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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리랑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된 정은하 명창 ( 최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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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칼럼] 아리랑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된 정은하 명창 ( 최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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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상주ㅈ너국민요경창대회에서 대통령상 수상

 

 

정은하는 이창배 · 안비취를 사사하고 경기소리를 이수한 명창인데 대구아리랑축제를 금년 8회째 했고 영천에서 하고 있는 영남아리랑축제와 전국아리랑경창대회를 4회째 하고 있다. 사단법인 영남민요·아리랑본존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작년에는 영남민요·아리랑심포지움-<아리랑의 세계화>-라는 학술대회를 했는데 초청된 학자들은 성병희, 이보형, 권오성, 최종민, 서한범, 최헌, 장익선(중국연변대학) 등이었다. 특별한 것은 학술대회의 경비 1000만원을 정은하 본인이 부담하였다는 것이다. 영천에서 하고 있는 영남아리랑축제도 2007년에 본인이 2000만원을 내고 도의 지원을 얻어 시작했던 대회이다. 그 다음해인 2008년에도 본인이 1000만원을 부담하고 시와 도의 지원을 받아 행사를 했는데 2009년에는 경상북도에서 3000만원 영천시에서 3000만원을 지원해 주어 6000만원으로 전국아리랑경창대회 등의 아리랑축제 행사를 하고 있다. 8년째 하고 있는 대구아리랑 축제는 나운규가 영화로 만들었던 ‘아리랑’을 각색하여 소리극으로 만들어 공연하는 행사라고 한다. 연극적인 부분은 연극인들이 출연하고 사이사이에 아리랑을 부르게 하는데 정은하의 문하생들이 많은 부분을 하지만 특별한 아리랑은 그 아리랑의 보유자들이 출연하여 부르게 하고 있다. 진도아리랑 같으면 진도의 강송대(전남지방문화재보유자)가 출연하여 부르게 하고 정선아리랑 같으면 역시 보유자인 김길자가 출연하여 부르게 한다. 중요무형문화재인 예천통명농요의 보유자들도 출연하여 수준 높은 민요를 부르게 하고 있다.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이런 소리극 ‘아리랑’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큰일 했다고 칭찬할 만한 일이다. 아리랑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하고 전국아리랑경창대회를 매년하고 ‘아리랑’을 소리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일을 하고 있는가? 아리랑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그녀가 아닌가?


정은하는 1956년 경북영천에서 남자6명에 여자 하나인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자오빠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다분히 남자 같은 분위기가 있는 여자가 되었다. 무엇을 하면 적극적으로 하고 웬만한 것은 겁 없이 막 해 내는 기질을 갖게 되었다. 영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갑자기 민요를 하고 싶어졌는데 오빠들이나 부모 누구도 그런 그녀를 용납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은하는 평택 큰 오빠 집에 가 있으면서 오빠 몰래 이른 시간 김밥 집에 가서 김밥 말아주는 일을 하고 모심을 때에는 마을 아주머니들과 함께 모를 심기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리고 민요를 배우기 위해 서울로 갔다. 당시 kbs라디오에서는 매주 한 번씩 민요백일장이라는 프로를 공개방송으로 했었는데 나 최종민은 안비취명창과 함께 심사를 맡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키가 훤칠하게 큰 정은하가 나타났다. 나에게 찾아 온 그녀는 다짜고짜 본인은 무슨 일을 하면서라도 꼭 민요를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즉석에서 이창배선생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며 거기 가 보라고 했는데 그 길로 최고의 민요사범 이창배를 찾아가 민요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정은하는 이창배 선생님 학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민요의 기초를 탄탄하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창배선생님이 ‘81년인가 중풍으로 쓰러져 오래지 않아 작고하셨기 때문에 안비취선생님에게로 옮겨 ’97년 돌아가실 때까지 왕래하며 계속 공부하였다.


정은하가 대구로 내려온 것은 ‘85년도였다. 처음에는 유종구선생에게 시조를 배우러 다녔다. 시조 뿐 아니라 가사도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니까 그곳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돈을 빌려 주며 민요학원을 차려 주었다. 1년만에 돈을 모아 빌린 돈을 갚고 향촌동에 연구소를 차렸다. 처음에는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을 주로 가르쳤다. 카톨릭 복지관에 가서 강습을 하고 무료봉사로 공연도 해 주며 민요활동을 했다. ’86년 아시안게임을 하는 해에 대구국악협회에 들어가서 민요분과위원장이 되어 협회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지역발전을 위한 국악행사에 대한 눈을 뜨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구·경북지역에서 민요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공연해 주기도 하고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공무원들도 알게 되고 각 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을 많이 알게 됐다. 자연히 정은하의 활동범위도 넓어졌다. ‘92년에는 대구예술대학에 나가 민요를 가르치게 되었다. ’93년 겨울부터는 경북교원연수원의 민요강사가 되어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쳐 민요전공으로 경북예고를 보내기도 하고 ‘96년부터 대구교육대학에 필수과목으로 민요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영남대학교나 경북대학교 동국대학교, 대구예술대학 등에 본인이 가르친 학생들을 민요전공을 진학시키는 일도 했다. 그래서 대구출신의 민요전공자 상당수가 정은하의 제자들이다.


정은하는 대구에서 열심히 민요를 가르치고 봉사하면서 본인이 열정을 쏟을 또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남의 토속민요였다. ‘90년쯤에 정은하는 예천의 통명농요 보유자 이상휴를 찾아갔다. 그 소리를 들어보고 너무 좋아서 그 동네에 가서 며칠씩 묵으면서 소리를 배웠다. 그런 식으로 상주, 영양, 수비, 안동 등 경북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민요를 채집하고 배우고 하는 일을 거듭했다. 그렇게 공부한 것을 모아서 민요발표회도 여러 번 했다. 2001과 2002년에는 정은하 영남민요 창작발표회도 했다. 말이 발표회지 직접 해 보면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민요를 채집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악보로 만들고 관현악 반주로 노래 부르게 하려면 단계마다 돈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 영남민요를 발굴하고 창작발표회까지 하는데 자비가 거의 2억원 정도 들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여 모은 돈은 대부분 그런 작업에 다 들어가는 꼴이 되었다. 그 처럼 어렵게 하던 정은하의 발표회도 이제는 훨씬 쉽게 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었다. 본인이 만든 사단법인체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의 지회가 13개나 되기 때문에 각지회에서 입장권 10000원짜리 100매씩만 팔아도 1000만원이 넘는 돈이 모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본인의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표값만 받아서 행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2002년에는 상주대회에서 대통령상도 받았고 경기민요는 안비취에게 이수받았고 대구아리랑도 철저히 조사하여 전모를 밝힐 수 있게 됐고 대구아리랑축제나 영천의 영남아리랑축제도 잘 돼가고 있어서 정은하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하지 못한 것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영남민요·아리랑 박물관을 건립하는 일이다. 정은하는 민요의 불모지 대구·경북에 많은 것을 이루어낸 것처럼 멀지 않아 영남민요·아리랑박물관도 반드시 만들어 낼 것이라 믿고 그 동안 이룬 성과에 대해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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