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맑음속초15.4℃
  • 맑음11.5℃
  • 맑음철원11.3℃
  • 맑음동두천12.3℃
  • 맑음파주11.4℃
  • 맑음대관령7.3℃
  • 맑음춘천11.6℃
  • 맑음백령도10.9℃
  • 황사북강릉16.0℃
  • 맑음강릉19.8℃
  • 맑음동해12.6℃
  • 맑음서울13.9℃
  • 맑음인천12.0℃
  • 맑음원주14.0℃
  • 황사울릉도13.8℃
  • 맑음수원9.6℃
  • 맑음영월12.3℃
  • 맑음충주11.2℃
  • 맑음서산8.4℃
  • 맑음울진13.0℃
  • 맑음청주15.5℃
  • 맑음대전13.3℃
  • 맑음추풍령13.2℃
  • 황사안동12.1℃
  • 맑음상주16.9℃
  • 맑음포항13.8℃
  • 맑음군산10.8℃
  • 황사대구13.9℃
  • 맑음전주12.6℃
  • 황사울산13.0℃
  • 황사창원12.2℃
  • 맑음광주14.0℃
  • 황사부산14.6℃
  • 맑음통영13.0℃
  • 맑음목포12.0℃
  • 황사여수14.6℃
  • 맑음흑산도12.1℃
  • 맑음완도13.1℃
  • 맑음고창8.7℃
  • 맑음순천9.8℃
  • 맑음홍성(예)14.9℃
  • 맑음10.3℃
  • 맑음제주13.8℃
  • 맑음고산13.7℃
  • 맑음성산13.0℃
  • 맑음서귀포14.7℃
  • 맑음진주10.6℃
  • 맑음강화12.5℃
  • 맑음양평12.1℃
  • 맑음이천13.9℃
  • 맑음인제11.4℃
  • 맑음홍천12.5℃
  • 맑음태백8.1℃
  • 맑음정선군9.3℃
  • 맑음제천10.9℃
  • 맑음보은10.1℃
  • 맑음천안10.8℃
  • 맑음보령10.4℃
  • 맑음부여11.6℃
  • 맑음금산10.6℃
  • 맑음12.3℃
  • 맑음부안10.5℃
  • 맑음임실9.3℃
  • 맑음정읍9.9℃
  • 맑음남원11.5℃
  • 맑음장수8.9℃
  • 맑음고창군9.3℃
  • 맑음영광군8.6℃
  • 맑음김해시13.9℃
  • 맑음순창군10.4℃
  • 맑음북창원14.4℃
  • 맑음양산시14.1℃
  • 맑음보성군13.6℃
  • 맑음강진군10.9℃
  • 맑음장흥11.6℃
  • 맑음해남8.5℃
  • 맑음고흥10.9℃
  • 맑음의령군11.9℃
  • 맑음함양군10.8℃
  • 맑음광양시13.9℃
  • 맑음진도군8.7℃
  • 맑음봉화9.0℃
  • 맑음영주12.8℃
  • 맑음문경17.2℃
  • 맑음청송군7.5℃
  • 맑음영덕9.6℃
  • 맑음의성10.2℃
  • 맑음구미13.4℃
  • 맑음영천10.0℃
  • 맑음경주시10.4℃
  • 맑음거창9.9℃
  • 맑음합천12.4℃
  • 맑음밀양12.9℃
  • 맑음산청11.7℃
  • 맑음거제11.8℃
  • 맑음남해12.9℃
  • 맑음12.6℃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공감언론 뉴시스

사회 > 사회일반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1:54  |  수정 2016-12-28 14:35:26
associate_pic1
【오키나와=뉴시스】평화의 초석.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1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외침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오시비앵침(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돼선 안 된다고 결의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년을 맞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태인을 비롯한 정치범, 전쟁 포로 등에 대한 집단 학살)를 자행한 곳인데, 1945년 1월 27일 옛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1947년 박물관으로 개관되어 처참한 히틀러의 만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박물관 입구에 쓰인 경구(警句)가 바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 된다’이다. 오늘의 우리가 역사유적지를 답사하는 이유가 이 경구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박물관 앞에서 한 말이다. 아마도 이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이나 기념비를 세운 분들도 같은 말을 하였을 것이다. 가해든 피해든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결의의 징표가 바로 이런 박물관이고 기념표식이기에 이를 건립하며 똑같은 염원을 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참혹하고, 반인륜적(反人倫的)이었던가를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지옥 상항을 벌린 인간들이 무슨 염치로 사랑을, 평화를, 꿈을 이야기 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엄중한 질책이다. 이제 시인은 이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역사기록으로서의 서사시를 써야 한다는 자성이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깊은 자성을 우리도 이곳 오키나와에서 엄숙하게 수용해야 한다.

associate_pic2
【오키나와=뉴시스】평화기념공원.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1944년 일본해군 ‘특설수상근무대’(特設水上勤務隊)로 끌려온 350명의 조선인 군부 우리 오빠 형들이 일본군의 교쿠사이(玉碎)로, 폭약을 묶어 미군 전차로 밀어 넣어 죽고, 미군의 폭격에 죽었고, 52명의 종군 위안부 우리 누이 언니들이 위안소에서 또한 요나구니지마 구부라항 이동 중인 배 안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이들이 바다 건너 조선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가 아리랑이었음을 확인한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아리랑을 서정민요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마다 조선인 희생자의 수는 다르다. 더욱이 오랜 세월이 지난 2010년대에 들어 동북아역사재단이 조사한 증언·공문서 등 각종문서 상세조사에 의한「일본군 위안소 지도」에 의하면 오키나와에서 채록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237명이 산출되었으니 이 섬에서의 우리 아리랑은 통곡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1970년 7월 8일, 도쿄타워 인질 사건

 “나는 우치난추 도미무라 준이치다. 20세 이하 청소년은 풀어주겠다. 조선인과 우치난추는 풀어주겠다. 하지만 미국인과 일본인은 풀어주지 않겠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 천황은 사죄하라!”

 ‘일본인들이여, 오키나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은 도미무라 준이치(富村順一)가 칼 두 자루를 들고 도쿄타워에 들어가 미국인 선교사의 목에 대고 외친 말이다. 1930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고, 1940년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를 거부, 소학교에서 쫓겨났고, 1954년에는 나하(那覇) 형무소 폭동에 참가했으며, 1955년에 일본 본토로 건너와 각종 운동에 참가했고,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자 위령탑 건설 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다. ‘야마톤추’(일본인이라는 오키나와 말)에게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의 통한을 외친 인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외침 속에 ‘조선인’이 들어 있다. 우치난추의 통한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조선인(일본군 군부·군속·위안부)들의 통한을 일본인들에게 전한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오키나와에 건립된 <아리랑비>, <조선인 희생자위령탑> 등 건립을 추동하였다.

 이 외침은  동서 1000㎞ 남북 400㎞ 해역에 160여개의 섬(유인도는 약 50개)으로 구성된 류큐(琉球) 왕국(1429년 호족세력 통합-일본·중국·조선 중개무역국)을1879년 일본 사쓰마번이 강제합병(1차 유쿠처분)시키고, 1872년 일본 야마토(大和)정부가 통합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군의 일본 본토 육상전을 저지시키는 사석(捨石戰)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1945년 종전 후에 미국 군정으로 넘기고, 1972년에는 일본에 흡수하면서도 미군기지로 남겨둔 것에 대한 항변이다.

associate_pic2
【오키나와=뉴시스】히메유리의 탑.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우리도 1905년 보호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제한하고 1910년 합병시켜 45년까지 식민지화 하여 수탈하고,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게 했고, 1948년 분단을 시킨 것이 일본이니 같은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강영훈 육군소장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런 지시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관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 발언이긴 하다. 그러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동정어린 발언이기 보다는 불완전한 독립을 마치 완전한 독립인 것처럼 거만함이 묻어있다. 

 #3 ‘미안하오 유구왕자여 슬프구나’(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

『동야휘집』·『광해군일기』·『인조실록』·『택리지』·『연려실기술』·『열하일기』, 그리고  『담옹유고(藫翁遺藁)』같은 야담집이나 실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구국 왕자의 슬픈 죽음에 대한 것으로 김려(金鑢)가 담옹유고에 기록한 <유구왕세자외전>이 그것이다. 김려는 <미안하오, 유구 옹세자여! 정말 미안하오>(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 悲夫哀哉)라는 제목으로 애도의 글을 남겼다.

 인조(1623~1649) 때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그 왕을 잡아 갔다. 이에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떠났는데 배가 표류하였다. 표착지는 제주 바닷가. 이 사실을 안 제주목사(濟州牧使) 이기빈(李其賓) 또는이란(李灤)은 배 안을 정탐하고 흰 앵무새 1쌍, 수정 알 2매(枚)의 보물과 술을 만드는 돌(酒泉石)이 있어 욕심이 났다. 4각의 돌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부으면 술이 되는 신기한 물건이고, 앵무새는 왼 발톱으로 비파를 켤 수 있다고 했고, 수정 알은 밤에 환하게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란은 왕자에게 요구했다. 이 보물들을 주면 유국구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그러자 왕자는 눈물로 호소했다.

associate_pic2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내가 보물을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부왕께서 힘없이 붙잡혀 갇혀 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부왕을 풀어 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대부(大夫)는 이를 슬퍼하소서.”

 이에 이란은 세 번씩이나 보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왕자는 눈물로 사정을 했다. 그리고 왕자는 이란의 욕심으로는 물건을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그럴 바에는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고 각오하고 혈서를 썼다. 절명시(絶命詩)인 것이다.

 “세 어진에 순장(殉葬)을 대속(代贖)할 이 누구인가/ 두 아들 배를 탈 때 도적이 불인(不仁)했도다/ 모래벌판 해골에 잡초가 얽히리니/ 이내 혼 고국(古國) 간들 슬퍼할 친지 있을까/ 제주도 앞 바닷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남은 원한 선명하여 만 년간 오열하리.”

 기어이 이란은 보물을 빼앗으려고 배를 포위했고, 위협에서 왕저의 보물을 보호하려는 종자 한 명은 돌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에 이란의 수군은 이를 빼앗으려 달려들고 배안을 급습하여 모든 보물을 약탈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13명의 시종과 왕자까지도 죽이고 말았다.  

 이란은 조정에 왕자의 배가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속여 아뢰었고, 강탈한 재물을 모두 소유했다. 그러나 앵무새가 땅을 밟자마자 죽는가 하면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포된 이란은 큰 벌도 받지 않고 방면되었다. 이 사실은 많은 문인들에게 유구국의 부왕과 왕자를 애도하는 글을 쓰게 했다. 대표적인 글이 김려가 쓴 글로 <미안하오 유구왕자여>가 있다. 이 번역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슬프고 슬프구나. 유구 세자의 일이 슬프고 슬프구나. 세상에는 ‘세자가 작은 보물을 아껴 위로 임금을 맞이하지 못했고, 아래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족히 일컬을 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지나친 말이다. 이란의 형세를 보건대 보물을 주었어도 죽었고 보물을 주지 않았어도 죽었을 것이다. 똑같이 죽는 것인데 하필 보물을 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자처럼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명철한 사람이 어찌 차마 보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신이 살면 임금을 맞이할 수 있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음에랴! 그러나 세자는 반드시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릇 이란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재물을 탐내 사람을 죽인 것이 첫 번째이다. 이웃 나라와의 외교를 망가뜨린 것이 두 번째이다. 임금을 속인 것이 세 번째이다. 신하가 이 가운데 한 가지 죄라도 있으면 마땅히 형을 받아 죽어야 하거늘 당시 군자가 그 죄를 성토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내지 않아 포악한 난신(亂臣)이 편안히 복을 누리고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유구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 건너 서쪽을 향해 두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어떤 말로 대답할 것인가? 이란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충분한 일인가? 단지 다행히 유구가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 바야흐로 왜놈의 난리 때문에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로부터 유구의 통신사가 끊어졌으니, 아, 이웃 나라에 들려 줄 이야기가 아니다.”

 1612년 사헌부 기록과「조선왕조실록」제27권 <광해군일기> 2월조에도 있고, 얼마나 애석했던지 지리서인「택리지」제주 대목에도 인용되어 있다. 와전되어 설화적인 요소가 보이긴 하지만 왕자의 제주 표착과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재물을 취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후 우리 조정은 유구국 표류자에 대해서는 어명으로 편의를 봐주는 조치를 취했지만, 외교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유구에 진 여러 빚 중에 가장 큰 빚이다. 바로 김려의 위의 글은 분명 이 빚을 후손들이 꼭 갚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긴 것일 것이다.

associate_pic2
【서울=뉴시스】김연갑, 아리랑 권위자
 역사에 대한 미안함을 갖는 것, 선린을 추구하는 진정한 자세이며 외교상 지성사의 전통이 아닌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는 창조되는 것이 아닌가?

 #4 아라리의 고려말 확산

 “이 노래는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는 노래로서 지금으로부터 580년 전 고려조가 망하게 되자 이제까지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이를 비관하고 송도(松都 개성의 고려 수도)에서 두문불출 은신하다가 정선에 숨어들어 지금의 거칠현동(居七賢洞)과 백이산(伯夷山)을 소요하면서, 이제까지 섬기던 고려왕조가 그냥 망하고 말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계승될 것인지, 송도에는 험악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는 이러한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데 연유한 것이다. 본래는 ‘아라리’(我羅理)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연유된 듯하더라. 당시 몇몇의 고려유신과 함께 거칠현동과 백이산에서 고려조를 위한 충의로웠던 마음씨를 읊은 칠현들의 시는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정선아리랑비> 음기(陰記)의 일부이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발행되는 모든 자료에 유사하게 전해지는 내용이다. 고려말 상황으로 이성계의 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여 관직에 오르지 않고, 충절을 지키려 정선에 은거하며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는 신세 한탄의 시를 읊었다. ‘아라리’가 오늘의 ‘아리랑’으로 음전(音轉)되었다는 논점이 주목된다. 

 이상에서 제시한 네 가지 상황, 우리와 오키나와는 일본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우리가 미안함을 가져야 사실도 있으니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를 전제하여 아리랑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를 유념하여 오키나와 속의 아리랑 층위를 살펴보기로 한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다운로드

  • [아카지마_아리랑①]누가_서정민요라_했는가_통곡의_아리랑.pdf (558.8K)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