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아리랑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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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7] 3ㆍ1만세운동 기간 애국가는 국가(國歌)였다3ㆍ1만세운동 기간 애국가는 국가(國歌)였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7]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8.03.02 11:13:4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3ㆍ1만세운동 초기 ‘애국가를 불렀다’를 ‘national cry’로 표기한 세브란스의전 오웬스가 1919년 3월 24일 <브리스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가 보낸 보고서 일부 애국가 역사에서 고유 곡명 ‘애국가(愛國歌)’ 시대와 ‘국가 애국가(國歌 愛國歌)’는 구분 된다. 1902년 대한제국이 윤용선을 책임자로 하여 <대한제국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를 제정하게 했다. 당시 일본 <기미가요>를 작곡, 정착, 일반화 시키고 독일로 귀국한 후란츠 에케르트(FranzEckert/1852~1916)를 초청하여 작곡한 것이다. 이를 고종에게 천거한 이는 민영환으로 이미 유치호 등을 인솔하여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갔다 근대식 의전(儀典) 절차를 보고 군제를 러시아식으로 삼으며 국가의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어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작사자를 악보의 서문을 쓴 민영환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 않고 작곡자는 악보 표지에 분명하게 에케르트를 작곡자로 밝혔다. 이 애국가는 1902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의 국가로 공립학교와 군대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서양정서에 장중한 분위기로 또한 가사의 난해함으로 일반화 되지는 못했다. 이런 까닭으로 윤치호의 <무궁화가>가 애국가로 불리게 되었고, 1907년에 와서 새롭게 작사된 <애국가>가 널리 불리게 되었다. 이런 길항(拮抗 서로 버티어 대항함) 관계는 1909년 전후까지로 추정된다. 이런 정황으로 공식적인 국가(國歌)는 약 7년 정도 존재한 <대한제국애국가> 뿐이다. 그러므로 임시정부 이전까지 나라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지닌 ‘애국가’는 존재했어도 나라가 제정한 또는 나라가 인정한 ‘국가 애국가’는 없었다고 본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학계의 인식이었다. 그러니까 현 <애국가>가 단순한 명칭으로서의 ‘애국가’를 넘어 나라가 인정한 ‘국가로서의 애국가’는 1919년 3ㆍ1만세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에서 불림으로서 부터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필자가 발굴한 자료를 통해 보면 적어도 현 애국가가 이미 <대한제국애국가>의 생명이 끝나는 1909년말부터 그 정통성을 계승하여 ‘나라가 인정한 국가 애국가’로 불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는 유감스럽게도 3ㆍ1만세운동 정황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외국 선교사의 보고서에서 확인이 되는데, 당시 세브란스의전(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선교사들의 소속 <브리스 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 목사(Donald D. Owens, 한국명 오은수)가 작성한 보고서이다. 1919년 3월 24일 위원회에 보낸 것이다. ▲ 3ㆍ1만세운동 초기 ‘애국가를 불렀다’를 ‘national cry’로 표기한 세브란스의전 오웬스가 1919년 3월 24일 <브리스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가 보낸 보고서 일부 내용은 일본의 식민정책, 일본의 개혁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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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2.18 11:40:4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1897년 7월 17일 낮 3시,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관>에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가 있었다. 이날은 조선이 개국한 날이라 기념식을 한 것으로, 사상최초의 민관합동 개국 기념식이었다. 강단에는 국기(태극기)를 게양하고 꽃 장식을 하고 하단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외국 공관원과 정부 고관들이 자리했고, 객석에는 관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도 자리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사가 주최했고 정부 재산을 관리하는 탁지부가 재정지원을 했고, 진행은 배재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했다. 강연은 서재필(독립신문 발행자/1864~1951), 아펜젤라(배재학당 설립자/1858~1902), 윤치호(전 외부 협판/1865~1945)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의 애국가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을 쓴 <National Flower>가 불렸다. 이 노래는 이후 ‘무궁화노래’ 또는 ‘무궁화가’로 표기되어 전승되었다. ▲ 영자신문 1897년 8월 17일자 가운데 ‘무궁화노래’ 기사 갈무리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에 기록되었다. 기록자는 Jaishon, P, 곧 서재필이다. 이 기록은 그동안 영문판 독립신문 <editorial note>에 실렸는데 최근에야 필자가 발굴한 기사이다. 애국가 사료로서는 일대 획을 긋는 사료이다. 이 날의 기념식을 위의 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20년 전 기념행사는 낮 3시에 시작하여 5시에 마쳤는데,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Praise)으로 시작되었다.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먼저 인사말을 했고, 외국인 참석자들을 소개했다. 이어 병중인 학부대신 이완용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배재 학당원들은 ‘무궁화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어 당시 연희전문을 설립한 아펜젤러 목사가 등단, ‘조선거주 외국인들의 의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어 서재필 박사가 ‘한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마지막 강연자인 윤치호가 나와 강연을 했다. 윤치호의 강연 제목은 <우리가 기념하는 날>로 주제는 “청국의 역사는 잘 알면서 우리 역사는 모르는 것이 현실”이라는 요지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서재필은 이 날 부른 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 영자신문 에 ‘무궁화 노래’ 기사를 올린 서재필의 만년 모습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하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다.” 다른 노래에 대해서는 ‘배재 학생들의 찬양’과 같이 의례적인 표현을 했는데, 두 번째 노래는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특히 윤치호를 ‘계관시인’(Poet Laureate)이라고 칭하여 작사자임을 명확히 했다. 이 기록은 거의 120년간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현 애국가를 윤치호로 인정한다 해도 동일 후렴이 이미 1897년부터 불려 왔으니 그 후렴이 포함된 <무궁화노래>가 윤치호 작사라는 증거가 없는 한 애국가 작사자를 단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1970년대부터 중요한 논거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 서재필 기사가 2015년에 밝혀짐으로서 애국가 작사자를 명확하게 밝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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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5] ‘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5]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0.25 11:34:2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후렴이 탄생 된지 120년이 되었다. 곧 오늘의 애국가 후렴이란 점에서 곧 애국가의 출현 120년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120년 전부터 현 애국가가 탄생하는 1907년까지는 ‘무궁화가’, ‘무궁화노래’, ‘애국가’로 그 이름을 달리하며 불렀다. 이 번 회에사는 이 ‘무궁화가의 미디어상의 전승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무궁화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계몽운동으로 국민들의 실력을 향상시켜 자주독립 국가로 가야함을 역설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언론도 이에 앞장섰다. 그래서 애국계몽 노래들을 발표하여 널리 보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가운데 1907년 10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 잡보에 ‘무궁화가’라는 곡명의 4절 노래가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이 역시 이 신문의 자주독립을 각성시키기 위해 ‘무궁화’를 수록했다. 一 셩ᄌᆞ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기리 보젼셰 二. 츙군 일편단심 북악치 놉고 국 열심의긔 동치 깁헤 三. 쳔만인 오ᄌᆞᆨ 나라랑여 농공샹귀쳔업시 직분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황실 황텬이 도으샤 국민동락 만만셰에 태평독립셰 (순한글판) 一 聖子神孫 五百年은 우리 皇室이요 山高水麗 東半島 우리 本國일세 (후렴)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 大韓으로 길이 保全셰 二. 忠君는 一片丹心 北岳치놉고 愛國는 熱心義氣 東海티 기페 三. 千萬人 오ᄌᆞᆨ 한마 나라랑여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皇室 皇天이 도으샤 國民同樂 萬萬歲에 泰平獨立셰 (국한문판)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게재된 전 4절 가사는 앞에서 살핀 1899년 6월 29일자 독립신문 잡보란 방학예식 기사에 수록된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가 한자형 ‘무궁화가’로 바뀐 것이다. 2. 도산본 애국창가집 ‘제14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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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9.03 10:57:5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문화재청은 2011년 초 근대음악유물 등록문화재 3편을 공고했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50년 이상이 지난 것 중 역사, 문화, 예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급격한 멸실,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2001년도에는 건축물 및 시설물, 2005년도에는 동산문화재 분야에 도입한 제도이다. 이에 따라 근대기의 역사적ㆍ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해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보존ㆍ관리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광복군가집 제1집」(1943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 펴냄), 「애국창가 악보집」(1916년 하와이 편찬 등사본),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자필악보」(1949년 필사) 세 가지를 등록했다. ▲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 이상의 3가지 음악자료는 애국가의 수록을 주목한 자료이다. 처음으로 근대 음악인 애국가의 자료를 국가가 관리하게 된 것으로 바람직한 결과이다. 이 세 가지 자료에는 현 애국가의 해외동포사회 확산과 광복군 수용 사실, 그리고 안익태가 작곡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만으로는 현 애국가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부족하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사’으로 시작하는 후렴이 사용된 <무궁화가>가 작사된 것이 1897년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으로 시작하는 가사가 작사 된 것이 1907년이고, ‘애국가’로 민중의 공인을 받은 것이 3ㆍ1만세운동기를 통해서이고, 임시정부 광복군들에 의해 불려 국가적 위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가사 변화와 보급 상황, 특히 3ㆍ1만세운동 기간에 불린 애국가들의 상황, 많은 ‘애국가’들의 정체성도 함께 밝혀져야 함은 당연하다. 앞으로 더 많은 애국가 자료가 발굴, 정리되어 이 맥락적 간극을 메꿔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발굴된 필사자료들을 주목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이중에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을 실례로 삼을 수 있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 발굴된 애국창가집 중 애국가류를 인식하고 정리한 자료인데, 이는 1919년 3ㆍ1만세운동 기간 전국에서 불린 다양한 애국가의 존재를 추정 할 수 있게 해 준다. ▲ 「애국창가집」의 안창호 작사 ‘애국가’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애국가류의 작사자나 수집 정리자를 밝힐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1910년대 이후 필사된 자료에 작사자가 밝혀진 것이 없다. 이 자료집에도 각각의 작품 정보가 없음은 물론, 수집ㆍ정리자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자료의 핵심 가치는 ‘애국가’ 명칭 자료와 일반 애국창가를 구분하여 정리ㆍ수록했다는 점이고, 이는 곧 1917년 전후의 ‘애국가’ 명칭 자료의 실상을 알게 한다는 점이다. 전체 29종을 밝힌 목차는 다음과 같다. 애국가 1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 2 애국가-산고수려 동반도는 3 애국가-긴날이 맛도록 4 애국가-동해의 돌출한 5 애국가-만왕 우리하나님계서는 6 애국가-우리나라 동반도난 7 애국가-화려한 강산 우리대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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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4] 안응권, “새 애국가 필요하다”고 박정희에 건의안응권, “새 애국가 필요하다”고 박정희에 건의 작사자 모른다고 “국가와 새 애국가” 개작 청원[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4]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0.17 11:04:2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963년 안웅권(安雄權)은 “전세계적 강국이 시발되기를 위하여 모순된 애국가부터 개창(改唱)하려 국가(國歌) 제정과 애국가를 개작(改作)····”했다며 자신의 작사 국가와 애국가를 담은 청원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발송했다. 1963년 6월 1일자로 국가재건최고회의 대통령권한 대행 박정희 의장에게 「국가제정 및 애국가선개작공개건의서」를 보냈다. 이 건의서의 핵심은 1955~56년에 문교부가 애국가 작사자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했지만 “안모(安某)와 윤모(尹某) 씨가 유력하다고 했으나 유시무종(有始無終)이어````” 자신이 새롭게 작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경일 등에서 자신이 작사한 국가를 선창(先唱)하고 만세3창 직후 역시 자신이 작사한 애국가를 부르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웅권의 현 애국가에 대한 비판과 개작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애국가(愛國歌)가 아니라 슬픈 국가 애국가(哀國歌)이다. 둘째 누가 시문작사(詩文作詞)했는지 모르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셋째 가사가 비국적(悲國的)이다. 넷째 1961년 들어 여러 개작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다섯째 5.16군사혁명 과업 완성과 새 공화국의 번창을 위해 맞지 않다. ▲ 순흥안씨 안웅권이 1963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대통령권한 대행에게 보낸 「국가제정 및 애국가선개작공개건의서」 표지, 안응권이 제시한 동일 곡조 <愛國歌 選(改)作>. 후렴은 “無窮花 千萬里 다찾아 빛내세/倍達 全世大國 强國繁榮하세”이다.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비판과 이유를 들어 새 국가와 애국가를 지었다고 했다. 주관적인 비판으로 맞지 않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에서 작사자가 확정 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다고 했지만, 사실은 ‘안모와 윤모씨’를 거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윤치호 작사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결국 윤치호로의 확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매우 치밀한 구상 하에서 국가와 새 애국가를 지어 제시했다. 또한 국가와 애국가를 이원화하여 의식 첫 순서에서는 국가를 부르고, 애국가는 행사 끝에서 만세3창과 함께 부르자고 했다. 제시한 선작(選作) 대한민국 국가와 개작 애국가는 다음과 같다. 大韓民國 國歌 高明檀生 弘益祖國 天地間에 으뜸일세 東邦文化 자랑하며 倍達民族 全世太陽 煉燭盈成 寶王疆土 富國安民 永樂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사 天壤無窮 强榮되리 愛國歌 選(改)作 一 東西南三海 白頭山 天上에 닿도록 하나님이 같이하사 우리나라 永存 東山上에 저 美庵들 언제나 보아도 金剛같은 民族正氣 倍達尊嚴 일세 후렴 無窮花 千萬里 다찾아 빛내세 倍達 全世大國 强國繁榮하세 二 높은하날 淸明한데 高曠구름없이 맑은太陽 우리衷心 民族象徵일세 億兆萬代 昌盛토록 廣大자랑하며 樂苦우나 金剛精氣 不變奉國하세 상투적인 한문투가 오히려 비속하게 읽힌다. 당시 박정희 혁명정부가 채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원자 안웅권에 대해서는 다른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안익태, 안창호와 같은 순흥 안씨임과 1985년 2월 청원법 위반 사건에 연류 되어 지상에 이름을 올린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이때의 청원법 위반 사건은 당시 사회문제가 된 ‘상습적 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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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18 11:34:5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우리들의 8월은 ‘애국가의 달’이다. 해방과 광복과 정부수립이란 역사적인 기념의 달이기에 가장 의미있게 애국가가 불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월에는 애국가의 역사를 한 번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현<애국가>를 수록한 첫 문헌은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초판은 1907년으로 추정되나 미확인)이다. 비록 현<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류와 영미(英美) 찬송가 12편을 수록한 18쪽의 소책자지만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 애국가를 수록했고, 개화기 출판물이고, 발행사가 광학서포이고, ‘역술(譯述)’ 같은 출판 용어를 사용한 점 등으로 그렇다. 음악인이 아니면서 학생들을 위해 제한적인 목적으로 발행 된 무곡보(無曲譜) 애국창가집이다. 지금까지 이 자료는 공식적인 영인 출판이 되지 않은 탓인지 창송가사(讚頌歌史)에 한정된 석사 논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찬미가》의 개론적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최초의 서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司書) 윤학구의 <해제 찬미가(解題 讚美歌)>의 일부다. “윤치호(尹致昊) 저(譯述), 융희(隆熙) 2년(1908), 활자본(金屬活字) 1책, 17.5cm x 12.5cm 18p, 장정(裝幀) 적황색(赤黃色) 표지 湖附裝. 이 자료는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의 인쇄도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월간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1970, 7호, 52쪽) 이상의 내용은 《찬미가》에 대한 최초의 해제(解題)로 네 가지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이 책이 1912년 총독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준다는 것이다. 둘은 이 시점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소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원본이 확인되지 않고 사본(寫本)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셋은 초판 발행 시기를 재판 발행 1년 전인 1907년으로 추정한 사실이다. 현재 초판이 발굴 되지 않아 1905년설, 1907년설이 대두 된 상태로 아직 단정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책을 통해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후의 다양한 윤치호 작사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로 애국가 가사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임중빈(任重彬/1939~2005)이 쓴 <새 자료로 보는 좌옹 윤치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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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18 11:34:5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우리들의 8월은 ‘애국가의 달’이다. 해방과 광복과 정부수립이란 역사적인 기념의 달이기에 가장 의미있게 애국가가 불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월에는 애국가의 역사를 한 번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현<애국가>를 수록한 첫 문헌은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초판은 1907년으로 추정되나 미확인)이다. 비록 현<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류와 영미(英美) 찬송가 12편을 수록한 18쪽의 소책자지만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 애국가를 수록했고, 개화기 출판물이고, 발행사가 광학서포이고, ‘역술(譯述)’ 같은 출판 용어를 사용한 점 등으로 그렇다. 음악인이 아니면서 학생들을 위해 제한적인 목적으로 발행 된 무곡보(無曲譜) 애국창가집이다. 지금까지 이 자료는 공식적인 영인 출판이 되지 않은 탓인지 창송가사(讚頌歌史)에 한정된 석사 논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찬미가》의 개론적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최초의 서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司書) 윤학구의 <해제 찬미가(解題 讚美歌)>의 일부다. “윤치호(尹致昊) 저(譯述), 융희(隆熙) 2년(1908), 활자본(金屬活字) 1책, 17.5cm x 12.5cm 18p, 장정(裝幀) 적황색(赤黃色) 표지 湖附裝. 이 자료는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의 인쇄도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월간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1970, 7호, 52쪽) 이상의 내용은 《찬미가》에 대한 최초의 해제(解題)로 네 가지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이 책이 1912년 총독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준다는 것이다. 둘은 이 시점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소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원본이 확인되지 않고 사본(寫本)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셋은 초판 발행 시기를 재판 발행 1년 전인 1907년으로 추정한 사실이다. 현재 초판이 발굴 되지 않아 1905년설, 1907년설이 대두 된 상태로 아직 단정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책을 통해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후의 다양한 윤치호 작사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로 애국가 가사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임중빈(任重彬/1939~2005)이 쓴 <새 자료로 보는 좌옹 윤치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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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1] 윤치호 생애와 애국가류 3가지윤치호 생애와 애국가류 3가지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1]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03 11:02:2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윤치호는 세 가지 애국가류를 작사했다. 1897년 이전에 <KOREA>를, 1897년 <무궁화노래>를,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작품을 애국찬미가 모음집인「찬미가」에 12편의 번역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여 발행한 것이 1908년(재판)이다. 이 때 창작 3편을 12편의 번역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게 됨으로서 「찬미가」 판권(板權)에 윤치호 ‘저(著)’나 ‘저술(著述)’ 또는 ‘역(譯)’이나 ‘번역(飜譯)’ 아닌, ‘역술’(譯述)이라고 밝혔다. 대부분 번역하고 나머지는 창작으로 이뤄졌다는 개화기적 출판 용어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작품은 일본, 중국, 미국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895년부터 1907년 사이에 각기 다른 시기와 목적과 상황에 의해 작사되어 유통ㆍ전승됨으로서 작사자 표기나 작사 당시의 기능이나 작품명도 고정되지 않은 채, 일정 기간 함께 또는 길항(拮抗, 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항함)하며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 전선에서 유통되었다. 특히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는 내놓고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 되어 의도적으로 또는 자연스럽게 작사자도, 작사 시기도, 작품명도 달리 구송(口誦)과 기록(記錄)이 되다 1945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1908년 재판으로 발행된 「찬미가」도 같은 운명이었다. 총독부의 금서 처분으로 유통이 금지되어 개인 소유도 불온자(不穩者)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폐기해 버렸다. 특히 1945년까지 ‘애국가’ 자체가 금지된 노래이었음으로 당연히 이 책의 유통은 폐쇄되어 세 작품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과 각각의 정체성은 발휘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일부에 ‘애국가’로 통칭되거나 윤치호 작이라는 정도만 전해졌고, 해외에서는 1914년 화와이 교민 발행의 《태평양잡지》에서 총독부가 판매금지 처분을 내려 금서가 되었다는 사실과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기록하는 정도였다. 또 한편 임시정부 같은 곳에서는 존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작사자를 ‘실명(失名)’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이 40여년의 세월은 이 세 작품에 대해 왜곡과 와전을 낳아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조차 ‘미상(未詳)’에 빠지게 하였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남기고 윤치호는 애국가를 남긴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김을한, <애국가만으로도 할 일을 하였다>, 연합신문, 1959년 11월 27일자) 그래서 언론인 김을한(金乙漢/1905~1992)이 이렇게 대놓고 선언하게 된 것이 1959년 이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윤치호 작사 3편의 애국가류 작품은 개화기 시가작품으로나 애국가 역사에서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필요성에서 우선 세 작품의 작사 배경으로서 윤치호의 생애를 정리하고자 한다. 작사 배경으로서의 생애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첫 관직생활을 하는 1895년 초부터 「찬미가」가 발행되는 1908년까지가 된다. 첫 작품 <KOREA>는 1897년 8월 13일 낮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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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6] 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2)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2)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6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3.28 08:52:1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일제강점기 ‘애국가 사건’은 주로 학생들과 관련한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이 애국가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검거된 경우나 교사가 애국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사실이 들켜 사건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신문과 총독부 조사보고서류에 기록된 애국가 사건들이다. 하동 보통학교 ‘애국가’사건 1923년 10월 2일자 「조선일보」에는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준 이두석(李斗錫)이란 인물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두석이 하동군 량보면 여의리 주재소에 근무하는 홍판일(黃判日)이란 주재소원에게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 주었는데, 그것이 다른 주재소원의 눈에 띄어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만으로는 위의 보도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사건은 지방 곳곳에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학습장조차도 철저하게 검색했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 필자 소장 자료 중 「공민학교 교장 시험 문제집」<제1종․2종>이란 공책에 ‘애국가’ 1절이 연필과 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런 노래는 인쇄 될 수 없었음으로 이같이 잡기장 속에 기록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총독부는 잡기장까지도 검색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앞에서 살핀 소안도 민족 운동기에 투옥자가 많았음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사립학교 학생 중 소안도내에서 일경에 피검되어 고문을 당한 사례에서 창가책이 매개가 된 사건이 제일 많았던 점으로 보아 소안도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민족운동 노래를 열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철필이나 연필로 애국가를 써서 한복바지 가랭이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그가 베껴준 창가 책을 학교 옆 주재소 앞을 지나다가 빠뜨렸다. 주재소 순사가 보니까 애국가가 많이 써졌는데, 한쪽에 김만득이라고 쎠져서…” 이 증언에서 이들이 특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애국가’ 명칭의 것이었고 일제는 역시 이를 단속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의 ‘애국가’ 1928년 4월 27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애국가’가 불렸다. 이때 사회를 보았던 3학년 학생 김형규(金炯奎)가 평양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매일신보> 기사를 살펴본다. ▲ 신입생 환영회에서 애국가를 불렀다고 일본 경찰은 학생을 구속하였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평양-부내 사립숭실전문학교 생도 모난 지난 3일 평양서에 검속되야 취조를 당하는데 동학생은 수일 전에 동교강당에서 열린 신입학생환영회에 구한국시대의 애국가를 부른 것이 발견되야 검속되었다더라.”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이다. “신입생 환영회를 마친 후 다과회를 시작할 때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창가를 일동이 불렀는데 이 창가는 본래 조선애국가로 '조선xxx'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야 그 사회자이든 전기 김형규씨를 구인하고 엄중한 취됴를 하는 중 지난 2일은 동교 학생회의 수명을 증인으로 심문하였다더라.” 이 기사로 보아 당시 일본 경찰은 요시찰 대상 학교에 신입생 환영회까지도 사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를 '조선xxx'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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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5] 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1)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1)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5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3.13 11:42:51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일제는 애국가와 태극기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3.1운동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항일시위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총독부는 <애국가>류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바로 1910년 10월 내무부 학무국 명의로 <축제일 약해>를 만들어 태극기나 애국가에 대한 검속을 강조했던 것이다. ▲ 2011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475호. <애국창가>. 이 책에는 무궁화가·애국가 등 70여 편의 애국창가가 수록되었다. “사립학교 중에서는 창가나 그 외의 다른 것으로 독립을 고취하며 일본으로의 반항을 장려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사용을 허락지 않았으므로 취체(取締)상 가장 주의를 요한다.” 또한 총독부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모든 교육과정에 학습케 했고, 일장기 게양을 의무화 했다. 이와 함께 ‘황국신민의 서사’를 아침마다 제창케 하고 ‘애국일(愛國日)의 노래’(일본군에 감사하는 황국신민이 되자는 내용을 담은 노래)’ 부르기와 궁성요배(일왕의 황궁을 향해 절 하는 것), 정오의 묵도(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묵념), 신사참배, 가미다나(집안에 놓는 신을 모시는 신단)의 설치, 일어상용, 시국 좌담회 개최 등을 정례화하여 일상화 시켰다. 뿐만 아니라 학교의 교가나 교명이 민족적인 뜻을 담고 있으면 그것도 폐지시켰다. 실례로 <보성전문학교>의 ‘보성’(普成)이 일본어로는 ‘후세이’로 한자음으로는 “부정(不正)”이란 뜻이 되어 이를 개명하라고 강요하여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바꾸게 한 사실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화’(梨花)가 이왕가(李王家)의 문장(紋章)이므로 민족적인 뜻이 담겨 있다고 트집을 잡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도록 했다. 그런가하면 ‘사립.(私立)이라는 말에 자주의식이 배어 있다는 이유로 쓰지 못하게 했고, 학교 모표(帽標)를 무궁화로 했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못하게 강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찍이 창가(음악)분야에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1910년에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부곡(附曲) 창가집으로 조선시대의 창가집이기도 한 《보통학교 창가집》 제1집에 우리의 전통 민요는 한 가지도 담지 않고 일본 창가 교육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는 음악 교재에서 마저도 민족의식을 말살하려한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창가 집은 1881년에 일본에서 발행한《소학창가집》 가운데서 27곡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당연히 통감부의 관여에 의한 결과였는데, 이것은 다시 명치(明治) 44년에 정정판(訂正版)으로 발행될 때 일부를 바꿔 조선총독부 편으로 내기도 했다. 또한 1914년 총독부가 발행한《신편창가집》에서는 기미가요 등을 게재하여 본격적으로 학습을 강요했던 것이다. 또한 찬송가도 세세히 감찰하였다. 당연히 민족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기준으로 삭제 하거나 사용을 금지시한 것인데, ‘주의군대’(개편「찬송가」․381장)가 그 한 예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애국가를 부르도록 그냥 두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애국가를 탄압한 사건들이 수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해외 교민사회나 임시정부 그리고 독립운동 단체에서 국가(國歌)를 대신하여 불리는 상황이었기에 국내에서 더욱 탄압을 했다. 두말 할 여지없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곧 항일, 애국, 독립운동이었다(<선언서 낭독, 애국가 고창>, 조선일보, 1926, 11, 6) 이제 애국가 사건들을 통해 그 탄압상을 확인하기로 한다. 애국가 사건 1924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애국가 사건”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애국가 사건으로 잡힌 로희성(盧熙星. 30) 시내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근일에 시내 종로 삼정목 구십삼 번지 사는 로희성을 체포하야 비밀리에 취조 중이라 하며 시내 청진동 청진여관에서도 한명을 인치하야 취조한다는 데 들은 바에 의하면 모다 지난번 애국가 사건에 관련된 것인 듯하다 더라.” ▲ 1924년 5월 12일 동아일보에 난 "애국가 사건" 기사 기사 제목 자체가 ‘애국가 사건’이라고 한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 ‘애국가’와 관련하여 체포되거나 취조당하는 것 자체를 모두 애국가 사건이라 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런 사건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앞선 보도는 확인이 되지 않아 구체적인 배경을 알 수는 없으나 ‘범인’의 나이가 30세가 된 것으로 보면 보통학교나 전문학교 학생은 아니다. 또한 지방이 아닌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조직적인 항일운동단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해주형무소 애국가 사건 1923년 임시정부의 연락 업무를 갖고 국내에 잠입 했다 체포, 수감된 요원 20여명이 1923년 4월 10일 임시정부 창립 일을 맞아 옥중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것이 문제가 된 사건이다. 해주 형무소 서흥 분서에 수감된 이들이 ‘임시정부 구립 기념식을 하는 것이 옳다 하고 22명이 일제히 ‘대한애국가(大韓愛國歌)’를 높이 불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간수들이 이중 세 명을 폭행하여 중상을 입혔고 이에 수감자들은 단식 투쟁으로 저항하여 나흘이 지나 거의 실신하게 된 사건이다. 그래서 ‘감옥 관리가 빌어 단식을 중단’했다. 한편 이 자료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1920년대 ‘애국가’를 ‘대한애국가’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대한’ 또는 ‘한국(韓國)’이란 국호를 붙인 것은 그것이 국가의 의미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안도(所安島)의 항일 애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