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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할린 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리뷰]사할린 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 아리랑으로 함께하지 못한 합동무대남북 아리랑 대합창 불발, 사연은? 등록 2018-08-27 17:08:32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서도소리 【사할린=뉴시스】 기미양 연구이사 =지난 6월 한국을 방문한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으로부터 남북러합동공연이 26년 만에 러시아 사할린에서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공식 행사명은 '광복 73주년,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 해방 73주년 기념 우정의 날'이다.사할린 동포 강제징용 80주년을 기리기 위해 사할린주한인협회가 주최하는 남북러합동공연 행사다. 이달 14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을 경유하는 길목에서 북측 통일음악단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어 더욱 가슴이 설레었다. 도착하자마자 사할린한국교육원을 방문해 아리랑 음반을 전달하고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연습실로 달려갔다. 연습에 여념이 없는 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을 만나 본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18일 오전 10시 해방절을 기리는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조선인을 해방시킨 영웅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영예광장 성화 헌화식에 참여하였다.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과 사할린한인협회 림종환 회장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일음악단과 러시아 원동 고려인통일연합회 리규률 위원장도 함께 참여하는 모습을 가까이 보게 되어 반가웠다. 국립남도국악원 판굿 헌화식을 마치고 '러시아는 나의 역사 박물관' 앞 광장 특설무대로 이동하였다. 역사박물관 앞 테라스에는 새고려신문사 이예식 기자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역사로 남은 한인 1세들의 애환을 담은 사진들이다. 우리나라 국립국악원 소속 유지숙 명창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공연 내용을 확인하였다. 1부에서 북한 지명이 들어간 서도소리, 2부에서는 아리랑과 긴아리랑을 부를 것이고, 피날레는 아리랑을 남북대합창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프로그램 안내서를 찾을 수 없어 북측 공연단이 무슨 노래를 부를지 궁금해졌다.광장에는 인천, 안산, 김포, 양주 등으로 영구 귀국한 사할린1세들이 나와 있었다. 사할린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무더운 여름 두 달 동안 머무르고 다시 한국으로 돌어간다. 한국에서 매년 사할린한마음대회가 이루어지는 음성 행사장에서 만난 사할린동포들을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반갑게 맞이하는 홈스크한인협회 박영순 회장의 손에 이끌려 홈스크 부스에 오니 대형 비빔밥축제 이벤트를 홍보하고 있다. 이날 소수민족들이 준비한 여러 부스 중 가장 많은 관객들이 긴줄을 서서 대형 비빔밥 그릇에서 퍼주는 컵밥을 받아 먹었다.드디어 2018 사할린 광복절 행사의 첫 막이 열렸다. 주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관 사할린출장소 황명희 소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 내용을 일부 발췌해 대독했다. 사할린주 안톤 월로슈코 제1부지사,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시장 대행 나탈리야 쿠프리나, 사할린주 두마 안드레이 하포츠킨 의장, 사할린주 민족연합회 마이야 키릴로와 등이 축사를 했다. 사할린다민족협회 아코뺜 싸르키스 조리코비츠 회장은 "사할린에서 남과 북이 만나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하나의 민족이다"고 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 사전 리허설을 보고 직관적으로 나온 멘트라고 보여진다. 그는 이미 아리랑을 통한 남북교류의 핵심을 알고 있는 것이다. 국립남도국악원 진도북춤 남측에서는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북측에서는 삼지연악단과 모란봉악단 단원으로 구성된 통일음악단, 사할린동포의 아리랑무용단,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이 출현했다. 국립남도국악원 기악단과 무용단과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길놀이로 오프닝 세리머니를 했다. 공연 첫 무대에는 윤민자, 강팔용 사할린 동포가수가 강원도아리랑을 불렀다. 이어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반주로 유지숙, 김민경 명창이 구성진 서도소리로 흥을 돋우고, 마당에서는 국립남도국악원의 판굿과 진도북춤이 5000여 관객을 신명나게 했다.통일음악단(단장 조승권)은 '민족끼리'라는 주제를 내세웠다. 힘찬 전주곡을 울리며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노래를 불렀고 '황성옛터'는 1세 어르신들이 애창곡으로 여가수가 구수하게 불렀다. '아리랑', '사랑의 깃발', '군밤타령', '무정한 그 사람' 외에도 12곡 이상과 러시아의 유명곡들 '카추샤', '사랑의 메아리', '내잘못일 게 뭐야' 등은 러시아어로도 불러 현지 동포들과 러시아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이날 관객 중에는 북조선 사할린 파견 근로자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북한의 해외노동자 파견이 확대되어 사할린에는 약 3000명 내외 북한 노동자들이 있다. 북한은 1950년대 후반 최초로 파견됐던 노동자들이 사할린에 장기체류하게 되자 이들을 귀환시키려 시도, 소련 외교부와 지방당국에 지속적으로 협조를 요청하고 노동자들을 개별 면담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북한 노동자 다수가 사할린에 정착하게 된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사할린은 러시아 내 타 지역보다 개별적 일거리가 많으며 노동조건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북한에서 파견 지역으로 인기가 높다. 또한 사할린은 한인이나 조선족이 많아서 러시아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개별적 일자리 연결과 자국 언어 소통은 사할린의 북한노동자들이 북한의 감시체계 속에서도 내부인뿐 아니라 현지인 및 한인·조선족 등 재외 한인들과도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즉, 사할린의 북한 노동자들은 역사적, 지리적, 인적, 경제적 조건 등이 다른 러시아 지역들에 비해 유리한 정서적 혜택을 누려왔다. 그러나 파견 노동자들은 임금의 대부분을 북한 당국에 직·간접적 방법으로 강제 상납해야하는 실정에서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이 북한 통일음악단이 사할린에서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게 되는 원인의 일부라고 본다. 사할린동포들이 준비한 아리랑무용단의 초혼무 '사할린아리랑'이 2부에서 펼쳐졌는데, 윤민자 명창의 소리를 따라서 아리랑무용을 새로이 선보이게 되었다. 사할린 1세대의 고통을 담은 사할린아리랑을 주제로 한 창작무는 이 행사를 주최한 사할린주한인협회의 취지에 맞는 작품이다. 이 사할린아리랑은 제1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처음으로 무대화되어 전국아리랑전승자협회가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과 전국 지역 아리랑제 무대에서 사할린 동포 윤민자와 원명운에 의해 불려지게 되다가 사할린에서 동포들이 처음으로 남북러합동공연에서 무대화하였다. 다음 사할린아리랑은 현지 동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해외아리랑제의 거점으로 정하게 된 배경이다. 일부 사할린 동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우리의 노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남화태 징용왔네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 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정치 개방후 햇빛은 밝고/ 우리의 살림엔 경사가 많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정태식 작, 1992년) 이 사할린아리랑은 사할린 한인들이 겪었던 고난을 담고 있는 망향의 노래이다. 국적이 조선-일본-무국적-소련-러시아로 5번이나 바뀌는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북한에 가서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도 있다. 그래서 현재는 한 가족이 남과 북에서 각각 살고 있는 셈이 된다. 남과 북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해외동포는 사할린 동포집단이다. 국내 27지역에 사할린 동포 1세가 영구 귀국하여 살고 있다. 이는 외세에 의한 이중징용에 이은, 자국에 의한 또 하나의 이산이다. 이러한 실정은 아리랑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이처럼 복잡한 민족 모순이 대치하고 있는 사할린이어서 남북합동공연이 이루어질 수 여건이 된다고 본다.이어 북측 통일음악단은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조국 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찬양하는 '사랑의 빛발' '김정은 장군' 등 선전 노래를 불렀다. 이번 행사는 1992년 남북의 통일예술축제 이후 26년 만에 이뤄지는 남북 합동공연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공연장에서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게 되어 걱정이 앞섰다. 드디어 기다리던 북한아리랑도 들을 수 있었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 섣달에도 꽃만 핀다/ 달뜨고 별뜨고 해도 뜨네.'벨칸토 창법으로 부른 아리랑은 러시아 동포들에게 익숙한 선율이어서인지 함께 따라 부르면서 박수를 많이 쳤다. 아리랑에 이어 북측 공연단은 러시아 대중가요를 러시아어로 불러주는 열정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북한 전통 민요와 장구춤과 부채춤을 선사했고 특히 러시아어로 부른 대중가요 공연에는 공연장 앞 스테이지에 나가서 댄스로 화답했다. 아쉽게도 사할린동포들은 남한 공연단보다는 북한 공연단에 더 많은 박수를 보냈다. 북한에서 애창하는 '휘파람'도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어 사할린 어린이들의 아리랑 노래에 부채춤을 선보이자 많은 박수를 받았다. 북한과 사할린의 아리랑 향유를 통해 끈끈한 아리랑민족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첫막에서 오프닝으로 사할린팀이 나와서 빠른 템포의 강원도아리랑을 선사했다. 창작무 선율이 사할린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이었다.그러나 남북예술단은 전날 리허설에서 남북대합창 '아리랑'을 마지막 곡으로 정했으나 현장에서는 이뤄지지 못해서 아쉬웠다. 관객들이 눈시울을 적시면서 북한 공연단이 부르는 아리랑과 '다시 만나요'라는 곡을 따라 부르는 대합창으로 막을 내렸다. 정작 유지숙 명창이 준비한 아리랑은 다음날 사할린주의 대표적인 탄광촌이었던 토마리 마을 공연에서 불려졌다. 국립남도국악원 에트노스예술학교 길놀이 북측 최철호 통일음악단장은 무대를 마친 뒤 "동포들의 축제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공연이기 때문에 남측과 곡들을 협의할 필요는 없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행사 주최 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돌아와 보니 행사 주최 측은 행사가 끝난 뒤 국립국악원에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하는 보도가 나왔다. 사할린에서 해외동포들과 함께 하는 공연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대합창하는 광경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갔지만 너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피날레에 왜 남한 가수는 안 나오느냐고 동포들이 나에게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에서는 아리랑대합창을 보여주었지만, 본 공연에서는 갑자기 사회체제 선전노래가 나와서 불발이 되었다고···. 1992년 통일예술축제에서 남북 대중가수들이 사할린에서 공연한 이후 26년 만에 만나게 되어 누구나 이번 남북합동공연에 대한 기대도 컸다. 【사할린=새고려신문/뉴시스】 영예광장 성화 헌화식.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을 비롯한 사할린 한인단체 관계자, 북측 통일음악단 대표, 그리고 필자가 참가했다. 20일,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은 다음 사할린아리랑제에 다시 한번 사할린에서 북한공연단과 함께 남북합동공연을 이루어내자고 나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돌아오는 21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북측 통일예술단을 다시 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오고 가는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같은 시각 사할린발 비행기를 타게 되면서 이번 공연의 의미에 대해 북측 공연단과 나누고 싶은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제3국 사할린을 거점으로 하여 다음 남북합동공연에서는 아리랑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행히 아직 잔존하고 있는 실향민들과 남으로 북으로 흩어진 해외동포들 가족은 통일된 조국의 땅을 밟고 싶다고 한다. 통일이 되어야 북으로 유학을 간 동생이 고향땅에서 다시 우리 형제들과 재회할 수 있다고.한국으로 돌아와 이산가족 상봉 뉴스에서 남으로 북으로 갈라져 눈물짓는 실향민을 접하면서, 우리는 남북문화교류를 활성화하여 제3국에서부터 자주 만나야 하고, 민족 동질성을 입증하는 인자인 아리랑을 통한 남북교류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나아가 아리랑만큼은 남과 북이 유네스코 공동등재를 위해 노력하자고 두 손을 잡고 싶었다. 유지숙 명창은 남북합동공연 전체 콘셉트에서 서도소리보다는 아리랑메들리가 더 나을뻔했다고 토로했다. 앞으로 해외 동포들과 함께 하는 남북합동공연에서는 아리랑을 레퍼토리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나는 20일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학교 특강을 했다. 김주환 원장, 러시아아리랑본부(회장 공노원) 회원, 사할린여성협회(회장 김웨철), 사할린아리랑무용단(단장 박영자), 러시아아리랑본부(자문변호사 브라디미르) 등이 참석하였다. 강의 내용 중 사할린 부분에서는 사할린 동포 윤민자가 사할린아리랑을 시연했다. 윤민자는 18일 남북러합동공연 세리머니에서 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의 헌무 사할린아리랑의 주제곡 불렀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이라는 주제와 사할린을 거점으로 하여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남북합동공연을 해야 하는 배경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 아리랑학교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홈스크한인협회의 초청으로 9월10일 이후 양 도시 한인협회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 아리랑학회 kibada@naver.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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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사할린아리랑제, 北 예술단 참가 추진···현지 한인협회 MOU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사할린아리랑제, 北 예술단 참가 추진···현지 한인협회 MOU 등록 2018-06-19 16:28:04 【서울=뉴시스】 박순옥 사할린주한인협회장(왼쪽)과 기미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사할린 아리랑제에 북측이 합류할 기반이 마련됐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와 러시아 사할린주 한인협회가 18일 서울에서 '아리랑 로드 확장' 업무협약을 했다. 두 단체는 "한민족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아리랑의 기능을 활용, 올해 제3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사할린을 거점으로 삼는 아리랑로드를 확장하기로 했다. 급변하는 북한과 아리랑공동체를 공유한다는 취지다. 금년 사할린아리랑제는 러시아는 물론, 남북 합동공연도 추진한다"고 밝혔다.2018 사할린아리랑제는 9월14일 유즈노사할린스크, 15일 홈스크 , 16일 코르샤코프에서 펼쳐진다. 남북 예술단과 중국, 일본, 미국의 한인들도 참가하는 아리랑 민족축전이 될 전망이다. 【서울=뉴시스】 사할린 한인 reap@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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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신문]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아리랑’ 그 전승현황과 과제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아리랑’ 그 전승현황과 과제 "유네스코 등재 이후 아리랑 전승현상과 과제” 심포지움 열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등록 2017.12.23 12:26:58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민족 곧 배달겨레 하면 떠오르는 것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리랑”이다. 나라 안이나 밖이나 배달겨레 누구나 가슴 속에 담고 살면서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부르는 노래 "아리랑”, 그 아리랑이야말로 배달겨레를 하나로 만드는 노래 가운데 으뜸이다. 아리랑은 지난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올랐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변화가 있는가? 또한 어떻게 전승되고 있는가를 묻는 심포지엄이 열려 주목을 받았다. 어제 22일 낮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기독교회관 대회의실에서 "유네스코 등재 이후 아리랑 전승현상과 과제”라는 제목의 아리랑 심포지움이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주최, 아리랑학회 주관,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후원으로 열렸다. ▲ 기조강연을 하는 미국 아리랑대학교 박태종 총장 ▲ 주제발표를 하는 이창식 세명대 교수, 아리랑학회 기미양 이사, 아리랑학교 김연갑 교장(왼쪽부터) 심포지움은 먼저 미국 아리랑대학교 박태종 총장이 "국외자의 아리랑 세계화에 대한 단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했다. 그는 아리랑을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노래,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노래,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오늘의 것이면서 옛것인 노래, 기쁨의 노래이면서 슬픔의 노래이고 슬픔의 노래이면서 기쁨의 노래다.”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의 아리랑 세계화 방안은 우선 아리랑의 세계를 문화론적 입장에서 요약, 제시한 안내서가 필요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해설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창식 세명대 교수는 "문화유산 등재인식과 아리랑 전승자 활성화 방안”이라는 주제발표에서 "뛰어난 전승자 한 명이 마을문화는 물론 지역문화를 활성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이런 인물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한데, 아리랑의 전승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아리랑의 예능보유자 문제도 이런 차원에서 검토해볼 시점에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 활동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의 아리랑학회 기미양 이사의 주제발표는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를 직접 돌아보며 확인한 결과를 토대로 현황을 정리했다. 그러면서 "전승, 연구, 시민운동, 공연중심, 이 네 가지 성격의 30개 단체가 활동하고 있지만 매우 침체된 분위기이다. 이를 타개하는 데는 예능보유자가 지정되어 지역 아리랑의 전수 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마지막 주제발표는 "유네스코 등재 이후 아리랑의 제문제”라는 제목으로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이 맡았다. 그는 "유네스코 등재로 기대했던 아리랑의 세계화와 전국적 전승활성화는 5년이 지난 지금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는 북한과 중국과의 공통논리를 전제해야 하는데, 여건상 논의 한 번 못한 실정이고, 전국 활성화는 각 시도 별로 정체성이 확인되는 지역아리랑을 조사한 뒤 그 활성화를 위해 예능보유자를 지정해야 하는데도 지자치제가 뒷짐 지고 있어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지정토론을 하는 김호규 국악신문 대표이사, 정창관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조직위 자문위원, 김중현 경기도립국악단 기획실장(왼쪽부터) ▲ 아리랑 심포지움 모습 ▲ 의지를 다지는 참석자들 이후 김호규 국악신문 대표이사, 정창관 서울아리랑페스티벌 조직위 자문위원, 김중현 경기도립국악단 기획실장의 지정토론이 있었으며, 서한범 한국전통음악학회장을 좌장으로 한 자유토론도 이어졌다. 심포지움이 끝난 뒤 정은하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은 "오늘 국악 관련 석학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아리랑 전승에 관해 여러 발표를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가슴 떨리고 벅차다. 이제 나머지는 우리 전승자들의 몫이라고 본다. 우리 전승자들은 앞으로 오늘 나온 방안들을 토대로 치열한 몸짓을 해야만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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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양 “2014, 아리랑 창조적 계승의 해”…위대한 3대 성과인쇄하기 닫기 연예 > 가요 기미양 “2014, 아리랑 창조적 계승의 해”…위대한 3대 성과 등록 2014-12-31 08:28:00 | 수정 2016-12-28 13:53:14 【서울=뉴시스】기미양 이사·아리랑학회 = 2011년 중국의 아리랑 자국 국가무형유산 지정으로 고조된 아리랑 현상은 금년 북한의 유네스코 등재에 이어, 내년 중반기 우리 문화재청의 아리랑 국가주요무형문화재 지정과 중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신청 여부로까지 이어질 듯하다. 3국이 하나의 종목을 각각 역사와 성격과 내용을 달리하여 자국 문화재로 지정한 것도 이례적인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아리랑 현상’을 있게 할 만하다. 이는 아리랑을 단순한 전통민요의 하나로만 보아야 하느냐는 본원적인 문제와 함께 각기 다른 국가명으로 인류무형유산이 된 남북의 아리랑이 과연 ‘아리랑 분단’ 효과 그 이상이 검증될 수 있는가의 문제까지 제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아리랑 현상’ 속에는 자발적 전승주체임을 자긍심으로 삼고 아리랑을 향유한 지방 곳곳의 아리랑꾼들이 있었다. 바로 이들이 아리랑판의 주인인 것임을 믿는다. 필자는 두 번에 걸쳐 아리랑판의 주인공들을 기록했다. 오늘 2014년의 마지막 날 기억하고 싶은 아리랑 사연을 가슴에 담으려 한다. 단견으로 표현하면 ‘창조적 계승’ 아리랑 판 세 가지이다. 하나는 경서도 국악인 유지숙의 창작 아리랑 14편을 담은 음반 ‘우리 아리랑’ 발매(신나라레코드)이고, 둘은 한국가곡연구소의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집’ 발간이고, 마지막은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 아리랑을 수록한 음반 ‘I Was, I Am, I Will’을 발매한 것이다. 모두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이란 선례로 내세울 만한 성과작들이다. ◇‘구동존이 아리랑’에서 ‘우리 아리랑’으로 2년 전, 늦었지만 나와야 하는 아리랑 음반이 나와 주목을 끈 것이 유지숙의 ‘구동존이(求同存異) 아리랑의 재발견’(신나라레코드)이다. 전공인 서도창으로 북한과 중국 동포들의 아리랑을 우리가 음반화한 것이다. 진정한 통일이 ‘어느 시점의 순간적인 사건’이 아닌 땅과 사람과 마음이 하나되는 통합이라면, 알고 부르고 있는 아리랑이 서로 같은 아리랑으로 불리는 것이 앞서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음반은 소중한 남북문화교류의 실적인 것이다. 【서울=뉴시스】최영식 소장·한국가곡연구소 = ‘아리랑 한국예술가곡 대축제’가 막을 내렸다. 한국가곡연구소는 금년 5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2014 세계무형유산활용 관광자원화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아리랑 한국예술가곡대축제 ‘아리랑 혼(魂)으로 타오르다’(부제)를 기획하였으며,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10월12일)과 의정부예술의전당(11월14일·공동주최)에 이어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세 번째 연주를 마지막으로 축제를 마쳤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은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어있는 아리랑, 판소리, 가곡, 농악 등 17개 종목의 훌륭한 우리나라 문화자원을 보존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개발하고 활용하여 문화관광 콘텐츠로 만드는데 목적을 두고 지원사업을 시행해오고 있으며, 서양음악 장르 중 한국예술가곡을 연구하는 단체인 본 연구소가 아리랑을 다양한 장르로 확산시켜 세계인의 아리랑으로 발전시키자는 취지 아래, 한국예술가곡에 입힌 아리랑을 주제로 아리랑 한국예술가곡대축제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하여, 어렵사리 행운을 얻은 것이다. 이문태 이사장과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기금을 받은 단체는 금년 안에 모든 행사를 마쳐야 하는 조건이므로 축제를 치르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 온 6개월이었다. 후원기업을 찾기 위해 가진 능력 안에서 최대한 노력하였으며 연주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수시대관의 어려움을 감수해야했다. 국가의 문화상징인 아리랑이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사회 전반에서 여러 형태의 행사와 축제가 봇물 터지듯 하며 아리랑 붐이 급격히 일어났다. 한국가곡연구소는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하면서 행여 시류에 편승하는 모양새로 비춰지지 않을까 고심하였으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음악인으로서 순수예술 중 가장 대중과 가까이 호흡할 수 있는 한국예술가곡의 주춤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해결과제는 십수 년동안의 화두였으므로, 아리랑을 소재로 가져 온 아리랑한국예술가곡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맥락으로 여겨질 수 있어서 본격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만만치 않았다. 뮤지컬, K팝 등 급변하고 있는 음악문화의 현실 속에 클래식 장르인 한국예술가곡은 극히 일부의 애호가와 소수의 전공자만이 맥을 이어가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리랑을 한국예술가곡에 입히기로 하고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집을 펴내기 위해 몰두하고 있던 즈음, 지원 단체로 선정되어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축제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을 하면서 아리랑이 왜 민초의 소리인지, 아리랑을 부르면 목이 메이고, 아리랑을 들으면 왜 눈물이 고이는지 알게 되었으며 준비 전의 막연한 불안감과 우려는 서서히 사라졌다. 당연한 결론인 것이었다. 한국인의 뛰는 가슴과 아픈 소리에 전율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무심하고 무덤덤했던 조국애가 내심 부끄러웠고 서양음악 분야에서 긴 세월 성악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서양음악의 틀에 갇혀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과 흥을 지혜와 해학으로 풀어나가는 겨레의 멋과 숨결 그리고 우리 민족의 굴곡진 삶이 고스란히 베인 아리랑을 한국예술가곡에 본격적으로 가져오는 작업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으며, 축제에 참가한 연주자들의 한국예술가곡에 대한 사랑과 확신어린 모습을 보며 희망과 용기를 얻었고 한국예술가곡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무대를 압도하며 뛰어난 연주기량을 펼치는 그들을 보며 커다란 축제를 준비하며 달려온 벅찬 과정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국내 성악계의 중진 소프라노 김영애 가천대 교수, 소프라노 박정원 한양대 교수와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며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베이스 전승현과 소프라노 박현주 숙대 교수, 테너 신동원, 진성원 그리고 세계 고음악계의 거장들과 활발한 연주활동을 펼치고있는 소프라노 임선혜와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금년 국내 오페라계의 신데렐라로 주목받은 소프라노 손지혜와 해외 오페라 극장에서 초청받고있는 바리톤 나건용은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의 예술가곡인 한국예술가곡과 아리랑의 소중함을 알고 축제에 참뜻을 모아 준 것이다. 지휘자 김성진은 서양악기와 전통악기의 비율을 3대 2로 조합하여 새로운 음색을 만들어내며 국내 유일의 아리랑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아리랑 한국예술가곡 연주를 윤택하고 조화롭게 이끌었으며 배우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의 역사성을 드라마적으로 풀어내어 무대에 극적 흥미와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오대환 음향감독과 총연출을 맡은 유은선 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의 날카로운 예술적 감각은 세 번째 축제무대인 예악당 연주를 축제의 완결편마냥 꽃 피웠다. 예악당 무대는 배우 유인촌 전 문화체육부장관이 1917년 1차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의 후손들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부른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었음을 알리며, 서울음대 성악과 저학년으로 구성된 12명과 당시의 상황을 간단히 재현하였다. 학생들은 서울대 윤현주 교수의 지도로 작곡가 이건용(서울시립오페라단 단장)의 아카펠라 ‘아리랑’을 수용소에 갇힌 복장으로 차려입고, 청아한 음색으로 정제된 듯 곱게 모아 부르면서 밑에서 위로 배우 유인촌과 함께 이동무대를 타고 올라와, 당시의 시대적 극한 상황을 그렸다. 마지막 무대는 서울시 구립여성합창단연합회, 서울아버지합창단과 서울대중창단이 부르는 아리랑(진규영 편작곡) 합창과 아리랑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아리랑 판타지에 양길순 선생과 제자들의 도살풀이춤에 이어 명창 안숙선이 진도아리랑과 문경새재아리랑을 구성지게 불러 감동어린 아리랑을 선사했으며 객석과 함께 아리랑 제창으로 마무리하였다. 연주를 보면서 눈물을 훔쳤다는 객석의 많은 분들은 녹화를 한 SBS의 방송날짜를 기다리겠노라고 전하였다. 이번 축제가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리랑이 서양음악의 클래식 장르인 예술가곡과 만남으로써 예술가곡무대로서는 처음으로 서양음악과 전통음악과의 융합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였다. 둘째, 아리랑이 본격적으로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음악언어인 예술가곡 장르와 결합함으로써 아리랑한국예술가곡으로 재탄생되어, 세계인의 한국예술가곡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다양한 스타일의 아리랑예술가곡의 레퍼토리를 발굴, 아리랑의 한국예술가곡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방향정립에 한 몫을 하였다고 본다. 특별히 소프라노 임선혜와 손지혜가 부른 ‘소프라노를 위한 세 개의 아리랑’(이영조 곡)과 베이스 전승현이 부른 ‘아리랑 산촌에’(백병동 곡) ‘장터아리랑’(정애련 곡) 그리고 소프라노 김영애와 박정원이 부른 ‘정선아라리’(임준희 곡)는 국내 초연으로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곡으로 독일가곡과 이탈리아가곡 등에 견주어 전혀 손색없는 뛰어난 작품으로 이번 축제를 통해 받은 선물이다. 모르고도 부르고 알고도 부르고 그저 마음 가는대로 가슴으로 부르는 우리들 삶의 소리 아리랑을 만나 사랑을 키운 2014년의 늦은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은 그저 노랫말이 좋아 흥얼거리며 한국예술가곡에 탐닉하기 시작한 시절보다 몇 갑절 진한 사랑과 애틋한 연민에 빠진 날들이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 방송매체의 어느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내 글 중에 좋은 것이 있어서 써왔다고 하였다. ‘이번 축제는 한국예술가곡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분들의 무대이다.’ 기자는 왜 좋은 글이라고 한 걸까. 나는 왜 한국가곡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분들의 무대라는 표현을 굳이 했을까. 못내 아쉬운 여운이 사라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길을 가노라면 동행하는 벗도 만나게 되고 뜻밖의 선물에 눈이 부셔 이유도 없이 눈물이 핑 돌 것만 같다. 첫눈을 보면 반가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지는 동심 어린 아이처럼…. http://koreartsong.com/ 이를 바탕으로 아리랑을 주체화한 유지숙이 이 땅 곳곳을 표제화 한다는 마음에서 금년에 제주도에서 경기도까지의 지명 아리랑을 창작하여 음반화했다. 작곡가(이상균 세한대 전통연희학과 교수)와의 일심으로 이뤄진 것으로 각각의 작품마다 지역성을 충실히 고려하였다. “서도소리와 경기소리가 섞여있는 지방이라서 강화아리랑을 그 선율에 얹었다. 제주아리랑은 제주의 독특한 선율과 방언을 가사로 만들어 이질감 없이 자연스런 아리랑이 되도록 했다. 제주도청이 관심을 갖고 방언을 감수했고 탐라문화제 때 초청해 부르도록 해줬다.”(유지숙) 14곡의 창악 아리랑을 한 음반에 담고, 이를 발표회에서 실연하였으니 이는 이미 ‘아리랑 완창’으로 표현했듯이 민요계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작곡·작사가나 창자의 활동은 앞으로 강원도와 북한지역 대상 아리랑을 창작하리라는 확장성을 기대하게 한다. 이 확장성은 이 음반이 번다한 아리랑 상황 속에서 의미있는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 작업의 실증임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세계화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집’ 유지숙의 작업이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역할하게 하는 것이라면, 한국가곡연구소의 ‘아리랑 한국예술가곡집’(KOREAN ART SONG, INTERNATIONAL EDITION) 발간은 아리랑의 세계화를 위한 성가로 보게 된다. 이미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와의 참여로 2012년 발행된 ‘한국예술가곡집’ 제1권의 발행으로부터 인연이 있는 연구소와 아리랑 가곡을 집대성한 자료집을 발간하여 해외에 알리는 것이 의미있겠다는 논의를 하였다. 이후 필자는 세 곡 정도의 창작을 발의하고 백병동, 임준희, 그리고 이탈리아 피렌체 음악원 교수인 파올로 푸를라니(Paolo Furlani)에게 위촉하였다. ‘정선아라리’ 사설에서 가사를 선(選)하고, 창작 아리랑인 ‘아리랑 산천에’와 ‘베니스아리랑’을 낳게 하였다. 【서울=뉴시스】김진아 기자 =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 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 첫 번째 정규 앨범 '아이 워즈, 아이 엠, 아이 윌(I WAS, I AM, I WILL)' 발매기념 쇼케이스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번 앨범에는 미니 앨범의 대표곡과 새롭게 창착한 곡 등 13곡이 실렸으며, 포크, 록, 재즈,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를 담았다. 최고은은 '아이 워즈, 아이 엠, 아이 윌' 발매를 기념, 11월 20일~21일 서울 홍대 앞 KT&G 상상마당 라이브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다. 2014.11.20. bluesoda@newsis.com 필자로서는 2000년 12월10일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시상식 때 조수미가 “아리랑은 평화를 상징한다(Arirang is a symbol of peace)”라는 멘트와 함께 ‘아리 아리랑’(작곡 안정준)에 감동한 후로 아리랑 가곡작품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2001년 ‘통일아리랑축전’을 기획하며 작곡가 최영섭 선생에게 ‘의병아리랑’과 ‘따르리라’ 라는 두 곡을 위촉, 초연을 한 바 있다. 이번에 이들을 포함하여 가곡집에 모두 수록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제1집에서 시도되어 평가를 받은 가사에 국제음성기호(IPA)를 적용, 아리랑 가곡에 세계 솔리스트들이 용이하게 접근하게 하였다. 분명 한곡가곡의 역사 만 아니라 아리랑의 세계화에도 평가가 기대되는 작업으로, 아리랑의 예술가곡화라는 창조성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 기대는 두 작곡가의 발언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아리랑 멜로디가 이토록 강한 영감을 주는 것이 놀랍다”(파올로 푸를라니),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는 가사 두 줄에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적 미학이 숨겨진 줄 몰랐다.”(임준희) 이미 피렌체 무대에 ‘콩쥐팥쥐 이야기’를 오페라로 작곡하여 올렸던 만큼 우리 아리랑에 대한 정서를 갖고 있는 작곡가의 평가이고, 현역 중 대표적인 작곡가인 암준희 선생은 아리랑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말한 것으로 세계화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최고은 ‘I Was, I Am, I Will’ 속의 아리랑 필자의 핸드폰 컬러링은 나윤선의 ‘아리랑’이다. 유럽 재즈계에 알린 작품이라 많은 이들에게 선물을 하는 마음으로 핸드폰에 사용했다. 그런데 이 작품만큼 좋은 또 하나의 아리랑이 출현했다. 바로 세 장의 미니 앨범을 통해 안정적인 가창력과 호흡법에서 깊은 인상을 주는 보컬로 평가를 받은 싱어송라이터 최고은이 부른 ‘본조아리랑’이다. 【서울=뉴시스】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첫 공식 음반 ‘I Was, I Am, I Will’ 11번 트랙 곡으로 6번의 뱃노래와 함께 감동을 받았다. 뱃노래는 ‘편곡-해체’로 전통민요를 모티브로 한 로킹 사운드라면, ‘아리랑’은 세 가지 악기에 의한 ‘포크적 재해석’이다. 인트로와 엔딩이 전혀 아리랑이 아니다. 이런 편곡이 오히려 4분을 아득한 아지랑이 속으로 유도한다. 자신의 어쿠스틱 기타와 간결한 드럼, 전기 기타가 주는 단출함이 최고은 특유의 서정성을 더해 주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혹시라도 이 두 줄 가사를 거친 해석만으로 칙칙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꼭 최고은의 이 곡을 들어보기를 권한다. 존 바이즈의 ‘리버 인 더 파인’의 서정성을 느끼는 반전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리랑에서 존 바이즈를 느낀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이는 아마도 앞선 트랙 타만 네가라(Taman Negara)에서 갖게 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말레이시아 밀림에 대한 동경심과 다음 트랙 ‘봄’에서 ‘우리는 왜 서로가 숲이 될 수 없는가’라는 성찰적 가사로 이어지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최고은이 판소리와 민요에 능한 가수라는 기대감의 반전이 주는 즐거운 배신감에서 느낀 것일 수도 있다. 또 아니면 엔딩 부분의 ‘아~리~’만의 무심한 읊조림이 추임새보다 더 긴 여운을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 나는 이제 내 핸드폰의 컬러링을 바꾸게 될 것 같다. 창작 아리랑으로? 가곡 아리랑으로? 아니면 최고은의 아리랑으로? 새해 어느날 확인해 드리리다. <사진> 위부터 명창 유지숙, 아리랑 한국예술가곡 대축제, 가수 최고은,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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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에 더해, 나름으로 늘 가슴에 절절하게 담았던 화두를 갖고 갔기 때문에 이런 지명의 의미가 각별하게 다가왔던 듯하다. 첫 번째 답사는 남은혜 명창의 음반 ‘북간도아리랑’을 구상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안중근의 의병정신을 주제로 한 ‘아무르아리랑’을 구상하기 위해서였고, 이번에는 항일무장 투쟁 ‘무기로서의 아리랑’ 현장을 가슴에 담는 것이 개인적인 관심사였다. 무기로서의 아리랑이란 주제를 가슴 속에 담은 것은 두 가지 계기에 의해서이다. 하나는 북한의 음악정치 원천이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시절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아리랑으로부터라는 사실 때문이다. 또 하나는 최근 읽은 1940년대 말 미국 좌파 포크그룹 <얄마닉 싱어즈>(Almanac Singers)의 ‘무기로서의 노래(Use of Songs as a weapon)’ 동아리 활동상의 감동에서다. 이들은 아리랑을 반전음악으로 사용한 피터 시거(PETE SEEGER)와 맥을 잇는 그룹으로서, 세계 저항음악을 말할 때 내 놓는 ‘무기로서의 노래’라는 슬로건을 창출한 음악가들이다. 필자의 과잉된 생각일런지는 몰라도 일제항일투쟁기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투사들의 아리랑 변용은 바로 이들보다 앞서 노래를 무기로 변용한 사례로 꼽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실례는 김산의 아리랑, 정율성의 아리랑, 광복군아리랑, 그리고 김일성의 아리랑 등을 그렇게 본다는 관점이다. 향수를 달래주고, 공동체적 친밀감으로 일체감을 형성시키고, 배우지 않아도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곡조에 항일적인 사설을 담은 것이다. 이는 향유하는 노래이면서 저항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7월 18일부터 24일까지의 조중접경지역 답사 내내 1930년대 말 중국 항일전선 지역으로 돌아가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구상했던 용정, 김산이 다닌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유하현 합리하, 김정숙이 김일성을 만나러 건넌 삼합, 보천보전투가 있었던 혜산진이 보이는 장백현, 뗏목아리랑이 흘렀던 압록강변에서 나운규와 김산, 그리고 정율성과 김정숙의 아리랑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독립당 출몰, 영사관 오도빠이···아리랑 아리랑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는 부를 수 없는 아리랑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르는 접경지대에서 불려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게 보게 된다. 필자가 수집한 자료 중 가장 앞서는 것은 1932년 7월 김경재가 북간도 상황의 기록 중에 조사한 다음의 사설이다. “독립당의 출몰이 자즈니/ 영사관 오도빠이 달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백두산=뉴시스】백두산 천지에서 아리랑남북공동등재를 기원하면서. 간도 용정에 있던 일본 영사관이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려고 싸이렌을 울리며 내달리는 상황을 아리랑에 각인시켰다. 일제의 오토빠이는 독립당을 추격하는 상징임을 모두에게 알림과 동시에 독립당은 계속해서 출몰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런 전승양상은 결정적으로 1941년 중경임시정부가 3대 군가의 하나로 채택한 광복군아리랑에서 진가가 발휘된다. “우리네 부모가 날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전해 주소/ 후렴-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넘겨주소/ 동실령고개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날려요.” 아리랑이 고난 극복의 추동체라는 사실을 말할 때, 떠올리는 이 광복군아리랑은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제를 밀어내고 승리한 기쁨을 앞당겨 자축하게 함으로 용전의 힘을 내게 하였다. 곡조가 밀양아리랑이니 배우지 않고도 즉석에서 합창할 수 있었으니 유용한 심리전술의 무기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강렬하게 되살아 난 아리랑 사연은 2013년 북간도답사 때 연길 정암촌에서 중국동포 음악가 김봉관 선생이 전해준 이야기이다. 요약하면 독립군 빨지산 활동상의 가슴 아픈 아리랑 사연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관동군 토벌대들이 산골짜기에 들어섭니다. 앞장에 선 ‘길 안내자’는 흰옷을 입은 조선족 노인이었습니다. 주위의 산봉우리를 둘러보던 노인은 목청을 뽑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이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도 못가서 발병난다…. 【북간도=뉴시스】2015 조중접경지역 답사 이동경로. 두만강 하류에서부터 백두산, 백두산에서 두만강 상류~하류. 미구에 노인은 일본군인의 군와 총에 쓰러지고 포위망을 늘인 항일유격대들의 분노의 총소리는 노인이 못다 부른 아리랑의 노래 가락을 이어갔답니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널리 알려진 항일투쟁 이야기입니다. 조선 노인을 왜놈 토벌대가 들이닥쳐 빨지산을 대라고 하며 끌고 갔는데, 노인은 약속한 장소로 가서 의연하게 아리랑을 불렸다 말입니다. 그것은 신호입니다. 그러니 아리랑은 처절한 왜놈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일본 토벌대(討伐隊)와 독립군 간의 추격전에서 “**도 못가서···”라는 대목의 숫자는 일본 토벌대의 규모를 알리는 것이다. 암호로 쓴 것인데,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러한 사실이 간자에 의해 일제에 알려졌고, 결국 독립군을 돕던 한 노인이 이 암호를 쓰다가 희생됐다는 이야기다. 이는 중국민족학교 황유복 교수의 ‘힌 옷의 동포’라는 책 속에도 들어있어 사실로 받아 들여지는 이야기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숙의 아리랑 사연도 관심 있게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북한의 음악정치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제7사 활동의 최고 전과라는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에서의 아리랑 역할을 확대, 재현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항일전선에서의 아리랑은 다양한 상황에서 확인 되는 것인데, 북한의 불후의 고전명작 ‘한 자위단원의 운명’이나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 하라’, 그리고 다부작(多部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불린 아리랑이 이런 상황에서 확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보천보와 간삼봉전투 아리랑> 【북간도=뉴시스】북한대학원대학교 2015 조중접경지역 현장답사단(단장 이우영 교수) 보천보에 홰불 올린 혁명군은 기세 높아/ 간삼봉의 싸움터엔 노래소리 드높았네/ 빨찌산녀장군이 선창 떼신 아리랑/ 봉이마다 릉선마다 뢰성타고 울렸네/ (후렴) 아리랑 스리랑/ 간삼봉에 불비 와서 아라리가 났네. 이 ‘간삼봉전투에 울려퍼진 아리랑’은 앞서 치러진 보천보전투에 이은 승전으로, 이 때 김일성과 김정숙이 아리랑을 함께 불렀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당시<매일신보> 1937년 7월 9일자가 보도한 ‘토벌대와 교화 중에도 노래 부르는 여당원, 김일성 일파 공비 격퇴’에서도 추정되듯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30년대 후반기 중국에서의 항일투쟁이 침체에 빠지는 시기로 중국군벌의 도움으로 유지되던 독립투쟁이 지하화 하는 상황에서 거둔 승전보였다. 이 승전은 일본 경찰을 격퇴한 전투로 김일성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린 전투이다.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으로 발행된 자서전『세기와 더불어』에 두 전투에서 아리랑이 혁명의 동지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고, 이를 계승, 2002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1937년 6월 4일 새벽, 일방적으로 대승한 전투, 장백현에서 보이는 함경남도(현 양강도) 혜산진으로부터 20㎞ 떨어졌다는 기록을 되살려 응시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상상의 전투신이 오버랩 되었다. 빨치산 전투방식대로 방화를 통한 충격과 주재 일본경찰을 비롯한 일인 관리만을 처단하여 공포심을 극대화 했다. 이 사실을 언론에 전해주어 대서특필,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게 했다. 선전선동 활동으로 군사적 성과 이상의 정치적 성과를 거둔 전투였다. “간삼봉 전투장에 울린 <아리랑>은 혁명군의 정신적 중심을 비쳐 보이고 낙천주의를 시위하였다. 적들이 <아리랑>을 듣고 어떤 기분에 잠겼겠는가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후에 포로들이 고백하기를 그 노래를 듣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졌고 다음 순간에는 공포에 잠기였으며 나중에는 인생 허무를 느꼈다고 하였다. 부상자들 중에는 신세를 한탄하며 우는 자들도 있었으며 한쪽에서는 도망병까지 났다.” 김일성의 ‘세기와 더불어’ 제6권에 나오는 대목이다. 무장투쟁 사상 처음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국내 진공작전으로 평가하는 전투에서 아리랑을 불렸으니 북한이 아리랑을 ‘혁명동지’로 표현할만한 것이다. 【북간도=뉴시스】수풍댐에서 배를 타고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만나다. 우리가 손을 흔들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외치면 그들도 손을 흔들며 웃어 준다. ◇백두산은 없고 장백산은 있다 그런데 이런 나의 ‘1930년대 아리랑 여행’(?)에서 현실로 일깨운 것은 백두산 답사에서였다. 그 이유는 천지를 오르기 위해 세 번이나 중국에 돈을 내야함은 물론 모든 표기에서 백두산이 아닌 ‘장백산’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조선족 동포들이 부르는 ‘장백산아리랑’이 조선족 스스로가 현실적으로 중국신민임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 노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심 더욱 안타까웠다. 그래서겠지만 이 노래는 1983년 전국민족단결현상모집에서 창작상을 받기도 했다. <장백산아리랑> “그 옛날 천지엔 선녀 내렸고/ 오늘은 세월 좋아 벗님들이 이 고장에 찾아 오누나/ 신선의 꽃 활짝 피는 우리네 장백산은/ 중국의 명산이요 연변의 자랑일세.” 조국(조선이나 대한민국)의 명산이 아니고, 중국의 명산이고, 연변의 자랑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백두산이 아니고 장백산이다. 만일 북한 지역에서 오른다면 장백산이 아닌 백두산임은 당연한 명칭이다. 이런 문제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자 갑자기 1930년말 상황과 달라진 것인 없다는 생각에서 천지에 오르는 발길이 너무나 힘겨웠다. 조중접경지 7일간의 답사, ‘여행’이 아니고 ‘답사’여야 하는 이유를 실감했다. 아리랑조차도 역사와 현실적 해석을 달리해야 하고, 산에 오름이 분명 여행이고 등산임에도 여행이 아닌 답사임은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인내를 필요로 할 듯하다. 중국의 역사와 현재, 이곳에서 만나는 조선족이라는 중국신민들, 그리고 멀리서만 볼 수밖에 없는 북한이 중첩된 곳이기에, 이를 어떻게 풀어 낼 것인지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답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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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왜 우리는 일본의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로 가는가"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계 "왜 우리는 일본의 아카지마 아리랑 고개로 가는가" 등록 2015-02-06 09:25:51 | 수정 2016-12-28 14:32:32 【서울=뉴시스】일본 오키나와 현 미야코지마 시의 아리랑비 【서울=뉴시스】기미양 추진단장(아카지마 아리랑 평화음악제) = 만남은 언제나 설레임을 갖게 한다. 그 설레임이 비록 아픈 역사적 사실을 만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2월9일 일본 오키나와 현에 있는 ‘아리랑 고개’를 만나러 간다. 실재적 아리랑고개인 경북 문경새재를 노래하는 문경아리랑보존회와 함께 역사적 아리랑고개인 오키나와 아카지마 아리랑고개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아직 보름 정도를 남겼지만, 사단법인 문경아리랑보존회와 함께 문경새재를 찾아가서 만남의 설레임을 나눴다. 지난 24일 문경새재 제2관문 문경아리랑노래비 앞에서 송옥자 회장과 회원들의 아리랑을 들으면서 이 고개에 스며있는 외침과 전쟁의 상흔들을 기억해냈다. 고개는 변혁의 기점이다. 시작과 끝이 동시에 이뤄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고개는 극단의 기점이기도하다. 전쟁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비로소 희망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이 같은 땅의 수많은 고개는 문경새재로 상징된다. 고개 정상에 떨어진 빗방울이 반은 한강으로 가고, 반은 낙동강으로 가는 자연적 극점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지만 과거급제의 기쁘고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 고개가 문경새재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높은 민중사 격변의 기점이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시 경복궁을 불태우고 평양으로 내닫게 한 배경은 신립 장군이 문경새재 방어를 포기한 까닭이었고, 경복궁 중수 7년 공사로 수난을 당한 삼남인들의 아픈 기억과 이후의 의병전과 동학혁명, 특히 한국전쟁 시 낙동강 방어선을 놓고 남북 군인은 물론 중공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격전으로 많은 피를 뿌린 문경 전투의 사연이 이 고개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의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방망이로 다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는 이 같은 문경새재의 아픔과 상흔을 특산품의 상실감으로 표현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개를 넘어 가는 의지를 노래한다. 이렇게 아리랑은 문경새재가 자연적이고 실재적인 고개이면서, 심상적(心象的)이면서 역사적인 고개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연유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오키나와 현의 작은 섬 아카지마 아리랑고개는 얼마나 아프고 또한 그 깊이만큼 높은 어떤 희망이 담겨있는지를 생각하면 설레임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 오키나와의, 아카지마의 아리랑고개도 문경새재의 사연만큼이나 깊고 높은 아픔과 희망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3박4일 만나게 되는 ‘아리랑노래비’와 ‘아리랑고개’···. 내 땅이 아닌 일본의 외딴 섬에 있다는 이 아리랑노래비와 아리랑고개의 존재는 역사적으로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아리랑 사연으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의외의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서 만나, 알고, 이해하여, 이를 아리랑정신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저항·대동·상생이란 아리랑정신으로! 【서울=뉴시스】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이 문경새재를 찾았다.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송옥자 회장과 회원들, 아리랑홍보대사 송미진, 문경아리랑경창대회 최연소 수상자 박주빈(당시 3세), 상여소리 명창 금명효, 기미양 단장, 유명옥·이인영 부단장, 이준용 다큐작가. <사진= 여행작가 엄문희> 아리랑정신의 승화는 아카지마 아리랑고개에서 세계적인 평화음악제를 개최하여 태평양전쟁 종전 70주년과 한일협정 5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새로운 미래 역사로 바꿔가는 것이다. 역사의 고개를 넘자는 것이다. 이의 추진을 위해 15명의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앞장서서 두 개의 고개를 통한 미래 역사를 새롭게 기록해 나갈 것인가를 확인하여 지속적인 교류를 준비할 것이고,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 추진단’이란 이름으로 진용을 짰다. 위령제와 고국의 아리랑을 올리는 공연을 위해 밀양아리랑보존회(광복군아리랑)·㈔김애경무용단(초혼무 아리랑)이 함께 하기로 했고, 류쿠국과 ‘아라리’ 교류 및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군 위문공연연예단의 아리랑 공연들을 조사하기 위해 아리랑학회와 ㈔한국전통음악치유협회가 참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관련 지자체 등에 보고하고 출판을 위해 영상 다큐팀(이준용)과 여행작가(엄문희)도 동행하기로 했다. 조선인 종군위안부 위안소와 조선인군부 강제수용소 조사 및 증언 기록은 이인영 선생과 송미진 선생이 맡고, 특별강의 ‘누치토타가라 아리랑 담론’ 강사로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선생도 동행한다. 특히 일본 내 아리랑 역사유적지 전문여행 기획을 위해 ㈜세종해외관광여행사 한상준 대표도 동행한다. 이번 답사에 ‘문경새재아리랑마을’에 5대째 터를 잡고 있는 김순옥 여사의 “시아버지(송영철)가 일본 징용 시절을 회상할 때는 언제나 아리랑을 불렀다”는 증언, 상여소리 명창 금명효 선생의 “탄광부였던 아버지(금인수)가 부른 탄광아리랑에는 일본말이 들어있어 징용의 사연이 담겨있다”는 증언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설레임을 더해 주었다. 아카지마아리랑평화음악제가 아카지마를 ‘평화의 아리랑섬’으로 발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서울에서 온 추진단 일행은 문경을 떠나왔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남북 당국이 아리랑으로 막힌 교류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읽었다. 아! 또 하나의 역사적 아리랑고개를 마주하였다.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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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기미양, 내가 만난 ‘아리랑 축제’ 현장·현장·현장인쇄하기 닫기 문화 > 공연/전시 기미양, 내가 만난 ‘아리랑 축제’ 현장·현장·현장 등록 2014-12-12 12:50:02 | 수정 2016-12-28 13:48:29 【서울=뉴시스】상주아리랑보존회 김동숙 회장. 서울 '2014 아리랑 판' 초청공연에서 상주아리랑을 열창하고 있다. 【서울=뉴시스】기미양 이사·아리랑학회 = 유네스코는 인류문화유산 '서정민요 아리랑'(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의 다양성. 공동체성, 창조성에 주목했다. 이러한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주년 기념행사가 전국적으로 개최되었다. 이 중 필자는 지난 4~5일 바쁘게 세 곳의 행사에 참여했다. 상주아리랑축제, 문경아리랑전수관 오픈식, 춘천의병아리랑 우석여중 공연이다. 모두 나름의 주제 하에서 자발적 전승을 실천하는 현장이었다. ◇상주아리랑, 영남아리랑과의 새로운 융합 현장 유네스코는 아리랑이 전통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는 '창조적 계승'에 주목했다. 아리랑 역사에서 창조적 계승 작품을 시대적으로 꼽는다면 그 첫째가 1926년 영화주제가 아리랑, 둘째가 1950년대 김옥심제 정선아리랑, 셋째가 1980년초 김소희에 의해 작창된 상주아리랑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상주아리랑이 목하 주목을 받고 있다. 무용음악(김영희 작 '고난의 꽃 아리랑')으로의 장르 확산은 물론 통일아리랑(이광수 소리), 북간도아리랑(남은혜 소리) 등으로 '노가바'되고 있다. 메나리조에 육자배기조 융합의 묘가 이런 장르 확산현상을 낳고 있는 것이다. 상주아리랑축제는 이번이 세 번째로 1997년부터 김동숙 회장(69)을 중심으로 30여명의 회원으로 보존회가 구성되어 2008년 첫 행사를 개최했고, 2012년 12월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일인 12월5일 두 번째 행사를 개최했고, 금년 등재 2주년 기념으로 12월4일 세 번째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사단법인 영남아리랑보존회 6개 지부(상주·영천·대구·부산·봉화·성주)와 함께 하여 상주아리랑과 영남지역 아리랑의 새로운 융합을 꾀하였다. 상주시민과 영남 지역 아리랑의 이해와 자극을 통해 상주아리랑의 위상 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특히 관객과 소통하고 이해를 위해 해설이 있는 공연으로 필자가 맡아 진행했다. 나름으로는 상주아리랑의 융합정신을 시대정신으로 제시하려 노력했다. 【서울=뉴시스】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아리랑 등재 2주년 기념, 12월4일 2014 상주아리랑축제. 상주아리랑보존회 김동숙 회장 초청으로 사단법인 영남아리랑보존회 6개 지부(상주·영천·대구·부산·봉화·성주)가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행사는 '난타아리랑'으로 막을 열어 김동숙 회장의 상주아리랑으로 시작했다. 이어 사단법인 영남아리랑보존회 정은하 회장이 1936년의 대구아리랑과 2003년 자신이 작창한 대구아리랑을 열창했다. 이어 영천아리랑보존회 전은석 회장과 회원들의 영천아리랑, 조순분과 임옥자의 봉화아리랑과 성주아리랑, 부산아리랑보존회 김희은의 동래아리랑까지 이어졌다. 이외에도 북한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서도아리랑·영천아리랑·경상도아리랑·해주아리랑을 선보였다. 창작 아리랑으로는 독도아리랑, 부산아리랑, 달성아리랑이 소개되었다. 이렇게 상주를 중심으로 하여 영남의 아리랑 전승 활동이 역동적으로 융합하는 현장에 있었다. 2014 제3회 상주아리랑축제는 새로운 융합을 모색하는 아리랑시대의 한복판이었다. ◇문경아리랑 전수관 준공식 2010년대 들어 존재 부각에 성공한 지역 브랜드 중 문경아리랑은 수위로 꼽힌다. 이 과정에 오랫동안 문경아리랑을 전승해 온 송옥자의 존재는 분명하다. 박달나무가 문경새재를 상징했듯 문경아리랑은 송옥자(63·단법인 문경아리랑보존회 이사장)가 상징해왔다. 그래서 문경시는 2013년 음반 '고개의 노래 문경아리랑' 취입으로 송옥자의 위상을 인정했고, 이번 12월5일 문경아리랑보존회(회원 40여명)를 전승 단체로 인정하여 전수관을 준공, 기념식과 공연을 하게 되었다. 필자는 상주 행사를 마치고 다음날 문경으로 넘어와 전수관 준공식에 참석했다. 송옥자 이사장은 축사에서 "오늘 아리랑 등재 2주년 기념일에 오랜 꿈이었던 전수관의 준공식을 갖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라고 했다. 고윤환 시장도 축사에서 "국립아리랑박물관건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여 그 열기를 확인했다. 이 열기 속에는 문경아리랑보존회의 견고한 공동체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알고 있다. 【서울=뉴시스】12월5일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전수관 준공식. 송옥자 회장, 고윤환 문경시장, 기미양 이사 등이 참석했다. 문경아리랑보존회의 견고한 공동체성은 이날 기념식에서도 확인되었다. 회원 모두가 잔치음식을 집에서 손수 마련해 와서 함께 한 것인데 도토리묵과 두부가 양념장으로 맛을 더했고, 북어찜과 닭발찜이 특별 잔치임을 알렸다. 배추전, 식혜, 시루떡도 푸짐했다. 문경아리랑의 전승 의지에 답한 아리랑전수관 준공, 이에 다시 화답한 것이다. 이만한 잔치상이 또 있겠는가? 각박한 서울살이에 쪼들린 필자의 지나친 감상만은 아닐 것이다. 전국의 이런 저런 많은 전승 단체를 겪어온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이 공동체성은 소중한 아리랑정신의 하나인 대동정신의 바탕일 것이다. ◇의병아리랑보존회의 의로운 활동 강원과 경북 일대에서 불려지는 아라리에는 지명과 서사가 있는 사설이 있다. 의병사를 입증하는 구비(口碑) 사설 6수이다.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춘천의 봉의산아 너잘있거라/ 신연강 뱃터가 하직일다 【서울=뉴시스】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송옥자 명창. 2010 한국구비문학대계 문경 편에서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민속아카이브 작업을 위해 문경새재아리랑 108수를 불렀다. ②귀약통 납날개 양총을 매고/ 벌업산 접전에 승전을 했네 ③우리나 부모가 날기르실제/ 성대장 줄려고 날길렀나 ④할미성(고모성) 꼭대기 진을치고/ 왜병정 오기만 기다린다 ⑤마고자 실갑에 양총을메고/ 북망산 접전을 가네 【서울=뉴시스】2014 의병아리랑 특별공연 현장 ⑥고부백산 접전시에/ 알뜰한 군병이 다죽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싸 아라리야 이 사설을 독립시켜 의병아리랑이라고 부른다. 아리랑으로서의 연속성(continuity)을 갖고,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직손 기연옥의 창조적 수용에 의한 변이(variation)로, 의병정신을 선택(selection)하여 부르는 것이다. 3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의병아리랑보존회 기연옥(62) 이사장이 2010년대 들어 차근차근 보급시키고 있다. 강원도와 춘천시의 후원으로 '2014 해설이 있는 의병아리랑' 순회공연을 종료하고, 유네스코 등재 2주년 기념으로 양구여중에서 특별공연을 가졌다. 체육관 조명과 음향의 부족함을 똘망한 여중생들의 눈빛으로 밝히며 유인석 의병장과 윤희순 여성 의병장의 활동상과 아리랑의 인류문화유산적 보편가치를 전했다. 의병아리랑·윤희순아리랑·춘천아리랑·의병살풀이 등을 20여 회원들의 자원(自願) 무료공연, 의로운 재능기부 활동이다. 강원지역 전계층에 보급을 넘어 제천, 문경, 장성 지역은 물론 중국 하얼빈과 러시아 연해주 동포사회까지 보급을 준비하고 있다. 금년의 강원도 10개 시군 순회공연을 통해 내용과 규모를 조정해왔다. 멀리뛰기를 준비한 것이다. 승용차로, 고속버스로 2박3일을 경북에서 강원도를 오르내렸다. 관객으로 또는 해설자로 만난 세 곳의 현장, 참으로 벅차게 마주했다. 이런 벅찬 현장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갈 것이다. 아! 아리랑,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박3일만 같아라! www.arirang21.org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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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중국, '아리랑 중국 문화재 만들기' 노골화인쇄하기취소 중국, '아리랑 중국 문화재 만들기' 노골화 기사입력 2012-12-06 06:11 최종수정 2012-12-06 09:25 중국, '아리랑 중국 문화재 만들기' 노골화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작년 10월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같은 제목의 책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연변주 문화국 편)'에 실린 서로 다른 아리랑 내용. 책 마지막 페이지에 발간 일자가 2011년 10월로 동일하게 찍혀 있지만 한 책에는 아리랑이 성급(省級) 무형문화유산 '아리랑타령'(阿里郞打令)으로, 또 다른 책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아리랑'(阿里郞)으로 표기돼 있다. 지난해 중국 당국이 아리랑을 자국의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책 내용이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부 기사 참조 >> 2012.12.6 photo@yna.co.kr "아리랑,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서울=연합뉴스) 황윤정 서혜림 기자 =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이주와 생활 속에서 류전(유전)되여 내려오며 불리운 중국 조선족들 속에서 널리 전해내려온 가장 대표적인 민요이다. 아리랑은 '아리랑'을 중복해서 부르는 것이 특징인데 선률(선율)이 류창(유창)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평온하며 아름다운 특성을 지니고 있는바 중국 조선족들 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작년 10월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연변주 문화국 편)'에 실린 내용이다.지난해 아리랑을 자국의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중국의 '아리랑 중국 문화재 만들기' 움직임이 노골화하고 있다. 조선족을 소개하는 책자에 아리랑 관련 내용을 대거 수록하는 등 아리랑을 중국 문화재로 만들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도 그 내용이 수정돼 재발간됐다. 아리랑이 중국 국가무형문화유산이라고?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작년 10월 중국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발간된 같은 제목의 책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연변주 문화국 편)'. 왼쪽 책에는 아리랑이 성급(省級) 무형문화유산 '아리랑타령'(阿里郞打令)으로, 오른쪽 또 다른 책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아리랑'(阿里郞)으로 표기돼 있다. 지난해 중국 당국이 아리랑을 자국의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뒤 책 내용이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부 기사 참조 >> 2012.12.6 photo@yna.co.kr 기미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은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발간 일자가 동일한 두 가지 종류의 '연변무형문화유산화첩'을 입수했다면서 아리랑 관련 내용이 수정돼 있었다고 말했다.책 마지막 페이지에 발간 일자가 2011년 10월로 동일하게 찍혀 있지만 한 책에는 아리랑이 성급(省級) 무형문화유산 '아리랑타령'(阿里郞打令)으로, 또 다른 책에는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아리랑'(阿里郞)으로 표기돼 있다.책 내용도 다르다. 아리랑을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표기한 책은 아리랑을 단순히 "중국 조선족의 대표적인 민가"라고 소개한 반면 아리랑을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으로 기재한 또 다른 책은 "중국 조선족들 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기 사무총장은 "책 제목은 물론 내용이 다 똑같은 데 아리랑 부분만 다르다"면서 작년 10월 1일에 책을 출간한 뒤 아리랑 내용을 수정해 재발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기 사무총장은 "진도아리랑타령, 밀양아리랑타령 등 (조선족이 부르는) '아리랑타령'과 (우리가 흔히 아는) '본조(本調) 아리랑'을 모두 선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 종류의 책자를 발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아리랑 곡이 수록된 '청년학생가곡집'(1955년 연변교육출판사 발간)도 입수했다면서 "해방 이후 나온 책 가운데 아리랑이 수록된 가장 최초의 책"이라면서 "조선족들은 해방 후 아리랑을 민족 표상으로 여겼다"고 소개했다. '조선족'에 실린 아리랑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중국 랴오닝(遼寧)민족출판사에서 올해 4월 18일 재발간한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에 실린 아리랑. << 문화부 기사 참조 >> 2012.12.6 photo@yna.co.kr 중국 랴오닝(遼寧)민족출판사에서 펴낸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에도 아리랑 내용이 새로 수록됐다.2009년 1월 1일 발간된 '조선족'에는 아리랑 내용이 없었지만 올해 4월 18일 재발간된 책에는 책 서문에서부터 아리랑을 소개하고 있다. 또 별도의 지면을 할애해 아리랑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기 사무총장은 "중국이 아리랑을 자국의 무형문화유산으로 체계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면서 "정작 국내에서는 아리랑이 '너무 흔하다'는 이유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은데 한시바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아리랑이 이번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 없다"면서 고구려 고분군처럼 중국이 북한과 손잡고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공동 등재를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중국은 2004년 북한과 공동으로 각각 보유하고 있는 고구려 고분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yunzhen@yna.co.kr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중국 랴오닝(遼寧)민족출판사에서 올해 4월 18일 재발간한 조선족 소개 책자 '조선족'. 책 서문은 물론 별도의 지면을 할애해 아리랑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 문화부 기사 참조 >> 2012.12.6 photo@yna.co.kr hrseo@yna.co.kr 이 기사 주소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etc&oid=001&aid=0005973893 인쇄하기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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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traditional music newspaper] Interview with Research Director of the Arirang Society, Ki MEE-YANG (2009)[국악신문]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인터뷰 Q: What was the motivation for your research on Arirang?A: The most common form of Arirang among Koreans and foreigners is the one from a movie based in Seoul. Although there are many variations of Arirang for each region, we still tend to think of them as one and the same. What intrigued me to study Arirang further is this ironic nature of Arirang. One yet many and many yet one.The first time I got interested in Arirang was in the 1980s, when I first met Mr. Mu, Se-Jung. I participated in his performance of ’Tongmaksal(Unification Arirang)’, his most well-known performance to date, over 60 times. The motif behind this performance piece was that Arirang was an artistic representation of our collective psyche as Koreans. This encounter with Mr. Mu provided me with additional opportunities to participate in Arirang field trips sponsored by <Arirang Association Inc.>. My role as a volunteer in those trips was to produce video recordings and still images of the Arirang performances and artist interviews. Due to financial constraints, hiring professional camera crew was not an option, when we could barely afford then-expensive video cameras.In 1997, <Venture Arirang> was founded in Hanaro-building at Insa-dong, as well as the headquarters of Arirang Association Inc., the organization in charge of performance planning as well as exhibition of Arirang related documents. Being involved in events such as <National Arirang Festival> in 1999 and <Jindo Arirang Exhibition> in 2000, being responsible for adaptation of Arirangs to performance pieces and providing narration for each albums as well as Arirangs themselves required a lot of studying and personal research into the subject.In due process, I became further interested in the creation of additional materials inspired by Arirang, which involved reinterpretation of archived documents and which resulted in the publication of the book.Having been appointed as director of organization planning in 1997, I have been involved in the creation of over 10 websites, representing various organizations I have been part of as well as Arirangs themselves. (Kim San’s Arirang, Na Woon-Kyu’s Arirang, Venture Arirang) The official webpage of the organization provide various Arirang related materials in over 60 bulletin boards, which numerous students and scholars are browsing every day for research purposes.Arirang is subcategorized into over 60 different variations musically, and over 50 variations regionally. Jeong Seon’s Arari has over 7,000 remaining verses and numerous Arirangs based on varying regions and themes exist, including Milyang Arirang, Jindo Arirang, Mungyeong Arirang, Chuncheon Righteous Army Arirang, Daegu Arirang, Yeongcheon Arirang, Gongju Arirang and North Korean Arirang. Arirang serve as a common ground for both people in North and South Korea, as well as those in 180+ foreign nations. Arirang can act as a bonding agent for Koreans worldwide. That’s where the term ’Diaspora Arirang’ came from.Our people has been using the name Arirang on every possible occasion, be it a brand name or a name of a place, whether humble or noble, from Arirang rubber shoes in the Japanese colonial times, to Arirang #1, the satellite from Korea. Arirang cafe including Arirang pub, Arirang bar, Arirang hotel, Arirang tofu, Arirang kimchi, Arirang radio and Arirang television station. Everything was named after Arirang in Korean history, which had been unprecedented in foreign nations. I believe this phenomenon deserves a place in the world history of culture, as there has been no race who sang the same song in unison. It was further exemplified in 2000 Sydney Olympics, where Korean teams entered during the opening ceremony with Arirang singing in the background, which was welcomed with standing ovation from heads of various foreign nations. Q: What was your most memorable incident in your research of Arirang?A: It was when I first heard the meaning of the term ’Arirang-chigi’, a type of crime where multiple culprits attack one person (often under the influence of alcohol) for his money and belongings. (chigi translates to ’hitting’ in Korean) Myself, Arirang Association Inc. and other related cultural organizations petitioned to the media, Ministry of Justice, Ministry of Education, Science and Technology and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to replace the term with ’Buchuk-bbaegi’ in 2003, on the grounds that it is a remnant of colonial times where Japanese government spread the term to disgrace the national spirit, I went on to appear on television to explain the necessity for revision.“UNESCO addresses the sponsorship for preserving ’valuable cultural assets around the world’ as the <Arirang Award>. ’Arirang People’ is the term North Koreans use to address all Koreans from the North and the South, including those in foreign countries, Despite these circumstances, the media have been using the term ’Arirang-chigi’ to refer to a violent crime. This is an outrage for all Koreans. We do not want to pass down this disgraceful term as our legacy. This calls for an immediate replacement.“This term was later revised to ’Buchuk-bbaegi’. For me, to research Arirang entailed being responsible for its preservation as well.After the above incident was when I concluded that Arirang deserves a more comprehensive approach as ’the song of the people’.In order to prove academically that Arirang is more than a common folk song, I started a expansive research. Although I originally majored in English literature, I transferred to a college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in 2001, where I received a bachelor’s degree with my thesis ’Kim San’s ’Song of Arirang’’ in 2004, and went on to enroll in Sungkyunkwan University where I did my research on history of Arirang from modern perspective. (Later I was informed that I was the first person to receive 2 consecutive degrees in Arirang) My academic pursuits were aided by my prior background as a executive of Venture Arirang and over 20 years of experience as a member of Korean Arirang Culture Association Inc., where I was helped by Mr. Kim Yeon-Gap to take my research further. I was helped by movie historian Mr. Kim Jong-Uk while researching the movie ’Arirang’ and its director, Na Yun-Gyu. But most importantly, what kept me going during this research was the publications of my mentor and folk culture scholar Mr. Mu Se-Joong, ’Arirang Theory’ and ’Unification Arirang’. Mr. Mu was also the person who first gave me the reason to study this subject 25 years ago. Q: What subjects did you explore in your studies?A: The key focus of my research was to clarify exactly when ’Arirang’ started being the symbol of our people. Arirang went through two major cultural events or changes in the modern times.The first major event was during the 7 year restoration project on Gyeongbok palace. Around 40,000 people, approximately four times the male population of Hanyang, were forced to work on the project. In this project site, Daewon-gun organized nationwide concerts to soothe the people’s anger and frustration over the forced labor. Various singing groups from all over the nation including professional singing groups who sang Arirang and groups of rafters who build rafts and ride them upstream towards Seoul who sang Arari in their spare time. It was during these times that Arari from Baekdu mountain ranges spread across people from various regions. This was the first major impact in the history of Arirang.The second impact was when the movie ’Arirang’, directed and produced by Na Yun-Gyu in 1926, was released and in theaters for a significant period of time during the colonial era, which, again, spread Arirang all over the nation.This thesis focuses on this second major impact in the history of Arirang, and delves further into the musical characteristics and implications of the original soundtrack ’Arirang’. Due to the inherent nature of the music, the music itself was released to the various locales sooner than the movie was released. It could be said that ’the music was what drove the movie to success’. This method of propagation wa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the way other movie soundtracks did. In the same time period when ’Arirang’ was released to public, historical documents claim that ’Euiyeol-dan threw a bomb in the middle of Jongro’. The movie was open during the ’6. 25 Korean War’ and it was played in the tents at the school playgrounds. The movie ran for over 40 years. It is for that reason this research was focused on how Arirang was used as a musical prop in the context of the movie and how it came to be known and spread in and out of the country. These factors contributed to its lengthened time of stay in theaters, and what made its two sequels possible. Moreover, my research explores the process in which Arirang gets solidified as the symbol of the people, thereby concluding the comprehensive analysis of Arirang. Q: What made you focus on that particular aspect?A: The first thing this thesis focused on was why Arirang had been known as a mere folk song that has been around for some time. Why was this song sung ’folkishly’?I started by going through the genealogy of Arirang, and analyzed Arirang as a folk song and as a movie soundtrack based on my interpretation of the genealogy.To this end, I had to see the movie and the soundtrack from a modern perspective. A lot of research efforts have been devoted to an in-depth understanding of the movie itself and its director.However, the academics, although the folk song ’Arirang’ and the theme song ’Arirang’, and the theme song ’Arirang’ and the movie ’Arirang’ are fundamentally inseparable, have long been focused on the individual works themselves rather than focusing on their correlations. Unlike prior works, this research focuses on exposing the true identity of ’Arirang’ by exploring how it was transformed in its spreading process as well as its adaptation from folk song to a performance piece. I saw this research as a process of consilience, and therefore took a comprehensive approach to the subject matter. Moreover, I expect to converge different views from various academia including those of Korean literature, cinema, folk culture and music and improve on the prior works.The Korean literature community focused on the literary values of the lyrics of Arirang, the folk music community approached it from the movie theme song perspective, while the movie community focused on the creators and the cinematic value of the movie. In order to break free from this segregation, I intend to clarify the core characteristics of Arirang by exploring its history of its creation and major changes, as well as its place in the national spirit.It is also known that due to the intense censorship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only four out of nine verses of the theme song was sung and passed on. It is under these circumstances that I began my research on this subject in 2002, the year in which the exhibition of historical documents commemorating the 100th Year Anniversary of Na Wun-Gyu’s Birth was commemorated. Q: How would you summarize your research up to this point?A: Looking into the post-movie history of ’Arirang’, Arirang as a theme song enjoyed a certain amount of popularity, the cause of which could be traced back to the hybridization of a traditional folk song. Both the movie ’Arirang’ and the theme song ’Arirang’ were the creation of an individual, but it was people’s decision to embrace it as their identity. The interesting question at this point would be what caused the people to do so.The nine verses that were reorganized to fit the narrative of the movie reached the audience in an intimate level and also left an imprint on them combined with the message of the movie itself. I would answer the question by organizing the key aspects of this phenomenon.First of all, it is normal for the theme of the movie to be played in the intro, poignant moments, and the ending. However, the lyrics of the theme song was written so that it would suit the specific scenes from the movie and amplify the emotions surrounding them, as well as representing the message of the movie itself. Additionally, the success of the movie ’Arirang’ added to the sense of pride and self-esteem of the people which made the song to be recognized as ’the song of the people’ during Japanese colonial times.Secondly, the verses from the theme song ’Arirang’ have no connection to one another in terms of context, but based on the connections made from its verses to corresponding scenes, they are able to maintain a certain degree of emotional consistency that is noticeable throughout the movie.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song ’Arirang’ performed its role by amplifying the emotional impacts of the movie, sustaining the poetic sentiments from respective scenes, bridging the gap between reality and fantasy, and summarizing the whole movie in several verses.Thirdly, it has been confirmed that there are a total of nine verses in the lyrics of ’Arirang’. Five of those verses were discovered later on. Among these five, the chorus and the first verse are considered relatively common in other folk songs such as ’Sushim-ga’ or ’Sarang-ga’. However, the first verse coming right after the chorus is a style created during Na Yun-Gyu’s adaptations. This pattern was used to embed messages of the movie to each verse, further emphasizing ’the representation of national spirit’ concept. In other words, it can be said that he extended the personal sense of pride and identity to a communal level.Fourthly, From a folk music historians’ perspective, Arirang’s success can be attributed to following major factors: a) the lyrics of the song were not restricted to a specific purpose, b) the tunes were simple and easy to follow, c) simple lyrical structure – two-line verse and a chorus, and d) versatility – it could be sung as a two-person exchange, a solo, or in unison. Today’s Arirangs sung by Koreans residing in foreign countries were branched out from the original version using the above characteristics.Fifthly, people were eventually oppressed for singing Arirang after Arirang took on a resistant color. For this reason, the movie and the song were categorized as being resistant, which led to production of various new movies representing such spirit. These resistant elements were the crucial factor in Arirang’s transition in status from ’new folk music’ to ’the original Arirang’ that represents all other Arirangs.Finally, the theme song Arirang was not a pre-existing version. The lyrics and the tunes were adapted and restructured to fit the thematic elements of the movie. During this period, the western music as well as Japanese musical theories coexisted with the Korean music. While Japanese musical style was being forcefully applied to popular Korean music, Korean people found solace and reaffirmed their identity with Arirang. This adaptation of existing Arirangs to one theme song can be seen as a creative reinterpretation of a historical legacy. Also, surviving the test of time and its constantly changing nature shows that Arirang is very much an open genre as well as resilient. Q: What are your future research plans?A: First of all, I intend to expand the scope of my research to the field of folk studies as well as that of Korean literature, to which my original thesis was limited. Also, I aim to focus on the efforts of the successors of Arirang in the post-1980s in terms of creative reinterpretation. I consider Arirang’s transition from a simple folk song to ’the song of the people’ as a form of creative reinterpretation, and will be looking into its development process from a socio-cultural perspective. This will be the focus of my doctoral thesis.Secondly, I am currently writing a book titled ’People and Arirang’, which will be discussing the spoken accounts of Arirang successors’ lives. The subjects of this research include dancers, painters and photographers as well as singers. After listening to a cappella rendition of Jeongseon Arirang performed by Kim Gil-Ja during ’Jeongseon Arirang Field Trip’ in 1999 and returning to Seoul, many artists have produced various works of art based on Arirang. Notable works include traditional musical version of Jeongseon Arirang by Kim Do-Hu of theater Muyeonsi, modern dance performance ’Arirang’ directed by Kim Gi-In and other Arirang poems and live performances. These passionate works of art were performed on stage during ’99 Korean Arirang Festival’ of October, 1999.Thirdly, the most famous version of Arirang today is the one used as a theme song, ’Bonjo Arirang’. In recognition of its status, the publication of ’World Arirang Tour’ is under way. I intend to prove the universality of Arirang and thereby laying the groundwork for globalization of Arirang.Lastly, we need to work on a comprehensive summarization of over ten thousand lyrics of Arirang. We can use this material to create new operas based on Arirang and to give live performances of them in a theater of an international scale, so that people will be able to see Arirang themed performances whenever they want, as long as they meet the pre-arranged schedule.I believe it is important to ensure that foreigners are able to absorb Arirang themed performance arts whenever they want when they visit Korea, since Arirang is our identity and has already gained a unique status for its universality.It is a shame that domestic recognition is not on par with Arirang’s worldwide status. There are plenty of research to be done in order to improve upon this issue. (2009 Interview) 1. 문-왜 아리랑을 연구하게 되었나? 답-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고 외국인이 알고 있는 아리랑은 서울에서 탄생한 영화주제가 ‘아리랑’이다. 그리고 각 지방과 해외에도 여러 지역명을 부친 아리랑이 산재하여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많은 아리랑을 하나의 아리랑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아리랑.......이러한 아리랑의 다양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직접적으로 아리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민속학자이시며 세계적인 전위예술가 무세중(Mu SeJung)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대표작인 통막살(통일아리랑) 퍼포먼스(통산 60여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아리랑은 우리 민족정신의 정체성을 표상한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무선생님과 이 작품을 가지고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에서 매년 추진하는 아리랑답사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현장에서 본인은 아리랑 공연과 전승자들의 인터뷰를 영상과 스틸로 담아내는 작업을 자원봉사 해왔다. 당시 매우 열악한 조건(경제적)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이었기에, 딱히 영상을 담아내는 전문가를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그 당시는 카메라와 비디오도 귀할 때이었다. 그후 1997년 인사동 하나로빌딩에 사)아리랑연합회와 함께 공식 후원업체 <벤처아리랑> 회사를 개설하면서 공연기획과 아리랑주제 문헌전시를 주관하게 된다. 1999년 <한민족아리랑제전>과 2000년 진도아리랑전시관 주관, 아리랑주제 작품 무대화, 작품해설, 음반해설을 맡으면서 여러 장르로 확산되는 아리랑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아리랑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리랑의 컨텐츠화’에 눈뜨게 되어 자료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하여 오늘의 책을 집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에서 사회문화적으로 확산된 아리랑의 다양성에 접하게 되었다. 한편 1997년 단체 사업부 이사로 재직하게 되면서, 단체 홈페이지와 그 외 아리랑 주제 홈피(김산의 아리랑, 나운규의 아리랑, 김산의 아리랑, 벤처아리랑), 아리랑나라 카페 등 10여개의 사이트를 제작하여 운영하여 오고 있다, 단체 홈페이지는 아리랑 주제를 컨텐츠화 하여 각 게시판을 60여개를 지속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많은 연구자와 학생들이 이 데이터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아리랑 관련 논문을 제출하고 있다. 아리랑은 음악적으로 60여종 지역적으로 50여종이 넘는다. 정선의 아라리는 7천여수가 남아 있고,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문경아리랑, 춘천의병아리랑, 대구아리랑, 영천아리랑, 공주아리랑, 북한아리랑 등등, 그리고 남과 북, 180여개국의 해외동포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공동인자이다. 세계로 흩어져 있는 한민족 네트워크를 아리랑으로 묶을 수 있다. 그래서 ‘디아스포라아리랑’이라는 신조어도 나왔다. 우리 민족은 가장 천한 것으로부터 귀한 것에까지 곳곳에 아리랑을 담아서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아리랑고무신에서부터 지금의 인공위성 아리랑1호까지가 아리랑으로 명명하고 있다. 아리랑카페, 아리랑술집, 아리랑빠, 아리랑호텔, 아리랑두부, 아리랑김치, 아리랑라듸오, 아리랑국제방송, 세상의 만화경을 다 담아 놓은 것이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수용 현상은 인류문화사의 맥락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현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민족이 지구상에는 없다고 본다. 남과 북으로 허리가 잘린 분단국이지만 1991년 시드니올림픽대회시 아리랑을 단가로 부르며 입장식을 하여 세계 정상들까지도 기립박수를 하지 않았던가? 2.문- 그동안 아리랑을 공부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답-이 과정에서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아리랑치기’라는 범죄용어이다. 2003년 이러한 문제제기에 의하여 촉발되어, 범국민적 차원에서 제기되었다, 사)아리랑연합회를 비롯하여 관련 문화예술단체가 연합하여, 각 방송신문 및 각 기관 단체 및 법무부 교육부, 문광부 등에 청원하여, 일제가 우리민족을 폄하하기 위해 조작한 ‘아리랑치기’라는 범죄용어를 ‘부축빼기’로 개정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누구나가 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신문방송에서도 다루어졌고, TV 방송에도 나가서 이 용어는 개정되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청원했다. “세계유네스코에서는 ‘가치 있는 세계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지원제도를 <아리랑상>이라는 명칭으로 제정, 시행하여 세계 가치 있는 구비문화 유산의 상징어가 되었고, 북한이 해외 동포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아리랑민족’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아리랑의 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치기‘라는 범죄용어를 신문방송에서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아리랑으로 자기 자신과 민족을 스스로 폄하하는 일이다. 이 시대에서 막지 못하면 그 전과는 다음 세대에 그대로 물려주는 오점이 될 것이기에 시급하게 개정되어야 한다.” 후에 이 범죄용어는 ’부축빼기‘로 개정되었다. 아리랑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일이기도 하다. 이를 기화로 하여 ‘아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민족의 노래’로서 총체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연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리랑은 ‘민요’라는 편견을 벗고 아리랑은 ‘민요 이상’이라는 것을 학술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어서 통섭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다시 2001년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2004년「김산의 ‘Song of Ariran’에 대한 고찰」로 국문학사를 받고, 성균관대학 대학원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근대의 시각에서 아리랑의 문화사를 짚어보는 연구를 석사학위논문으로 내놓게 되었다. (아리랑으로 학사, 석사를 이어서 받은 연구자는 처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결과는 나의 직업의식(벤처아리랑 대표)과 이십여년 동안 <사단법인아리랑연합회 Korean Arirang Culture Associati>에서 아리랑연구 편찬사업에 참여하면서 공동 연구자인 김연갑선생의 도움을 받았음이다. 영화<아리랑>과 나운규 연구 부분은 영화사가 김종욱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의 정신적인 스승이신 민속학자 무세중 선생의 ‘아리랑론’과 ‘통일아리랑’ 작품이 큰 동기부여가 되어 주었다. 25년전 나에게 ‘아리랑’이라는 화두를 처음 던져주신 분이시기도 하다. 3.문- 이번에 아리랑의 어떤 부분을 연구했나? 답-언제부터 아리랑은 ‘민족의 상징’이 되었나? 아리랑은 근대를 거치면서 두 번의 문화충격을 크게 받게 되는 부분에 주목했다. 제1차 문화충격은, 아리랑은 경복궁 중건 7년동안 한양 거주 남자의 4배인 4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이 현장에서 대원군은 이들의 원성을 누르고 위로하기 위하여 전국단위의 콘서트 경연대회 마당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각 지방에서 위문공연으로 올라온 전문예인집단들이 부르던 아리랑, 그리고 강원도 지역의 뗏군(나무를 베어서 뗏목을 만들어서 타고 와서 서울한강에서 팔았던 화전민이나 농군 집단. 몇 달동안 급류를 타고 오는 도중에 목숨을 잃기도 하는 위험한 업이다.)들이 부르던 아라리들이 경합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백두대간에서 부르는 ‘아라리’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이때가 아리랑의 첫 번째 문화충격이다. 제 2차 충격은 일제강점기 1926년 나운규가 만든 영화 <아리랑>의 장기상영으로 아리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충격이다. 이 논문은 바로 제2차 아리랑의 문화충격 시기를 중점으로 하여서 주제가 <아리랑>의 특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러한 주제가의 특성으로 하여 주제가가 영화보다 먼저 각 지방에 먼저 상륙했다. 이는 “주제가가 영화를 끌고 다녔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주제가와는 전혀 다른 양식으로 인식되고 전파된 것이다. 개봉 당시 상황의 기록을 살펴보면 “종로 한복판에 의열단이 폭탄을 던졌다”라고 표현했다. 영화는 <6.25한국전쟁>시에도 학교 운동장 천막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장장 40여년 이상이나 장기상영되었다. 그래서 이 연구는 주제가 <아리랑>이 영화의 서사구조 속에서 어떠한 영화적 장치로 작용하여 국내외에서 회자되어 확산되었나? 이러한 요인은 영화의 장기상영으로 발전했고, 제2편 제3편의 아리랑이 나왔다고 본다. 나아가 그러한 과정에서 아리랑이 민족의 상징으로서 위상을 부여받게 되는 과정까지 살펴본, 주제가 <아리랑>의 특성 연구이다. 4.문- 왜 그 부분을 주목했나? 답-이 논문에서는 일차적으로 ‘아리랑’을 일반적으로 오래 전부터 불리어진 전통민요로 잘못 알고 있는 점에서 출발하였다, 왜 이 주제가는 ‘민요처럼‘ 불려졌나? 그래서 전승되어 오고 있는 아리랑의 계보를 분석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주제가 <아리랑>의 형성배경에서, 민요로써의 <아리랑>, 주제가로써의 <아리랑>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서 나운규가 감독한 영화 <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에 대해 근대의 시각으로 심도 있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영화 <아리랑>의 작품론, 작가론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그러나 민요 ‘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 주제가 <아리랑>과 영화 <아리랑>은 불가분의 관계인데도 학계에서는 각각 개별적인 연구에만 머물러 왔다. 이 연구는 사회문화예술에서 확산되는 과정에서 주제가 <아리랑>이 대중문화예술 전범위에서 무대화 되는 과정에서 성격변화를 하여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아리랑’까지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연구이다, <아리랑>에 대한 통섭(consilience)적인 연구로서 총체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했다. 나아가 선행연구의 문제점을 보완하여 그동안 국문학계, 영화학계, 민속학계, 음악학계 등에서 서로 타자의 입장에서 방치해왔던 주제가 <아리랑>에 대한 총체학적인 연구를 기대해 본다. 국문학계에서는 민요 ‘아리랑’의 텍스트 연구를 중점으로, 민요학계에서는 대중 유행가의 하나로, 민속학계는 영화 주제가로만 인식을 하였고, 영화학계에서는 주제가를 민요 ‘아리랑’이라는 제한성에서 거리를 두어 작가론이나 작품론 등으로만 진행되어 왔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민요 ‘아리랑’에서 주제가 <아리랑>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성격변화를 거쳐 오늘날 세계 속에서 ‘아리랑’이라고 통칭되는 주제가 <아리랑>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는 아리랑 연구에 있어서, 첫 번째로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가는 일제에 의해서 검열과 탄압으로 총 9절 중 4절만 일반적으로 불려져 오고 전승되어 왔다. 그래서 2002년 <나운규 탄생백주년 기념 문헌전시회>하면서부터 이 연구 논문을 준비해왔다. 5.문-연구 결과 중요한 논점 5가지로 요약한다면? 답-영화 <아리랑>이후, 대중문화예술 속에서 여러 장르로 확산된 아리랑을 살펴보면, 주제가로 불려진 노래로서의 아리랑은 문화변용 현상, 또는 신민요의 혼종적(混種的) 특성에 의해 새로운 노래에 대한 인기를 점할 수 있었다. 영화 <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은 나운규 개인의 창작작업이었지만, 이를 선택하고 수용한 주체는 ‘민족’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대중주체는 왜 아리랑을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였나? 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해본다. 이는 영화 주제가 아리랑영화의 서사구조에서 재구성한 총 9절의 주제가 <아리랑> 가사를 통해 영화 내적 긴밀성으로 하여 주제가 또는 영화음악으로서 대중에게 각인되어 영화의 주제의식에서 인식되어 출발하고 있음이다. 이러한 시각과 결과는 우리 문화사에 의미 있는 논점들이 되리라고 본다. 이러한 논점들을 정리하는 것으로써, 본 연구의 결론을 삼고자 한다. 첫째, 영화 주제가는 처음의 타이틀과 서정적인 장면에서 그리고 마지막의 앤딩 장면에서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영화 아리랑 주제가는 영화의 서사 구조에 따라, 그 단락의 상황을 확대 심화시키는 가사를 배치하여 마치 각 대목의 독립적인 삽입곡과 같은 기능을 하게 했고, 전체적인 정서를 함축하여 영화의 테마를 상징하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이에 영화 <아리랑>은 민족영화로의 성공이 민족과 민중성에 대한 인식과 자각을 더하게 하여 일제강점기 '민족의 노래'로서의 위상을 부여 받을 수 있었다. 둘째, 주제가 <아리랑>은 일반 주제가와 달리 각 절은 탈문맥화 된 내용이다. 그러나 각 절은 영화 내적 기능을 중심으로 상호 연관성을 갖고 영화적 정서를 감싸 안으며 주제를 끌고 나간다. 그리하여 서사의 흐름 속에서 정서를 확대시키는 영화음악의 역할, 서정적인 장면을 유지시키는 삽입곡의 역할, 현실의 고리와 환상의 고리를 이어주는 역할. 그리고 영화 전체를 이미지화 하는 주제가의 역할을 주제가 <아리랑>은 포괄적으로 수행했다고 본다. 셋째, 이러한 역할을 한 주제가 아리랑의 가사는 총 9절로 확인되었다. 이는 기존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4개의 절에 나머지 5개의 절이 새롭게 확인된 것이다. 이중 후렴과 제1절은 예전부터 유행가로 불려진 잡가 수심가나 사랑가등에서 확인되는 것으로써, 전렴 다음에 제1절로 배치하여 정형화 하여 특화시킨 것은 나운규의 재창작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제가 아리랑을 ‘후렴구+제1절’을 ‘공식어구’로 하여 노래를 정형화 하여, 각각의 절에 주제를 집약시켜 ‘민족에 대한 표상’으로까지 확대시켰다. 즉, 나운규는 개인적 자아와 자긍심을 집단적 주체의 단위로 심화 확산시켰다고 볼 수 있다. 넷째, 민요론적인 입장에서 ‘아리랑’이 대중화 할 수 있었던 형식적인 요건은 다음과 같다. ① 특정 기능에 구속되지 않았다 ② 음곡의 단순용이성(單純容易) ③ 두 줄 시에 후렴을 매기는 단순구조 ④ 매기고 받는 합창과 혼자 부르는 독창, 그리고 함께 부르는 제창이 가능하다. 이런 요건에 의해 오늘날 해외 교민사회에서 불려지는 아리랑은 거의 모두 주제가 <아리랑>의 각 편을 수용하여 분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섯째. 주제가 <아리랑>은 저항의 성격을 띠면서 탄압을 받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영화 상황과 그 주제가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저항요로 유형화 되었고, 그 결과 비판과 항일의식을 반영한 여러 각 편이 재생산되었다. 이러한 영화의 저항적 요소는 주제가 또는 ‘신민요 아리랑’에서 모든 아리랑을 대표하는 ‘(본조)아리랑’으로의 위상 변화를 갖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게 했다. 여섯째, 주제가 <아리랑>은 일반 영화에서처럼 기존 음악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각 국면의 서사 구조에 맞게 가사를 지어 구성하고 기존 선율을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