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아리랑연합회 뉴스목록
-
2020문경새재아리랑제
-
2020문경새재아리랑제-산과 고개의 노래
-
국내외 아리랑 전승단체 #전국아리랑전승단체협의회전국아리랑 전승단체조ㅓ사 경상도아리랑 영남아리랑보존회(정은하) 대구아리랑보존회(김상준) 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전은석)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송옥자) 상주아리랑연구보존회(김동숙) 성주아리랑보존회(임옥자) 밀양아리랑보존회(윤정일) 부산아리랑보존회(김희은) 울릉도아리랑보존회(황효숙) 예천아리랑보존회(장경자) 예천토속아리랑보존회(최수인) 구미아리랑보존회(김종남) 구미인동아리랑보존회(서주달)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임규익) 경산아리랑연구보존회(배경숙) 청송아리랑보존회(이혜숙) 안동아리랑보존회(이귀남) 영주아리랑보존회(박순옥) 영덕아리랑보존회(김옥순) 의성아리랑보존회(노가엽) 경주아리랑보존회(이소래) 독도아리랑진흥회 칠곡아리랑보존회 충청도아리랑 공주아리랑보존회(남은혜) 청주아리랑보존회(강옥선) 진천아리랑보존회(김준봉) 제천아리랑보존회 (김정옥) 강원도아리랑 태백아라레이보존회(김금수) 평창우밀어러리보존회(최옥선)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기연옥) 원주어리랑보존회(남강연) 인제뗏목아리랑보존회(권원희) 고성아리랑보존회(엄기종) 강릉아리랑보존회 속초아리랑보존회 양구아리랑보존회 홍천아리랑보존회 정선아리랑 지부 (김진동) 서울경기아리랑 안성아리랑보존회(조명숙) 김포아리랑보존회(서정섭) 군포아리랑보존회(한영숙) 동두천아리랑보존회(유은서) 가평아리랑보존회(최승녀)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 남양주아리랑보존회(송규철) 포천아리랑보존회 인천아리랑보존회 구리아리랑연구보존회 전라지역 아리랑 진도아리랑보존회(박병훈) 제주도아리랑 제주도아리랑보존회(강소빈) 서귀포아리랑보존회(유재희) 제주아리랑연구회(장경숙) -국외- 디아스포라문화원(박승의), 러시아아리랑본부(공노원) 사할린아리랑합창단(최나타샤) 양주영구귀국사할린동포협회,(강상용) 하바로프스크아리랑 지부 (김석복) 모스크바아리랑 지부(신금선) 사할린 아리랑 지부 (이진선) (일본)도쿄아리랑 지부(도쿄우정의 꽃다발앙상블/전월선) (중국)연변아리랑보존회(김은희), (미국)아리랑인스티튜트 서울 지부 (마이클 람브라우) 후원회 김채원무용단
-
이사회 이사진, 국내외 아리랑 지부전국 전승단체의 전승활동 지역 아리랑제 현황 유네스코 등재 전 단체의 전승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 지역 아리랑 커뮤니티만큼 지역명을 단 ‘지역+아리랑제’를 개최한 단체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사단법인이라도 설립취지에 따른 구체적 실천을 하지 않는 단체는 제외하기로 한다. 아리랑 전승단체 창립과 전승활동 현황 (2018-07-08) 조사자:기미양 단체명(초대회장) 창립 년도 법인 년도 아리랑제 사이트 전라도 (사)진도아리랑보존회(박병훈) 1885 2016 통산1회 www.jindoarirang.or.kr 서울 경기 포천메나리보존회 1988 cafe.daum.net/pochen-menari 강원 정선아리랑연구원(김뻑국) 2001 가평아리랑연구보존회 2011 통산5회 (사)아리랑보존회(김영임) 2013 2013 미상 www.ariranginfo.com (사)서울아리랑보존회(유명옥) 2014 2015 통산2회 www.arirang21.com 가평의병아리랑보존회(유미식) 2017 통일아리랑을 부르는 모임(이호연) 2014 통산6회 www.koreansori.kr 군포아리랑보존회(한영숙) 2012 미상 김포아리랑보존회(서정섭) 2016 통산1회 구리아리랑보존회 인천아리랑보존회(손영숙) 2017 통산1회 강원도 정선아라리전수교실(김병하) 1984 정선아라리보존회(김병하) 미상 미탄아리랑전수회 1983 정선아리랑전수회(유영란) 1995 (사)정선아리랑보존회(김길자) 2005 2012 통산42회 cafe.daum.net/arari77 (사)태백아라레이보존회(김금수) 2004 2014 통산12회 (재)정선아리랑문화재단 2008 www.jacf.or.kr 정선아라리배움터(이현수) 2008 cafe.daum.net/arari0179 (사)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기연옥) 2012 통산6회 www.arirang21.or.kr 인제뗏목아리랑보존회(권덕희) 2013 2013 2회 강릉아리랑보존회(권정희) 2013 통산4회 평창아라리보존회(박원홍)
-
[경북뉴스] 한국문화재재단·한겨레아리랑연합회, 아리랑 전승자 워크숍 개최한국문화재재단·한겨레아리랑연합회, 아리랑 전승자 워크숍 개최 황진호 기자 승인 2019.11.01 17면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진옥섭)과 한겨레아리랑연합회(상임이사 김연갑)는 지난 28일부터 29일 이틀 동안 문경 STX리조트 대강의실에서 ‘아리랑 전승자 워크숍’을 열었다.이 워크숍은 11월 1일 오후 2시 경복궁에서 열릴 ‘아리랑고(告)’를 준비하기 위한 준비모임으로 이 자리에는 전국에서 46개 아리랑 전승단체 대표 150여 명이 참석했다.‘아리랑고(告)’ 행사는 경복궁 중건공사1865~1872) 7년 동안 산악민요인 ‘아라리’가 전파되면서 새로운 통속민요 아리랑이 형성되어 오늘의 전국적인 판도를 이뤘으며,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오르고, 국가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된 역사적 사실을 기리는 잔치다.이날 행사 취지 공유를 위한 특강, 행사 성공을 기원하는 고유문 서명, 공연 프로그램 논의와 연습으로 이뤄졌다.특강은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의 ‘경복궁 중건과 아리랑 전파, 확산’, 김영운 국악방송사장의 ‘아리랑, 음악적 분포상과 그 계보’, 한국문화재재단 진옥섭 이사장의 ‘아리랑, 공연 컨텐츠로서의 현상’으로 이뤄졌다.김연갑 상임이사는 문화재청 누리집에 올라있는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아리랑에 대한 해설을 통해 “아리랑의 범위, 종류, 분포상을 제시하고, 산골의 생활노래인 ‘아라리’가 후렴을 갖는 대중들이 여흥으로 부르는 오늘의 ‘아리랑’으로 환골탈태한 계기가 경복궁 중건이었다. 곧 밀양아리랑, 본조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 형성되는 계기가 경복궁 중건기 형성된 아리랑(H,B.헐버트 채보)에서부터 확산됐다”고 주장했다.또한 “경복궁 중건 공사 7년 동안 쓰인 문경새재의 박달나무가 대량 공출된 사실과 삼남지역에서 부역으로 오고간 젊은이들이 넘나든 문경의 새재가 ‘고개’로 바뀌어 ‘아리랑고개’가 형성됐다”고 말했다.김영운 사장은 “노래 이름으로는 192종의 아리랑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아리랑’이란 말이 들어 간 후렴을 쓴다는 형식의 공통성이 있다. 이를 전제로 토속민요 아리랑과 통속민요 아리랑으로 구분된다”고 밝혔다.또한 북한도 ‘아르레기’라는 토속민요를 갖고 있지만 남쪽의 아리랑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고 했다.진옥섭 이사장은 20여 년 동안 발굴한 여러 춤꾼과 소리꾼의 성공사례를 예로 들면서 “아리랑은 공연용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다양하게 꾸밀 수 있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이어서 각 전승자 단체 대표자들의 행사 성공을 기원하는 고유문 서명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고유문은 경복궁 ‘아리랑고(告)’ 행사 때 올릴 예정이다.저녁 만찬에서는 각 전승단체의 건배사와 자신들만의 ‘아리랑’ 한 소절씩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고, 초청 소리꾼 최은진의 무대도 있었다.문경에서는 문경아리랑보존회 송옥자 전승자와 회원들이 참석했으며, 참여 전승자들은 이튿날인 29일 문경새재아리랑비를 탐방하고 해산했다.(사)제주도아리랑보존회 강소빈 이사장은 “이곳 문경에서 가장 먼 곳의 참석자는 우리일 것이다. 그러나 세분의 뜻 깊은 주제발표를 듣고 ‘아리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새겼다는 것은 우리에겐 정말 큰 행운이다. 이제 우리는 며칠 뒤 ‘아리랑고(告)’ 잔치를 멋지게 치러내야 하고 이를 기점으로 ‘아리랑’을 세계의 아리랑으로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각오다”고 말했다.
-
아리랑의 역사 코너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문헌전)
-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 연혁( 1980-2021년)1983 <아리랑기행단>결성 (고문:고은·총무:김연갑) 1986 <모임 아리랑>결성 (고문:허규·나운영·김연갑) 전국아리랑보존연합회 결성 1986 제1회 <아리랑축제> 개최(국립극장) 1989 제2회 <아리랑축제>(올림픽 공원) 기간 중 전국 15대 지역 아리랑연희자 대표 모임에 서 <전국아리랑보존연합회>결성을 합의(업무 총괄: 김연갑) 1989 02 .초대회장 최서면박사(국제한국연구원 원장)추대 남북 단일팀 단가 <아리랑>합의 자문(통일원) 1990's 1991 12.최서면 초대회장의 임기 만료로 제2대 송성한(외무부 본부대사) 추대 해외 동포사회를 아우른다는 취지에서 연합회 명칭을 '한민족아리랑보존연합회'로 변경 1994 제2대 회장 임기만료 /제3대 회장에 송철원(신문로포럼 공동대표)추대 1994 08.사단법인 설립 허가(문화체육부 허가번호 제 111호) 사단법인 한민족아리랑연합회로 변경 1992 03.부터 일본`중국`러시아 등 해외동포 대상 아리랑조사 시행 1995 03.일본 미야즈카 도시오교수 『아리랑의 탄생』출판 후원. 1995 03.강원도 정선 <아리랑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결성(위원장:김병하) 1996 10.羅雲奎 <아리랑필름되찾기> 서명대회 1996 <코리아 네트워크> 개정 청원. <아리랑TV>로 1997 09.송철원 이사장 임기 만료 1997 11.공식 후원업체 <벤처아리랑>개설(대표:기미양) 1997 10.임시이사회에서 김선풍`김정 이사를 공동 업무대행으로 위촉, 결의 1997 10.아리랑연합회 홈페이지 구축 1998외국 언론 등 아리랑 관련 취재 및 협조 (현재진행중) 1998 03.아리랑문헌전시회<생활 속의 아리랑> (정선군 북면 여량리 <아리랑전시관>) 1998 08.고문. 자문위원단, 제4대 이사장에 한완상박사 추대 <김산연구회> 개설(회장:기미양) 1998 11.제 4대 한완상 이사장 취임 1999 10.정선아리랑제 <99‘한민족아리랑제전> 공동개최 및 <아리랑문헌전시회> 1999 10.제1회 <아리랑연구자대회>(정선아리랑축제), 중국 박창묵선생 초청 1999 06.일본 JAl기 기내잡지 취재지원 2000 04.밀양 <아랑제> 개막 <아리랑환타지> 공연 2000's 2000 10.<아리랑필름되찾기> 보고서 1.2.3.편 발행 및 <아리랑이 보고 싶다> 출간 2000 07.제2차 해외아리랑학술답사-일본(동경) 2000 11.<2000진도아리랑축제>공동개최 및 <진도아리랑전시관> 개관 <북한아리랑축전> 남측 위탁업무 수행 2001 07.상주아리랑 지회 개설(국내 14개 지회/해외 4개 지부) 2001 04.서울 인사동<01'통일아리랑축전>개최 영화 <아리랑>대본 완성(서경웅 감독) 북한에 공동제작 제의 2001 06.충북 제천 <제천아리랑환타지>제천아리랑보존회(김정옥) 공동(아리랑환타지 7회공연) (제작:벤처아리랑) 2001 09.충남 대전<대전아리랑환타지> 대전문화사랑회 공동 개최 2002 01.<북한아리랑축전 어떻게 볼것인가?>세미나 개최 2002 04.서울<한국대학생아리랑축전> 후원 (제작:벤처아리랑) 2002 06.범민련 공동, <6.15 공동선언기념 음악회 <아리랑을부른다’>(남인사마당) 개최 2002 06.북측<아리랑축전>, 남측 업무 위탁 받음 2002 06.<6.15 공동선언기념 음악회 ‘아리랑을 부른다’>공동개최 2002 11.<아리랑축전 업무종결보고서> 발간 <김산의 아리랑>사이버 공간 구축 2002 12.김산의 독자 고영광에게 <김산의 '아리랑'원전 기증식> 2002 10.<나운규탄생백주년기념 문헌전시회>(인사화랑)(제작:벤처아리랑) 2003 01.정전50주년기념판문점<평화의노래 아리랑>행사추진(한미연합사3회논의) 2003 03.음반<다시 부르는 아리랑>공동기획 및 발매 2003 03.<김산선생 서훈추서>을 위해 중국북경 고영광 방문 2003 06.<정전60주년 ‘특별한 아리랑음반 전시회’>와 기념특강(인사화랑) 2003 07.<‘아리랑치기’ 용어 사용금지>에 대해 대정부 청원, 실행 2003 08.<북한아리랑축전>공동개최 논의를 위한 총련계와 회합(동경) 2003 08.<아리랑박물관> 건립추진위 결성 2003 08.대구유니버시아드 기념 <대구아리랑축제> 공동 개최 2003 09.<재외동포음악인 초청 행사>(일본 김학권선생 초청간담회 및 아리랑학술답사) 2003 12.<2003아시아 태평양 문화연대 공연 및 국제문화포럼> 후원 2004 09.<정선아리랑지부개소식(지회장:위봉돈) 2004 10.영월아리랑지부 개소식 (지회장:박대헌) 2005 01.아리랑컨텐츠화 사업 <민족의 노래 아리랑>구축(중앙대와 공동) 2005 03.<아리랑의 세계화 위원회>결성 (김진선지사/ 한명희박사 공동대표) 본 단체 주 관단체로 선정 2005 03.<렉쳐 김순녀정선아리랑발표회>(우면당)(제작:벤처아리랑) 2005 03.해외 원로와의 전국아리랑 학술답사(유타주립대 이정면 박사) 2005 04.국회(문광위 김재홍 의원)와 문화재청에 <아리랑 포괄 지정>에 대한 정책제안 2005 07.강연회 김산 서훈기념 <김산선생의 복권 의미> 개최 2005 06.음반<연변속의 아리랑:아리랑랑랑>공동기획 2005 03.<아리랑세계화위원회>결성 2005 03.<아리랑낭랑> 밴드결성 및 음반기획및 홍보.지원 2005 10.제1회 <영천아리랑축제> 공동 개최 2005 10.아베의 <아리랑필름>추적 활동 (현재 진행중) 2006 03.일본 사이트<게이샤의 노래 아리랑> 아마존 판매 폐쇄 요청, 실행. 2006 03.<아라리 3대명가 김길자>음반공동 기획 2006 05.<2006‘하이서울>'퓨전아리랑' 제작 및 공연주관 2006 06.<DMZ아리랑평화페스티발> 개최 2006 08.소리극 '김산의 아리랑'(2006/2012) (기획:기미양/아리랑학회) 2008 08.제6회 대구아리랑축제 <김구의 아리랑> 공동기획(고영광 초청) 2009 08.제7회 대구아리랑제 공동기획 및 <김산의 아리랑> 문헌전시회 2008 09.영화<아리랑>개봉82주년기념학술회 개최(발제자:김종욱`김연갑 ,기미양.) 2008 08.제6회 대구아리랑축제 <김구의 아리랑> 공동기획(고영광 초청) 2008 10.김산서거70주기기념특강(작가: 이원규) 개최(마고싸롱) 2009 06.<영천아리랑의 귀향>강연회 개최(영천 문화회관) 2009 08.제7회 대구아리랑제 공동기획 및 <김산의 아리랑> 문헌전시회 2009 03.<한류난장 ‘아리랑’공연한마당>후원 2009-화성아리랑 콘서트 (기획:벤처아리랑) 고구려아리랑 콘서트 (기획:벤처아리랑 /주관:고구려문화연구회) 2010's 2010 03.한국전쟁 참전용사와 함께 하는 <아리랑콘서트> 추진(DMZ) 2010 03.<아리랑세계화위원회> 결성 2010 04.일본 <교토통신> 국내 아리랑 취재 지원 2010 05.제4차 해외 아리랑학술조사-일본(도쿄 일대) 2010 09.<영화 ‘아리랑’ 개봉84기념토론회>(김종욱,김종원,기미양,조희문.사회:김연갑)) 2010 11.<한민족아리랑의 날>제정 추진위원회 결성 2011 06.중국 아리랑사태에 대한 대정부 성명서 발표 2011 06.매년 6월25일 6시25분 <한민족 아리랑 함께 부르기>운동 전개 2011 06.제5차 해외아리랑학술조사-일본(오사카 지역) 2011 06.일본 <아리랑필름> 추적을 위해 아베씨 담당변호사 방문 2011 08.<문화공정대응시민연대>단체 참여 (http://cafe.daum.net/UNESCO21) 2011 09.<아리랑학회>개설, 단체 참여 2011 11.이인식의 콘서트<2011아리랑타령> 후원(세종문화회관) 2013 03 <렉쳐 남은혜의 아리랑> 총기획 (장소:국립국악원) 2014 03 <판아리랑> 총기획 및 진행 2014 08 러시아비로비쟌아리랑제(장소:러시아 비로비쟌) 2015 02.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주관 2015 04.아리랑남북교류협의회 설립 2015 09.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설립 2016 06.아리랑학교 개설(교장:김연갑) 2016 12.제1회사할린아리랑제(장소:사할린) (공동주관;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2016 12.사할린아리랑학교 개설 2017 03.<사할린동포와 함께 아리랑> 주관(공동주관:아리랑학회/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2017 03.아리랑학교 개설 (주최:문경문화원/주관:아리랑학교 (교장:김연갑)) 2017 04.<강원 남북아리랑의 재발견> 기획(공동주관: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아리랑학회) 2017 09.고려인아리랑제(고려인강제이주80년희생자추모식)(주최:기억과동행위원회와 서 울시/후원:동북아평화연대) 2017 09.제2회사할린아리랑제(장소:사할린) (공동주관;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제12회 아리랑상 개최(수상자:러시아 사할린 홈스크 시장 수호메소브 안드레이) 2018 08.사할린아리학교 개관 (주관:아리랑학교/운영자:기미양) 2018 02.제12회문경새재아리랑제-디아스포라 아리랑 총기획 2018 02. 전국아리랑워크샾 주관 (주최:문경문화원) 2018 12. 제11회문경새재아리랑제(디아스포라 아리랑) 공동주관 제14회 아리랑상 개최 (프레스센타) 2018 12.아리랑학회학술대회(서울 태화빌딩) 2019 03.사할린아리랑합창단 개설(양주 영구귀국 사할린동포 2019 10.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 50개 지역 아리랑전승단체 참가 '아리랑길놀이' <아리랑퍼레이드)>광화문광장 <55개 지역 아리랑워크샾> 주관 (주최:문화재청) 2019 11. 경복궁아리랑고 (40개 지역 아리랑전승단체) (주관: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2019 12. 제3회사할린아리랑제 (사할린한인협회 공동주관) 2020's 2020 01. 러시아아리랑학술답사 (하바롭스크. 사할린)_(주관:아리랑학회) 2020 06.제13회문경새재아리랑제 (문경문화원 공동주관/총기획) 2020 05-12 아리랑코로나부르기(독도에서 제주까지) (주관:아리랑학회/왕십리아리랑보존회)
-
[연합뉴스] 영화 `아리랑' 찾기 위해 정부지원 절실영화 `아리랑' 찾기 위해 정부지원 절실 기사입력 1995.08.29. 오후 4:46 스크랩 본문듣기 설정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1 댓글 요약봇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서울=聯合) 영화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씨, 영화 아리랑필름 되찾기 100인회 의 김경원회장 등으로 구성된 한민족아리랑보존연합회는 29일 春史 羅雲奎의 아리랑 을 되찾기 위해서는 정부가 직접 나서 일본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연갑씨 등은 이날 세종문화회관 문화사랑방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는 아베 요시시게가 아리랑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필름공개나 제공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정부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김경원회장은 "금년 3,4월 및 7월 등 세차례 아베씨 집을 찾아가 조사한 결과 아리랑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아베씨의 집에 있지 않고 장소가 확인되지 않은 6군데의 필름창고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김회장은 ▲ 그동안 아베씨가 아리랑 필름이 `없다' 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아베씨가 소장하고 있는 한국필름 목록 55번째에 아리랑이 기록돼 있고 ▲금년 7월 조사 때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필름통이 새로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아베씨가 제2의 장소에 `아리랑'을 포함한 필름을 보관하고 있는 것이 확실시된다고 추정했다.그러나 영화 `아리랑'과 관련한 의문점인 과연 필름이 남아 있느냐와 필름이 있다면 누가 소장하고 있느냐는 그동안 여러 사람들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만 정수웅감독, 호현찬 영화진흥공사사장, 春史의 차남 나한봉씨, 김연갑씨, 김경원씨, 일본의 선데이 마이니치 등의 추적을 통해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아베 가나에가 한국필름을 광범위하게 수집했으며 그의 아들 아베 요시시게가 이 수집품을 이어받아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이다.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뿐 아니라 북한 및 일본의 영화 관계자들이 아베 요시시게씨를 직접 찾아가 필름의 행방을 추적했으나 아베씨가 소장하고 있는 필름목록중 한국영화리스트에 아리랑이 기재돼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아무도 필름을 직접 보거나 존재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아베씨 역시 필름이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회피하면서 "필름이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거나 "남북이 통일되면 주겠다"는 등의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
2019서울아리랑페스티벌 왕십리아리랑 공연2019서울아리랑페스티벌
-
2019 제9회 효국악한마당-왕십리아리랑제창작아리랑 '왕십리아리랑' (사)왕십리아리랑 연구보존회 대표 이혜솔(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배뱅이굿 이수자) 명창이 작사하고, 양금 연주자 윤은화가 작곡했다.
-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제10회 효(孝) 국악한마당 - 왕십리아리랑제
-
[Book] 북한아리랑 연구 (김연갑 , 청송, 2002년)목차 1. 북한의 아리랑 실상과 인식2. 영천아리랑의 귀향과 그 의미3. 가서 함께 해야할 우리잔치 <아리랑 축전>4. 북한에도 아리랑이 있다(음반해설)5. 부록
-
[신문방송] 아리랑 연구자 김연갑 선생님과의 만남 (문학광장, 2007-12-18)그 누구에게 배운 일이 없음에도 우리는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가끔 흥얼거린다. 또 그 노래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아리랑이야말로 우리가 몸으로 들어서 배우고 익혀 또 다시 누군가에게 불러주는 자장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아리랑은 노래이면서, 아쉬움이면서, 따뜻함이면서 미련이 한데 어우러진 우리들 속의 한 노래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아리랑에 대한 이제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이런 아리랑을 나는 과연 어데서 불러본 적이 있을까? 아직은 아리랑을 목 놓아 부를 만한 어떤 계기가 나에겐 특별히 없었던 듯하다. 그렇게 오래된 노래를 어찌 내가 한 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아리랑은 나와 같은 젊은 세대의 노래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아리랑은 전통문화복원을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쯤으로 듣고 있었던 같다. 그래서 아리랑 연구자이자 운동가이신 김연갑 선생님(아래 사진)을 만난 것은 이전까지 알고 있었던 아리랑에 대한 나의 이런 관념을 수정할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방송(KBS1 라디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해설)이다, 원고 집필이다, 공연기획이다 해서 바쁘시지요. 근황이 어떠신지요? 요즘은 어떤 일에 관심을 두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 네, 안녕하세요. 북한은 2002년부터 ‘아리랑 축전’이라는 행사를 준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당시 대집단 체조라는 대규모 행사를 하면서 ‘태양’이라든가, ‘빛’이라든가, ‘별’이라는 것을 상징화하여 북한 통치자들을 부각시켰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상징들을 사용하는 대신에 ‘아리랑 민족’이라는 표현을 썼지요. 이는 엄청난 변화예요. 우상의 대상이 한 개인에서 민족으로 바뀐 것이죠. 1990년 남북이 단일팀으로 구성되어 단가(團歌)를 만들었고 이후 남북한이 ‘제3국에서 함께하는 모든 일에서는 아리랑을 부르자’ 했던 이 단가는 동서독이 통일이 됐을 때 그들의 단가가 어느덧 국가(國歌)가 된 것처럼, 우리에게도 통일 이후에는 이 단가인 아리랑이 국가(國歌)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저는 통일 이후에는 이 아리랑이 새로운 국가(國家)의 국가(國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시절,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과 북의 통일 문제를 넘어 분단으로 인해서 희생된 러시아 동포, 중국 동포, 일본 동포들을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일 것인가의 문제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지요. 다행스럽게도 이들 교포 2세, 3세들은 우리말을 잃어버리긴 했으나 아리랑만큼은 거의 잊지 않았지요. 통일 이후엔 이 아리랑이 이들을 껴안는 어떤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은 아리랑을 국가(國歌)로 하자고 합의를 보았다고 하네요. 다만 가사의 일부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란 표현이 마땅치 않으니, 이 문제는 서로 연구해서 잘 풀기로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얘기 같지만 이런 대화를 나눈 그분들의 위치는 결코 사적이지 않았죠. 이런 것으로 보면 아리랑은 남북문제를 푸는 아주 중요한 ‘동질성의 고리’ 인자가 아닌가 싶어요. 도대체 아리랑이 무엇이기에 그 바쁜 와중에서도 두 분은 아리랑 얘기에 몰두했을까요? 또 판문점이라고 하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냉정한 사안들이 오가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리랑’이라는 단가(團歌) 문제만큼은 남북 모두의 의견합치를 보았을까요? 이제까지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그 어떤 회담도 1안부터 시작해서 5안까지 이르러서도 합의가 안 된 일이 많아요. 그런데 유독 이 단가(團歌) 문제만큼은 똑같이 1안으로 제출되어 받아들인 것이죠. 1953년 7월 17일 휴전회담 시, 중공군, 북한군과 미군이 휴전협정 사인을 하고 악수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헤어져 돌아서는데, 양측 군악대가 동시에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다고 해요. ‘아리랑’이 그날 있었던 휴전협정의 ‘마지막 도장’을 찍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남측이 참여하지 않은 사인, 합의, 휴전협정은 결국 미완성이었는데 양쪽에서 아리랑을 연주함으로써 오늘의 이 역사적인 문제는 중공군과 미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문제’라는 것을 회담장을 차지한 중공군과 미군에게 각인시켜 준 거죠. 민족문제에 있어서도 아리랑은 묘한 염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민족의 문제를 아리랑으로 풀어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매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남과 북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이 아리랑을 ‘어떻게 함께 나눌 것인가’, 그리고 DMZ라고 하는 냉전을 상징하는 공간을 어떻게 새로이 상징화할 것이냐, 하는 등등의 고민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지난해에 ‘제1회 DMZ 아리랑 평화 페스티벌’이라는 축제를 열었죠. 정말로 아리랑만을 가지고 한 공연이었죠. 내리 2시간을요. 역사 이래로 이런 일은 없었죠. 하나의 단일한 노래로 축제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아리랑은 가능했어요. 왜냐하면 북한 아리랑도 있고 울릉도 아리랑도 있고, 진도, 밀양, 기타 등등 50여 가지의 아리랑이 있었으니까요. 또한 그날의 아리랑은 여러 장르로도 확산이 되는 날이었지요. 소리 공연에서 회화까지 모두 펼쳐졌지요. 타악기 공연, 아리랑 회화, 현대무용, 전통무용 등 동서양 악기가 한데 어우러진 퓨전 아리랑 등이 신명나게 소개되었지요. 선생님이 하시는 방송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해설은 재미있는 일인 것 같은데요? 김태준의 1934년 지론을 보면, <청산별곡>의 여음(餘音, 후렴)은 결국 아리랑과 상통한다고 보고 있지요. 내용의 선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리랑과 <청산별곡>은 직결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보면 아리랑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불려온 노래입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이 매듭이 좀 단단히 묶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를 풀어내는 어떤 단서를 우리 조상들이 분명 우리에게 남겼을 거라는 것이죠. 단서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랜 기간 방치해 뒀거나(무심했거나) 그 열쇠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 자신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런저런 공부를 하다 보니, 38도선이라는 것도 임진왜란 때 이미 중국과 일본이 암암리에 얘기했던 부분이란 것까지도 알게 됐죠. 역사에 고비가 생기는데 그 고비의 원인은 훨씬 앞선 역사에 이미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못 찾았기에 고비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지요. 지금 하고 있는 라는 프로그램은 고대사 부분부터 다뤄 지금은 신라시대까지 내려오고 있어요. 방송을 하면서 저도 많이 배우고 있는 프로예요. 아리랑에 대한 제 생각은 이래요. 사람들은 아리랑이 자신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잘 안 들어요. 또 아리랑과 관련해서 얘기를 하다 보면, 특히 학술적인 얘기가 나오면 일반인들은 ‘아리랑이 뭐 이렇게 어려워!’ 하면서 불편해해요. 역사에 대한 관심도 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동북공정과 같은 문제는 일반인들은 알기 힘들어요. 연구자들끼리만 소통하는 얘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문제를 다수의 국민과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아리랑 석박사학위자들이 얘기하듯이, 아리랑의 작시법이 따로 있어서 우리 할머니들이 그 옛날의 ‘아라리’를 불렀을까요? 그건 아니지요. 아리랑과 관련한 여러 논문은 언뜻 보면 제 자신도 모르는 얘기가 많아요. 그 논문을 우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죠. 그렇다면 그걸 내가 공부를 해서 마치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주자는 것이 제 소임이지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역사와 더불어 아리랑을 함께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2006년에 있었던 ‘제1회 DMZ 평화 페스티벌’은 어떻게 해서 열렸나요? = 북한의 경우는 아리랑 축전을 하는데, 그럼 우리 쪽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에 상응하는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미 우리의 경우 이러저러한 축제를 합쳐서 거의 6백 몇 개가 넘는 축제가 있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아리랑이라는 축제를 던져놓아도 보통 사람들은 시큰둥한 거예요. 다만 북한 아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만 갖고 있더라고요. ‘자, 그럼 우리 남쪽에서 이러한 아리랑 축제를 만들 테니까 당신들이 한번 와서 보시오. 그리고 이 축제를 보고 북한 아리랑과 한번 비교해 보시오.’ 하는 마음이었지요. 기준이 있어야 북한이 잘 한다, 못 한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준비를 한 것이 ‘제1회 DMZ 평화 페스티벌’이었죠. 그런데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장소 마련도 힘들었죠. 아리랑을 사랑하는 이들의 염원이 있었기에 성사될 수가 있었죠. 축제는 2002년부터 준비해서 2006년인 작년에 이뤄졌죠. 그것도 강원도가 DMZ지역을 관광화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아리랑 공연은 힘들었어요. 아리랑 축제의 마당에는 장사익, 김영임 선생님을 비롯하여 팔도 아리랑, 진도, 밀양, 정선 아리랑 등이 선보였죠. 선생님은 언제부터 아리랑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요? = 전 어려서부터 아주 가난하게 살았어요. 어머니가 피난 와서 절 낳으셨죠. 당시에 할머니는 며느리인 어머니한테 왜 이 어려운 시국에 애를 가졌느냐고 하셨대요. 어서 애를 떼라고 호통을 치셨나 봐요. 농사일로 정신없는데 며느리가 애를 가졌으니 화가 나신 거예요. 어머니는 아이를 떼려고 많은 노력을 한 것 같아요. 결국은 아이를 못 떼고 낳은 거죠. 그 덕에 제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어머니는 보리밭에서 일하시다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절 낳으시고 스스로 태를 잘랐다고 해요. 그리고 다시 밭에 가서 일하셨대요. 그런데 그날 일을 하시다가 목이 말라서 벌컥벌컥 들이켠 찬물 때문에 산모와 저는 한 삼 년을 앓아누웠다고 해요. 그 이후로 젖도 제대로 못 먹고, 전 잔병치레를 참 많이 했고요. 또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는 가난 때문에 불화가 많았대요. 집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할머니는 당신의 친정집으로 절 데려가는 일이 많았어요. 할머니의 친정집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가는 아주 먼 곳에 있었지요. 마냥 걷다 날이 저물면 전 할머니와 성황당 같은 데서 잤어요. 또 어떤 날은 절에서 잘 때도 있었고요. 당시의 저는 또래 아이들보다는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구나 하는 느낌이 있어요. 할머니가 주무시면 혼자서 스님이 염불하는 거나, 혹은 성황당에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것 등등의 일들을 죄다 봤죠. 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절에서 스님이 몇 시에 일어나 뭐 하는지를 세세하게 다 알고 있었죠. 그래서 학교 들어가서도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여선생님이 오늘은 어떻게 꾸미고 오시는지 이런 데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대신 음악은 좀 좋아했던 것 같아요. 당시 제 둘째 형님이 큰형님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서울시청에서 구두닦이 일과 이발 일을 하셨어요. 그 형님이 일 년에 두세 번씩 고향으로 내려오셨죠. 형님은 오실 때마다 인형하고 미군들이 갖고 노는 트럼프 같은 걸 갖고 왔어요. 그런데 하루는 형님께서 하모니카를 내 앞에 꺼내놓는 거였어요. 그 하모니카 소리가 참 좋았어요. 그런데 형님은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올라갔으니까 아는 노래가 없는 거예요. 단 하나, 아리랑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 아리랑이 당시 제가 아는 음악의 전부였죠. 그때 제가 다니던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6. 25때 부상을 입으신 분이었어요. 손가락이 하나도 없는 분이셨죠. 그래서 풍금을 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음악을 들을 수 없었죠. 그리고 전교생이 30명인 시골 학교다보니 2학년부터 졸업할 때가지 한 분이 다 가르쳤죠. 그래서 제가 아는 음악이란 것이 ‘애국가’, ‘3.1절 노래’, ‘8.15노래’, ‘교가’, ‘아리랑’이 전부였지요. 그리고 이 중에서 제가 하모니카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었죠. 이처럼 아리랑은 제 유년기에 있어서 세상의 전부였죠. 지금 생각하면 그 처음의 아리랑은 참 칙칙한 아리랑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아리랑이라는 것은 꼭 그런 느낌만은 아니더라고요. 당시 저는 형님을 생각해서라도 뭔가를 해야지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리랑을 부르곤 했지요. 아리랑은 내 가슴속으로 칙칙하게 왔지만 결국에는 내가 일어설 때는 반드시 이 아리랑으로 일어서리라 생각했지요. 지금은 할머니들이 3.1운동 현장에서, 또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왜 이 아리랑을 그토록 불렀을까 하는 수수께끼를 조금은 알 듯싶어요. ‘아리랑연합회’ 출범과 그동안 협회가 이룬 성과들이 궁금합니다. = 1994년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기행문’이 유행이었습니다. 유홍준, 고은, 신경림 선생님 등의 활동이 많았던 시절이죠. 그 무렵 고은 선생님이 주축이 돼서 ‘아리랑 기행단’이 만들어졌어요. 또 국립극장 단장이셨던 허규 선생님과 나운영 선생님 같은 분들은 이미 ‘아리랑 모임’을 만들어 스터디를 하고 있었지요. 이런 분위기의 결과로 1995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 아리랑 축제라는 것이 열렸지요. 당시 고은, 허규, 나운영 선생님이 모인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 아리랑을 하나로 통합해서 ‘전국아리랑보존협회’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죠. 한 선생님이 그렇다면 젊은 친구인 김연갑이 이 아리랑을 앞장서서 끌고 나가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셨죠. 그래서 회장 없는 사무국장체제로 ‘아리랑보존연합회’라는 것이 만들어진 것에요. 이후 정식으로 발족이 되었고요. 그러니까 ‘아라랑보존협회’는 고은, 허규, 나운영, 최서면 박사, 김연갑, 정선의 김병하, 진도의 박병훈 선생님들, 이런 분들이 아리랑으로 만나 만든 것이죠. 법인 차원에서 한 일들이 참 많아요. 그 중에서 진도, 밀양, 정선, 영천, 울릉도, 제주 지역에서 아리랑 축제가 열릴 수 있도록 했지요. 지역공동체의 한 구심력을 갖는 노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요. 또 아리랑이 보다 많이 불리는 지역의 노래를 축으로 축제 같은 행사를 만들어보자 해서 시작한 일이죠. 아리랑이 주제가 되는 축제를 위해서 저는 전국 팔도를 열심히 돌아다녔죠. 물론 정선 같은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오던 행사였지요. 이런 경우에는 그 축제의 외연이 확대되고 내연이 충실한 축제가 되었지요. 진도아리랑 축제, 밀양아리랑 축제, 성북아리랑 축제, 영천아리랑 축제 등은 원래 다른 이름의 축제였는데 ‘아리랑 축제’라는 이름으로 승격돼서 독립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또 그동안 아리랑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대회를 10여 회 정도 했어요. 이것도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또 개인적 일들이기는 하지만 아리랑 관련 자료집 및 기타 책들을 10여 종 출간했고요. 또 그동안 이곳과 인연을 가지셨던 분들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결과도 있네요. 그동안 여기서 아리랑을 주제로 한 논문을 써서 박사 4명, 석사가 20명이 나왔죠. 협회차원에서 이 분들에게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했으니까요. <사진 위는 아리랑 음반들> ‘아리랑’은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리랑의 맨 끝부분을 이야기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아리랑의 처음을 얘기하라면 못 할 것 같아요. 제 자신도 참 묘하더라고요. 다만 요즘에 이르러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남과 북, 그리고 35개국에 흩어진 우리 동포들에게 너희들이 생각하는 단 하나의 민족의 노래를 꼽으라고 했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리랑을 꼽았다는 사실에요. 저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제가 확실히 조사를 해봤어요. 아리랑은 가장 흔한 노래이지만 결국에는 맨 마지막에 우리가 한국인이며 조선인이며 까레이스끼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는 노래, 그런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리랑은 ‘존재 증명의 노래’라고 볼 수 있어요. 노수복이라는 정신대 할머니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긴 채, 필리핀에서 40년을 살아오신 분이었죠. 그런 할머니께서 ‘내가’ 조선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마지막 방법으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또 훈 할머니도 그렇고 심지어는 입양아 수잔 브링크 양도 우리말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아리랑은 기억해서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증언했어요. 결국 우리가 한국인이며 북한인이며 일본에 있는 조선인이며 러시아에 있는 까레이스끼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가 곧 아리랑이라는 것이지요. 어느 누가 그 어디서 아리랑을 부르면 우리는 그를 한국인, 혹은 조선인으로 인정해 줄 거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리랑이라는 것은 노래, 혹은 민요라는 것에 국한시켜서 해석하지 않아요. 아리랑은 우리의 상징 그 이상이에요. 그동안 발표하신 ‘연구논문’과 ‘저작들’에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요? = 남과 북은 1956년부터 단일팀을 만들려고 노력했지요.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단일팀 성사는 쉽지 않았지요. 그런 와중에도 남북의 단가는 아리랑으로 채택되었고요. 북한도 ‘아리랑’만큼은 거부하지 않았지요. 저는 이러한 아리랑이 북한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이런 물음을 갖고 2000년부터 시작한 연구는 2005년에 이르러 <북한아리랑>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보았지요. 북한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독립활동을 하시던 분들이 아리랑을 많이 불렀던 점, 아리랑을 곧 항일운동의 동지로 보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아리랑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거예요.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중국동포들이 부르는 아리랑은 북한아리랑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과 교류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중국동포들과 북한은 이전부터 계속 교류가 있었던 것이죠. 이런 교류로 인해서 중국동포들이 부르는 영천아리랑, 경상도아리랑, 기쁨의 아리랑, 장백산아리랑 등을 북한이 똑같이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사실 이런 아리랑들은 우리도 잘 모르는 아리랑들이죠. 북한은 항일운동가들이 부른 아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반면 우리는 해방 후, 광복군이 주력부대로서의 역할을 못 하다 보니 중국에서 활동하던 노래나 그들의 문화가 군대문화로 연결이 안 된 것이죠. 그런데 북한은 중국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이들의 의식이나 체험이 북한에 그대로 접속된 것이죠. 밀양아리랑, 본조아리랑, 그 외에 중국동포들이 만들어 불렀던 영천아리랑, 청주아리랑, 경상도아리랑, 기쁨의 아리랑 이런 것들은 이미 일제 강점기 시절에 광복군들이 불렀던 노래들이에요. 이런 노래들이 북한에서는 그대로 유지가 된 것이죠. 그래서 아리랑을 보는 인식이 북한의 경우는 민족사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요. 반면 우리는 아리랑을 국악의 한 장르로 보죠. 그러다보니까 같은 아리랑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개념이죠. 우리는 예술성에 가치를 둬서 얼마나 전통적으로 부르느냐 하는 데 관점을 두죠. 북한에서는 우리의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에 대해 콧소리 내고 또 느려터진 아리랑이라고 하면서 그런 노래를 누가 따라 부르겠느냐, 부정적인 입장이죠. 그래서 그들은 진도아리랑 같은 경우에는 남도 육자배기조에 탁성을 빼버리고, 또 정선아리랑도 느린 매나리조를 빠르게 고쳐서 불러요. 이것은 북한의 음악 정책이고 그 극단성을 보여주는 사례이죠. 그쪽에서는 제일 먼저 아리랑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요. 북한은 <밀림아 이야기하라>라는 혁명가극을 필두로 모든 중요한 장면에서는 아리랑을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제일 먼저 아리랑을 자신들의 성음에 맞게 고쳐야 했지요. 그들이 아리랑 축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는 ‘아리랑을 민족음악의 복판에 둬라’라는 교시가 있어요. 남북이 단일팀 단가로 아리랑을 제시할 때, 북한은 이렇듯 민족사적 입장에서 제시를 한 것이고 우리 측에서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쉬운 노래이니까 제시를 한 것이지요. 그 의도는 서로 달랐지만 어떻든 결국에는 민족의 노래라고 하는 최종적인 인식은 다 같이한 것 같아요. 이런 점을 저는 북한 아리랑을 연구하면서 재확인하게 되었죠. 앞으로 계속해서 연구해야 할 아리랑의 과제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 많은 외국인을 포함하여 우리 스스로도 의심을 갖고 있는 문제인데요, 우리의 아리랑이 과연 그렇게 오랫동안 몇 백 년에 걸쳐서 불러온 노래냐, 하는 의문이에요.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즉, 시대를 거듭해서 내려오게 된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숙제가 있는 것이죠. 가사의 적층현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이는 김시업 선생님의 책에도 나와 있지만 아리랑은 그야말로 4천에서 6천수의 노랫말이 적층된 것이거든요. 이것은 오디세이와 비교가 안 되는 이야기죠. 그 옛날의 노래가 지금까지 하나의 노래로 살아왔다는 것이죠. 적층이 마무리돼서 삼국유사에 남아있는 향가가 아니라, 그 시절에 불렸던 노래가 지금까지 변형돼서 지금까지도 정선이라는 그곳에서 불리고 있다는 점이죠. 이처럼 고대의 노래가 살아서 온 경우는 전 세계에 어디에도 없다는 일이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리랑은 고대의 노래죠. 정선에 가면 아리랑이라고 하지 않고 아라리라고 해요. 하지만 그 아라리를 우리는 아리랑이라고도 하고요. 그렇다면 아리랑과 아라리가 어떻게 같은 노래인가 하는 의문이 남죠. 정선 아라리는 우리가 부르는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월드컵 때 부르던 윤도현 아리랑과 다르다는 것이죠. 물론 가사는 민속음악이라는 것이 들고나는 것이니까 비슷한 것도 있고 같은 것도 있죠. 그럼 무엇으로 같은 노래라는 것을 입증하느냐의 과제가 있죠. 또 정선아리랑은 그 명칭을 아라리라고 한다는 점이죠. 그렇다면 아라리와 아리랑이 어떻게 변해서 지금의 아리랑으로 왔느냐 하는 문제, 선율이 다른데도 어떻게 해서 정선 아라리에서 모든 아리랑이 확산됐나 하는 문제들을 우리 학자들이 계속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늘에서 밀양아리랑 진도 아리랑이 동시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죠. 하나의 노래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적으로 확장되었을 거라는 것이죠. 이와 같은 일이 전 세계에 또 어디에 있냐는 것이죠. 진도 사람들은 노래라고 하면 빠지지 않는데, 왜 우리가 다른 지역에서 부르는 아리랑을 끌어다가 진도아리랑이라고 부르냐는 것이죠. 자신들의 노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밀양 사람들, 경상도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데요. 그 영남 사람들이 왜 굳이 다른 지역의 노래를 가져다가 왜 밀양아리랑이라고 했냐는 것이죠. 이런 문제가 수수께끼로 남아있어요. 어떤 이들은 ‘명칭의 자극전파’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요. 그 명칭이 어떤 유명한 사람이 쓰거나, 충격을 줬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내서 따라서 쓴다는, 명칭의 자극전파설로도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다른 노래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있어야 하는데, 기껏 육자배기하면 ‘자진육자배기’ 그냥 ‘육자배기’ 정도, 난봉가 하면 그냥 ‘난봉가’ ‘자진난봉가’ 정도예요. 그런데 아리랑은 어떻게 해서 50여 종류가 넘게 확산이 되었는가 하는 거예요. 그 옛날 조선에서 쫓겨나간 중국동포, 러시아동포들도 왜 아리랑을 부르냐는 것이죠. 이 수수께끼, 도대체 아리랑이 어떤 힘을 가졌기에 그럴까요? 이는 다양한 분야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 위는 영화 아리랑 개봉 80년 기념 토론회 참석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리랑 연구자’로서 혹은 아리랑을 널리 알리는 ‘아리랑의 운동가’로서 그동안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 아리랑은 제 가슴 속에 있던 노래예요. 또 지금 하는 모든 일은 처음부터 내 일이라고 여겼던 일이에요. 저의 어려움은 남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어려움과는 좀 달라요. 저의 어려움은 다만 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이라든가 제 스스로에 대한 어떤 좌절감이 오는 때이지요. 지금의 이 일을 어떤 소명의식, 혹은 애국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국고보조를 안 해줘서 무척 서운했을 거예요. 사실 저는 한 번도 지원금을 받은 적이 없어요. 또 신청하지도 않았고요. 지원금을 주는 곳에서 제 생각을 인정하고 돈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보다는 더 중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들을 도와야죠. 결국 이 일을 하면서 오는 어려움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보다 일찍 ‘한자’라든가 ‘역사’라든가 ‘민족’이라든가 ‘현장답사를 통해서 얻어야 할 지식’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매달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있을 뿐이에요. 이것이 지금의 제 숙제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이 숙제를 좀 더 빨리 끝내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있어요. 반대로 이 일을 하시면서 보람 있는 일도 있었을 듯싶은데요? = 1986년에 첫 사설집인 <역사의 노래 민족의 노래>를 고은 선생님, 박재삼 선생님의 격려로 출간하게 되었어요. 그 책이 나온 당시만 해도 분위기는 냉랭했어요. 이를테면 어떤 이들은 ‘아리랑 갖고 밥 먹는 사람이 있네.’ 이런 식이었죠. 특히 방송출연하고 나면 이런 식의 비아냥거림이 오랫동안 뒤따라와 곤혹스러웠죠. ‘야, 아리랑 갖고 무슨 연구를 하냐. 우습지 않냐?’ 이랬었죠. 세상 사람들이 아리랑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얘기했었죠.
-
의병아리랑 춘천아리랑보존회/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아리랑 4K영상의병아리랑 춘천아리랑보존회/ 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아리랑 4K영상
-
아리랑학회, 2017사할린동포들과함께 아리랑 (2차공연)김채원무용단 아리랑살풀이 남은혜 명창의 사할린아리랑 송옥자 명창의 문경새재아리랑
-
2016 사할린아리랑제 2016Сахалинский Ариран사할린 홈스크시민회관에서 열린 2016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열창하는 김희은 회장 모습입니다 부산, 동래아리랑 보존회장 김희은회장은 오랬동안 아리랑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www.arirang1.com
-
삼일절 기념, 사할린동포들과함께 아리랑/인천다문화어린이합창단사할린동포들과 함께 아리랑공연이 2017. 3. 1. 인천 동산비전센타에서 열렸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사무총장의 해설과 진행으로 이루어진 한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의 아리랑 공연과 함께 인천 다문화어린이합창단의 귀여운공연이 있었다 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울면서 웃었다, 하도 고마워서…‘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 등록 2017-03-02 19:22:01 【인천=뉴시스】신동립 기자 =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이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이 펼쳐지고 있다. 1일 인천 동산비전센터 공연이 8일 오후 2시 남동사할린센터로 이어진다. 3·1절 무대에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와 무용단이 참여했다. 지난해 12월 ‘ 2016 사할린 아리랑제’ 멤버들이다. 이들은 영구귀국한 사할린 동포를 찾아 인천으로 왔다. 기연옥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장, 김동숙 상주아리랑보존회장, 김희은 부산아리랑보존회장, 김채원 아리&랑무용단장이 뜻을 모았다. 【인천=뉴시스】신동립 기자 =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이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이 펼쳐지고 있다. 1일 인천 동산비전센터 공연이 8일 오후 2시 남동사할린센터로 이어진다. 3·1절 무대에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와 무용단이 참여했다. 지난해 12월 ‘ 2016 사할린 아리랑제’ 멤버들이다. 이들은 영구귀국한 사할린 동포를 찾아 인천으로 왔다. 기연옥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장, 김동숙 상주아리랑보존회장, 김희은 부산아리랑보존회장, 김채원 아리&랑무용단장이 뜻을 모았다. 김채원이 아리랑춤, 김희은이 사할린아리랑·부산아리랑, 김동숙이 상주아리랑·진도아리랑, 김제택이 색소폰, 김정란이 본조아리랑·태평가, 인천다문화어린이합창단이 아리랑과 댄스, 김지호가 모던댄스 ‘프레이’, 박노경이 밀양아리랑 춤, 기연옥과 회원들이 의병아리랑을 선보였다. 공노원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은 "우리 사할린 동포의 고난과 역경를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인천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듣고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 묻힌 부모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리랑이 위로의 노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정말 감동스러웠다”고 인사했다. 이강연 전 안중근기념관 사무처장과 이인영 아리랑학교장 그리고 홍선희 동북아평화연대 공동대표는 "전국의 사할린 동포단체들로 확대할 필요가 있는 공연”이라며 명창과 무용가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는 "사할린동포들은 인천을 비롯한 국내 20여곳에 거주하고 있다. 인천 논현동 국민임대 아파트를 중심으로 287세대 490명이 있는데, 안산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세계 여성의 날’(3월8일)마다 사할린동포 위안잔치를 열어 온 인천동산비전센터에게도 감사한다”고 전했다. reap@newsis.com 김채원이 아리랑춤, 김희은이 사할린아리랑·부산아리랑, 김동숙이 상주아리랑·진도아리랑, 김제택이 색소폰, 김정란이 본조아리랑·태평가, 인천다문화어린이합창단이 아리랑과 댄스, 김지호가 모던댄스 ‘프레이’, 박노경이 밀양아리랑 춤, 기연옥과 회원들이 의병아리랑을 선보였다. 【인천=뉴시스】신동립 기자 =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이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이 펼쳐지고 있다. 1일 인천 동산비전센터 공연이 8일 오후 2시 남동사할린센터로 이어진다. 3·1절 무대에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와 무용단이 참여했다. 지난해 12월 ‘ 2016 사할린 아리랑제’ 멤버들이다. 이들은 영구귀국한 사할린 동포를 찾아 인천으로 왔다. 기연옥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장, 김동숙 상주아리랑보존회장, 김희은 부산아리랑보존회장, 김채원 아리&랑무용단장이 뜻을 모았다. 김채원이 아리랑춤, 김희은이 사할린아리랑·부산아리랑, 김동숙이 상주아리랑·진도아리랑, 김제택이 색소폰, 김정란이 본조아리랑·태평가, 인천다문화어린이합창단이 아리랑과 댄스, 김지호가 모던댄스 ‘프레이’, 박노경이 밀양아리랑 춤, 기연옥과 회원들이 의병아리랑을 선보였다. 공노원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은 "우리 사할린 동포의 고난과 역경를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인천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듣고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 묻힌 부모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리랑이 위로의 노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정말 감동스러웠다”고 인사했다. 이강연 전 안중근기념관 사무처장과 이인영 아리랑학교장 그리고 홍선희 동북아평화연대 공동대표는 "전국의 사할린 동포단체들로 확대할 필요가 있는 공연”이라며 명창과 무용가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는 "사할린동포들은 인천을 비롯한 국내 20여곳에 거주하고 있다. 인천 논현동 국민임대 아파트를 중심으로 287세대 490명이 있는데, 안산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세계 여성의 날’(3월8일)마다 사할린동포 위안잔치를 열어 온 인천동산비전센터에게도 감사한다”고 전했다. reap@newsis.com 공노원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은 "우리 사할린 동포의 고난과 역경를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인천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듣고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 묻힌 부모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리랑이 위로의 노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정말 감동스러웠다”고 인사했다. 【인천=뉴시스】신동립 기자 =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이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이 펼쳐지고 있다. 1일 인천 동산비전센터 공연이 8일 오후 2시 남동사할린센터로 이어진다. 3·1절 무대에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와 무용단이 참여했다. 지난해 12월 ‘ 2016 사할린 아리랑제’ 멤버들이다. 이들은 영구귀국한 사할린 동포를 찾아 인천으로 왔다. 기연옥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장, 김동숙 상주아리랑보존회장, 김희은 부산아리랑보존회장, 김채원 아리&랑무용단장이 뜻을 모았다. 김채원이 아리랑춤, 김희은이 사할린아리랑·부산아리랑, 김동숙이 상주아리랑·진도아리랑, 김제택이 색소폰, 김정란이 본조아리랑·태평가, 인천다문화어린이합창단이 아리랑과 댄스, 김지호가 모던댄스 ‘프레이’, 박노경이 밀양아리랑 춤, 기연옥과 회원들이 의병아리랑을 선보였다. 공노원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은 "우리 사할린 동포의 고난과 역경를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인천에서 사할린아리랑을 듣고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 묻힌 부모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리랑이 위로의 노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정말 감동스러웠다”고 인사했다. 이강연 전 안중근기념관 사무처장과 이인영 아리랑학교장 그리고 홍선희 동북아평화연대 공동대표는 "전국의 사할린 동포단체들로 확대할 필요가 있는 공연”이라며 명창과 무용가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는 "사할린동포들은 인천을 비롯한 국내 20여곳에 거주하고 있다. 인천 논현동 국민임대 아파트를 중심으로 287세대 490명이 있는데, 안산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세계 여성의 날’(3월8일)마다 사할린동포 위안잔치를 열어 온 인천동산비전센터에게도 감사한다”고 전했다. reap@newsis.com 이강연 전 안중근기념관 사무처장과 이인영 아리랑학교장 그리고 홍선희 동북아평화연대 공동대표는 "전국의 사할린 동포단체들로 확대할 필요가 있는 공연”이라며 명창과 무용가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는 "사할린동포들은 인천을 비롯한 국내 20여곳에 거주하고 있다. 인천 논현동 국민임대 아파트를 중심으로 287세대 490명이 있는데, 안산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세계 여성의 날’(3월8일)마다 사할린동포 위안잔치를 열어 온 인천동산비전센터에게도 감사한다”고 전했다. reap@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
기연옥의 아무르아리랑/ 사할린동포들과함께아리랑 4K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사할린 아리랑 순회공연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아리랑’이 2017. 3. 8. 인천 사할린동포복지센터에서 펼쳐졌다. 지난 3·1절 공연에 이은 이날 무대에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와 각 지역 아리랑보존회 그리고 아리&랑무용단이 참여했다
-
제 16 회 공주아리랑제제 16 회 공주아리랑제
-
제2회 사할린아리랑제 2017 둘째날 (홈스크 문화예술극장)제2회 사할린아리랑제 2017 둘째날 (홈스크 문화예술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