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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할린 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리뷰]사할린 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 아리랑으로 함께하지 못한 합동무대남북 아리랑 대합창 불발, 사연은? 등록 2018-08-27 17:08:32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서도소리 【사할린=뉴시스】 기미양 연구이사 =지난 6월 한국을 방문한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으로부터 남북러합동공연이 26년 만에 러시아 사할린에서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공식 행사명은 '광복 73주년,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 해방 73주년 기념 우정의 날'이다.사할린 동포 강제징용 80주년을 기리기 위해 사할린주한인협회가 주최하는 남북러합동공연 행사다. 이달 14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을 경유하는 길목에서 북측 통일음악단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어 더욱 가슴이 설레었다. 도착하자마자 사할린한국교육원을 방문해 아리랑 음반을 전달하고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연습실로 달려갔다. 연습에 여념이 없는 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을 만나 본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18일 오전 10시 해방절을 기리는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조선인을 해방시킨 영웅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영예광장 성화 헌화식에 참여하였다.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과 사할린한인협회 림종환 회장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일음악단과 러시아 원동 고려인통일연합회 리규률 위원장도 함께 참여하는 모습을 가까이 보게 되어 반가웠다. 국립남도국악원 판굿 헌화식을 마치고 '러시아는 나의 역사 박물관' 앞 광장 특설무대로 이동하였다. 역사박물관 앞 테라스에는 새고려신문사 이예식 기자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역사로 남은 한인 1세들의 애환을 담은 사진들이다. 우리나라 국립국악원 소속 유지숙 명창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공연 내용을 확인하였다. 1부에서 북한 지명이 들어간 서도소리, 2부에서는 아리랑과 긴아리랑을 부를 것이고, 피날레는 아리랑을 남북대합창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프로그램 안내서를 찾을 수 없어 북측 공연단이 무슨 노래를 부를지 궁금해졌다.광장에는 인천, 안산, 김포, 양주 등으로 영구 귀국한 사할린1세들이 나와 있었다. 사할린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무더운 여름 두 달 동안 머무르고 다시 한국으로 돌어간다. 한국에서 매년 사할린한마음대회가 이루어지는 음성 행사장에서 만난 사할린동포들을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반갑게 맞이하는 홈스크한인협회 박영순 회장의 손에 이끌려 홈스크 부스에 오니 대형 비빔밥축제 이벤트를 홍보하고 있다. 이날 소수민족들이 준비한 여러 부스 중 가장 많은 관객들이 긴줄을 서서 대형 비빔밥 그릇에서 퍼주는 컵밥을 받아 먹었다.드디어 2018 사할린 광복절 행사의 첫 막이 열렸다. 주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관 사할린출장소 황명희 소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 내용을 일부 발췌해 대독했다. 사할린주 안톤 월로슈코 제1부지사,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시장 대행 나탈리야 쿠프리나, 사할린주 두마 안드레이 하포츠킨 의장, 사할린주 민족연합회 마이야 키릴로와 등이 축사를 했다. 사할린다민족협회 아코뺜 싸르키스 조리코비츠 회장은 "사할린에서 남과 북이 만나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하나의 민족이다"고 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 사전 리허설을 보고 직관적으로 나온 멘트라고 보여진다. 그는 이미 아리랑을 통한 남북교류의 핵심을 알고 있는 것이다. 국립남도국악원 진도북춤 남측에서는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북측에서는 삼지연악단과 모란봉악단 단원으로 구성된 통일음악단, 사할린동포의 아리랑무용단,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이 출현했다. 국립남도국악원 기악단과 무용단과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길놀이로 오프닝 세리머니를 했다. 공연 첫 무대에는 윤민자, 강팔용 사할린 동포가수가 강원도아리랑을 불렀다. 이어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반주로 유지숙, 김민경 명창이 구성진 서도소리로 흥을 돋우고, 마당에서는 국립남도국악원의 판굿과 진도북춤이 5000여 관객을 신명나게 했다.통일음악단(단장 조승권)은 '민족끼리'라는 주제를 내세웠다. 힘찬 전주곡을 울리며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노래를 불렀고 '황성옛터'는 1세 어르신들이 애창곡으로 여가수가 구수하게 불렀다. '아리랑', '사랑의 깃발', '군밤타령', '무정한 그 사람' 외에도 12곡 이상과 러시아의 유명곡들 '카추샤', '사랑의 메아리', '내잘못일 게 뭐야' 등은 러시아어로도 불러 현지 동포들과 러시아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이날 관객 중에는 북조선 사할린 파견 근로자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북한의 해외노동자 파견이 확대되어 사할린에는 약 3000명 내외 북한 노동자들이 있다. 북한은 1950년대 후반 최초로 파견됐던 노동자들이 사할린에 장기체류하게 되자 이들을 귀환시키려 시도, 소련 외교부와 지방당국에 지속적으로 협조를 요청하고 노동자들을 개별 면담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북한 노동자 다수가 사할린에 정착하게 된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사할린은 러시아 내 타 지역보다 개별적 일거리가 많으며 노동조건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북한에서 파견 지역으로 인기가 높다. 또한 사할린은 한인이나 조선족이 많아서 러시아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개별적 일자리 연결과 자국 언어 소통은 사할린의 북한노동자들이 북한의 감시체계 속에서도 내부인뿐 아니라 현지인 및 한인·조선족 등 재외 한인들과도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즉, 사할린의 북한 노동자들은 역사적, 지리적, 인적, 경제적 조건 등이 다른 러시아 지역들에 비해 유리한 정서적 혜택을 누려왔다. 그러나 파견 노동자들은 임금의 대부분을 북한 당국에 직·간접적 방법으로 강제 상납해야하는 실정에서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이 북한 통일음악단이 사할린에서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게 되는 원인의 일부라고 본다. 사할린동포들이 준비한 아리랑무용단의 초혼무 '사할린아리랑'이 2부에서 펼쳐졌는데, 윤민자 명창의 소리를 따라서 아리랑무용을 새로이 선보이게 되었다. 사할린 1세대의 고통을 담은 사할린아리랑을 주제로 한 창작무는 이 행사를 주최한 사할린주한인협회의 취지에 맞는 작품이다. 이 사할린아리랑은 제1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처음으로 무대화되어 전국아리랑전승자협회가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과 전국 지역 아리랑제 무대에서 사할린 동포 윤민자와 원명운에 의해 불려지게 되다가 사할린에서 동포들이 처음으로 남북러합동공연에서 무대화하였다. 다음 사할린아리랑은 현지 동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해외아리랑제의 거점으로 정하게 된 배경이다. 일부 사할린 동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우리의 노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남화태 징용왔네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 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정치 개방후 햇빛은 밝고/ 우리의 살림엔 경사가 많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정태식 작, 1992년) 이 사할린아리랑은 사할린 한인들이 겪었던 고난을 담고 있는 망향의 노래이다. 국적이 조선-일본-무국적-소련-러시아로 5번이나 바뀌는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북한에 가서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도 있다. 그래서 현재는 한 가족이 남과 북에서 각각 살고 있는 셈이 된다. 남과 북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해외동포는 사할린 동포집단이다. 국내 27지역에 사할린 동포 1세가 영구 귀국하여 살고 있다. 이는 외세에 의한 이중징용에 이은, 자국에 의한 또 하나의 이산이다. 이러한 실정은 아리랑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이처럼 복잡한 민족 모순이 대치하고 있는 사할린이어서 남북합동공연이 이루어질 수 여건이 된다고 본다.이어 북측 통일음악단은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조국 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찬양하는 '사랑의 빛발' '김정은 장군' 등 선전 노래를 불렀다. 이번 행사는 1992년 남북의 통일예술축제 이후 26년 만에 이뤄지는 남북 합동공연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공연장에서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게 되어 걱정이 앞섰다. 드디어 기다리던 북한아리랑도 들을 수 있었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 섣달에도 꽃만 핀다/ 달뜨고 별뜨고 해도 뜨네.'벨칸토 창법으로 부른 아리랑은 러시아 동포들에게 익숙한 선율이어서인지 함께 따라 부르면서 박수를 많이 쳤다. 아리랑에 이어 북측 공연단은 러시아 대중가요를 러시아어로 불러주는 열정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북한 전통 민요와 장구춤과 부채춤을 선사했고 특히 러시아어로 부른 대중가요 공연에는 공연장 앞 스테이지에 나가서 댄스로 화답했다. 아쉽게도 사할린동포들은 남한 공연단보다는 북한 공연단에 더 많은 박수를 보냈다. 북한에서 애창하는 '휘파람'도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어 사할린 어린이들의 아리랑 노래에 부채춤을 선보이자 많은 박수를 받았다. 북한과 사할린의 아리랑 향유를 통해 끈끈한 아리랑민족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첫막에서 오프닝으로 사할린팀이 나와서 빠른 템포의 강원도아리랑을 선사했다. 창작무 선율이 사할린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이었다.그러나 남북예술단은 전날 리허설에서 남북대합창 '아리랑'을 마지막 곡으로 정했으나 현장에서는 이뤄지지 못해서 아쉬웠다. 관객들이 눈시울을 적시면서 북한 공연단이 부르는 아리랑과 '다시 만나요'라는 곡을 따라 부르는 대합창으로 막을 내렸다. 정작 유지숙 명창이 준비한 아리랑은 다음날 사할린주의 대표적인 탄광촌이었던 토마리 마을 공연에서 불려졌다. 국립남도국악원 에트노스예술학교 길놀이 북측 최철호 통일음악단장은 무대를 마친 뒤 "동포들의 축제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공연이기 때문에 남측과 곡들을 협의할 필요는 없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행사 주최 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돌아와 보니 행사 주최 측은 행사가 끝난 뒤 국립국악원에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하는 보도가 나왔다. 사할린에서 해외동포들과 함께 하는 공연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대합창하는 광경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갔지만 너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피날레에 왜 남한 가수는 안 나오느냐고 동포들이 나에게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에서는 아리랑대합창을 보여주었지만, 본 공연에서는 갑자기 사회체제 선전노래가 나와서 불발이 되었다고···. 1992년 통일예술축제에서 남북 대중가수들이 사할린에서 공연한 이후 26년 만에 만나게 되어 누구나 이번 남북합동공연에 대한 기대도 컸다. 【사할린=새고려신문/뉴시스】 영예광장 성화 헌화식.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을 비롯한 사할린 한인단체 관계자, 북측 통일음악단 대표, 그리고 필자가 참가했다. 20일,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은 다음 사할린아리랑제에 다시 한번 사할린에서 북한공연단과 함께 남북합동공연을 이루어내자고 나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돌아오는 21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북측 통일예술단을 다시 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오고 가는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같은 시각 사할린발 비행기를 타게 되면서 이번 공연의 의미에 대해 북측 공연단과 나누고 싶은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제3국 사할린을 거점으로 하여 다음 남북합동공연에서는 아리랑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행히 아직 잔존하고 있는 실향민들과 남으로 북으로 흩어진 해외동포들 가족은 통일된 조국의 땅을 밟고 싶다고 한다. 통일이 되어야 북으로 유학을 간 동생이 고향땅에서 다시 우리 형제들과 재회할 수 있다고.한국으로 돌아와 이산가족 상봉 뉴스에서 남으로 북으로 갈라져 눈물짓는 실향민을 접하면서, 우리는 남북문화교류를 활성화하여 제3국에서부터 자주 만나야 하고, 민족 동질성을 입증하는 인자인 아리랑을 통한 남북교류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나아가 아리랑만큼은 남과 북이 유네스코 공동등재를 위해 노력하자고 두 손을 잡고 싶었다. 유지숙 명창은 남북합동공연 전체 콘셉트에서 서도소리보다는 아리랑메들리가 더 나을뻔했다고 토로했다. 앞으로 해외 동포들과 함께 하는 남북합동공연에서는 아리랑을 레퍼토리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나는 20일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학교 특강을 했다. 김주환 원장, 러시아아리랑본부(회장 공노원) 회원, 사할린여성협회(회장 김웨철), 사할린아리랑무용단(단장 박영자), 러시아아리랑본부(자문변호사 브라디미르) 등이 참석하였다. 강의 내용 중 사할린 부분에서는 사할린 동포 윤민자가 사할린아리랑을 시연했다. 윤민자는 18일 남북러합동공연 세리머니에서 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의 헌무 사할린아리랑의 주제곡 불렀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이라는 주제와 사할린을 거점으로 하여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남북합동공연을 해야 하는 배경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 아리랑학교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홈스크한인협회의 초청으로 9월10일 이후 양 도시 한인협회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 아리랑학회 kibada@naver.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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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에 더해, 나름으로 늘 가슴에 절절하게 담았던 화두를 갖고 갔기 때문에 이런 지명의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왔던 듯하다. 첫 번째 답사는 남은혜 명창의 음반 ‘북간도아리랑’을 구상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안중근의 의병정신을 주제로 한 ‘아무르아리랑’을 구상하기 위해서였고, 이번에는 항일무장 투쟁 ‘무기로서의 아리랑’ 현장을 가슴에 담는 것이 개인적인 관심사였다. 무기로서의 아리랑이란 주제를 가슴 속에 담은 것은 두 가지 계기에 의해서이다. 하나는 북한의 음악정치 원천이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아리랑으로부터라는 사실 때문이다. 또 하나는 최근 읽은 1940년대 말 미국 좌파 포크그룹 <얄마닉 싱어즈>(Almanac Singers)의 ‘무기로서의 노래(Use of Songs as a weapon)’ 동아리 활동상의 감동에서다. 이들은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사용한 피터 시거(PETE SEEGER)와 맥을 잇는 그룹으로서, 세계 저항음악을 말할 때 내 놓는 ‘무기로서의 노래’라는 슬로건을 창출한 음악가들이다. 필자의 과잉된 생각일런지는 몰라도 일제항일투쟁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아리랑 변용은 바로 이들보다 앞서 노래를 무기로 변용한 사례로 꼽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실례는 김산의 아리랑, 정율성의 아리랑, 광복군아리랑, 그리고 김일성의 아리랑 등을 그렇게 본다는 관점이다. 향수를 달래주고, 공동체적 친밀감으로 일체감을 형성시키고, 배우지 않아도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곡조에 항일적인 사설을 담은 것이다. 이는 향유하는 노래이면서 저항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7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조중접경지역 답사 내내 1930년대 말 중국 항일전선 지역으로 돌아가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구상했던 용정, 김산이 다닌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합리하, 김정숙이 김일성을 만나러 건넌 삼합, 보천보전투가 있었던 혜산진이 보이는 장백현, 뗏목아리랑이 흘렀던 압록강변에서 나운규와 김산, 그리고 정율성과 김정숙의 아리랑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독립당 출몰, 영사관 오도빠이···아리랑 아리랑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는 부를 수 없는 아리랑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르는 접경지대에서 불려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게 보게 된다. 필자가 수집한 자료 중 가장 앞서는 것은 1932년 7월 김경재가 북간도 상황의 기록 중에 조사한 다음의 사설이다. “독립당의 출몰이 자즈니/ 영사관 오도빠이 달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백두산=뉴시스】백두산 천지에서 아리랑남북공동등재를 기원하면서. 간도 용정에 있던 일본 영사관이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려고 싸이렌을 울리며 내달리는 상황을 아리랑에 각인시켰다. 일제의 오토빠이는 독립당을 추격하는 상징임을 모두에게 알림과 동시에 독립당은 계속해서 출몰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런 전승양상은 결정적으로 1941년 중경임시정부가 3대 군가의 하나로 채택한 광복군아리랑에서 진가가 발휘된다. “우리네 부모가 날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전해 주소/ 후렴-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넘겨주소/ 동실령고개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날려요.” 아리랑이 고난 극복의 추동체라는 사실을 말할 때, 떠올리는 이 광복군아리랑은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제를 밀어내고 승리한 기쁨을 앞당겨 자축하게 함으로 용전의 힘을 내게 하였다. 곡조가 밀양아리랑이니 배우지 않고도 즉석에서 합창할 수 있었으니 유용한 심리전술의 무기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강렬하게 되살아 난 아리랑 사연은 2013년 북간도답사 때 연길 정암촌에서 중국동포 음악가 김봉관 선생이 전해준 이야기이다. 요약하면 독립군 빨지산 활동상의 가슴 아픈 아리랑 사연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관동군 토벌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섭니다. 앞장에 선 ‘길 안내자’는 흰옷을 입은 조선족 노인이었습니다. 주위의 산봉우리를 둘러보던 노인은 목청을 뽑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이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도 못가서 발병난다…. 【북간도=뉴시스】2015 조중접경지역 답사 이동경로.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백두산, 백두산에서 두만강 상류~하류. 미구에 노인은 일본군인의 군와 총에 쓰러지고 포위망을 늘인 항일유격대들의 분노의 총소리는 노인이 못다 부른 아리랑의 노래 가락을 이어갔답니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널리 알려진 항일투쟁 이야기입니다. 조선 노인을 왜놈 토벌대가 들이닥쳐 빨지산을 대라고 하며 끌고 갔는데, 노인은 약속한 장소로 가서 의연하게 아리랑을 불렸다 말입니다. 그것은 신호입니다. 그러니 아리랑은 처절한 왜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일본 토벌대(討伐隊)와 독립군 간의 추격전에서 “**도 못가서···”라는 대목의 숫자는 일본 토벌대의 규모를 알리는 것이다. 암호로 쓴 것인데,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러한 사실이 간자에 의해 일제에 알려졌고, 결국 독립군을 돕던 한 노인이 이 암호를 쓰다가 희생됐다는 이야기다. 이는 중국민족학교 황유복 교수의 ‘힌 옷의 동포’라는 책 속에도 들어있어 사실로 받아 들여지는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리랑 사연도 관심 있게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북한의 음악정치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제7사 활동의 최고 전과라는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아리랑 역할을 확대, 재현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항일전선에서의 아리랑은 다양한 상황에서 확인 되는 것인데, 북한의 불후의 고전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나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 하라’, 그리고 다부작(多部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불린 아리랑이 이런 상황에서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천보와 간삼봉전투 아리랑> 【북간도=뉴시스】북한대학원대학교 2015 조중접경지역 현장답사단(단장 이우영 교수) 보천보에 홰불 올린 혁명군은 기세 높아/ 간삼봉의 싸움터엔 노래소리 드높았네/ 빨찌산녀장군이 선창 떼신 아리랑/ 봉이마다 릉선마다 뢰성타고 울렸네/ (후렴) 아리랑 스리랑/ 간삼봉에 불비 와서 아라리가 났네. 이 ‘간삼봉전투에 울려퍼진 아리랑’은 앞서 치러진 보천보전투에 이은 승전으로, 이 때 김일성과 김정숙이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당시<매일신보> 1937년 7월 9일자가 보도한 ‘토벌대와 교화 중에도 노래 부르는 여당원, 김일성 일파 공비 격퇴’에서도 추정되듯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30년대 후반기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이 침체에 빠지는 시기로 중국군벌의 도움으로 유지되던 독립투쟁이 지하화 하는 상황에서 거둔 승전보였다. 이 승전은 일본 경찰을 격퇴한 전투로 김일성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린 전투이다.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으로 발행된 자서전『세기와 더불어』에 두 전투에서 아리랑이 혁명의 동지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고, 이를 계승, 2002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1937년 6월 4일 새벽, 일방적으로 대승한 전투, 장백현에서 보이는 함경남도(현 양강도) 혜산진으로부터 20㎞ 떨어졌다는 기록을 되살려 응시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상상의 전투신이 오버랩 되었다. 빨치산 전투방식대로 방화를 통한 충격과 주재 일본경찰을 비롯한 일인 관리만을 처단하여 공포심을 극대화 했다. 이 사실을 언론에 전해주어 대서특필,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게 했다. 선전선동 활동으로 군사적 성과 이상의 정치적 성과를 거둔 전투였다. “간삼봉 전투장에 울린 <아리랑>은 혁명군의 정신적 중심을 비쳐 보이고 낙천주의를 시위하였다. 적들이 <아리랑>을 듣고 어떤 기분에 잠겼겠는가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후에 포로들이 고백하기를 그 노래를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졌고 다음 순간에는 공포에 잠기였으며 나중에는 인생 허무를 느꼈다고 하였다. 부상자들 중에는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도망병까지 났다.”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 제6권에 나오는 대목이다. 무장투쟁 사상 처음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국내 진공작전으로 평가하는 전투에서 아리랑을 불렸으니 북한이 아리랑을 ‘혁명동지’로 표현할만한 것이다. 【북간도=뉴시스】수풍댐에서 배를 타고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만나다. 우리가 손을 흔들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면 그들도 손을 흔들며 웃어 준다. ◇백두산은 없고 장백산은 있다 그런데 이런 나의 ‘1930년대 아리랑 여행’(?)에서 현실로 일깨운 것은 백두산 답사에서였다. 그 이유는 천지를 오르기 위해 세 번이나 중국에 돈을 내야함은 물론 모든 표기에서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조선족 동포들이 부르는 ‘장백산아리랑’이 조선족 스스로가 현실적으로 중국신민임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 노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심 더욱 안타까웠다. 그래서겠지만 이 노래는 1983년 전국민족단결현상모집에서 창작상을 받기도 했다. <장백산아리랑> “그 옛날 천지엔 선녀 내렸고/ 오늘은 세월 좋아 벗님들이 이 고장에 찾아 오누나/ 신선의 꽃 활짝 피는 우리네 장백산은/ 중국의 명산이요 연변의 자랑일세.” 조국(조선이나 대한민국)의 명산이 아니고, 중국의 명산이고, 연변의 자랑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백두산이 아니고 장백산이다. 만일 북한 지역에서 오른다면 장백산이 아닌 백두산임은 당연한 명칭이다. 이런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자 갑자기 1930년말 상황과 달라진 것인 없다는 생각에서 천지에 오르는 발길이 너무나 힘겨웠다. 조중접경지 7일간의 답사, ‘여행’이 아니고 ‘답사’여야 하는 이유를 실감했다. 아리랑조차도 역사와 현실적 해석을 달리해야 하고, 산에 오름이 분명 여행이고 등산임에도 여행이 아닌 답사임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인내를 필요로 할 듯하다. 중국의 역사와 현재, 이곳에서 만나는 조선족이라는 중국신민들, 그리고 멀리서만 볼 수밖에 없는 북한이 중첩된 곳이기에, 이를 어떻게 풀어 낼 것인지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답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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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아카지마 아리랑⑥]그 이름 아리랑, 인류보편 ‘고난의 메타포’ 등록 2015-02-16 16:19:52 | 수정 2016-12-28 14:35:25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위령제를 올렸다. 유일한 20대 단원 송미진씨가 당시 위안부 숙소 앞에서 오열했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 “조국의 아리랑은 나의 영혼이자 블루스, 내 몸 안의 DNA와 같다.” 교포2세 가수 아라리 에이치, 박영일(新井英一)이 한 말이다. 1994년 발표한 <청하아리랑>(清河への道~48番)이 주목을 받아 1995년 일본 레코드 상을 수상했고, tbc TV 10시 메인뉴스 테마뮤직으로 1년간 방송되었다. <청하 아리랑>은 그가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청하군(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을 방문한 뒤 작사·작곡한 작품이다. 교포2세로 차별을 받고 미군 기지에서 이국인 취급을 받은 서러움을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나는 간다”라고 강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1950년부터 후쿠오카 이와쿠니 미군기지에서 접시닦이를 하다 미국행을 한 후 정체성을 지닌 노래를 해야한다는 강렬함에 부르게 된 노래다. “아리랑은 특별한 고난을 겪은 이 만이 부르는 특권을 가진 노래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기 나름의 고난을 가진 사람, 그리고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는 이에게 보편적으로 어필하게 하는 힘을 가진 노래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의 메타포(metaphor)로서의 아리랑은 반드시 조선이라는 공간이나 조선인이라고 하는 민족에 한정되어 있지 않은 보편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드라마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리소스(財源)인 것이다.” 아리랑을 연구한 일본 학자가 쓴 글의 일부이다. ‘고난의 메타포’라고 했다. 이어 교표2세들의 아리랑을 살펴본다. 바로 이들의 부친 대부분은 징용에 끌려왔다 잔류한 이들이다. 백룡의 <아리랑의 노래>는 아마도 동포2세들이 공통으로 갖는 아리랑의 정서일 것이다. “술을 드신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향의 멜로디 아리랑의 노래/ 그 무엇을 그리며 부르시는 걸까/ 그 때의 현해탄 아니면 어릴 적 고향산하/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네.” 호타루 아리랑 <특공대의 노래> 붉은 피가 샘솟는 요카레노(특공대의)/ 일곱 개의 제복단추 아침 해에 빛난다/ 오늘도 비상한다 가노야의 창공에/ 큰 희망의 부푼 구름 샘솟네 치쿠호우(筑豊) 탄광 아리랑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숱(석탄)파러 왔느냐/ 일본땅 좋다고 누가 말했냐/ 일본땅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숱 팔 때는 배고파 못살겠네/ 이 말만 하면은 몽둥이로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하고/ 감독이 겁나서 가만히 불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넘어 간다 봄 아리랑 【아카지마(오키나와)=뉴시스】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단장 기미양)이 10일 아카지마(阿嘉島)의 아리랑고개를 찾아 한국인 위안부들의 넋을 달랬다.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영감이 어디로 가나?/ 아리랑 고향에는 살수가 없어/ 추운 만주로 쫓기어 간다/ 아리랑 아리랑 정처 없이/ 아리랑 국경을 넘어서 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동포는 무엇을 먹나?/ 아리랑 나라는 쌀의 나라/ 아리랑 동포는 좁쌀도 없다/ 무자비한 왜놈에게 빼앗기고/ 오소리 지주에게 착취당해 이런 아리랑을 부르는 재일동포는 70여만명, 부라쿠민(部落民; 천민 후예), 오키나와인에 이은 세 번째 소수자 집단이다. 천민계급이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이었다가 부락만 남았다. 아이누족, 오키나와인,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류큐인과 함께 일본 내의 대표적 소수 집단이다. 재일동포 아리랑은 이런 굴곡을 헤치고 피어난 꽃이다. 아리랑은 기존의 구비문학 또는 민요 서술의 지배 담론과는 다른 시각에서 의미체계를 구성해야 함을 일깨운다. 텍스트로서의 특정 아리랑에 대한 물음의 해답은 하나이다. 그러나 아리랑 문화로서의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이다. 이 일본 속의 아리랑이 그렇다. 어찌 민요론적인 해석으로 답할 수 있는가? 역사적 전개와 맥락에서 아리랑을 조감해야 함을 실감한다. 아리랑은 전승과 창조적 계승에서 자발적이라는 사실과 역사적 지속성, 문화적 개성, 현실적 가치에서 탁월한 보편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유산과 다르다. 보편적이되 특수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오키나와로부터의 아리랑은 이런 현학을 떠나 더 높은 것이어야 함을 깨우쳐 준다. 만국진량(萬國津梁), ‘만국에 열려있는 가교’, 1458년 제작된 류큐국 종(鐘)에 세겨진 경구이다. 아리랑은 만국에 열려있고, 만국을 노래해야 한다. 그래서 만국에 통해야 한다. 만국을 위해! 누치토타가라! 생명 이상의 존귀함은 없다! 이 귀한 두 경구(警句)에 아리랑이 있어야 한다. 루치난추 대대로 내려오는 이 경구는 수없는 역사적 고난을 극복하며 얻은 진리일 터, 어쩌면 우리의 피, 우리의 아라리가 담겨있을 터!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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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사회 > 사회일반 [아카지마 아리랑①]누가 서정민요라 했는가, 통곡의 아리랑 등록 2015-02-16 16:21:54 | 수정 2016-12-28 14:35:26 【오키나와=뉴시스】평화의 초석.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오키나와=뉴시스】김연갑 상임이사·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1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외침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오시비앵침(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돼선 안 된다고 결의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년을 맞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유태인을 비롯한 정치범, 전쟁 포로 등에 대한 집단 학살)를 자행한 곳인데, 1945년 1월 27일 옛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어 1947년 박물관으로 개관되어 처참한 히틀러의 만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 박물관 입구에 쓰인 경구(警句)가 바로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 된다’이다. 오늘의 우리가 역사유적지를 답사하는 이유가 이 경구를 실천하기 위해서 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박물관 앞에서 한 말이다. 아마도 이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이나 기념비를 세운 분들도 같은 말을 하였을 것이다. 가해든 피해든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결의의 징표가 바로 이런 박물관이고 기념표식이기에 이를 건립하며 똑같은 염원을 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홀로코스트가 얼마나 참혹하고, 반인륜적(反人倫的)이었던가를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지옥 상항을 벌린 인간들이 무슨 염치로 사랑을, 평화를, 꿈을 이야기 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엄중한 질책이다. 이제 시인은 이를 반성하고 속죄하는 역사기록으로서의 서사시를 써야 한다는 자성이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깊은 자성을 우리도 이곳 오키나와에서 엄숙하게 수용해야 한다. 【오키나와=뉴시스】평화기념공원.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1944년 일본해군 ‘특설수상근무대’(特設水上勤務隊)로 끌려온 350명의 조선인 군부 우리 오빠 형들이 일본군의 교쿠사이(玉碎)로, 폭약을 묶어 미군 전차로 밀어 넣어 죽고, 미군의 폭격에 죽었고, 52명의 종군 위안부 우리 누이 언니들이 위안소에서 또한 요나구니지마 구부라항 이동 중인 배 안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이들이 바다 건너 조선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가 아리랑이었음을 확인한 우리도 이제는 더 이상 아리랑을 서정민요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마다 조선인 희생자의 수는 다르다. 더욱이 오랜 세월이 지난 2010년대에 들어 동북아역사재단이 조사한 증언·공문서 등 각종문서 상세조사에 의한「일본군 위안소 지도」에 의하면 오키나와에서 채록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237명이 산출되었으니 이 섬에서의 우리 아리랑은 통곡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1970년 7월 8일, 도쿄타워 인질 사건 “나는 우치난추 도미무라 준이치다. 20세 이하 청소년은 풀어주겠다. 조선인과 우치난추는 풀어주겠다. 하지만 미국인과 일본인은 풀어주지 않겠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 천황은 사죄하라!” ‘일본인들이여, 오키나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은 도미무라 준이치(富村順一)가 칼 두 자루를 들고 도쿄타워에 들어가 미국인 선교사의 목에 대고 외친 말이다. 1930년 오키나와에서 태어났고, 1940년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를 거부, 소학교에서 쫓겨났고, 1954년에는 나하(那覇) 형무소 폭동에 참가했으며, 1955년에 일본 본토로 건너와 각종 운동에 참가했고,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자 위령탑 건설 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다. ‘야마톤추’(일본인이라는 오키나와 말)에게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을 뜻하는 오키나와 말)의 통한을 외친 인물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외침 속에 ‘조선인’이 들어 있다. 우치난추의 통한과 오키나와에 있었던 조선인(일본군 군부·군속·위안부)들의 통한을 일본인들에게 전한 것이다.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오키나와에 건립된 <아리랑비>, <조선인 희생자위령탑> 등 건립을 추동하였다. 이 외침은 동서 1000㎞ 남북 400㎞ 해역에 160여개의 섬(유인도는 약 50개)으로 구성된 류큐(琉球) 왕국(1429년 호족세력 통합-일본·중국·조선 중개무역국)을1879년 일본 사쓰마번이 강제합병(1차 유쿠처분)시키고, 1872년 일본 야마토(大和)정부가 통합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군의 일본 본토 육상전을 저지시키는 사석(捨石戰)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1945년 종전 후에 미국 군정으로 넘기고, 1972년에는 일본에 흡수하면서도 미군기지로 남겨둔 것에 대한 항변이다. 【오키나와=뉴시스】히메유리의 탑. 사진= 엄문희 여행작가 우리도 1905년 보호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제한하고 1910년 합병시켜 45년까지 식민지화 하여 수탈하고, 3년간 미군정을 실시하게 했고, 1948년 분단을 시킨 것이 일본이니 같은 처지였다. 그래서인지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강영훈 육군소장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런 지시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시대 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관계를 어느 정도는 이해한 발언이긴 하다. 그러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동정어린 발언이기 보다는 불완전한 독립을 마치 완전한 독립인 것처럼 거만함이 묻어있다. #3 ‘미안하오 유구왕자여 슬프구나’(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동야휘집』·『광해군일기』·『인조실록』·『택리지』·『연려실기술』·『열하일기』, 그리고 『담옹유고(藫翁遺藁)』같은 야담집이나 실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구국 왕자의 슬픈 죽음에 대한 것으로 김려(金鑢)가 담옹유고에 기록한 <유구왕세자외전>이 그것이다. 김려는 <미안하오, 유구 옹세자여! 정말 미안하오>(哀哉悲夫. 琉球世子之事. 悲夫哀哉)라는 제목으로 애도의 글을 남겼다. 인조(1623~1649) 때 왜인(倭人)이 유구를 침략해서 그 왕을 잡아 갔다. 이에 왕세자가 보물을 갖고 왜(倭)에 들어가 부왕(父王)을 풀어 달라고 떠났는데 배가 표류하였다. 표착지는 제주 바닷가. 이 사실을 안 제주목사(濟州牧使) 이기빈(李其賓) 또는이란(李灤)은 배 안을 정탐하고 흰 앵무새 1쌍, 수정 알 2매(枚)의 보물과 술을 만드는 돌(酒泉石)이 있어 욕심이 났다. 4각의 돌에는 구멍이 있는데 여기에 물을 부으면 술이 되는 신기한 물건이고, 앵무새는 왼 발톱으로 비파를 켤 수 있다고 했고, 수정 알은 밤에 환하게 빛을 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란은 왕자에게 요구했다. 이 보물들을 주면 유국구으로 돌려보내주겠다고. 그러자 왕자는 눈물로 호소했다.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내가 보물을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부왕께서 힘없이 붙잡혀 갇혀 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부왕을 풀어 달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대부(大夫)는 이를 슬퍼하소서.” 이에 이란은 세 번씩이나 보물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왕자는 눈물로 사정을 했다. 그리고 왕자는 이란의 욕심으로는 물건을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그럴 바에는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고 각오하고 혈서를 썼다. 절명시(絶命詩)인 것이다. “세 어진에 순장(殉葬)을 대속(代贖)할 이 누구인가/ 두 아들 배를 탈 때 도적이 불인(不仁)했도다/ 모래벌판 해골에 잡초가 얽히리니/ 이내 혼 고국(古國) 간들 슬퍼할 친지 있을까/ 제주도 앞 바닷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남은 원한 선명하여 만 년간 오열하리.” 기어이 이란은 보물을 빼앗으려고 배를 포위했고, 위협에서 왕저의 보물을 보호하려는 종자 한 명은 돌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에 이란의 수군은 이를 빼앗으려 달려들고 배안을 급습하여 모든 보물을 약탈했다. 그리고도 부족하여 13명의 시종과 왕자까지도 죽이고 말았다. 이란은 조정에 왕자의 배가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속여 아뢰었고, 강탈한 재물을 모두 소유했다. 그러나 앵무새가 땅을 밟자마자 죽는가 하면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체포된 이란은 큰 벌도 받지 않고 방면되었다. 이 사실은 많은 문인들에게 유구국의 부왕과 왕자를 애도하는 글을 쓰게 했다. 대표적인 글이 김려가 쓴 글로 <미안하오 유구왕자여>가 있다. 이 번역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슬프고 슬프구나. 유구 세자의 일이 슬프고 슬프구나. 세상에는 ‘세자가 작은 보물을 아껴 위로 임금을 맞이하지 못했고, 아래로 자신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족히 일컬을 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지나친 말이다. 이란의 형세를 보건대 보물을 주었어도 죽었고 보물을 주지 않았어도 죽었을 것이다. 똑같이 죽는 것인데 하필 보물을 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자처럼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명철한 사람이 어찌 차마 보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물며 자신이 살면 임금을 맞이할 수 있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음에랴! 그러나 세자는 반드시 여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릇 이란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재물을 탐내 사람을 죽인 것이 첫 번째이다. 이웃 나라와의 외교를 망가뜨린 것이 두 번째이다. 임금을 속인 것이 세 번째이다. 신하가 이 가운데 한 가지 죄라도 있으면 마땅히 형을 받아 죽어야 하거늘 당시 군자가 그 죄를 성토하는 말을 한 마디도 내지 않아 포악한 난신(亂臣)이 편안히 복을 누리고 자손이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유구 사람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 건너 서쪽을 향해 두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어떤 말로 대답할 것인가? 이란의 인육을 먹는 것으로 충분한 일인가? 단지 다행히 유구가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 바야흐로 왜놈의 난리 때문에 여기에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 이로부터 유구의 통신사가 끊어졌으니, 아, 이웃 나라에 들려 줄 이야기가 아니다.” 1612년 사헌부 기록과「조선왕조실록」제27권 <광해군일기> 2월조에도 있고, 얼마나 애석했던지 지리서인「택리지」제주 대목에도 인용되어 있다. 와전되어 설화적인 요소가 보이긴 하지만 왕자의 제주 표착과 애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재물을 취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후 우리 조정은 유구국 표류자에 대해서는 어명으로 편의를 봐주는 조치를 취했지만, 외교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유구에 진 여러 빚 중에 가장 큰 빚이다. 바로 김려의 위의 글은 분명 이 빚을 후손들이 꼭 갚길 바라는 마음에서 남긴 것일 것이다. 【서울=뉴시스】김연갑, 아리랑 권위자 역사에 대한 미안함을 갖는 것, 선린을 추구하는 진정한 자세이며 외교상 지성사의 전통이 아닌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는 창조되는 것이 아닌가? #4 아라리의 고려말 확산 “이 노래는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는 노래로서 지금으로부터 580년 전 고려조가 망하게 되자 이제까지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이를 비관하고 송도(松都 개성의 고려 수도)에서 두문불출 은신하다가 정선에 숨어들어 지금의 거칠현동(居七賢洞)과 백이산(伯夷山)을 소요하면서, 이제까지 섬기던 고려왕조가 그냥 망하고 말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계승될 것인지, 송도에는 험악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는 이러한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데 연유한 것이다. 본래는 ‘아라리’(我羅理)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 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 ‘알리’에서 연유된 듯하더라. 당시 몇몇의 고려유신과 함께 거칠현동과 백이산에서 고려조를 위한 충의로웠던 마음씨를 읊은 칠현들의 시는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정선아리랑비> 음기(陰記)의 일부이다. 강원도 정선군에서 발행되는 모든 자료에 유사하게 전해지는 내용이다. 고려말 상황으로 이성계의 혁명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여 관직에 오르지 않고, 충절을 지키려 정선에 은거하며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는 신세 한탄의 시를 읊었다. ‘아라리’가 오늘의 ‘아리랑’으로 음전(音轉)되었다는 논점이 주목된다. 이상에서 제시한 네 가지 상황, 우리와 오키나와는 일본 그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우리가 미안함을 가져야 사실도 있으니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이를 전제하여 아리랑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를 유념하여 오키나와 속의 아리랑 층위를 살펴보기로 한다. www.arirangsong.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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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기미양)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7세 박주빈·25세 송미진, 日아카지마 아리랑평화음악제 합류 까닭 등록 2015-02-06 10:35:35 | 수정 2016-12-28 14:32:33 【서울=뉴시스】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상황이라는 다층적 관계로 오키나와는 깊은 관계이다. 이 관계의 상징이 아카지마(阿嘉島)에 있는 ‘아리랑 고개’와 그 사연이다. ‘고개의 노래’라는 아리랑이 이 오키나와 외딴 섬에서 불렸다는 아픈 사연을 전해 주는 아리랑고개는 분명 세계지도에 없는 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와 사연을 우리 아리랑사(史)에 기꺼이 편입시키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에 두 진객이 함께 한다. 박주빈(7)군과 송미진(25)양이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참가단 15명의 일원인데, 박군은 5세 때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음반 프롤로그를 장식한 꼬마 소리꾼이고, 송양은 문경아리랑의 전설적 소리꾼인 고 송영철 선생의 손녀이다. 2012년 문경시가 제작한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은 명창 송옥자(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이사장과 송영철(1917~2002) 선생이 생전에 남긴 문경아리랑 녹음 자료를 수록한 CD 2장이다. 첫 트랙에 귀여운 산골 어린이의 서툰 발음으로 부른 문경아리랑을 수록, 3세대의 소리를 장식한 문경아리랑경창대회 금상 수상 어린이 명창 박군이다. 이번 참가는 외할머니인 문경아리랑보존회 총무 이경숙 여사와의 동행으로 소리를 좋아하여 선뜻 가겠다고 했다. 추진단은 소리꾼으로서의 자질을 발휘하는 것이라며 환영하였고, 11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에게 올리는 ‘헌가(獻歌) 아리랑’을 맡기로 했다. 【서울=뉴시스】기미양 단장·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 = ‘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추진단’이 9일 오키나와로 간다. 역사적으로, 음악사적으로, 설화적 관계로, 그리고 미군위문협회(USO) 아리랑 상황이라는 다층적 관계로 오키나와는 깊은 관계이다. 이 관계의 상징이 아카지마(阿嘉島)에 있는 ‘아리랑 고개’와 그 사연이다. ‘고개의 노래’라는 아리랑이 이 오키나와 외딴 섬에서 불렸다는 아픈 사연을 전해 주는 아리랑고개는 분명 세계지도에 없는 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와 사연을 우리 아리랑사(史)에 기꺼이 편입시키는 일을 위해 가는 것이다. 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에 두 진객이 함께 한다. 박주빈(7)군과 송미진(25)양이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참가단 15명의 일원인데, 박군은 5세 때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음반 프롤로그를 장식한 꼬마 소리꾼이고, 송양은 문경아리랑의 전설적 소리꾼인 고 송영철 선생의 손녀이다. www.arirang21.org 송양은 10대 때 문경의 대표적인 소리꾼이었던 할아버지(당시 27세)로부터 1943년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아 귀국한 사연과 함께 아리랑을 듣고 배웠다. 이후 성장하며 소리에 소질이 있음을 자각하고 본격적으로 할아버지 소리를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평생 산 문경읍 하초리가 작년에 ‘문경새재아리랑마을’로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되어, 송옥자 선생을 스승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소리길을 걷기로 했다. 문경에서는 격대(隔代) 소리꾼의 탄생이라며 축하해 주었다. 어머니 김순옥 여사와 동행하는데, 특별히 할아버지 유품 중에 징용 때 휴대했던 소지품을 가지고 가서 할아버지를 회고하기로 했다. 그 진품은 현장에서 공개하기로 하였다. 이번 답사에서는 할아버지 무릎에서 늘 듣고 자란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을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서 희생당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헌사할 예정이다.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은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가 주축이 되어 실재적 아리랑고개인 ‘문경새재’와 역사적 아리랑고개인 ‘아카지마아리랑고개’의 역사적 만남을 통해, 아리랑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느끼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답사이다. 이런 행사에 박군과 송양의 참여는 매우 뜻깊다 하겠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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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아리랑' 마침내 탄생, 안중근 동양평화론 현장 가다인쇄하기 닫기 국제 > 아시아/대양주 '안 의사 아리랑' 마침내 탄생, 안중근 동양평화론 현장 가다 등록 2014-07-28 07:45:00 | 수정 2016-12-28 13:07:48 【서울=뉴시스】"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쾌거 현장이다. 【서울=뉴시스】기미양 이사(아리랑학회) = 매년 해외 ‘아리랑 루트 확정’을 위한 한민족 이주사 현장 답사를 해오고 있다. 올해는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 주관으로 ‘제10기 안중근 의사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에 지도위원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7월 8일부터 15일까지 7박8일 동안 러시아와 중국 동북삼성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하고 왔다. 지난해 8월 북간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올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 조·중·러의 국경지대 훈춘과 동북삼성을 중심으로 하얼빈까지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따랐다. 이 중에 핵심은 러시아 지역은 블라디보스토크 우스리스크 크라스키노, 중국은 훈춘 연길 하얼빈, 대련(여순)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집단거주지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최재형 정착지, 그리고 안중근 의사 의거현장인 중국 하얼빈역, 순국 장소인 뤼순 감옥은 숙연한 마음으로 답사를 했다. 모두 세계사 변혁기라는 맥락에서 수난사의 정점이고 최후를 마친 곳이라는 점에서 추모와 정신 계승이란 의무감 때문이었다. 특히 올해는 러시아 이주 150년이 되는 해이어서 더욱 뜻 깊었는데, 지난 6월18일 사단법인 고려인돕기운동본부의 초청으로 고려인 124명이 고국방문을 함께하여 러시아 150년 이주사를 되새기는 기회도 가졌다. 8월15일에는 비로비쟌에서 광복절 기념공연을 ‘아리랑’을 주제로 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는데, 미주 이주 100년 기념을 아리랑으로 했듯이 러시아 이주 150년 기념도 아리랑으로 하는 아리랑의 역사성을 되새기는 뜻 깊은 해임을 절감했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최재형의 나라 연해주 연해주에서는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을 고리로 안중근 의사와 13도 의군의 유인석 대장의 활동을 확인하는 곳이다. 이 곳을 인천에서 두 시간 반 만에 도착하여 밟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분들은 상상을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니 송구스럽기도 했고, 감격스럽기도 했다. 전자는 민족 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풍찬노숙을 각오하고 백두산을 넘어 간 경로가 아득하고 처참한 생각이 들어서고, 후자는 님들의 희생으로 만든 나라의 후손들이 단숨에 건너 백년역사를 단 며칠 만에 답사할 수 있는 세상임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연해주는 해삼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듯이 이주의 루트가 다양했다. 비행장에서 버스로 1시간 이동으로 다다른 신한촌(유적비)은 1863년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형성되어 많은 후손을 키워 낸 곳이지만 일제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처참한 박해로 목숨을 묻은 곳이다. 그리고 드디어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그 이름 ‘신한촌’으로 역사 속에 각인시켜 유적비를 남긴 곳이다. 그나마 이 유적비조차도 1999년에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세운 것이다. 비문에 새겨져 있듯 13도 의군 창설, 1919년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 수립으로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운 곳이다. 지난해도 들렀던 곳이지만 1910년대 해외 독립운동 기지의 중요한 거점으로 항일역사가 응축된 역사현장인 것이다. ‘독수리전망대’에서 바라본 역사적 기억은, 조국에서 들어오는 이들과 중국에서 들어오는 한인들이 약속지점으로 삼은 뜻 깊은 곳이다. 물론 이 ‘약속’은 오늘 같은 시간 단위가 아니라 길게는 계절, 짧게는 상순·하순 정도였으니 약속 자체가 곧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이곳은 고려인들에게는 눈물과 웃음이 다 마른 이들이 뜬 눈으로 서성였던 처소였다. 해외 한인 유적지 가운데 만남의 장소로 중국 연변 일송정과 함께 매우 특별한 유적지이다. 이 독수리전망대를 내려와 혁명광장으로 이동하여 ‘혁명의불’을 찾았다. 이 기념 불꽃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도 있어 사회주의 국가의 상징이 되었는데, 나는 이번에 다른 시각으로 보기 위해 찾았다. 그것은 ‘아리랑의 불’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뉴시스】연추 하리마을-연해주에서는 1905~1908년 두만강 대안인 연추지역(크라스키노)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지난해에 이은 10월1일 ‘아리랑의 날’을 기념하여 금년 9월 중순 쯤 태백산에서 채화하여 전국 지회로 순회하여 모시는 ‘아리랑의 불’을 준비하고 있다. 이곳의 불은 혁명의 기념물이지만 우리는 ‘아리랑의 불멸성’을 기리려는 것이다. 이 ‘혁명의 불’은 가스로써 태풍에도 꺼지지 않게 기술적 완벽성을 갖췄다는데 해군이 관리하고 있다. 기술적인 설명은 찾을 수가 없었지만 개념정도는 확인하여서 소득이 있었다. ◇라즈돌노예 역, 치르치크 아리랑 9일 전용버스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던 중 라즈돌노예 역사를 들렀다. 1937년 9월의 강제이주를 증언해 주는 곳이다. 사할린 지역에 사는 동포까지 불러온 이들을 이곳 역에서 태워 출발한 이주의 현장이다. 그날의 절망과 고난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난 번 방문에서도 생각했지만, 이곳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의 가혹한 여정을 아리랑으로 서사화한 작품을 만들어 교민들과 남북한이 함께 하는 공연을 정례화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임에야 이런 역사적 현장을 보듬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신허(한인 최초의 마을)를 경유하여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유인석 선생 등의 활동이 집약된 대표적인 연추(Ianchikhe) 마을을 보았다. 연추하(延秋河)가 흐르고 있고, 상·중·하 세 마을이 보였다. 이 마을들은 북한과 러시아 국경인 두만강과 가까워 일대 한인마을 중 가장 많은 한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라진 연해주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와 함께 대표적인 고려인 마을이다. 특히 연추는 안중근 의사가 최초로 의병을 창설하기 위해 찾은 해외 의병사의 메카이다. 의병들이 조국과 중국의 훈춘, 북간도 등을 오갈 때면 반드시 거쳤던 곳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1908년 봄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등 한인 지도자들과 동의회(同議會)를 조직한 의병 본부지가 있었던 곳이니 중요한 유적지이다. 당시 많은 고려인 마을이 있었다는 곳이지만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러시아 극동식 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연해주 남쪽지역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를 중심으로 남북 수십리, 동서 사오리를 흐르는 지신허강 주변은 아름다운 곳이다. 상상 만으로도 고려인들이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크라스키노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를 마주했다. 연해주에서 버스로 4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러시아·북한 국경지역인 추카노프카라는 마을로 두만강이 멀지 않은 민간인통제구역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2월 동료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를 결성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맹세하며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던 역사의 현장이다. 비문을 읽고 해설을 들으며 격분과 함께, 의혈의 안 의사 모습을 그리며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역사를 뜨겁게 만나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비에 새겨진 글이 선연한 핏빛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직계 조상 기정진, 기우만, 기산도, 기삼연님들의 의병활동이 안 의사의 활동과 오버랩 되어 자긍심을 맛보기도 했다. 크라스키노 국경 세관에서 러시아 출국수속을 마치고 국경을 넘고 다시 장영자 세관을 거쳐 훈춘으로 들어갔다. 조·중 경계선인 도문시에서 대동강 너머 북한 산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으로 민족사의 비감을 오늘에 되짚어 보는 곳이었다. 일정을 위해 쉬지 않고 봉오동 전투 승전지를 탐방하고 다시 연길로 이동하여 항일유적지를 탐방했다. ◇코레아 우라! 【서울=뉴시스】안중근의사기념관앞에서.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주최한 제10기 안중근 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 돈화에서 하얼빈행 기차를 탔다. 장장 8시간, 기내숙박(6인1실)으로 하얼빈 평방역에 도착했다. 먼저 찾은 곳이 731부대(죄증박물관)이다. 끔직한 생체시험과 화학실험을 자행한 일제의 잔혹상을 상징하는 곳이다. 건물도, 비치된 유물도, 모두 일그러진 고통스런 얼굴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나 만의 느낌일까? 오래 있기가 싫었다. 일제의 망령이 깊게 전해져 안 의사 유적을 찾는 걸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드디어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도착했다. 국내의 보도를 통해 본 것보다 위용이 느껴져 뿌듯했다. 1909년 10월26일의 장거를 기념하는 뜻 깊은 기념관이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삼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죽노니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여 …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원한이 없겠노라”는 것이 안 의사의 유언이었고, 소망이었다. 이 문구는 우리 모두를 압도했다. 이 앞에서 누군들 떳떳할 수 있겠는가? 단지 마음을 다듬어 역사 만이라도 바로 보는 자세를 갖출 뿐이었다. 교과서의 흑백사진과 몇 년 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기차에서 내리는 이토의 모습을 떠올랐다. 1907년 연해주에 도착한 안 의사는 단지동맹에서 맹세한대로 3년 내에 이토를 처단하리라고 다짐하고 기다렸다. 그리고 1909년 10월26일 이토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동지들과 치밀한 준비를 했다. 하얼빈역에서의 거사는 안 의사가 맡기로 했다. 드디어 운명의 순간, 예상대로 이토는 기내에서 회담을 마치고 하얼빈 총영사, 궁내대신 비서관, 만주철도주식회사 이사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의장대를 향해 내려섰다. 순간 사열대와 환영군중의 뒤편에서 숨죽이고 있던 안 의사의 권총이 국모시해 국권침탈 국적(國賊) 이토(伊藤博文)를 향해 불을 뿜었다. 세 번의 총성이 울렸다. 이어 이토는 물론 주변의 몇 명이 함께 비틀거렸다. 총성으로 대열이 흩어지고 급기야 러시아 의장대와 호위대가 안 의사를 덮치듯 달려들었다. 이에 안 의사는 당당하게 마주하며 외쳤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총성보다 더 크고 장렬하게 ‘대한만세, 대한만세’를 외친 것이다. 대한국(大韓國) 의병(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서의 당당한 군사활동이었다. 안 의사가 총을 쏜 장소에는 ‘삼각형’, 이토가 코코프체프 쪽으로 쓰러진 자리에는 ‘사각형’ 표시가 되어 있다. 위대한 대한국 의병대장 거사 현장이 이 두 가지 표시로만 증거하니 소중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인류문명 발상지가 한 점 샘(泉)으로만 증거하듯, 위대한 동양평화 정신 발양지도 이 두 점으로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뉴시스】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강월화 관장(왼쪽)에게 문경아리랑, 구동존이 아리랑, 의병 아리랑, 남은혜의 아리랑 음반을 기증했다. 강 관장은 조선민족예술관 2층 안중근 의사 기념실이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이전하기까지 모든 책임을 맡았다. 2014년 첫 번째 아리랑로드 확정을 위한 하얼빈 지역 답사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의 현장 답사였다. 이제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기념 제1호 아리랑 음반, ‘역사적 기억의 전승, 의병아리랑’ 음반을 제작하며 미진했던 중국과 러시아 지역 의병유적지 답사에 대한 숙제를 마쳤다. 그리고 완성을 미룬 ‘안 의사 아리랑’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야 아리랑 얼쑤 아라리야 (후렴) 왜놈과는 하늘 아래 살 수가 없어 팔걷고 뛰어나와 의병되었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 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다섯발 내디뎌 도적 쓰러트리니 【서울=뉴시스】단지동맹비.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기념,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설치했다. 동양평화 대역사 시작하였네 서릿발 칼날같은 저 용맹 아무르 흑룡강에 흐르고 흘러 아므르 흑룍강 흐르고 흘러 동해바다 향해 아리아리 아라리야.’ 나는 이 ‘안 의사 아리랑’으로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가슴에 담았다. 소란함 속에서 아리랑을 읊조린다. ‘동양평화 하자하자 외치는소리, 하늘땅 온세상 진동하누나.’ 이번 귀한 기회를 준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감사드린다. 동시에 소중한 담론을 공유하게 해준 참여자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kibada@naver.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