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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9] 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

기사입력 2017.07.17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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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9]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은 194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고(愛國歌 攷)>(2)에서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주장하였다이 시기 발행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으로 쓴 것이다.

     

    뚜렷한 역사의 사실을 조작할 수는 없다.”라고 전제하고, “윤치호의 처지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리한 관사가 붙게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작이 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한것이라고 하였다이 주장의 근거는 바로 윤치호가 1945년 9월 자필로 애국가 4절을 남긴 <가사지>이다.


     

     

    고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요컨대 밝힐 건 바로 밝히고 시정할 것은 바로 시정해야 한다위정당국은 이 사실을 규명하여 공포함으로써 국민 교육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하여야 될 것”(동아일보, 1948. 10. 7)

     

    이후 이 <가사지>를 주목한 이는 신학자 백낙준(白樂濬/1896~1985)이다그는 소론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고>(윤치호선집 2, 1999)>에서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외증(外證)으로 좌옹 자신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자기의 작이라고 서면으로 증언한 바가 있다.”고 했다이 같은 주장은 기독교 서지학자 윤병춘(尹春炳/1918~2010) 목사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가 임종하시기 전에 자녀들의 권유로 쓴 친필 애국가는 일제치하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자신임을 알리지 못했던 것을 조국 해방 후에 밝히려 했던 것이며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큰 뜻을 자손 대에서 이어주기를 바라는 유언장이기도 했다.(윤병춘, <윤치호선집 2>, 1999)


     

     

    또한 최근에는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도 이 <가사지>를 증거로 다음과 같이 윤치호를 작사자로 인정했다.

     

    애국가 노랫말을 지은 사람이 윤치호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그 신문은 윤치호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손수 붓으로 써서 '윤치호 작사'라 해 놓은 것을 사진으로 공개한 것이다이래서 지금까지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1955년 윤치호 가족으로부터 <가사지>를 사본화 하고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제(解題)를 달아 놓았다.

     

    愛國歌 분류 書畵 筆蹟 등록번호 史資 2220 / 본문 愛國歌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 佐翁 尹致昊(18651945)가 애국가 가사를 자필로 쓴 원고사진 자료의 끝 부분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쓰여 있음. / 1(2), 한글 소장서울특별시 尹永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종합데이터베이스 검색, ‘애국가’)

     

    현 애국가 가사를 첫 기록인 1908년 재판 찬미가」 14자필 <가사지>, 그리고 현재 것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1908년 재판 찬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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