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아리랑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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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2] ‘애국가’인가 ‘국가’인가?‘애국가’인가 ‘국가’인가?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2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1.24 09:00:0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국가(國歌/National Anthem)는 국호 대한민국·국기 태극기․국화 무궁화와 함께 노래로서 나라를 표상하는 국가 상징물의 하나이다. 추상적인 대한민국을 구체적으로 역사성과 이념을 가사와 선율로 나타낸 것이다. 이로서 국가는 부르는 이에게 민족 정서를 통해 이념을 일체화 시켜 연대감과 동질감을 갖게 하는 것을 첫 째의 기능으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기능음악이거나 정치음악이지 감상을 위한 절대음악은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가는 ‘애국가’(愛國歌)다. 이 애국가는 국가 고유 곡명이면서 동시에 나라를 사랑하자는 계몽가로서의 명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기능상으로는 ‘나라의 유일한 제도적 노래’인 국가이면서 ‘나라를 사랑하자는 계몽적 노래’(Patriotic Hymn)의 하나인 애국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National Anthem인 동시에 Patriotic Hymn이고, 명칭은 <Ae-kuk-ga>인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 국가와의 차이이기도 한데, 그러므로 정확한 표기는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라고 하고, 식순에서도 ‘국가 제창’이라고 해야 옳다. 우리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라고 하지 않고 ‘국기에 대한 경례’라고 하듯이 ‘국가 제창’ 또는 ‘국가 애국가 제창’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을 하면 오늘날 우리가 의식에서 표현하는 ‘애국가 제창’이라고 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서부터 ‘아리랑’은 물론 북한의 ‘애국가’도 포함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국가는 하나지만 애국가는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일각에서는 ‘우리는 국가(國歌) 없는 국가(國家)’라며 국가를 빨리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 했고, ‘애국가는 차라리 아리랑으로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런 주장은 다른 이유와 명분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가 ‘애국가’라는 곡명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곧 ‘국가 애국가’라는 표현에서 느끼듯이 제도적 기능(위상)명과 곡명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국가 아닌 애국가일 뿐’이라고 잘못 이해한 결과라는 것이다. 굳이 국가와 애국가를 동일시하는 중의적 표현을 쓴 데는 구한말 민족 구성원들 나름의 합의가 있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상황에서 애국하여 나라는 지키는 것이 우선이지 권위적인 국가의 필요성은 두 번째라는 인식이 강하여 ‘애국가’를 ‘국가’로 동일시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명확한 증거는 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자 논설에서도 공공장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불러야 한다고 했고, 이를 전후하여 독립신문이나 각종 학교나 교회에서도 많은 애국가류를 창작하여 불렀던 것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1897년 8월 17일자 독립신문의 ‘대조선 개국 오백오회 기원절 축사’ 기사에 나타난 ‘무궁화노래’(윤치호 작사)를 이후 민중들이 이를 부르면서 곡명을 ‘애국가’로 고처 불렀다는 사실이다. ▲ -1902년 대한제국 반포 <대한제국애국가> 독일어 본 표지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양악식으로 편곡하고 귀국하여 궁정음악가로 복귀한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를 초빙하여 작곡하였다. 또한 조정이 독립신문 등의 애국가 운동을 받아들여 1902년 공식 제정 반포한 국가 명칭이 ‘대한제국 애국가’(Koreanischen National Hymne)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독립신문 편집진 같은 지식 그룹이나 이를 수용한 민중들이나 이를 반영한 대한제국 정부도 국가를 애국가로 동일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애국가에 대해 부연하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후렴이 쓰인 최초의 명칭은 ‘무궁화노래’였다. 이 후렴을 계승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가사로 고처 발표한 것은 1908년 ‘찬미가14장’이다. 그러니까 작사자는 ‘무궁화노래’와 ‘찬미가14장’이란 곡명으로 발표했지만 민중들은 이를 ‘애국가’로 주체화 하였다는 말이 된다. 즉, 대한제국 시대나 임시정부 시대나 해방 후나 오늘이나 완전한 독립(통일) 국가를 이룰 때까지는 먼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합의인 것이다. 이는 오늘의 우리가 애국가를 단순히 의례적이거나 또는 ‘강요된 애국심’으로 부르는 것에서 매우 무거운 역사의식을 갖고 불러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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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2.18 11:40:4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1897년 7월 17일 낮 3시,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관>에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가 있었다. 이날은 조선이 개국한 날이라 기념식을 한 것으로, 사상최초의 민관합동 개국 기념식이었다. 강단에는 국기(태극기)를 게양하고 꽃 장식을 하고 하단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외국 공관원과 정부 고관들이 자리했고, 객석에는 관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도 자리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사가 주최했고 정부 재산을 관리하는 탁지부가 재정지원을 했고, 진행은 배재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했다. 강연은 서재필(독립신문 발행자/1864~1951), 아펜젤라(배재학당 설립자/1858~1902), 윤치호(전 외부 협판/1865~1945)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의 애국가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을 쓴 <National Flower>가 불렸다. 이 노래는 이후 ‘무궁화노래’ 또는 ‘무궁화가’로 표기되어 전승되었다. ▲ 영자신문 1897년 8월 17일자 가운데 ‘무궁화노래’ 기사 갈무리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에 기록되었다. 기록자는 Jaishon, P, 곧 서재필이다. 이 기록은 그동안 영문판 독립신문 <editorial note>에 실렸는데 최근에야 필자가 발굴한 기사이다. 애국가 사료로서는 일대 획을 긋는 사료이다. 이 날의 기념식을 위의 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20년 전 기념행사는 낮 3시에 시작하여 5시에 마쳤는데,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Praise)으로 시작되었다.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먼저 인사말을 했고, 외국인 참석자들을 소개했다. 이어 병중인 학부대신 이완용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배재 학당원들은 ‘무궁화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어 당시 연희전문을 설립한 아펜젤러 목사가 등단, ‘조선거주 외국인들의 의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어 서재필 박사가 ‘한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마지막 강연자인 윤치호가 나와 강연을 했다. 윤치호의 강연 제목은 <우리가 기념하는 날>로 주제는 “청국의 역사는 잘 알면서 우리 역사는 모르는 것이 현실”이라는 요지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서재필은 이 날 부른 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 영자신문 에 ‘무궁화 노래’ 기사를 올린 서재필의 만년 모습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하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다.” 다른 노래에 대해서는 ‘배재 학생들의 찬양’과 같이 의례적인 표현을 했는데, 두 번째 노래는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특히 윤치호를 ‘계관시인’(Poet Laureate)이라고 칭하여 작사자임을 명확히 했다. 이 기록은 거의 120년간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현 애국가를 윤치호로 인정한다 해도 동일 후렴이 이미 1897년부터 불려 왔으니 그 후렴이 포함된 <무궁화노래>가 윤치호 작사라는 증거가 없는 한 애국가 작사자를 단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1970년대부터 중요한 논거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 서재필 기사가 2015년에 밝혀짐으로서 애국가 작사자를 명확하게 밝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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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0] ‘계관시인 윤치호’, 무궁화가 작사‘계관시인 윤치호’, 무궁화가 작사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0]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7.25 11:07:1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애국가>의 후렴은 1897년부터 불린 <무궁화가>에서 쓰인 것이다. 그래서 <무궁화가>를 작사한 이가 <애국가> 작사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논리에서 윤치호가 <무궁화가>를 작사했음이 확인 되어야 한다. 이는 최근 영문판<독립신문>의 발굴에서 확인 되었다. 1897년 8월 8일에는 독립협회 <통상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서재필과 윤치호는 회원들에게 독립협회 활성화를 위해 토론회의 조직체 결성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 위원 3인을 선출했는데 윤치호 등이 선출되었고, 윤치호가 독립협회를 시민들의 참여를 확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는 각종 기념행사에서 강연과 통역은 물론, 기념가를 지어 사용하는 활동이 확인이 된다. 바로 1897년 8월 13일 오후 3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 참여다. <독립관>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 대해서 먼저 당시 독립신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행사 4일 후 17일자의 보도이다. ▲ 독립신문 ‘무궁화 노래’가 불렸다는 기사 1897년 8월 17일자 일젼에 독립관에셔 긔원졀 츅샤 일에 죠흔 연셜이 만히 잇시되 다 긔록 할 슈 업셔 대강 긔록하노라. 한셩 판윤 리채연씨가 연셜 하되 무론 엇던 나라던지 신민이 신민의 직무를 아니 하거드면 졍부에셔 졍부 직무 하기가 어려온지라 그런고로 의졍 대신 이하로 각기 직무를 거드면 그 나라 일이 져졀노 잘 되 법이라.(줄임) 아편셜라씨의 영어 연셜은 후일에 번역 하야 낼터이요. 윤치호씨의 연셜은 긔원졀을 죠션 인민이 경츅하는 일이라. 나라마다 경츅이 잇는 긔원졀이 조선이 경츅졀이라.(줄임) 젼국 인민이 당쵸에 긔원졀이 무엇인지 모르니 엇지 한심치 아니 리요. 죠션 인민이 이럿케 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른 나라 모양으로 자긔 나라 샤긔와 자긔 나라에 유명 인사들의 뎍들과 자긔 나라 디위를 공부 아니 하고 다 쳥국 것을 한즉, 자긔 나라 일은 도모지 모르고 죠션 인사들의 문벌이나 공부 하며 무단 협잡 하면 돈 벌 것이나 알고 자긔 나라에 영광 되고 쟈랑스런 것은 하나도 모로고 다 못된 학문들만 잇시니 국가에 셜령 아무 죠흔 일이 잇드라도 국민들이 그걸 엇지 경츅 하는 걸로 알 것이오. 윤씨의 말이 죠션 인민들이 죠션이 자긔의 나라인줄로 알게 하는 학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 독립신문 1897년 8월 17일자 논설) ▲ 97년 순종의 기부금으로 거립된 독립관 기사에서 윤치호는 교사 아펜젤라와 의사 서재필에 이어 “긔원졀을 죠션 인민이 경츅하는 일이라”라고 시작하는 연설을 했다. 국민들이 조선이 개국한 날인 기원절을 모르는 것은 중국 역사를 공부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모순임을 역설하고, 이제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시대를 맞자는 권고였다. 개화의식과 반청자주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 행사는 국가적 행사였다. 바로 노래가 의례적으로 불린 행사였다. 대죠션국 오백오회 긔원졀 츅사를 팔월 십삼일 오후 셰시에 독립관에셔 국긔를 놉히 달고 그 아래 화쵸로 단쟝 하엿서 졍부 대쇼 관인과 여러 학도와 인민이 만히 모혓시며 각국 공령사와 신사와 부인들이 각기 례복을 가쵸 입고 뎨뎨히 안졋는지라. 그 츅수가 일졀를 보니 쳐음에 학당 학원들이 츅슈가를 불너 오천 여년 우리 왕실 만셰 무궁 도으쇼셔 찬송 하니 외국부인이 악긔로 률에 쫒아 병챵 하더라. 둘 째 회쟝 안경슈씨가 연셜 하고 셋 째 한셩 판윤 리채연씨가 학부대신 리완용씨를 대신 하야 국민의 당연히 할 직무를 연셜 하고, 넷째 배재학당 학원들이 ‘무궁화 노래’를 불으니,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 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하여 보셰 하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병챵 하더라다. 다섯 째 미국 교사 아편셜라씨가 영어로 죠션에 거류 외국 인사들을 대하 야 각기 당연히 할 직무를 연셜 하며, 여셧 째 졔손씨가 죠션 관민들을 대하야 진보 할것을 연셜 하고, 일곱 째 배재학당 학원들이 ‘나라 사랑하는 노래’를 불으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쫒아 병챵 하더라. 여섯 째 젼 협판 윤치호씨가 긔원졀일 문졔를 연셜 한 후에 탁지 대신 심샹훈씨가 졔손씨와 외국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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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9] 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9]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7.17 11:28:31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은 194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고(愛國歌 攷)>(2)에서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발행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으로 쓴 것이다. “뚜렷한 역사의 사실을 조작할 수는 없다.”라고 전제하고, “윤치호의 처지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리한 관사가 붙게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작이 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한”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로 윤치호가 1945년 9월 자필로 애국가 4절을 남긴 <가사지>이다. “고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밝힐 건 바로 밝히고 시정할 것은 바로 시정해야 한다. 위정당국은 이 사실을 규명하여 공포함으로써 국민 교육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하여야 될 것”(동아일보, 1948. 10. 7) 이후 이 <가사지>를 주목한 이는 신학자 백낙준(白樂濬/1896~1985)이다. 그는 소론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고>(윤치호선집 2, 1999)>에서,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외증(外證)으로 “좌옹 자신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자기의 작이라고 서면으로 증언한 바가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은 기독교 서지학자 윤병춘(尹春炳/1918~2010) 목사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가 임종하시기 전에 자녀들의 권유로 쓴 친필 애국가는 일제치하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자신임을 알리지 못했던 것을 조국 해방 후에 밝히려 했던 것이며,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큰 뜻을 자손 대에서 이어주기를 바라는 유언장이기도 했다.(윤병춘, <윤치호선집 2>, 1999) 또한 최근에는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도 이 <가사지>를 증거로 다음과 같이 윤치호를 작사자로 인정했다. “애국가 노랫말을 지은 사람이 윤치호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신문은 윤치호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손수 붓으로 써서 '윤치호 작사'라 해 놓은 것을 사진으로 공개한 것이다. 이래서 지금까지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1955년 윤치호 가족으로부터 <가사지>를 사본화 하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제(解題)를 달아 놓았다. “愛國歌 / 분류 書畵 > 筆蹟 / 등록번호 史資 2220 / 본문 愛國歌 /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 佐翁 尹致昊(1865∼1945)가 애국가 가사를 자필로 쓴 원고. 사진 자료의 끝 부분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쓰여 있음. / 1(2), 한글 / 소장; 서울특별시 尹永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종합데이터베이스 검색, ‘애국가’) 현 애국가 가사를 첫 기록인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자필 <가사지>, 그리고 현재 것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1908년 재판 「찬미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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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8] 김구, 왜 애국가 작사자 이름을 잊었다고 했나?김구, 왜 애국가 작사자 이름을 잊었다고 했나?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김연갑 애국가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7.07 11:34:3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애국가학교 교장] 임시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를 누구로 알고 있었을까? 이는 김구 주석의 인식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김구 주석은 1945년 애국가 악보에서 그 해석을 가능케 하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바로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한국애국가(韓國愛國歌)》란 악보집 기록이다. 이 악보에는 중국 충칭(중경)에서 발행된 김구의 장서인과 친필로 표제를 쓴 표지 왼쪽에 ‘金九 題(김구 제)’와 ‘金九之印(김구지인)’이라는 인장과 김구 친필로 ‘一九四五 十月十八日’(1945년 10월18일)이 쓰여 있다. 뒷면 중앙에는 중사장(中山裝)의 김구 사진이 있고, 사진 아래쪽에서는 <한국애국가 고사(故事)>와 작곡자 그리고 번역자(중역/민석린, 영역/정한범)를 소개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이 악보집 출간에 의한 실물 악보를 보지 못하고 귀국했을 것이다. 이 악보집은 충칭의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라는 출판사에서 이사소(李士釗)가 편집, 발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 국가의 역사성을 비롯해 변천 과정과 법적 지위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다.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중국 중경에서 맞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요인들의 귀국을 앞두고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한국애국가(韓國愛國歌)》 악보를 발행했다. 이 악보의 존재는 1942년 미국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애국가의 올랭사인(Auld lang syne) 곡조를 이어서 신곡으로 변경 요청한 것을 허가해준 후, 이어서 중경임시정부도 자체적으로 안익태 곡으로 바꾸고 이 신곡을 ‘애가(國歌)’로 불러왔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진행시키는 가운데,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체는 중국정부가 임시정부와의 문화적 유대를 토대로 교류를 통한 한중우호를 증진시키려는 공공외교의 채널이었다. 이 무렵 중한문화협회가 인쇄비를 음악월간사 이사소에게 지원하는 형태로 중경임시정부는 《한국애국가》악보를 발행하게 된다. 김구 주석의 측근 엄항섭(嚴恒燮)와 민필호(閔弼鎬) 등이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발행된 이 악보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홍보하는 목적과 함께, 광복 한국의 영도자로서 김구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애국가》는 대한민국이 법통을 이어 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발행한 마지막 출판물이며, 동시에 임시정부 주석의 명의로 출판된 첫 “국가(國歌)의 악보(樂譜)”이다. 안익태 곡 애국가는 1948년 정부 수립 시에 “대한민국 국가(國歌)”로서가 아니라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채택한 국가(國歌)”로 먼저 확정되었다. 그런데 김구는 애국가 작사자에 대해 <한국애국가 고사(故事)>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애국가는 ①50년 전에 한 ②한국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③일명(佚名, 이름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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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7]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따로 있었다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따로 있었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7]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6.28 11:09:05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955년부터 1956년 8월까지의 국사편찬위원회 소관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첫 해 3차에 걸친 조사결과로 윤치호가 유력하나 확정을 하지 못했다. 위원회에서 표결결과 11:2로 만장일치가 되지못해 윤치호로 확정을 하지 못했다. 이는 일면 신중을 기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문제를 학술적 결론이 아닌 거수로 결정하려했다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 못 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듬해 8월 국사편찬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는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동안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오해가 있게 된 것인가? 그것은 안창호가 1907년 귀국하여 국가(國歌), 국기(國旗), 국화(國花) 같은 국가상징의 필요성을 강연을 통해 표하고 나름의 ‘애국가’를 작사한 것에 따른 것이다. 다음은 귀국한 다음 달 의무균명학교에서 ‘애국가’의 기능을 설하고 지어 제창할 것을 강조한 기록이다. “西署萬里峴義務均明學校에서 去番 歸國하였던 美國 留學生 안창호씨가 生徒에게 對하여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種 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每日 上학 前에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 즉 其開明模範을 令人感昻이라. 然則 凡吾學校도 從今 施行하자 하므로 該校에서 去月曜日로 爲始하여 拜旗唱歌例를 舉行한다더라.”<國旗禮拜,『大韓每日申報』1907년 3월 20일자> 이는 안창호가 미국의 경험을 제시하며 한국에서도 이를 따를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직접 ‘애국가’를 작사했다. 이 존재는 1908년 3월 『태극학보(太極學報)』 제18호에 발표한 <애국가(愛國歌)>로 확인 된다. 필명을 ‘애국생(愛國生)’으로 하여 망국의 책임이 누구 탓도 아닌 너와 나의 탓이므로, 주인으로서 애국정신과 하나 된 단체 힘으로 나라를 되찾아 중흥영웅이 되자고 하는 내용이다. <애국가> 1. 슬프도다 우리민족아 / 사천여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 오늘날 이지경 웬일인가 2. 일간두옥도 내 것 아니요 / 수묘전토도 내 것 못되네 무리한 수욕을 대답 못하고 / 공연한 구타도 거져 밧노라 3. 남산초목도 눈이 있으면 / 비창한 눈물이 가득하겠고 동해에 별도 마음이 있으면 / 우리와 같이 슬퍼하리라 4. 한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 죽기전 한번 움직거리고 조그만 벌도 남이 다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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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4] 3•1만세운동과 애국가3•1만세운동과 애국가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4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3.01 10:08:2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만세운동’이란 나라를 오래도록 유지시켜 달라는 기원을 구호로 하여 저항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3•1운동에서의 “만세”는 “조국이여 만년동안 계속 될 지어다”라는 뜻이다. 이때의 운동이 위와 같이 저항의 한 수단인〈만세운동〉이었음은 민중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모두 현실의 학정에 비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한국 정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이니 우리 다 같이 끝까지 독립만세 시위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그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성 시내가 만세 소리에 “떴다 잠겼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 시위에 대한 스스로의 명칭에서도 ‘만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시위를 용천리 시위에서 희생자가 많이 난 것에 대해 현북면민이 위로하기 위하여 용천리로 가서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위로 만세”라 했던 것이다. 또한 이때 만세 운동을 위해 집결한 하조대 뒷편의 고개를 “만세고개”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굳이 군수나 면장이나 구장(리장)등의 관공리를 앞장 세워 만세를 부르게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개성에서 일인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것과 경남 진주 시위에서 군수 민인호를 “사로잡아 제복과 제모를 벗긴 후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한” 경우나 함안 가야면 시위 때 관헌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한 경우 등이다. 이같이 만세를 부르게 한 것은 관리들로부터 항복을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 수원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3•1만세시위에 앞장썼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만세운동에서의 무기는 없었다. 다만 시위 도구는 있었다. 그것이 바로 깃발과 구호와 노래였던 것이다. 깃발은 태극기였고, 구호는 ‘조선(대한)독립만세’가 주였고, 노래는 ‘애국가’가 주였다. 물론 태극 깃발 외에도 농민들이 사용한 ‘농기도 사용되었듯이 노래도 ’애국가‘뿐만 아니라 교가, 찬송가, ’아리랑‘ 그리고〈애국가〉류와 〈독립가>류도 불렸다. 이중에 애국가와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불린 노래이다. “이때에 일본 헌병이 쫓아와서 제일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를 외치던 최석일의 태극기를 든 바른팔을 무도하게 일본도로 내리쳤다. 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 팔과 함께 떨어진 깃발을 얼른 왼손으로 주워들며 그냥 만세를 불렀다. 헌병은 다시 그 왼팔마저 칼로 내리쳤다. 최는 양팔을 다 잃었지마는 안색이 오히려 태연하여 입만으로도 만세를 계속하였다. 악귀와도 같은 일본 헌병은 이번에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최의 목을 쳐서 그는 장렬하게 순사했다. 이같이 최가 쓰러져 죽자 그 바로 뒤에서 행진하던 김사걸이 최가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워들고 계속 앞장서서 나갔다. 이번에는 헌병 보조원이 짐승을 죽이는데 사용하던 쇠 갈구리를 들고 달려들어 그의 배를 쳐서 질질 끌고 가던 도중 일본인 헌병이 총탄을 발사해 죽고 말았다.“ 이상과 같은 상황은 경남 창원군 진북면 사동리 시위에서 김수동(金守東)의 경우이기도 한데, 이처럼 태극기는 시위에서의 중요한 도구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3•1운동 중 일제의 제암리 학살에 이어 두 번째로 악명 높은 정주 학살 사건 그리고 진북 학살사건에서 태극기의 위상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3월 1일 오후 1시였다. 남녀교인들과 시내 지식계급에 속하는 유지들이 식장인〈숭덕학교〉교정으로 모여들어 장내는 1천 수백 명에 달했다. 선교사 모페트(馬 布三悅)도 내빈석에 와 앉았고 일본인 경찰인 사복형사들이 경비진을 지키고 있었다. 봉도식(奉悼式)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고 끝나자 돌연히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어 군중들은 꼭 10년 만에 다시 대하는 국기인지라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 주목할 즈음, 도인권(都寅權)이 단상에 뛰어올라 이제부터 ‘조선독립선포식’을 거행하겠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목사 정일선(丁一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목사 강규찬이 연설했다. 식은 목사 김선두가 사회하였고, 애국가 봉창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였는데 승덕학교 교사 황찬영과 윤원삼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날라다가 군중에게 나누어 주자 만세소리가 우뢰와 같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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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3] 독립신문의 애국가운동독립신문의 애국가운동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4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2.18 11:22:0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입지가 강화된 일본은 1898년 시베리아 철도 부설과 부동항 확보를 최우선으로 삼은 러시아와 조선을 사이에 두고 충돌했다. 이러한 상황에 주눅이 든 고종은 급기야 1882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러시아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싶다.”며 ‘조미수호조약’대로 조선을 도와줄 것을 미국에 기대하는 나약함의 소유자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 독립신문 폐간 까지의 로고 , 글판과 영문화 이러한 상황을 국가의 위기로 인식한 일부 지식인들, 이를 테면 서재필과 같은 인물들은 국권수호와 자주독립을 위하여 국민을 계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곧 계몽을 목적으로 한 신문의 창간으로 바로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의 ‘독립’ 용어 사용은 1894년 음력 12월 12일 고종이 종묘에 올리는 고유문(告由文)에서 처음 쓴 것을 시작으로 세 번째 사용으로 독립신문은 제호에 태극무늬까지 넣어 시대정신인 ‘독립’을 사시(社是)로 제시하였다. 이 신문의 ‘독립’은 국가 구성원 모두가 새로운 문명에 눈을 떠 인권을 존중하고, 국민 각자가 직분을 다하여 나라의 부강을 통해 세계 국가로 자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애국심 발양을 국권수호의 기본 강령으로 삼아 신문을 통해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자주권을 유지하려면 국민이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도 가져야 한다.”며 천부지성(天賦之性)이 자주 국권을 지키는 정신적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애국심은 국민이 국정의 참여를 허락해 주고 민권을 신장시켜 줌으로서 민중이 나라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할 때에 형성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독립신문은 <애국가 지어 부르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실천의 한 결과가 3년 동안 13편을 게재하고 논설에서 애국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분명히 애국계몽이라는 지향점을 갖는 실천운동의 결과로 우리 역사 최초의 ‘애국가 개창운동(皆唱運動)’인 셈이다. 이로부터 종래의 잡가나 민요 형태인 3․4조나 4․4조 운율에 매 행 띄어 쓰지 않고 2행 1구를 만들어 상하 양단에 나누어 쓰는 형식에서 가창에 적합한 4절 내외의 형식과 ‘합가’(合歌)라는 형태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의 합가는 일반적인 후렴과 같이 되풀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노래하는 것을 말하는데, 찬송가 곡조에 맞춰 부를 수 있는 것 등 다양한 형태였다. 형식으로는 전통적인 것에서 가깝지만 그 내용은 한결같이 우리나라, 자주독립, 만세, 애국, 하나님, 충군, 태극기, 부국강병 등 시대상을 반영하는 말들로 이루어져 그 대의를 담은 새로운 노래들임이 분명하다. 이때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각계각층으로서 학생, 주사(초급 공무원), 기사, 군인, 예수교인 등이다. 이들은 투고(投稿)시에 직업과 주소까지도 밝히고 있음이 이색적이기기도 한데, 중류층이나 서민층에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격려에 의하여 독자들에 의해 기고한 각종의 애국가란 이름을 붙인 가사들이 많이 게재되었다. 독립신문은 애국가에 대해 사설은 물론 ‘잡보란’을 통해서도 그 필요성과 기능에 대해 계몽했다. 예를 들면 <관립소학교>가 훈련원에서 개최한 운동회에서 애국가를 부른 상황을 보도한 것이나 ‘대죠션 셔울 야소교회가 대군주 폐하 탄신 경축회에서 애국가를 부를 예정’이라는 보도, 그리고 ‘조선졍부 학교가 학교에 국기를 게양하고 아침마다 애국가를 부르게 된다는 사실’ 등을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1896년 4월 7일 창간, 1899년 12월 4일 폐간까지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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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 장준하의 감동적인 애국가 증언장준하의 감동적인 애국가 증언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1.17 12:06:2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한 정치인의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따진다면 아리랑이 국가다”라는 발언이 애국가담론의 주제가 되었음이 현실이다. 이는 헌법에 국호(대한민국), 국기(태극기)는 규정하고 있으나 국가(애국가)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60년대 이후 많은 논란(작사자 논란, 가사 개정 논란, 작곡 표절시비, 국가제정 논의 등)이 있어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에 <한국문화신문>에서는 근대사 자료수집가로 애국가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작사자 논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국가상장연구회’ 김연갑 위원로부터 애국가 논란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자료 중심으로 풀어가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특히 독자여러분의 이의 제기나 사료비판을 적극 수용하여 애국가 역사 정리에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말) 1981년, 나는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인식하고 가슴에 담아 오다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 ‘역사의 노래’ 애국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연신내 골목 헌책방에서 산 장준하의 《돌베게》라는 책이다. 일제 학병으로 갔다가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 준위로 입대하고, 다시 광복군에 참여하다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환국하는 과정을 한숨과 격정으로 단숨에 읽게 한 책이다. 그런데, 김구선생과 환국하는 과정의 애국가 기술 부분에서 눈물지으며 따라 부르다 책장을 적시는 뜨거운 감동을 겪었다. 내 20대와 비교되는 민족사 속의 꿋꿋한 삶을 마주하고 큰 자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암송하는 이 대목! 애국가의 힘과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고, 이후 아리랑과 함께 30여년을 매달려오게 하였다. 나에게 ‘애국가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준 대목을 다시 떠올리며, 나의 ‘애국가 찾기’를 시작 하고자 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김구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조선을 지극히 사랑하는 위대한 영도자’로 평가했다는 미군 하지 중장(J. R. Hodge, 1893~ 1963)이 마련한 미군 수송기편으로 단지 ‘임정요인의 한 사람’이란 자격으로 환국 제1진으로 귀국했다. 선생을 수행한 장준하는 비행기 창으로 한반도가 보이자 창가를 향해 감동적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을 기술하였다. “누구의 지휘도 없이 ‘동해물과 백두산이…’합창으로 엄숙하게 흘러나왔다. 비행기 속 공기를 흔드는 노래 소리는 어느덧 울음 섞인 노래가 되었다. 애국가는 우리들의 심장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조국을 주먹 안에 움켜잡은 듯이 떨게 했다. 드디어 애국가는 끝까지 부르지 못하고 울음으로 끝을 흐렸다. 기체 안의 노 투사 김구마저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그 어느 누가 이 애국가를 울지 않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노래를 부르는 입모양인지, 웃음을 억누르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발음을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노 혁명가의 감격. 감상을 내어버린 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 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알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흘렀다. ‘조국을 찾고 눈물도 찾으셨구나’ 나는 마치 한 소년처럼 여울지는 가슴을 느끼며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광복과 환국의 감격을 표현해야 했고, ‘대한 사람 대한으로’라는 만남을 꿈꾸며 부를 노래가 애국가 말고 또 있겠는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은 물론, 1940년 중경임시정부 광복군 성립식에서도 광복과 환국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가 애국가가 아니었던가? ▲ 장준하 지은 《돌베게》 김구와 장준하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며 감격으로 애국가를 부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