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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양 “2014, 아리랑 창조적 계승의 해”…위대한 3대 성과인쇄하기 닫기 연예 > 가요 기미양 “2014, 아리랑 창조적 계승의 해”…위대한 3대 성과 등록 2014-12-31 08:28:00 | 수정 2016-12-28 13:53:14 【서울=뉴시스】기미양 이사·아리랑학회 = 2011년 중국의 아리랑 자국 국가무형유산 지정으로 고조된 아리랑 현상은 금년 북한의 유네스코 등재에 이어, 내년 중반기 우리 문화재청의 아리랑 국가주요무형문화재 지정과 중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신청 여부로까지 이어질 듯하다. 3국이 하나의 종목을 각각 역사와 성격과 내용을 달리하여 자국 문화재로 지정한 것도 이례적인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아리랑 현상’을 있게 할 만하다. 이는 아리랑을 단순한 전통민요의 하나로만 보아야 하느냐는 본원적인 문제와 함께 각기 다른 국가명으로 인류무형유산이 된 남북의 아리랑이 과연 ‘아리랑 분단’ 효과 그 이상이 검증될 수 있는가의 문제까지 제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아리랑 현상’ 속에는 자발적 전승주체임을 자긍심으로 삼고 아리랑을 향유한 지방 곳곳의 아리랑꾼들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아리랑판의 주인인 것임을 믿는다. 필자는 두 번에 걸쳐 아리랑판의 주인공들을 기록했다. 오늘 2014년의 마지막 날 기억하고 싶은 아리랑 사연을 가슴에 담으려 한다. 단견으로 표현하면 ‘창조적 계승’ 아리랑 판 세 가지이다. 하나는 경서도 국악인 유지숙의 창작 아리랑 14편을 담은 음반 ‘우리 아리랑’ 발매(신나라레코드)이고, 둘은 한국가곡연구소의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집’ 발간이고, 마지막은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 아리랑을 수록한 음반 ‘I Was, I Am, I Will’을 발매한 것이다. 모두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이란 선례로 내세울 만한 성과작들이다. ◇‘구동존이 아리랑’에서 ‘우리 아리랑’으로 2년 전, 늦었지만 나와야 하는 아리랑 음반이 나와 주목을 끈 것이 유지숙의 ‘구동존이(求同存異) 아리랑의 재발견’(신나라레코드)이다. 전공인 서도창으로 북한과 중국 동포들의 아리랑을 우리가 음반화한 것이다. 진정한 통일이 ‘어느 시점의 순간적인 사건’이 아닌 땅과 사람과 마음이 하나되는 통합이라면, 알고 부르고 있는 아리랑이 서로 같은 아리랑으로 불리는 것이 앞서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음반은 소중한 남북문화교류의 실적인 것이다. 【서울=뉴시스】최영식 소장·한국가곡연구소 = ‘아리랑 한국예술가곡 대축제’가 막을 내렸다. 한국가곡연구소는 금년 5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2014 세계무형유산활용 관광자원화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아리랑 한국예술가곡대축제 ‘아리랑 혼(魂)으로 타오르다’(부제)를 기획하였으며,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10월12일)과 의정부예술의전당(11월14일·공동주최)에 이어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세 번째 연주를 마지막으로 축제를 마쳤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은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어있는 아리랑, 판소리, 가곡, 농악 등 17개 종목의 훌륭한 우리나라 문화자원을 보존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개발하고 활용하여 문화관광 콘텐츠로 만드는데 목적을 두고 지원사업을 시행해오고 있으며, 서양음악 장르 중 한국예술가곡을 연구하는 단체인 본 연구소가 아리랑을 다양한 장르로 확산시켜 세계인의 아리랑으로 발전시키자는 취지 아래, 한국예술가곡에 입힌 아리랑을 주제로 아리랑 한국예술가곡대축제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하여, 어렵사리 행운을 얻은 것이다. 이문태 이사장과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기금을 받은 단체는 금년 안에 모든 행사를 마쳐야 하는 조건이므로 축제를 치르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 온 6개월이었다. 후원기업을 찾기 위해 가진 능력 안에서 최대한 노력하였으며 연주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수시대관의 어려움을 감수해야했다. 국가의 문화상징인 아리랑이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사회 전반에서 여러 형태의 행사와 축제가 봇물 터지듯 하며 아리랑 붐이 급격히 일어났다. 한국가곡연구소는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하면서 행여 시류에 편승하는 모양새로 비춰지지 않을까 고심하였으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음악인으로서 순수예술 중 가장 대중과 가까이 호흡할 수 있는 한국예술가곡의 주춤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해결과제는 십수 년동안의 화두였으므로, 아리랑을 소재로 가져 온 아리랑한국예술가곡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질 수 있어서 본격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만만치 않았다. 뮤지컬, K팝 등 급변하고 있는 음악문화의 현실 속에 클래식 장르인 한국예술가곡은 극히 일부의 애호가와 소수의 전공자만이 맥을 이어가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리랑을 한국예술가곡에 입히기로 하고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집을 펴내기 위해 몰두하고 있던 즈음, 지원 단체로 선정되어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축제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을 하면서 아리랑이 왜 민초의 소리인지, 아리랑을 부르면 목이 메이고, 아리랑을 들으면 왜 눈물이 고이는지 알게 되었으며 준비 전의 막연한 불안감과 우려는 서서히 사라졌다. 당연한 결론인 것이었다. 한국인의 뛰는 가슴과 아픈 소리에 전율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무심하고 무덤덤했던 조국애가 내심 부끄러웠고 서양음악 분야에서 긴 세월 성악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서양음악의 틀에 갇혀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과 흥을 지혜와 해학으로 풀어나가는 겨레의 멋과 숨결 그리고 우리 민족의 굴곡진 삶이 고스란히 베인 아리랑을 한국예술가곡에 본격적으로 가져오는 작업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으며, 축제에 참가한 연주자들의 한국예술가곡에 대한 사랑과 확신어린 모습을 보며 희망과 용기를 얻었고 한국예술가곡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무대를 압도하며 뛰어난 연주기량을 펼치는 그들을 보며 커다란 축제를 준비하며 달려온 벅찬 과정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국내 성악계의 중진 소프라노 김영애 가천대 교수, 소프라노 박정원 한양대 교수와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베이스 전승현과 소프라노 박현주 숙대 교수, 테너 신동원, 진성원 그리고 세계 고음악계의 거장들과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고있는 소프라노 임선혜와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금년 국내 오페라계의 신데렐라로 주목받은 소프라노 손지혜와 해외 오페라 극장에서 초청받고있는 바리톤 나건용은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의 예술가곡인 한국예술가곡과 아리랑의 소중함을 알고 축제에 참뜻을 모아 준 것이다. 지휘자 김성진은 서양악기와 전통악기의 비율을 3대 2로 조합하여 새로운 음색을 만들어내며 국내 유일의 아리랑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아리랑 한국예술가곡 연주를 윤택하고 조화롭게 이끌었으며 배우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의 역사성을 드라마적으로 풀어내어 무대에 극적 흥미와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오대환 음향감독과 총연출을 맡은 유은선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의 날카로운 예술적 감각은 세 번째 축제무대인 예악당 연주를 축제의 완결편마냥 꽃 피웠다. 예악당 무대는 배우 유인촌 전 문화체육부장관이 1917년 1차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의 후손들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부른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었음을 알리며, 서울음대 성악과 저학년으로 구성된 12명과 당시의 상황을 간단히 재현하였다. 학생들은 서울대 윤현주 교수의 지도로 작곡가 이건용(서울시립오페라단 단장)의 아카펠라 ‘아리랑’을 수용소에 갇힌 복장으로 차려입고, 청아한 음색으로 정제된 듯 곱게 모아 부르면서 밑에서 위로 배우 유인촌과 함께 이동무대를 타고 올라와, 당시의 시대적 극한 상황을 그렸다. 마지막 무대는 서울시 구립여성합창단연합회, 서울아버지합창단과 서울대중창단이 부르는 아리랑(진규영 편작곡) 합창과 아리랑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아리랑 판타지에 양길순 선생과 제자들의 도살풀이춤에 이어 명창 안숙선이 진도아리랑과 문경새재아리랑을 구성지게 불러 감동어린 아리랑을 선사했으며 객석과 함께 아리랑 제창으로 마무리하였다. 연주를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는 객석의 많은 분들은 녹화를 한 SBS의 방송날짜를 기다리겠노라고 전하였다. 이번 축제가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리랑이 서양음악의 클래식 장르인 예술가곡과 만남으로써 예술가곡무대로서는 처음으로 서양음악과 전통음악과의 융합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였다. 둘째, 아리랑이 본격적으로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음악언어인 예술가곡 장르와 결합함으로써 아리랑한국예술가곡으로 재탄생되어, 세계인의 한국예술가곡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다양한 스타일의 아리랑예술가곡의 레퍼토리를 발굴, 아리랑의 한국예술가곡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방향정립에 한 몫을 하였다고 본다. 특별히 소프라노 임선혜와 손지혜가 부른 ‘소프라노를 위한 세 개의 아리랑’(이영조 곡)과 베이스 전승현이 부른 ‘아리랑 산촌에’(백병동 곡) ‘장터아리랑’(정애련 곡) 그리고 소프라노 김영애와 박정원이 부른 ‘정선아라리’(임준희 곡)는 국내 초연으로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곡으로 독일가곡과 이탈리아가곡 등에 견주어 전혀 손색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이번 축제를 통해 받은 선물이다. 모르고도 부르고 알고도 부르고 그저 마음 가는대로 가슴으로 부르는 우리들 삶의 소리 아리랑을 만나 사랑을 키운 2014년의 늦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은 그저 노랫말이 좋아 흥얼거리며 한국예술가곡에 탐닉하기 시작한 시절보다 몇 갑절 진한 사랑과 애틋한 연민에 빠진 날들이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 방송매체의 어느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내 글 중에 좋은 것이 있어서 써왔다고 하였다. ‘이번 축제는 한국예술가곡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분들의 무대이다.’ 기자는 왜 좋은 글이라고 한 걸까. 나는 왜 한국가곡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분들의 무대라는 표현을 굳이 했을까. 못내 아쉬운 여운이 사라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길을 가노라면 동행하는 벗도 만나게 되고 뜻밖의 선물에 눈이 부셔 이유도 없이 눈물이 핑 돌 것만 같다. 첫눈을 보면 반가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는 동심 어린 아이처럼…. http://koreartsong.com/ 이를 바탕으로 아리랑을 주체화한 유지숙이 이 땅 곳곳을 표제화 한다는 마음에서 금년에 제주도에서 경기도까지의 지명 아리랑을 창작하여 음반화했다. 작곡가(이상균 세한대 전통연희학과 교수)와의 일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각각의 작품마다 지역성을 충실히 고려하였다. “서도소리와 경기소리가 섞여있는 지방이라서 강화아리랑을 그 선율에 얹었다. 제주아리랑은 제주의 독특한 선율과 방언을 가사로 만들어 이질감 없이 자연스런 아리랑이 되도록 했다. 제주도청이 관심을 갖고 방언을 감수했고 탐라문화제 때 초청해 부르도록 해줬다.”(유지숙) 14곡의 창악 아리랑을 한 음반에 담고, 이를 발표회에서 실연하였으니 이는 이미 ‘아리랑 완창’으로 표현했듯이 민요계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작곡·작사가나 창자의 활동은 앞으로 강원도와 북한지역 대상 아리랑을 창작하리라는 확장성을 기대하게 한다. 이 확장성은 이 음반이 번다한 아리랑 상황 속에서 의미있는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 작업의 실증임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세계화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집’ 유지숙의 작업이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역할하게 하는 것이라면, 한국가곡연구소의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집’(KOREAN ART SONG, INTERNATIONAL EDITION) 발간은 아리랑의 세계화를 위한 성가로 보게 된다. 이미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와의 참여로 2012년 발행된 ‘한국예술가곡집’ 제1권의 발행으로부터 인연이 있는 연구소와 아리랑 가곡을 집대성한 자료집을 발간하여 해외에 알리는 것이 의미있겠다는 논의를 하였다. 이후 필자는 세 곡 정도의 창작을 발의하고 백병동, 임준희, 그리고 이탈리아 피렌체 음악원 교수인 파올로 푸를라니(Paolo Furlani)에게 위촉하였다. ‘정선아라리’ 사설에서 가사를 선(選)하고, 창작 아리랑인 ‘아리랑 산천에’와 ‘베니스아리랑’을 낳게 하였다.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 첫 번째 정규 앨범 '아이 워즈, 아이 엠, 아이 윌(I WAS, I AM, I WILL)' 발매기념 쇼케이스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번 앨범에는 미니 앨범의 대표곡과 새롭게 창착한 곡 등 13곡이 실렸으며, 포크, 록, 재즈,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를 담았다. 최고은은 '아이 워즈, 아이 엠, 아이 윌' 발매를 기념, 11월 20일~21일 서울 홍대 앞 KT&G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다. 2014.11.20. bluesoda@newsis.com 필자로서는 2000년 12월10일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 조수미가 “아리랑은 평화를 상징한다(Arirang is a symbol of peace)”라는 멘트와 함께 ‘아리 아리랑’(작곡 안정준)에 감동한 후로 아리랑 가곡작품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2001년 ‘통일아리랑축전’을 기획하며 작곡가 최영섭 선생에게 ‘의병아리랑’과 ‘따르리라’ 라는 두 곡을 위촉, 초연을 한 바 있다. 이번에 이들을 포함하여 가곡집에 모두 수록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제1집에서 시도되어 평가를 받은 가사에 국제음성기호(IPA)를 적용, 아리랑 가곡에 세계 솔리스트들이 용이하게 접근하게 하였다. 분명 한곡가곡의 역사 만 아니라 아리랑의 세계화에도 평가가 기대되는 작업으로, 아리랑의 예술가곡화라는 창조성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 기대는 두 작곡가의 발언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아리랑 멜로디가 이토록 강한 영감을 주는 것이 놀랍다”(파올로 푸를라니),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는 가사 두 줄에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적 미학이 숨겨진 줄 몰랐다.”(임준희) 이미 피렌체 무대에 ‘콩쥐팥쥐 이야기’를 오페라로 작곡하여 올렸던 만큼 우리 아리랑에 대한 정서를 갖고 있는 작곡가의 평가이고, 현역 중 대표적인 작곡가인 암준희 선생은 아리랑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말한 것으로 세계화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최고은 ‘I Was, I Am, I Will’ 속의 아리랑 필자의 핸드폰 컬러링은 나윤선의 ‘아리랑’이다. 유럽 재즈계에 알린 작품이라 많은 이들에게 선물을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에 사용했다. 그런데 이 작품만큼 좋은 또 하나의 아리랑이 출현했다. 바로 세 장의 미니 앨범을 통해 안정적인 가창력과 호흡법에서 깊은 인상을 주는 보컬로 평가를 받은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 부른 ‘본조아리랑’이다. 【서울=뉴시스】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첫 공식 음반 ‘I Was, I Am, I Will’ 11번 트랙 곡으로 6번의 뱃노래와 함께 감동을 받았다. 뱃노래는 ‘편곡-해체’로 전통민요를 모티브로 한 로킹 사운드라면, ‘아리랑’은 세 가지 악기에 의한 ‘포크적 재해석’이다. 인트로와 엔딩이 전혀 아리랑이 아니다. 이런 편곡이 오히려 4분을 아득한 아지랑이 속으로 유도한다. 자신의 어쿠스틱 기타와 간결한 드럼, 전기 기타가 주는 단출함이 최고은 특유의 서정성을 더해 주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혹시라도 이 두 줄 가사를 거친 해석만으로 칙칙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꼭 최고은의 이 곡을 들어보기를 권한다. 존 바이즈의 ‘리버 인 더 파인’의 서정성을 느끼는 반전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리랑에서 존 바이즈를 느낀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이는 아마도 앞선 트랙 타만 네가라(Taman Negara)에서 갖게 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말레이시아 밀림에 대한 동경심과 다음 트랙 ‘봄’에서 ‘우리는 왜 서로가 숲이 될 수 없는가’라는 성찰적 가사로 이어지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최고은이 판소리와 민요에 능한 가수라는 기대감의 반전이 주는 즐거운 배신감에서 느낀 것일 수도 있다. 또 아니면 엔딩 부분의 ‘아~리~’만의 무심한 읊조림이 추임새보다 더 긴 여운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 나는 이제 내 핸드폰의 컬러링을 바꾸게 될 것 같다. 창작 아리랑으로? 가곡 아리랑으로? 아니면 최고은의 아리랑으로? 새해 어느날 확인해 드리리다. <사진> 위부터 명창 유지숙, 아리랑 한국예술가곡 대축제, 가수 최고은,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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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사할린아리랑제’ 김채원 단장, 연출력과 무대 장악력에 사할린교민 찬사김채원 단장, 연출력과 무대 장악력에 사할린교민 찬사 ( 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김채원(<아리&랑무용단> 단장/한양대 강사) 단장이 ‘2016 사할린아리랑제’ 총연출과 독무 출연으로 사할린교민과 현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김단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전수자로 원광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2009)한 후 한양대와 중앙대 등에서 강의했고, 1993년 일본 오까야마 모모따로 맛쯔리 참가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2008년 ‘김은선의 춤’(국립민속박물관)과 2016년 ‘해원의 짓’(국립민속박물관) 등을 발표, 한국무용가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특히 1996년 가고시마 ‘추석 가을 축제’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전통 춤 안무를 비롯한 집단작품 안무로 그해 전국 예술축제 안무부문 특상 수상을 계기로 안무가로도 활동했다. 또한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 개최기념 “무돌이” 전국 중․고등학교국악경연대회 심사위원으로부터 학생작품 심사로 무용교육자로서도 크게 활동했다. ‘2016사할린아리랑제’는 한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회장 정은하)가 사할린주한인협회, 사할린주이산가족협회, 사할린주노인회 3개 단체의 초청으로 지난 12월 1, 2일 <사할린한인문화회관>과 <홈스크시문화회관>에서 팔도아리랑과 춤으로 두 차례 공연을 펼쳤다. 12개 지역 아리랑 단체 37명이 펼친 팔도아리랑 무대는 고려인 2, 3세와 러시아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김단장의 안무는 춘천의병아리랑, 상주아리랑, 대구아리랑, 성주아리랑, 서울아리랑, 구미아리랑, 부산아리랑, 청주아리랑, 문경아리랑 간의 조화와 가사 내용에 따른 라인 구성으로 아리랑의 같고 다름을 부각시켰다. 또한 영하 18도의 추위 속에서 연린 징용한인 유적지인 ‘이중징용자위령비’와 ‘망향의 탑’ 추모제 연출도 맡아 유종의 미를 거뒀다. 사할린 현지 공연 실무자들, 초청 쇄도(殺到) 이번 두 무대의 총연출과 마지막 작품인 <북을 울려라>에 독무로 출연으로 탁월한 연출력과 무대장악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대해 현지 언론인 사할린우리말방송, 새고려신문, 유즈노사할린스크신문, ASTB TV방송국, OTB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김단장은 첫 공연을 마치고 참관한 현지 공연단으로부터 내년 공연의 출연 의뢰를 받기도 했다. 김 단장은 이번 총연출로 아리랑의 다양성과 각 아리랑의 속성들을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이 경험을 발전시켜 해외 동포 공연 맞춤형 ‘아리랑 얼쑤!’ 팀 운영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단장은 1999년 정선에서 개최된 한민족아리랑제전 개막공연에서 김대환의 북과 최선배의 트럼펫과 함께 파격적인 춤을 선보여 아리랑을 형상화한 경험이 있다. 이후 2008년 ‘김채원의 춤’으로부터 2015년 ‘꽃이여 피어나라’(봉선사) 까지 아리랑을 전통춤으로 형상화 하는데 관심을 가졌다.(www.arirang21.net)) 김채원 약력 현-‘<아리&랑무용단> 단장 임이조선생 사사-승무, 살풀이, 교방살풀이, 삼북, 장고 송화영선생 사사-무산향, 춘앵전, 부채춤, 검무 진주검무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전수자 원광대학교 이학박사 전)국립전통예고 무용과교사, 전)동국대학교,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강의 <최근 공연> 2015-베트남호치민 기산국악제전위원회 타무락 2016-풍경소리의 찾아가는 음악회-붓다의 메아리 -대성사 산사음악회 -김채원의춤-해원의몸짓(국립민속박물관) -화선풍류(국립민속박물관) <예술감독> -2016사할린아리랑제(러시아 사할린) -2001통일아리랑축전(인사동) -2000진도아리랑축제(진도) -1999한민족아리랑제전(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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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에 더해, 나름으로 늘 가슴에 절절하게 담았던 화두를 갖고 갔기 때문에 이런 지명의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왔던 듯하다. 첫 번째 답사는 남은혜 명창의 음반 ‘북간도아리랑’을 구상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안중근의 의병정신을 주제로 한 ‘아무르아리랑’을 구상하기 위해서였고, 이번에는 항일무장 투쟁 ‘무기로서의 아리랑’ 현장을 가슴에 담는 것이 개인적인 관심사였다. 무기로서의 아리랑이란 주제를 가슴 속에 담은 것은 두 가지 계기에 의해서이다. 하나는 북한의 음악정치 원천이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아리랑으로부터라는 사실 때문이다. 또 하나는 최근 읽은 1940년대 말 미국 좌파 포크그룹 <얄마닉 싱어즈>(Almanac Singers)의 ‘무기로서의 노래(Use of Songs as a weapon)’ 동아리 활동상의 감동에서다. 이들은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사용한 피터 시거(PETE SEEGER)와 맥을 잇는 그룹으로서, 세계 저항음악을 말할 때 내 놓는 ‘무기로서의 노래’라는 슬로건을 창출한 음악가들이다. 필자의 과잉된 생각일런지는 몰라도 일제항일투쟁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아리랑 변용은 바로 이들보다 앞서 노래를 무기로 변용한 사례로 꼽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실례는 김산의 아리랑, 정율성의 아리랑, 광복군아리랑, 그리고 김일성의 아리랑 등을 그렇게 본다는 관점이다. 향수를 달래주고, 공동체적 친밀감으로 일체감을 형성시키고, 배우지 않아도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곡조에 항일적인 사설을 담은 것이다. 이는 향유하는 노래이면서 저항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7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조중접경지역 답사 내내 1930년대 말 중국 항일전선 지역으로 돌아가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구상했던 용정, 김산이 다닌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합리하, 김정숙이 김일성을 만나러 건넌 삼합, 보천보전투가 있었던 혜산진이 보이는 장백현, 뗏목아리랑이 흘렀던 압록강변에서 나운규와 김산, 그리고 정율성과 김정숙의 아리랑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독립당 출몰, 영사관 오도빠이···아리랑 아리랑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는 부를 수 없는 아리랑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르는 접경지대에서 불려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게 보게 된다. 필자가 수집한 자료 중 가장 앞서는 것은 1932년 7월 김경재가 북간도 상황의 기록 중에 조사한 다음의 사설이다. “독립당의 출몰이 자즈니/ 영사관 오도빠이 달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백두산=뉴시스】백두산 천지에서 아리랑남북공동등재를 기원하면서. 간도 용정에 있던 일본 영사관이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려고 싸이렌을 울리며 내달리는 상황을 아리랑에 각인시켰다. 일제의 오토빠이는 독립당을 추격하는 상징임을 모두에게 알림과 동시에 독립당은 계속해서 출몰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런 전승양상은 결정적으로 1941년 중경임시정부가 3대 군가의 하나로 채택한 광복군아리랑에서 진가가 발휘된다. “우리네 부모가 날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전해 주소/ 후렴-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넘겨주소/ 동실령고개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날려요.” 아리랑이 고난 극복의 추동체라는 사실을 말할 때, 떠올리는 이 광복군아리랑은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제를 밀어내고 승리한 기쁨을 앞당겨 자축하게 함으로 용전의 힘을 내게 하였다. 곡조가 밀양아리랑이니 배우지 않고도 즉석에서 합창할 수 있었으니 유용한 심리전술의 무기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강렬하게 되살아 난 아리랑 사연은 2013년 북간도답사 때 연길 정암촌에서 중국동포 음악가 김봉관 선생이 전해준 이야기이다. 요약하면 독립군 빨지산 활동상의 가슴 아픈 아리랑 사연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관동군 토벌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섭니다. 앞장에 선 ‘길 안내자’는 흰옷을 입은 조선족 노인이었습니다. 주위의 산봉우리를 둘러보던 노인은 목청을 뽑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이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도 못가서 발병난다…. 【북간도=뉴시스】2015 조중접경지역 답사 이동경로.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백두산, 백두산에서 두만강 상류~하류. 미구에 노인은 일본군인의 군와 총에 쓰러지고 포위망을 늘인 항일유격대들의 분노의 총소리는 노인이 못다 부른 아리랑의 노래 가락을 이어갔답니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널리 알려진 항일투쟁 이야기입니다. 조선 노인을 왜놈 토벌대가 들이닥쳐 빨지산을 대라고 하며 끌고 갔는데, 노인은 약속한 장소로 가서 의연하게 아리랑을 불렸다 말입니다. 그것은 신호입니다. 그러니 아리랑은 처절한 왜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일본 토벌대(討伐隊)와 독립군 간의 추격전에서 “**도 못가서···”라는 대목의 숫자는 일본 토벌대의 규모를 알리는 것이다. 암호로 쓴 것인데,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러한 사실이 간자에 의해 일제에 알려졌고, 결국 독립군을 돕던 한 노인이 이 암호를 쓰다가 희생됐다는 이야기다. 이는 중국민족학교 황유복 교수의 ‘힌 옷의 동포’라는 책 속에도 들어있어 사실로 받아 들여지는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리랑 사연도 관심 있게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북한의 음악정치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제7사 활동의 최고 전과라는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아리랑 역할을 확대, 재현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항일전선에서의 아리랑은 다양한 상황에서 확인 되는 것인데, 북한의 불후의 고전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나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 하라’, 그리고 다부작(多部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불린 아리랑이 이런 상황에서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천보와 간삼봉전투 아리랑> 【북간도=뉴시스】북한대학원대학교 2015 조중접경지역 현장답사단(단장 이우영 교수) 보천보에 홰불 올린 혁명군은 기세 높아/ 간삼봉의 싸움터엔 노래소리 드높았네/ 빨찌산녀장군이 선창 떼신 아리랑/ 봉이마다 릉선마다 뢰성타고 울렸네/ (후렴) 아리랑 스리랑/ 간삼봉에 불비 와서 아라리가 났네. 이 ‘간삼봉전투에 울려퍼진 아리랑’은 앞서 치러진 보천보전투에 이은 승전으로, 이 때 김일성과 김정숙이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당시<매일신보> 1937년 7월 9일자가 보도한 ‘토벌대와 교화 중에도 노래 부르는 여당원, 김일성 일파 공비 격퇴’에서도 추정되듯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30년대 후반기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이 침체에 빠지는 시기로 중국군벌의 도움으로 유지되던 독립투쟁이 지하화 하는 상황에서 거둔 승전보였다. 이 승전은 일본 경찰을 격퇴한 전투로 김일성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린 전투이다.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으로 발행된 자서전『세기와 더불어』에 두 전투에서 아리랑이 혁명의 동지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고, 이를 계승, 2002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1937년 6월 4일 새벽, 일방적으로 대승한 전투, 장백현에서 보이는 함경남도(현 양강도) 혜산진으로부터 20㎞ 떨어졌다는 기록을 되살려 응시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상상의 전투신이 오버랩 되었다. 빨치산 전투방식대로 방화를 통한 충격과 주재 일본경찰을 비롯한 일인 관리만을 처단하여 공포심을 극대화 했다. 이 사실을 언론에 전해주어 대서특필,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게 했다. 선전선동 활동으로 군사적 성과 이상의 정치적 성과를 거둔 전투였다. “간삼봉 전투장에 울린 <아리랑>은 혁명군의 정신적 중심을 비쳐 보이고 낙천주의를 시위하였다. 적들이 <아리랑>을 듣고 어떤 기분에 잠겼겠는가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후에 포로들이 고백하기를 그 노래를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졌고 다음 순간에는 공포에 잠기였으며 나중에는 인생 허무를 느꼈다고 하였다. 부상자들 중에는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도망병까지 났다.”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 제6권에 나오는 대목이다. 무장투쟁 사상 처음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국내 진공작전으로 평가하는 전투에서 아리랑을 불렸으니 북한이 아리랑을 ‘혁명동지’로 표현할만한 것이다. 【북간도=뉴시스】수풍댐에서 배를 타고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만나다. 우리가 손을 흔들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면 그들도 손을 흔들며 웃어 준다. ◇백두산은 없고 장백산은 있다 그런데 이런 나의 ‘1930년대 아리랑 여행’(?)에서 현실로 일깨운 것은 백두산 답사에서였다. 그 이유는 천지를 오르기 위해 세 번이나 중국에 돈을 내야함은 물론 모든 표기에서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조선족 동포들이 부르는 ‘장백산아리랑’이 조선족 스스로가 현실적으로 중국신민임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 노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심 더욱 안타까웠다. 그래서겠지만 이 노래는 1983년 전국민족단결현상모집에서 창작상을 받기도 했다. <장백산아리랑> “그 옛날 천지엔 선녀 내렸고/ 오늘은 세월 좋아 벗님들이 이 고장에 찾아 오누나/ 신선의 꽃 활짝 피는 우리네 장백산은/ 중국의 명산이요 연변의 자랑일세.” 조국(조선이나 대한민국)의 명산이 아니고, 중국의 명산이고, 연변의 자랑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백두산이 아니고 장백산이다. 만일 북한 지역에서 오른다면 장백산이 아닌 백두산임은 당연한 명칭이다. 이런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자 갑자기 1930년말 상황과 달라진 것인 없다는 생각에서 천지에 오르는 발길이 너무나 힘겨웠다. 조중접경지 7일간의 답사, ‘여행’이 아니고 ‘답사’여야 하는 이유를 실감했다. 아리랑조차도 역사와 현실적 해석을 달리해야 하고, 산에 오름이 분명 여행이고 등산임에도 여행이 아닌 답사임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인내를 필요로 할 듯하다. 중국의 역사와 현재, 이곳에서 만나는 조선족이라는 중국신민들, 그리고 멀리서만 볼 수밖에 없는 북한이 중첩된 곳이기에, 이를 어떻게 풀어 낼 것인지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답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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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 등록 2015-02-16 16:19:52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위령제를 올렸다. 유일한 20대 단원 송미진씨가 당시 위안부 숙소 앞에서 오열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조국의 아리랑은 나의 영혼이자 블루스, 내 몸 안의 DNA와 같다.” 교포2세 가수 아라리 에이치, 박영일(新井英一)이 한 말이다. 1994년 발표한 <청하아리랑>(清河への道~48番)이 주목을 받아 1995년 일본 레코드 상을 수상했고, tbc TV 10시 메인뉴스 테마뮤직으로 1년간 방송되었다. <청하 아리랑>은 그가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청하군(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을 방문한 뒤 작사·작곡한 작품이다. 교포2세로 차별을 받고 미군 기지에서 이국인 취급을 받은 서러움을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나는 간다”라고 강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1950년부터 후쿠오카 이와쿠니 미군기지에서 접시닦이를 하다 미국행을 한 후 정체성을 지닌 노래를 해야한다는 강렬함에 부르게 된 노래다. “아리랑은 특별한 고난을 겪은 이 만이 부르는 특권을 가진 노래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기 나름의 고난을 가진 사람,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이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하게 하는 힘을 가진 노래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의 메타포(metaphor)로서의 아리랑은 반드시 조선이라는 공간이나 조선인이라고 하는 민족에 한정되어 있지 않은 보편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드라마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리소스(財源)인 것이다.” 아리랑을 연구한 일본 학자가 쓴 글의 일부이다. ‘고난의 메타포’라고 했다. 이어 교표2세들의 아리랑을 살펴본다. 바로 이들의 부친 대부분은 징용에 끌려왔다 잔류한 이들이다. 백룡의 <아리랑의 노래>는 아마도 동포2세들이 공통으로 갖는 아리랑의 정서일 것이다. “술을 드신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향의 멜로디 아리랑의 노래/ 그 무엇을 그리며 부르시는 걸까/ 그 때의 현해탄 아니면 어릴 적 고향산하/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네.” 호타루 아리랑 <특공대의 노래> 붉은 피가 샘솟는 요카레노(특공대의)/ 일곱 개의 제복단추 아침 해에 빛난다/ 오늘도 비상한다 가노야의 창공에/ 큰 희망의 부푼 구름 샘솟네 치쿠호우(筑豊) 탄광 아리랑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숱(석탄)파러 왔느냐/ 일본땅 좋다고 누가 말했냐/ 일본땅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숱 팔 때는 배고파 못살겠네/ 이 말만 하면은 몽둥이로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하고/ 감독이 겁나서 가만히 불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넘어 간다 봄 아리랑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영감이 어디로 가나?/ 아리랑 고향에는 살수가 없어/ 추운 만주로 쫓기어 간다/ 아리랑 아리랑 정처 없이/ 아리랑 국경을 넘어서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동포는 무엇을 먹나?/ 아리랑 나라는 쌀의 나라/ 아리랑 동포는 좁쌀도 없다/ 무자비한 왜놈에게 빼앗기고/ 오소리 지주에게 착취당해 이런 아리랑을 부르는 재일동포는 70여만명, 부라쿠민(部落民; 천민 후예), 오키나와인에 이은 세 번째 소수자 집단이다. 천민계급이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이었다가 부락만 남았다.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류큐인과 함께 일본 내의 대표적 소수 집단이다. 재일동포 아리랑은 이런 굴곡을 헤치고 피어난 꽃이다. 아리랑은 기존의 구비문학 또는 민요 서술의 지배 담론과는 다른 시각에서 의미체계를 구성해야 함을 일깨운다. 텍스트로서의 특정 아리랑에 대한 물음의 해답은 하나이다. 그러나 아리랑 문화로서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이다. 이 일본 속의 아리랑이 그렇다. 어찌 민요론적인 해석으로 답할 수 있는가? 역사적 전개와 맥락에서 아리랑을 조감해야 함을 실감한다. 아리랑은 전승과 창조적 계승에서 자발적이라는 사실과 역사적 지속성, 문화적 개성, 현실적 가치에서 탁월한 보편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유산과 다르다. 보편적이되 특수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오키나와로부터의 아리랑은 이런 현학을 떠나 더 높은 것이어야 함을 깨우쳐 준다. 만국진량(萬國津梁), ‘만국에 열려있는 가교’, 1458년 제작된 류큐국 종(鐘)에 세겨진 경구이다. 아리랑은 만국에 열려있고, 만국을 노래해야 한다. 그래서 만국에 통해야 한다. 만국을 위해! 누치토타가라! 생명 이상의 존귀함은 없다! 이 귀한 두 경구(警句)에 아리랑이 있어야 한다. 루치난추 대대로 내려오는 이 경구는 수없는 역사적 고난을 극복하며 얻은 진리일 터, 어쩌면 우리의 피, 우리의 아라리가 담겨있을 터!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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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사회 > 사회일반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1:54 | 수정 2016-12-28 14:35:26 【오키나와=뉴시스】평화의 초석.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1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외침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오시비앵침(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돼선 안 된다고 결의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년을 맞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태인을 비롯한 정치범, 전쟁 포로 등에 대한 집단 학살)를 자행한 곳인데, 1945년 1월 27일 옛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1947년 박물관으로 개관되어 처참한 히틀러의 만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박물관 입구에 쓰인 경구(警句)가 바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 된다’이다. 오늘의 우리가 역사유적지를 답사하는 이유가 이 경구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박물관 앞에서 한 말이다. 아마도 이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이나 기념비를 세운 분들도 같은 말을 하였을 것이다. 가해든 피해든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결의의 징표가 바로 이런 박물관이고 기념표식이기에 이를 건립하며 똑같은 염원을 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참혹하고, 반인륜적(反人倫的)이었던가를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지옥 상항을 벌린 인간들이 무슨 염치로 사랑을, 평화를, 꿈을 이야기 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엄중한 질책이다. 이제 시인은 이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역사기록으로서의 서사시를 써야 한다는 자성이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깊은 자성을 우리도 이곳 오키나와에서 엄숙하게 수용해야 한다. 【오키나와=뉴시스】평화기념공원.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1944년 일본해군 ‘특설수상근무대’(特設水上勤務隊)로 끌려온 350명의 조선인 군부 우리 오빠 형들이 일본군의 교쿠사이(玉碎)로, 폭약을 묶어 미군 전차로 밀어 넣어 죽고, 미군의 폭격에 죽었고, 52명의 종군 위안부 우리 누이 언니들이 위안소에서 또한 요나구니지마 구부라항 이동 중인 배 안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이들이 바다 건너 조선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가 아리랑이었음을 확인한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아리랑을 서정민요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마다 조선인 희생자의 수는 다르다. 더욱이 오랜 세월이 지난 2010년대에 들어 동북아역사재단이 조사한 증언·공문서 등 각종문서 상세조사에 의한「일본군 위안소 지도」에 의하면 오키나와에서 채록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237명이 산출되었으니 이 섬에서의 우리 아리랑은 통곡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1970년 7월 8일, 도쿄타워 인질 사건 “나는 우치난추 도미무라 준이치다. 20세 이하 청소년은 풀어주겠다. 조선인과 우치난추는 풀어주겠다. 하지만 미국인과 일본인은 풀어주지 않겠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 천황은 사죄하라!” ‘일본인들이여, 오키나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은 도미무라 준이치(富村順一)가 칼 두 자루를 들고 도쿄타워에 들어가 미국인 선교사의 목에 대고 외친 말이다. 1930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고, 1940년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를 거부, 소학교에서 쫓겨났고, 1954년에는 나하(那覇) 형무소 폭동에 참가했으며, 1955년에 일본 본토로 건너와 각종 운동에 참가했고,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자 위령탑 건설 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다. ‘야마톤추’(일본인이라는 오키나와 말)에게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의 통한을 외친 인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외침 속에 ‘조선인’이 들어 있다. 우치난추의 통한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조선인(일본군 군부·군속·위안부)들의 통한을 일본인들에게 전한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오키나와에 건립된 <아리랑비>, <조선인 희생자위령탑> 등 건립을 추동하였다. 이 외침은 동서 1000㎞ 남북 400㎞ 해역에 160여개의 섬(유인도는 약 50개)으로 구성된 류큐(琉球) 왕국(1429년 호족세력 통합-일본·중국·조선 중개무역국)을1879년 일본 사쓰마번이 강제합병(1차 유쿠처분)시키고, 1872년 일본 야마토(大和)정부가 통합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군의 일본 본토 육상전을 저지시키는 사석(捨石戰)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1945년 종전 후에 미국 군정으로 넘기고, 1972년에는 일본에 흡수하면서도 미군기지로 남겨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오키나와=뉴시스】히메유리의 탑.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우리도 1905년 보호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제한하고 1910년 합병시켜 45년까지 식민지화 하여 수탈하고,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게 했고, 1948년 분단을 시킨 것이 일본이니 같은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강영훈 육군소장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런 지시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관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 발언이긴 하다. 그러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동정어린 발언이기 보다는 불완전한 독립을 마치 완전한 독립인 것처럼 거만함이 묻어있다. #3 ‘미안하오 유구왕자여 슬프구나’(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동야휘집』·『광해군일기』·『인조실록』·『택리지』·『연려실기술』·『열하일기』, 그리고 『담옹유고(藫翁遺藁)』같은 야담집이나 실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구국 왕자의 슬픈 죽음에 대한 것으로 김려(金鑢)가 담옹유고에 기록한 <유구왕세자외전>이 그것이다. 김려는 <미안하오, 유구 옹세자여! 정말 미안하오>(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 悲夫哀哉)라는 제목으로 애도의 글을 남겼다. 인조(1623~1649) 때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그 왕을 잡아 갔다. 이에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떠났는데 배가 표류하였다. 표착지는 제주 바닷가. 이 사실을 안 제주목사(濟州牧使) 이기빈(李其賓) 또는이란(李灤)은 배 안을 정탐하고 흰 앵무새 1쌍, 수정 알 2매(枚)의 보물과 술을 만드는 돌(酒泉石)이 있어 욕심이 났다. 4각의 돌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부으면 술이 되는 신기한 물건이고, 앵무새는 왼 발톱으로 비파를 켤 수 있다고 했고, 수정 알은 밤에 환하게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란은 왕자에게 요구했다. 이 보물들을 주면 유국구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그러자 왕자는 눈물로 호소했다.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내가 보물을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부왕께서 힘없이 붙잡혀 갇혀 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부왕을 풀어 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대부(大夫)는 이를 슬퍼하소서.” 이에 이란은 세 번씩이나 보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왕자는 눈물로 사정을 했다. 그리고 왕자는 이란의 욕심으로는 물건을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그럴 바에는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고 각오하고 혈서를 썼다. 절명시(絶命詩)인 것이다. “세 어진에 순장(殉葬)을 대속(代贖)할 이 누구인가/ 두 아들 배를 탈 때 도적이 불인(不仁)했도다/ 모래벌판 해골에 잡초가 얽히리니/ 이내 혼 고국(古國) 간들 슬퍼할 친지 있을까/ 제주도 앞 바닷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남은 원한 선명하여 만 년간 오열하리.” 기어이 이란은 보물을 빼앗으려고 배를 포위했고, 위협에서 왕저의 보물을 보호하려는 종자 한 명은 돌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에 이란의 수군은 이를 빼앗으려 달려들고 배안을 급습하여 모든 보물을 약탈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13명의 시종과 왕자까지도 죽이고 말았다. 이란은 조정에 왕자의 배가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속여 아뢰었고, 강탈한 재물을 모두 소유했다. 그러나 앵무새가 땅을 밟자마자 죽는가 하면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포된 이란은 큰 벌도 받지 않고 방면되었다. 이 사실은 많은 문인들에게 유구국의 부왕과 왕자를 애도하는 글을 쓰게 했다. 대표적인 글이 김려가 쓴 글로 <미안하오 유구왕자여>가 있다. 이 번역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슬프고 슬프구나. 유구 세자의 일이 슬프고 슬프구나. 세상에는 ‘세자가 작은 보물을 아껴 위로 임금을 맞이하지 못했고, 아래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족히 일컬을 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지나친 말이다. 이란의 형세를 보건대 보물을 주었어도 죽었고 보물을 주지 않았어도 죽었을 것이다. 똑같이 죽는 것인데 하필 보물을 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자처럼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명철한 사람이 어찌 차마 보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신이 살면 임금을 맞이할 수 있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음에랴! 그러나 세자는 반드시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릇 이란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재물을 탐내 사람을 죽인 것이 첫 번째이다. 이웃 나라와의 외교를 망가뜨린 것이 두 번째이다. 임금을 속인 것이 세 번째이다. 신하가 이 가운데 한 가지 죄라도 있으면 마땅히 형을 받아 죽어야 하거늘 당시 군자가 그 죄를 성토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내지 않아 포악한 난신(亂臣)이 편안히 복을 누리고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유구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 건너 서쪽을 향해 두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어떤 말로 대답할 것인가? 이란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충분한 일인가? 단지 다행히 유구가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 바야흐로 왜놈의 난리 때문에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로부터 유구의 통신사가 끊어졌으니, 아, 이웃 나라에 들려 줄 이야기가 아니다.” 1612년 사헌부 기록과「조선왕조실록」제27권 <광해군일기> 2월조에도 있고, 얼마나 애석했던지 지리서인「택리지」제주 대목에도 인용되어 있다. 와전되어 설화적인 요소가 보이긴 하지만 왕자의 제주 표착과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재물을 취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후 우리 조정은 유구국 표류자에 대해서는 어명으로 편의를 봐주는 조치를 취했지만, 외교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유구에 진 여러 빚 중에 가장 큰 빚이다. 바로 김려의 위의 글은 분명 이 빚을 후손들이 꼭 갚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긴 것일 것이다. 【서울=뉴시스】김연갑, 아리랑 권위자 역사에 대한 미안함을 갖는 것, 선린을 추구하는 진정한 자세이며 외교상 지성사의 전통이 아닌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는 창조되는 것이 아닌가? #4 아라리의 고려말 확산 “이 노래는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는 노래로서 지금으로부터 580년 전 고려조가 망하게 되자 이제까지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이를 비관하고 송도(松都 개성의 고려 수도)에서 두문불출 은신하다가 정선에 숨어들어 지금의 거칠현동(居七賢洞)과 백이산(伯夷山)을 소요하면서, 이제까지 섬기던 고려왕조가 그냥 망하고 말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계승될 것인지, 송도에는 험악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는 이러한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데 연유한 것이다. 본래는 ‘아라리’(我羅理)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연유된 듯하더라. 당시 몇몇의 고려유신과 함께 거칠현동과 백이산에서 고려조를 위한 충의로웠던 마음씨를 읊은 칠현들의 시는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정선아리랑비> 음기(陰記)의 일부이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발행되는 모든 자료에 유사하게 전해지는 내용이다. 고려말 상황으로 이성계의 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여 관직에 오르지 않고, 충절을 지키려 정선에 은거하며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는 신세 한탄의 시를 읊었다. ‘아라리’가 오늘의 ‘아리랑’으로 음전(音轉)되었다는 논점이 주목된다. 이상에서 제시한 네 가지 상황, 우리와 오키나와는 일본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우리가 미안함을 가져야 사실도 있으니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를 전제하여 아리랑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를 유념하여 오키나와 속의 아리랑 층위를 살펴보기로 한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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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기미양)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 등록 2015-02-06 10:35:35 | 수정 2016-12-28 14:32:33 【서울=뉴시스】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상황이라는 다층적 관계로 오키나와는 깊은 관계이다. 이 관계의 상징이 아카지마(阿嘉島)에 있는 ‘아리랑 고개’와 그 사연이다. ‘고개의 노래’라는 아리랑이 이 오키나와 외딴 섬에서 불렸다는 아픈 사연을 전해 주는 아리랑고개는 분명 세계지도에 없는 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와 사연을 우리 아리랑사(史)에 기꺼이 편입시키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에 두 진객이 함께 한다. 박주빈(7)군과 송미진(25)양이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참가단 15명의 일원인데, 박군은 5세 때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음반 프롤로그를 장식한 꼬마 소리꾼이고, 송양은 문경아리랑의 전설적 소리꾼인 고 송영철 선생의 손녀이다. 2012년 문경시가 제작한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은 명창 송옥자(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이사장과 송영철(1917~2002) 선생이 생전에 남긴 문경아리랑 녹음 자료를 수록한 CD 2장이다. 첫 트랙에 귀여운 산골 어린이의 서툰 발음으로 부른 문경아리랑을 수록, 3세대의 소리를 장식한 문경아리랑경창대회 금상 수상 어린이 명창 박군이다. 이번 참가는 외할머니인 문경아리랑보존회 총무 이경숙 여사와의 동행으로 소리를 좋아하여 선뜻 가겠다고 했다. 추진단은 소리꾼으로서의 자질을 발휘하는 것이라며 환영하였고, 11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에게 올리는 ‘헌가(獻歌) 아리랑’을 맡기로 했다. 【서울=뉴시스】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상황이라는 다층적 관계로 오키나와는 깊은 관계이다. 이 관계의 상징이 아카지마(阿嘉島)에 있는 ‘아리랑 고개’와 그 사연이다. ‘고개의 노래’라는 아리랑이 이 오키나와 외딴 섬에서 불렸다는 아픈 사연을 전해 주는 아리랑고개는 분명 세계지도에 없는 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와 사연을 우리 아리랑사(史)에 기꺼이 편입시키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에 두 진객이 함께 한다. 박주빈(7)군과 송미진(25)양이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참가단 15명의 일원인데, 박군은 5세 때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음반 프롤로그를 장식한 꼬마 소리꾼이고, 송양은 문경아리랑의 전설적 소리꾼인 고 송영철 선생의 손녀이다. www.arirang21.org 송양은 10대 때 문경의 대표적인 소리꾼이었던 할아버지(당시 27세)로부터 1943년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아 귀국한 사연과 함께 아리랑을 듣고 배웠다. 이후 성장하며 소리에 소질이 있음을 자각하고 본격적으로 할아버지 소리를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평생 산 문경읍 하초리가 작년에 ‘문경새재아리랑마을’로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되어, 송옥자 선생을 스승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소리길을 걷기로 했다. 문경에서는 격대(隔代) 소리꾼의 탄생이라며 축하해 주었다. 어머니 김순옥 여사와 동행하는데, 특별히 할아버지 유품 중에 징용 때 휴대했던 소지품을 가지고 가서 할아버지를 회고하기로 했다. 그 진품은 현장에서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번 답사에서는 할아버지 무릎에서 늘 듣고 자란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을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서 희생당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헌사할 예정이다.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은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가 주축이 되어 실재적 아리랑고개인 ‘문경새재’와 역사적 아리랑고개인 ‘아카지마아리랑고개’의 역사적 만남을 통해, 아리랑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느끼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답사이다. 이런 행사에 박군과 송양의 참여는 매우 뜻깊다 하겠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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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아리랑' 마침내 탄생, 안중근 동양평화론 현장 가다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안 의사 아리랑' 마침내 탄생, 안중근 동양평화론 현장 가다 등록 2014-07-28 07:45:00 | 수정 2016-12-28 13:07:48 【서울=뉴시스】"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쾌거 현장이다. 【서울=뉴시스】기미양 이사(아리랑학회) = 매년 해외 ‘아리랑 루트 확정’을 위한 한민족 이주사 현장 답사를 해오고 있다. 올해는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주관으로 ‘제10기 안중근 의사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에 지도위원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7월 8일부터 15일까지 7박8일 동안 러시아와 중국 동북삼성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하고 왔다. 지난해 8월 북간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올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 조·중·러의 국경지대 훈춘과 동북삼성을 중심으로 하얼빈까지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따랐다. 이 중에 핵심은 러시아 지역은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크라스키노, 중국은 훈춘 연길 하얼빈, 대련(여순)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집단거주지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최재형 정착지, 그리고 안중근 의사 의거현장인 중국 하얼빈역, 순국 장소인 뤼순 감옥은 숙연한 마음으로 답사를 했다. 모두 세계사 변혁기라는 맥락에서 수난사의 정점이고 최후를 마친 곳이라는 점에서 추모와 정신 계승이란 의무감 때문이었다. 특히 올해는 러시아 이주 150년이 되는 해이어서 더욱 뜻 깊었는데, 지난 6월18일 사단법인 고려인돕기운동본부의 초청으로 고려인 124명이 고국방문을 함께하여 러시아 150년 이주사를 되새기는 기회도 가졌다. 8월15일에는 비로비쟌에서 광복절 기념공연을 ‘아리랑’을 주제로 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는데, 미주 이주 100년 기념을 아리랑으로 했듯이 러시아 이주 150년 기념도 아리랑으로 하는 아리랑의 역사성을 되새기는 뜻 깊은 해임을 절감했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최재형의 나라 연해주 연해주에서는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을 고리로 안중근 의사와 13도 의군의 유인석 대장의 활동을 확인하는 곳이다. 이 곳을 인천에서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하여 밟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분들은 상상을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니 송구스럽기도 했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전자는 민족 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풍찬노숙을 각오하고 백두산을 넘어 간 경로가 아득하고 처참한 생각이 들어서고, 후자는 님들의 희생으로 만든 나라의 후손들이 단숨에 건너 백년역사를 단 며칠 만에 답사할 수 있는 세상임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연해주는 해삼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듯이 이주의 루트가 다양했다. 비행장에서 버스로 1시간 이동으로 다다른 신한촌(유적비)은 1863년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형성되어 많은 후손을 키워 낸 곳이지만 일제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처참한 박해로 목숨을 묻은 곳이다. 그리고 드디어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그 이름 ‘신한촌’으로 역사 속에 각인시켜 유적비를 남긴 곳이다. 그나마 이 유적비조차도 1999년에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세운 것이다. 비문에 새겨져 있듯 13도 의군 창설, 1919년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 수립으로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운 곳이다. 지난해도 들렀던 곳이지만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 기지의 중요한 거점으로 항일역사가 응축된 역사현장인 것이다.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본 역사적 기억은, 조국에서 들어오는 이들과 중국에서 들어오는 한인들이 약속지점으로 삼은 뜻 깊은 곳이다. 물론 이 ‘약속’은 오늘 같은 시간 단위가 아니라 길게는 계절, 짧게는 상순·하순 정도였으니 약속 자체가 곧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고려인들에게는 눈물과 웃음이 다 마른 이들이 뜬 눈으로 서성였던 처소였다. 해외 한인 유적지 가운데 만남의 장소로 중국 연변 일송정과 함께 매우 특별한 유적지이다. 이 독수리전망대를 내려와 혁명광장으로 이동하여 ‘혁명의불’을 찾았다. 이 기념 불꽃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도 있어 사회주의 국가의 상징이 되었는데, 나는 이번에 다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 찾았다. 그것은 ‘아리랑의 불’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뉴시스】연추 하리마을-연해주에서는 1905~1908년 두만강 대안인 연추지역(크라스키노)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지난해에 이은 10월1일 ‘아리랑의 날’을 기념하여 금년 9월 중순 쯤 태백산에서 채화하여 전국 지회로 순회하여 모시는 ‘아리랑의 불’을 준비하고 있다. 이곳의 불은 혁명의 기념물이지만 우리는 ‘아리랑의 불멸성’을 기리려는 것이다. 이 ‘혁명의 불’은 가스로써 태풍에도 꺼지지 않게 기술적 완벽성을 갖췄다는데 해군이 관리하고 있다. 기술적인 설명은 찾을 수가 없었지만 개념정도는 확인하여서 소득이 있었다. ◇라즈돌노예 역, 치르치크 아리랑 9일 전용버스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던 중 라즈돌노예 역사를 들렀다. 1937년 9월의 강제이주를 증언해 주는 곳이다. 사할린 지역에 사는 동포까지 불러온 이들을 이곳 역에서 태워 출발한 이주의 현장이다. 그날의 절망과 고난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난 번 방문에서도 생각했지만, 이곳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의 가혹한 여정을 아리랑으로 서사화한 작품을 만들어 교민들과 남북한이 함께 하는 공연을 정례화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임에야 이런 역사적 현장을 보듬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신허(한인 최초의 마을)를 경유하여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유인석 선생 등의 활동이 집약된 대표적인 연추(Ianchikhe) 마을을 보았다. 연추하(延秋河)가 흐르고 있고, 상·중·하 세 마을이 보였다. 이 마을들은 북한과 러시아 국경인 두만강과 가까워 일대 한인마을 중 가장 많은 한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진 연해주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와 함께 대표적인 고려인 마을이다. 특히 연추는 안중근 의사가 최초로 의병을 창설하기 위해 찾은 해외 의병사의 메카이다. 의병들이 조국과 중국의 훈춘, 북간도 등을 오갈 때면 반드시 거쳤던 곳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1908년 봄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등 한인 지도자들과 동의회(同議會)를 조직한 의병 본부지가 있었던 곳이니 중요한 유적지이다. 당시 많은 고려인 마을이 있었다는 곳이지만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러시아 극동식 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연해주 남쪽지역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를 중심으로 남북 수십리, 동서 사오리를 흐르는 지신허강 주변은 아름다운 곳이다. 상상 만으로도 고려인들이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크라스키노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를 마주했다. 연해주에서 버스로 4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러시아·북한 국경지역인 추카노프카라는 마을로 두만강이 멀지 않은 민간인통제구역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2월 동료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를 결성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맹세하며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던 역사의 현장이다. 비문을 읽고 해설을 들으며 격분과 함께, 의혈의 안 의사 모습을 그리며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역사를 뜨겁게 만나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비에 새겨진 글이 선연한 핏빛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직계 조상 기정진, 기우만, 기산도, 기삼연님들의 의병활동이 안 의사의 활동과 오버랩 되어 자긍심을 맛보기도 했다. 크라스키노 국경 세관에서 러시아 출국수속을 마치고 국경을 넘고 다시 장영자 세관을 거쳐 훈춘으로 들어갔다. 조·중 경계선인 도문시에서 대동강 너머 북한 산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민족사의 비감을 오늘에 되짚어 보는 곳이었다. 일정을 위해 쉬지 않고 봉오동 전투 승전지를 탐방하고 다시 연길로 이동하여 항일유적지를 탐방했다. ◇코레아 우라! 【서울=뉴시스】안중근의사기념관앞에서.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주최한 제10기 안중근 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 돈화에서 하얼빈행 기차를 탔다. 장장 8시간, 기내숙박(6인1실)으로 하얼빈 평방역에 도착했다. 먼저 찾은 곳이 731부대(죄증박물관)이다. 끔직한 생체시험과 화학실험을 자행한 일제의 잔혹상을 상징하는 곳이다. 건물도, 비치된 유물도, 모두 일그러진 고통스런 얼굴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나 만의 느낌일까? 오래 있기가 싫었다. 일제의 망령이 깊게 전해져 안 의사 유적을 찾는 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드디어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도착했다. 국내의 보도를 통해 본 것보다 위용이 느껴져 뿌듯했다. 1909년 10월26일의 장거를 기념하는 뜻 깊은 기념관이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삼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죽노니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원한이 없겠노라”는 것이 안 의사의 유언이었고, 소망이었다. 이 문구는 우리 모두를 압도했다. 이 앞에서 누군들 떳떳할 수 있겠는가? 단지 마음을 다듬어 역사 만이라도 바로 보는 자세를 갖출 뿐이었다. 교과서의 흑백사진과 몇 년 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의 모습을 떠올랐다. 1907년 연해주에 도착한 안 의사는 단지동맹에서 맹세한대로 3년 내에 이토를 처단하리라고 다짐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1909년 10월26일 이토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동지들과 치밀한 준비를 했다. 하얼빈역에서의 거사는 안 의사가 맡기로 했다. 드디어 운명의 순간, 예상대로 이토는 기내에서 회담을 마치고 하얼빈 총영사, 궁내대신 비서관, 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의장대를 향해 내려섰다. 순간 사열대와 환영군중의 뒤편에서 숨죽이고 있던 안 의사의 권총이 국모시해 국권침탈 국적(國賊) 이토(伊藤博文)를 향해 불을 뿜었다. 세 번의 총성이 울렸다. 이어 이토는 물론 주변의 몇 명이 함께 비틀거렸다. 총성으로 대열이 흩어지고 급기야 러시아 의장대와 호위대가 안 의사를 덮치듯 달려들었다. 이에 안 의사는 당당하게 마주하며 외쳤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총성보다 더 크고 장렬하게 ‘대한만세, 대한만세’를 외친 것이다. 대한국(大韓國) 의병(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서의 당당한 군사활동이었다. 안 의사가 총을 쏜 장소에는 ‘삼각형’, 이토가 코코프체프 쪽으로 쓰러진 자리에는 ‘사각형’ 표시가 되어 있다. 위대한 대한국 의병대장 거사 현장이 이 두 가지 표시로만 증거하니 소중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인류문명 발상지가 한 점 샘(泉)으로만 증거하듯, 위대한 동양평화 정신 발양지도 이 두 점으로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뉴시스】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강월화 관장(왼쪽)에게 문경아리랑, 구동존이 아리랑, 의병 아리랑, 남은혜의 아리랑 음반을 기증했다. 강 관장은 조선민족예술관 2층 안중근 의사 기념실이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이전하기까지 모든 책임을 맡았다. 2014년 첫 번째 아리랑로드 확정을 위한 하얼빈 지역 답사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의 현장 답사였다. 이제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기념 제1호 아리랑 음반, ‘역사적 기억의 전승, 의병아리랑’ 음반을 제작하며 미진했던 중국과 러시아 지역 의병유적지 답사에 대한 숙제를 마쳤다. 그리고 완성을 미룬 ‘안 의사 아리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얼쑤 아라리야 (후렴) 왜놈과는 하늘 아래 살 수가 없어 팔걷고 뛰어나와 의병되었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 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다섯발 내디뎌 도적 쓰러트리니 【서울=뉴시스】단지동맹비.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기념,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설치했다. 동양평화 대역사 시작하였네 서릿발 칼날같은 저 용맹 아무르 흑룡강에 흐르고 흘러 아므르 흑룍강 흐르고 흘러 동해바다 향해 아리아리 아라리야.’ 나는 이 ‘안 의사 아리랑’으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가슴에 담았다. 소란함 속에서 아리랑을 읊조린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이번 귀한 기회를 준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감사드린다. 동시에 소중한 담론을 공유하게 해준 참여자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kibada@naver.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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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리랑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된 정은하 명창 ( 최종민)정은하는 이창배 · 안비취를 사사하고 경기소리를 이수한 명창인데 대구아리랑축제를 금년 8회째 했고 영천에서 하고 있는 영남아리랑축제와 전국아리랑경창대회를 4회째 하고 있다. 사단법인 영남민요·아리랑본존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작년에는 영남민요·아리랑심포지움-<아리랑의 세계화>-라는 학술대회를 했는데 초청된 학자들은 성병희, 이보형, 권오성, 최종민, 서한범, 최헌, 장익선(중국연변대학) 등이었다. 특별한 것은 학술대회의 경비 1000만원을 정은하 본인이 부담하였다는 것이다. 영천에서 하고 있는 영남아리랑축제도 2007년에 본인이 2000만원을 내고 도의 지원을 얻어 시작했던 대회이다. 그 다음해인 2008년에도 본인이 1000만원을 부담하고 시와 도의 지원을 받아 행사를 했는데 2009년에는 경상북도에서 3000만원 영천시에서 3000만원을 지원해 주어 6000만원으로 전국아리랑경창대회 등의 아리랑축제 행사를 하고 있다. 8년째 하고 있는 대구아리랑 축제는 나운규가 영화로 만들었던 ‘아리랑’을 각색하여 소리극으로 만들어 공연하는 행사라고 한다. 연극적인 부분은 연극인들이 출연하고 사이사이에 아리랑을 부르게 하는데 정은하의 문하생들이 많은 부분을 하지만 특별한 아리랑은 그 아리랑의 보유자들이 출연하여 부르게 하고 있다. 진도아리랑 같으면 진도의 강송대(전남지방문화재보유자)가 출연하여 부르게 하고 정선아리랑 같으면 역시 보유자인 김길자가 출연하여 부르게 한다. 중요무형문화재인 예천통명농요의 보유자들도 출연하여 수준 높은 민요를 부르게 하고 있다.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이런 소리극 ‘아리랑’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큰일 했다고 칭찬할 만한 일이다. 아리랑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하고 전국아리랑경창대회를 매년하고 ‘아리랑’을 소리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일을 하고 있는가? 아리랑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그녀가 아닌가? 정은하는 1956년 경북영천에서 남자6명에 여자 하나인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자오빠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다분히 남자 같은 분위기가 있는 여자가 되었다. 무엇을 하면 적극적으로 하고 웬만한 것은 겁 없이 막 해 내는 기질을 갖게 되었다. 영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갑자기 민요를 하고 싶어졌는데 오빠들이나 부모 누구도 그런 그녀를 용납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은하는 평택 큰 오빠 집에 가 있으면서 오빠 몰래 이른 시간 김밥 집에 가서 김밥 말아주는 일을 하고 모심을 때에는 마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모를 심기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리고 민요를 배우기 위해 서울로 갔다. 당시 kbs라디오에서는 매주 한 번씩 민요백일장이라는 프로를 공개방송으로 했었는데 나 최종민은 안비취명창과 함께 심사를 맡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키가 훤칠하게 큰 정은하가 나타났다. 나에게 찾아 온 그녀는 다짜고짜 본인은 무슨 일을 하면서라도 꼭 민요를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즉석에서 이창배선생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며 거기 가 보라고 했는데 그 길로 최고의 민요사범 이창배를 찾아가 민요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정은하는 이창배 선생님 학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민요의 기초를 탄탄하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창배선생님이 ‘81년인가 중풍으로 쓰러져 오래지 않아 작고하셨기 때문에 안비취선생님에게로 옮겨 ’97년 돌아가실 때까지 왕래하며 계속 공부하였다. 정은하가 대구로 내려온 것은 ‘85년도였다. 처음에는 유종구선생에게 시조를 배우러 다녔다. 시조 뿐 아니라 가사도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니까 그곳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돈을 빌려 주며 민요학원을 차려 주었다. 1년만에 돈을 모아 빌린 돈을 갚고 향촌동에 연구소를 차렸다. 처음에는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을 주로 가르쳤다. 카톨릭 복지관에 가서 강습을 하고 무료봉사로 공연도 해 주며 민요활동을 했다. ’86년 아시안게임을 하는 해에 대구국악협회에 들어가서 민요분과위원장이 되어 협회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지역발전을 위한 국악행사에 대한 눈을 뜨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구·경북지역에서 민요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공연해 주기도 하고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공무원들도 알게 되고 각 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을 많이 알게 됐다. 자연히 정은하의 활동범위도 넓어졌다. ‘92년에는 대구예술대학에 나가 민요를 가르치게 되었다. ’93년 겨울부터는 경북교원연수원의 민요강사가 되어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쳐 민요전공으로 경북예고를 보내기도 하고 ‘96년부터 대구교육대학에 필수과목으로 민요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영남대학교나 경북대학교 동국대학교, 대구예술대학 등에 본인이 가르친 학생들을 민요전공을 진학시키는 일도 했다. 그래서 대구출신의 민요전공자 상당수가 정은하의 제자들이다. 정은하는 대구에서 열심히 민요를 가르치고 봉사하면서 본인이 열정을 쏟을 또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남의 토속민요였다. ‘90년쯤에 정은하는 예천의 통명농요 보유자 이상휴를 찾아갔다. 그 소리를 들어보고 너무 좋아서 그 동네에 가서 며칠씩 묵으면서 소리를 배웠다. 그런 식으로 상주, 영양, 수비, 안동 등 경북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민요를 채집하고 배우고 하는 일을 거듭했다. 그렇게 공부한 것을 모아서 민요발표회도 여러 번 했다. 2001과 2002년에는 정은하 영남민요 창작발표회도 했다. 말이 발표회지 직접 해 보면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민요를 채집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악보로 만들고 관현악 반주로 노래 부르게 하려면 단계마다 돈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 영남민요를 발굴하고 창작발표회까지 하는데 자비가 거의 2억원 정도 들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여 모은 돈은 대부분 그런 작업에 다 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그 처럼 어렵게 하던 정은하의 발표회도 이제는 훨씬 쉽게 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었다. 본인이 만든 사단법인체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의 지회가 13개나 되기 때문에 각지회에서 입장권 10000원짜리 100매씩만 팔아도 1000만원이 넘는 돈이 모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본인의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표값만 받아서 행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2002년에는 상주대회에서 대통령상도 받았고 경기민요는 안비취에게 이수받았고 대구아리랑도 철저히 조사하여 전모를 밝힐 수 있게 됐고 대구아리랑축제나 영천의 영남아리랑축제도 잘 돼가고 있어서 정은하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하지 못한 것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영남민요·아리랑 박물관을 건립하는 일이다. 정은하는 민요의 불모지 대구·경북에 많은 것을 이루어낸 것처럼 멀지 않아 영남민요·아리랑박물관도 반드시 만들어 낼 것이라 믿고 그 동안 이룬 성과에 대해 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