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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김연갑 ‘아리랑 5도 답파기’ <1>

기사입력 2015.12.1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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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감언론 뉴시스

    문화 > 문화일반

    아리랑, 역사의 현실화·현실의 역사화 엄격해야

    등록 2015-12-16 07:47:00  |  수정 2016-12-28 1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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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뉴시스】왼쪽부터 표재순, 이춘희, 김동진, 브루스 헐버트, 윤영달, 김연갑
    【서울=뉴시스】김연갑 ‘아리랑 5도 답파기’ <1>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2015년 오늘의 아리랑 현상은 2011년 6월, 중국이 전체 인구의 0.016%인 조선족의 아리랑을 자국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 명록적 통지 아리랑 11-147호’로 지정함으로써 그 반동에서 얻어진 일종의 ‘우연한 행운’, 세렌디피티(serendipity)이기도 하다. 이에 의해 2012년 우리가 ‘한국의 서정민요 아리랑’(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과 2014년 북한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아리랑 민요’(Arirang Folk so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였다. 그리고 관련 지자체의 관심이 촉발되고 금년 10월 국가주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연속적인 관심은 역사상 없었던 ‘아리랑 현상’이다.

     이 같은 아리랑 현상은 금년이 정점이다. 물론 내년이 나운규감독 영화 ‘아리랑’ 개봉 90주년이라는 계기가 있지만, 국가적 관심은 하향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금년까지의 현상은 아리랑사의 중요한 국면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검토하는 것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특히 갑작스럽고 과잉된 관심으로 인해 정작 오랫동안 자발적으로 아리랑을 전승해 온 전승자들의 공로가 희석된 점 등은 조명되어야 한다. 이 글은 이런 현장의 보고이다.

     다만 전제하는 것은 한 관찰자의 단견이기 때문에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비판과 험잡기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또 다른 아리랑 현상을 위하여 오늘의 아리랑 현상을 검토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양해가 있길 바란다. 이제 가장 의욕적인 아리랑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경북 문경시가 지난 13일 오후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한 ‘아리랑 도시 선포식’ 소식 중심으로 시작하여 5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 “2015년 8월 19일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가 1886년, 그러니까 129년 전 한국에 온 지 석 달만에 어린이들로부터 아리랑을 듣고 감동하여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아리랑을 채보했다는 사실과 그 편지가 공개되었다. 인류보편적인 음악 재현 방식인 오선 채보 사실과 이를 입증하는 원본의 국내 존재는 문명교류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가치 있는 사실과 유물이다. 이 편지 원본의 근대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문화재청의 검토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제1회 아리랑상 시상식 축사에서 2015년 9월14일)

     음악사학자 이혜구박사는 “음악에서의 채보는 천언만어(千言萬語)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세종 시대부터 쓰여 온 육보·정간보 같은 전통적 기보법이 있었지만 아리랑은 채보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1886년 입국한 미국인 헐버트라는 교육자에 의해 서양 오선보로 채보되었으니, 이는 일본의 대표 민요 사쿠라(-サクラ)나 중국의 대표민요 모리화(茉莉花)가 서양에 소개된 것보다 앞선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하게 된다. 더불어 헐버트가 1896년 ‘한국소식’에 아리랑의 어원·역사·전파상황 등을 구체화하여 기술한 것이 10년 동안이나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결과라는 사실도 알게 하였다. 

     # “2015년 9월 24일, 문화재청은 아리랑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9호(아리랑의 최초 기록 시점으로 계산한 ‘129’란 수와 문화재청 아리랑 지정 호수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2015년이 아리랑 현상의 정점임을 알려주는 것일 수 있다)로 지정했다. 향토민요 또는 통속민요로 불리는 아리랑 계통의 악곡을 모두 포함했다. 이번의 아리랑 지정은 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특정하지 않고 지정한 것으로 첫 사례이다. 2012년 유네스코 등재로 도치(倒置)되었던 아리랑 위상이 제 위치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런 결과는 바로 오늘의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원 여러분의 아리랑 사랑이 얻어낸 것이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창립대회 축사에서 2015년 9월25)

     아리랑의 현실적 위상인 ‘민족의 노래’라는 표현은 다른 종목과 다르게 각 지역에서 활동해온 자발적 전승자들의 향유적 활동 결과이다. 이는 아리랑 현상에서 매우 강조되어야 할 덕목인데, 영남지역의 두드러진 현상이다. 멀게는 1983년 창립된 ‘모임 아리랑’(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전신)부터이고, 가깝게는 2003년 사단법인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회장 정은하)의 창립으로부터 형성된 20여개의 아리랑보존회가 그 실체이다. 이들은 다른 종목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 조교·이수자가 되기 위해 보존회를 결성하는 것과 다르게, 스스로 즐기는 것으로 전승한다는 마음에서 보존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들이 2012년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신청서에 향유 커뮤니티로 전승을 다짐하는 서명을 하였다. 이 서명이 요건을 충족시켜 유네스코 등재 심사에 이를 수 있었다. 바로 이들의 자부심이 “국가정책 범위 안에서 공연, 연구, 조사 업무 등의 지원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고자 한다”며 아리랑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기여하겠다며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회장 정은하, 사무총장 고성환)를 결성한 것이다. 최근 문화재청을 방문, 국민적 아리랑경창대회를 개최하여 명실상부한 창조적 계승을 하겠다고 밝혀 활동이 주목된다.

     ◇문경시의 아리랑사업에 박수를

     #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라고 하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이를 ‘과잉된 민족주의적 표현’이라고 비난했고, 지방자치단체는 표면적으로는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기화에 한정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더 큰 문제는 ‘민족’의 90%가 아리랑의 전승 주체인 농투산이들이며, 오늘에서는 전국의 자생적 전승자들인데,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일부 교수들조차 이들의 아리랑 전승 사실을 마치 자신들의 연구대상 쯤의 하나로만 보아 전승 과정 일부의 과(過)를 부각시켜 비판하는 이들도 있고, 지자체에서는 2012 유네스코 등재를 사업의 출발 기점으로 삼아 전승자들의 기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일부 시·군 지자체 사업에서도 무시되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기도 했다. 연구자는 연구 성과로, 예술가는 예술성으로, 전승자는 창조적 계승으로, 운동가는 확산 보급으로 지자체 사업에 협조와 자문을 해야 하는데, 마치 한 지자체의 업적 기록자로 전락한 듯한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글쓴이 같은 운동가나 자생적 전승자들은 안중에도 없고, ‘열매 따기’까지 가는 투자자(?)들만이 함께 하는 듯하다.” (제4회 동래아리랑제 축사에서 2015년 12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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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뉴시스】문경새재아리랑비
     돌려 말할 필요 없이 이 대목의 키워드는 문경시의 아리랑 현상을 말한 것이다. 지난 12월13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아리랑도시 선포식’이 있었다. 문경아리랑의 가치를 인식시키기 위한 강연과 국립박물관 건립을 발의하여 전시회와 자문위원단을 구성하고, 팔도아리랑 사설을 한글(서예가 아님)·한지·아리랑의 융합을 통해 세계에 알리자는 제안과 실행 주체 구성을 한 본인으로서는 이런 발전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한다고 하니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정선군에 이은 두 번째 아리랑재단 출현이니 문경시의 아리랑사업에 대한 진정성이 묻어나는 선언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경시의 아리랑 사업에서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문경아리랑의 역사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헐버트의 아리랑악보로’(‘아리랑도시 선포문’ 2쪽) 세운 비석의 문제이다. 이 비는 아리랑 사업의 초기 공(功)을 과(過)로 치부할 수 있게 할 만한데, 비(碑)는 그 영구성과 기록성으로 하여 ‘기념비적’이기에 숙고에 숙고를 거쳐 건립되어야 한다.  

     ◇헐버트 ‘아리랑악보비’인가 ‘문경새재아리랑비’인가? 

     왜 문경시가 세운 이 비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느냐는 우선 내용이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과 건립을 발의하고 추진하고 성문(成文)하고 새기고 입비(立碑)하는 과정에 누구도 진정성 있는 자문을 해주지 않았거나, 건립자인 시장이나 실무자인 일부 공무원의 독단으로 자문을 거치지 않았거나, 또 아니면 자문 내용을 무시했을 수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문경새재아리랑은 근대민요로서의 아리랑 시원’임을 입증하려는 취지를 명문화 비명(碑銘)과 내용이 후일치하지 않고, 내용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가 1차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에 응답이 없었고, 그 시점으로부터 10여개월이 지났는데도 수정이나 폐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과 담당 공무원의 독단이 있다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글쓴이가 강원도 정선군 정선역 광장에 있던 ‘도원가곡비’에 대해 1986년 내용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자 이의 사실을 확인한 정선유도회와 정선청년회의소는 즉시 철거, 폐기하였다. 이는 비의 기록은 그만큼 정확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의 책임은 막중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인데, 이런 전례에 비추어 보면 문경시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거나 시장과 일부 공무원의 독단이 내재해 있다고 보게 된다. 문제를 제기한 글쓴이에게 문경시는 반론도, 지적에 대한 문의도 일체 없었다. 이제 1차 시장과 담당자, 2차 시장에게 전달한 비의 문제점을 다시 지적하는 것으로 수정이나 폐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비 전면 표제 ‘KOREAN VOCAL MUSIC’은 논문 표제이지 아리랑 악보에 대한 표제가 아니다. 이 표제의 논문 안에는 아리랑 외에 두 개(시조와 군밤타령 악보 각 1편)의 악보가 더 있어 비명과 일치하지 않는다. 당연히 비 후면 내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후면의 문제다. ‘문경새재아리랑비 건립취지문’은 ‘문경새재아리랑비’ 건립취지문인지, ‘문경새재아리랑의 가사를 쓴 헐버트의 채보 아리랑 기록’에 대한 취지문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다. 이런 불명확함은 대표사설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들어가는 것은 곧 ‘문경새재아리랑’이라고 하는 오류를 낳게 된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아리랑의 원형인 헐버트의 아리랑악보’(선포문 원고 2쪽)같은 표제나 문구 사용은 비 같은 선언적 기록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또한 후면 내용 중 “모든 아리랑의 고개 대명사···”라는 문장도 정확한 기술이 아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모든 아리랑고개의 대명사···”로 해야 한다. ‘아리랑의 고개’라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나라 아리랑 기록상 그 첫 시원···”이란 문장이다. 이는 “근대민요 아리랑 기록상 그 첫 시원···”이라 해야 옳다. 왜냐하면 1896년 기록을 기준으로 한다면 1894년 정월 ‘매천야록 신성염곡 아리랑’ 기록과 1894년 5월 일본 우편호우지신문 ‘조선의 유행요’ 기록에 이은 세 번째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타 지역의 반발을 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부차적인 문제는 다음이다. 헐버트의 공식 직함을 ‘외무특사’라고 했다. 그러나 헐버트는 처음 ‘교육자’로 왔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다시 ‘선교사’로 입국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1904년부터 1905년 사이 고종의 특사(밀사)로 활동하였으니, 그의 직함은 교육자·선교사·고종특사 모두를 쓸 수는 있다. 그렇다고 ‘외무특사’만 쓰는 것은 자칫 아리랑 채보가 외교관의 돌발적인 의외의 결과로 1886년부터 1896년까지 10년간 연구한 결과라는 사실을 희석시킬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직함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비 후면 끝에 ‘문경시장 고윤환’이라 새겼다. 이는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고윤환’으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

     아리랑은 문경을 넘어, 영남을 넘어, 남한을 넘어, 남북을 넘어, 세계 인류 보편적 문형유산이 되었기 때문에 ‘문경시장 고윤환’이란 표현은 소아적이다. 이 시대 아리랑 사업 중에 헐버트의 기록을 기리고 이 기록과 문경아리랑의 연관성을 주목하는 모든 이들의 추대로 구성된 ‘건립추진위원회’ 대표로 비를 건립했다는 명분과 역사성을 함의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리랑의 핵심인 대동정신에 입각할 때에도 ‘나의 업적’이 아니라 동시대 ‘우리의 업적’이어야 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족-헐버트의 1896년 아리랑 기록은 글쓴이가 1985년 10월30일자 조선일보를 통해 발굴, 보고했고 1886년 육필악보 수록 편지 존재도 필자가 2015년 8월18일 민영통신사 뉴시스와 KBS 9시뉴스를 통해 발굴, 보고하였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www.arirang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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