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일제강점기 ‘애국가 사건’은 주로 학생들과 관련한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이 애국가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검거된 경우나 교사가 애국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사실이 들켜 사건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신문과 총독부 조사보고서류에 기록된 애국가 사건들이다.
하동 보통학교 ‘애국가’사건
1923년 10월 2일자 「조선일보」에는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준 이두석(李斗錫)이란 인물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두석이 하동군 량보면 여의리 주재소에 근무하는 홍판일(黃判日)이란 주재소원에게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 주었는데, 그것이 다른 주재소원의 눈에 띄어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만으로는 위의 보도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사건은 지방 곳곳에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학습장조차도 철저하게 검색했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 필자 소장 자료 중 「공민학교 교장 시험 문제집」<제1종․2종>이란 공책에 ‘애국가’ 1절이 연필과 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런 노래는 인쇄 될 수 없었음으로 이같이 잡기장 속에 기록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총독부는 잡기장까지도 검색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앞에서 살핀 소안도 민족 운동기에 투옥자가 많았음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사립학교 학생 중 소안도내에서 일경에 피검되어 고문을 당한 사례에서 창가책이 매개가 된 사건이 제일 많았던 점으로 보아 소안도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민족운동 노래를 열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철필이나 연필로 애국가를 써서 한복바지 가랭이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그가 베껴준 창가 책을 학교 옆 주재소 앞을 지나다가 빠뜨렸다. 주재소 순사가 보니까 애국가가 많이 써졌는데, 한쪽에 김만득이라고 쎠져서…”
이 증언에서 이들이 특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애국가’ 명칭의 것이었고 일제는 역시 이를 단속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의 ‘애국가’
1928년 4월 27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애국가’가 불렸다. 이때 사회를 보았던 3학년 학생 김형규(金炯奎)가 평양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매일신보> 기사를 살펴본다.
▲ 신입생 환영회에서 애국가를 불렀다고 일본 경찰은 학생을 구속하였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
“평양-부내 사립숭실전문학교 생도 모난 지난 3일 평양서에 검속되야 취조를 당하는데 동학생은 수일 전에 동교강당에서 열린 신입학생환영회에 구한국시대의 애국가를 부른 것이 발견되야 검속되었다더라.”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이다.
“신입생 환영회를 마친 후 다과회를 시작할 때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창가를 일동이 불렀는데 이 창가는 본래 조선애국가로 '조선xxx'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야 그 사회자이든 전기 김형규씨를 구인하고 엄중한 취됴를 하는 중 지난 2일은 동교 학생회의 수명을 증인으로 심문하였다더라.”
이 기사로 보아 당시 일본 경찰은 요시찰 대상 학교에 신입생 환영회까지도 사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를 '조선xxx'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탄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