나와 전쟁은 6월22일 일본 남서제도를 담당했던 32군 대장의 옥쇄로 종결되었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잔류 일본군은 8월15일 이후까지 류쿠 열도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해 많은 주민들의 희생시켰다. 희생자는 일본군 9만8000명, 미군 1만4000명, 조선인 군부 및 종군위안부 1만명, 오키나와 주민 9만8000명이다.

associate_pic2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방문,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한국인 위안부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아! 오키나와 아라시로 토시아키 평화기념공원의 오키나와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평화의 초석>(2009)에는 희생자의 이름들이 인각되어 있다. 오키나와 현민 14만9171명, 미군 1만4009명, 영국군 82명, 대만인 34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82명, 대한민국인 364명, 총 24만명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전쟁에서 조선인은 얼마나 희생되었는가. 아라시로 토시아키나 아라사키 모리테루의 연구에 따르면, 대략 1만여 명의 조선인이 희생당했다. 그 희생자 속에는 오키나와로 징병된 학병(전문학교 재학 이상 학력의 징병자), 지원병, 군부, 위안부, 이전부터 오키나와에 체류했던 민간인 등이 모두 포함된다. 그런데 왜 오키나와전쟁에서 1만여명 이상이 희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에 새겨진 숫자는 겨우 446명뿐일까?

 그 이유는 첫째, 조선인 출신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비극적 죽음을 맞은 굴욕적 장소에 이름이 ‘각명’되는 것을 유족들이 거부한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

 둘째, 일본의 정치 세력이 체계적으로 전쟁책임과 전후배상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희생자의 이름을 각명할 수 없다는 점.  

 셋째, 조선인 희생자의 유해 발굴 및 조사를 일본정부 및 오키나와 현정이 사실상 방기함으로써 죽음의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
 더 이상한 것은 1945년 이전은 국적이 모두 조선이어야 하는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산으로 숫자를 줄이고, 배상에서 차이를 두겠다는 속셈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장에서 각오해야하는 사실은 오키나와전쟁에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의 비극을 해원(解寃)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일본, 오키나와 모두의 합동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특히 이런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남북이 일치된 견해와 행동력을 수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다시 오키나와 위안부 문제로 들어가 본다. 오키나와전쟁의 막바지에 패전을 확신한 32군 사령부는 관련 서류 일체를 소각했다. 어쩔 수 없이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밝혀야 할 것이지만 오키나와 본섬에만 대략 130여 군데의 위안소가 있었고, 조선인 종군위안부가 있었다고 확인된 위안소는 41개소이다. 위안소 시설당 대체로 7~10명의 위안부가 있었음을 추정하면 최소 287명(41×7), 최대 410명(41×10) 정도가 오키나와 본섬에 강제 연행되어 체류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강제연행한 위안부 중 조선인 51%, 중국인 36%, 일본인 12%라는 기록에 견주면 조선 출신 위안부는 최소 460명, 최대 660여명에 이른다.

 다시 주목한다. 이상의 추정 숫자는 오키나와 본섬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류큐제도에 속해 있는 미야코나 야에야마 제도에도 일본 32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오키나와 본섬과 마찬가지의 군 위안소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숫자는 1000여 명 가까이로 늘어나게 된다.  

 다큐멘터리영화 <오키나와전의 증언>(자나모토 케이후쿠 謝名元慶福 감독, 1피트운동회, 2005)은 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가 1000명 이상 오키나와로 ‘강제연행’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1991년 오키나와전쟁 당시의 조선인 강제연행 문제를 <아리랑의노래>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 재일조선인 박수남 감독의 증언집 <아리랑의 노래>는 이들의 수보다 더 큰 아픔들을 기록하고 있다.  

associate_pic2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다섯살 때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의 프롤로그를 맡은 박주빈(7)군이 술을 올리고 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1944년 7월9일. 경상북도 농촌지역에서 강제징용 명령장을 받은 일군의 조선인 청년들은 그들이 속한 면사무소에 강제연행된 후 기차를 타고 대구에 도착한다. 이들은 숙영지였던 대구사범학교에서 며칠을 머문 후 열차 편으로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으며, 여기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7시간의 항해 끝에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다.

 이들이 북규슈(九州)의 모지항(門司港)에 도착한 것은 7월22일이었으며,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3000여명이었다. 그곳에서 일본군 12만명과 함께, 26쌍의 거선(巨船)을 타고 항해를 다시 시작한 것은 7월30일. 거친 풍랑과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피해 8월1일 가고시마(鹿兒島)현에 도착했다.

 8월3일 가고시마항 출항. 8월5일 파파야와 야자수가 출렁거리는 아마미 제도에 도착. 그곳에서 4개월여 체류하면서 군부로서 진지공사를 한 후에 다시 출항한 것이 12월16일이었다. 항로는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德之島)였다. 오키나와가 가까워졌다.

 12월21일 도쿠노시마를 출발해 12월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오키나와현의 수도 격인 나하항에 도착했다. 이날로부터 오키나와전쟁이 사실상 종료되는 8월15일까지, 조선인 군부 조장이었던 김원영은 고스란히 전쟁의 희비극을 체험한 후, 전쟁 말기에 미군에 항복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인 위안부들은 어떤 경로를 거쳐 오키나와에 입도했는가.

 근로정신대로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연행된 여성들은 군부들의 이동 경로와 유사한 방식으로 오키나와에 왔을 것이다. 다만 군부들이 대체로 경상북도 촌 출신이었다면, 조선에서 연행된 종군위안부들은 대체로 16~19세의 전라도, 충청도 출신이었다는 증언이 눈에 띈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은 군과 민간이 결합한 형태로 진지에 위안소를 만들었으며, 이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조선인 위안부들을 ‘강제연행’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1944년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위안부로서 만주 및 중국 전선에 있었던 조선인 위안부들은 오키나와로 재배치된 일본군 제9, 24, 28, 62연대와 함께 오키나와 본도 및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로 흩어졌을 것이다.

 일본 본도 및 대만 그리고 남양에 흩어져 있던 종군위안부 역시 패퇴하는 혹은 오키나와로 재배치된 일본의 육해군 부대나 학병, 특별간부후보생(특공하사관)과 함께 오키나와 본도 및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로 연행되었다.
 군부(軍夫)는 군속(軍屬)의 최말단 노무자로 일본군 작업복을 입었지만 무기는 지급되지 않았다. 물론 전쟁 막바지의 옥쇄투쟁 과정에서는 일본군 부대장이 죽창으로라도 미군과 싸우라는 지시를 했지만, 그런 명령을 내린 자들은 물론 군부 역시 자연 가마(오키나와에서 ‘동굴’을 이르는 말) 방공호 입구에서 대변을 보다가 폭사(暴死)하기도 하는 등 삶은 비참했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한 군부들은 조장(軍夫頭)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해상자살특공대의 2인용 선박인 말레를 은폐하기 위한 기지 건설에 동원되었고, 평온할 때는 식량 공출이나 종군 위안부 위안소 건설에 동원되기도 했다.

associate_pic2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를 방문, 현지 주민과 평화의 악수를 나눴다. 아리랑 음반도 전달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같은 조선인으로 만났을 때 얼마나 비참함을 느꼈을까? 그런데 조선인 군부들은 면사무소에 입소하여 오키나와에 올 때까지 여러 차례에 탈영을 했다고 한다. 대개는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는데, 탈영하다가 붙잡힌 조선인 군부를 각 조원 70명이 죽봉으로 힘을 다해 구타하라는 끔직한 형벌이 있었다. 이렇게 살아 오키나와까지 와서 한 곳에서 폭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것이다.  

 위안부들의 생활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위안소 건물도 없었기에 군부들이 위안소를 건설할 때까지는 오키나와 원주민의 집에 일시 거주하기도 했지만, 위안부 다수가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실정이어서 그들이 도착한 곳이 어딘지도 몰랐다고 할 정도이다.

 오키나와 현지인들에게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의 이미지는 치마저고리와 조선 민요 아리랑으로 기억된다. 괴로울 때면 위안부들은 조선 민요 아리랑을 불렀고(군부 역시 그랬다고 김원영은 증언한다), 식량증산을 위해 야산에 동원되었을 때도 아리랑을 불렀다. 산속에서 우연히 아리랑 민요를 듣게 된 조선인 군부들은 이곳에도 조선 처자가 있구나, 놀랐다고 하는데 나중에야 그들이 위안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군 병사들에게 위안소 출입은 월 4회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장교들에게는 이러한 출입제한이 없었다. 위안소 이용은 일요일로 제한되었는데, 1회 이용 금액은 1엔(당시 병대 월급은 7엔)이었고, 휴가나 휴일이 되면 병사들에게 군 당국은 ‘돌격1번’이라는 콘돔을 지급했다. 위안부 1인에게 대략 70여명의 병사가 계급과 무관하게 줄을 섰다.
 장교들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다. 중대장급 이상의 장교들은 위안부들을 ‘전속’으로 소유하려 했으며, 전쟁 말기까지 위안부들을 극한 전쟁터로 끌고 다녔으며, 위안부와 함께 자결하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의 일본군은 “살아서 치욕을 겪지 말라”는 ‘전진훈’에 따라 자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키나와인들과 조선인들을 향해서는, 미군에 항복하게 되면 “남성은 탱크로 깔아뭉개 죽이고, 여성은 강간한 후 죽일 것이다”라는 괴담을 유포시켰는데, 이 때문에 오키나와인과 조선인들은 미군에 항복하는 선택 대신 수류탄으로 집단자결(집당강제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군 병사들이 위안소에 지불한 돈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위안소를 관리하던 일본인이나 포주에게 갔을 것이다. 기록을 읽어보면 위안소의 점주나 포주들은 대개가 일본군 상급 장교와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여성들로, 대체로 그 연령대는 30대 중반 이상으로 위안부 출신인 경우도 있었지만, 조선인 출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밝혀진 바 없다.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 위안부의 성병 관리는 일본군이 책임졌다. 하지만 위안소 운영을 통해 획득된 자산이 어디로 갔는가는 아직까지 뚜렷한 종착역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오키나와전쟁 과정에서 군부와 위안부는 여러 비극에 노출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군부가 죽는 것이야 능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막상 한계상황이 오자 일본군이 조선인 군부를 ‘스파이 혐의’로 의심하고 처단-학살하는 일이 잦아졌다. 오키나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파이 혐의로 붙잡힌 조선인 군부를 처형하고자 했을 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마디 하고 죽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텐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이렇게 외친 후 즉각 총살당했다. 오키나와인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패색이 명백해지자 조선인 군부의 조장은 “우리는 조선인이다, 이제 각자 헤어져 살길을 도모하자”하고 해산 명령을 내렸다. 가마(동굴) 속의 군부들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미군에 항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모두 옷을 벗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길을 선택했지만, 등 뒤 일본군의 기총소사로 죽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associate_pic2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았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전쟁 말기 대다수의 일본군 위안부들은 간호부가 되었다. 일본군에 강제연행되었던 위안부들은 전황이 안정화되어 있을 때는 성노예로, 전황이 악화되었을 때는 간호부로서의 이중역할을 강제당했다. 일본어도 몰랐고 오키나와어도 몰랐던 대다수 조선의 위안부들은, 마지막까지 일본군이 대피했던 가마에서 피 묻은 군복을 빨거나 가마 안에 사람이 가득한 데도 일본군 장교의 ‘성욕’에 고스란히 응해야만 했다. 그러나 위안부들은 스파이 혐의나 오키나와 주민들이 경험했던 ‘집단강제사’의 비극을 겪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미군의 기총소사나 폭격에 희생되기도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모든 옷을 벗고 두 손을 든 후, 뒤에 따르는 조선인 군부와 일본군을 선도해 미군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군부와 위안부 모두 전쟁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의 삶은 다른 경로로 전개되었다. 조선인 군부는 2차대전의 종전 소식을 포로수용소에서 들었다. 오키나와의 포로수용소는 민족별로 분류되어 분리 수용되었으며, 조선인들의 경우 하와이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변화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조선인들의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노골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따라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은 또 다른 비극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의 지프차를 타고 일본군과 조선인 군부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살아있었군요”라고 말한 후 포로수용소를 떠났지만, 일부는 오키나와에 은둔하는 길을 택했다. 해방된 조국으로의 귀국을 위안부들이 두려워하거나 포기한 것은 아마도 ‘가부장적 남근주의’가 지배적이던 조국에서 ‘환향녀’의 비난을 무릅쓰는 일의 공포와 함께, 위안부로서 삶의 존엄을 완전히 상실해 스스로를 긍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1972년 종군 위안부임을 최초로 밝힌 두 분을 주목하고자 한다. 1972년, 오키나와에서 ‘종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폭로한 이는 배봉기 할머니였다. 1972년은 오키나와가 미국의 점령지배 체제에서 일본으로 이른바 ‘조국 복귀’를 한 해였다. 일본의 행정당국은 1945년 이후 일본 본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구(舊)일본국민이었던 조선인들을 무국적자로 처리했다. 이 와중에 배봉기 역시 졸지에 무국적자가 된 것이다. 당시 오키나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배봉기는 자신이 일본을 위해 ‘애국’을 했다고 말하면서 “한국으로 갈 수 없다. 생활보조금이 끊기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게 애국의 대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이로서 위안부 존재가 부각되었다. 배할머니는 정치적 집단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좌파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잔인성’을 고발하고자 했고, 우파들은 온몸으로 ‘애국’한 구일본국민의 ‘국가에 대한 헌신’을 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누구도 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외쳤다.

 “나는 버림받았다. 조선에서도 또 일본에서도, 심지어 오키나와에서도.”

 1984년 한국의 신문 기자에 의해 태국 한식당에서 손자의 자장가로 아리랑을 부른 노수복 할머니의 존재가 보도되었다. 이로부터 여자 정신대(위안부) 문제가 국내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극한 상황에 처했던 위안부와 군부들은 왜 아리랑을 불렀을까? 앞에서도 제기했지만 아리랑이 슬퍼서도, 자신들의 처지가 슬퍼서도 아니었다. 자기 치유였다. 아니, 조선인이라는 공동체적 집단 치유였다. 신생아실(新生兒室)에서 한 아이가 울면 따라 우는데, 한 아이를 떼어 놓고 자신의 울음소리를 녹음하여 들려주었을 때는 따라 울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여 반응하는 심리(이타심 활성화)가 내재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영웅성, 선행을 따라하는 심리를 파악한 연구결과의 파생이론인데, 이를 ‘신생아성 반응현상’(新生兒性 反應 울음 現像)이라고 한다.

 군부나 위안부들의 아리랑 부르기는 바로 이 현상과 같다는 것이다. 서로의 극한 처지를 아리랑을 통해 공감하는 심리가 작용한 결과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 속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sympathy)이야말로 아리랑이 간직해 온 미덕이 아니던가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들 군부와 위안부들의 아리랑을 가슴에 담았다면 결코 서정민요라고 해서는 안된다. 아픈 역사를 견뎌 낸 치유의 노래이고, 고개를 넘는 힘의 노래이고, 그래서 아리랑은 서사민요인 것이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다운로드

첨부파일 다운로드

  • [아카지마_아리랑③]일본으로_끌려간_한국남녀_군부·위안부_아리랑.pdf (606.0K)
  • NISI20150212_0010621872_web.jpg (119.1K)
  • NISI20150212_0010621875_web.jpg (86.9K)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