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국악신문] 용인 은이성지 아리랑노래비를 찾아서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5057 기미양 객원기자 등록 2021.05.13 15:54 조회수 18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은 ‘2021아리랑학교’가 주최한 ‘경기지역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아리랑답사를 위해 길을 떠났다. 월간 잡지 ’길벗‘에 실린 ’천주교와 아리랑(기찬숙)‘을 읽고 나서, 필자(아리랑학회)에게 용인시 남곡리 아리랑고개에 대한 답사 안내 및 강연요청을 하고 회원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회장은 지난 주 가평아리랑답사에서 보납산(법업산)에서 의병들이 이승에서 넘었던 마지막 고개 아리랑고개 답사에 이어 이번 주는 용인 지역 아리랑고개를 찾아서 길을 나셨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는 ‘은이(隱里) 성지’가 있다. 천주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목한 본당이며 순교 후 유체의 이장 경로이기도 하다. ‘은이’라는 지명은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숨어 살던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여기에는 ‘삼덕(三德)의 길’이라는 고갯길이 있다. 세 개의 덕(德)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하나는 신덕(信德)고개인 ‘별미 고개’, 둘은 망덕(望德)고개인 ‘해실이 고개’, 셋은 애덕(愛德)고개인 ‘거문정 고개’길을 말한다. 오늘에도 인적이 드믄 산길이 포함되어 있는데, ‘120 나무계단 길’과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때 호랑이도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는 ‘기적의 길’도 있다. 그런데 은지성지 순례길 첫 번째 신덕고개 ‘별미고개’에는 뜻밖에도 ‘아리랑’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천주교 초기에 아리랑이 신앙공동체에서도 불렸음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결속과 포교를 위해 민중의 노래에 신앙심을 얹어 불렀다고 본다. 이 비에 새겨진 가사가 당시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만한 유래를 담보했기에 비로 새겨졌다고 보게 된다. 은지성지 성지순례길은 총 14km 5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인데 신덕고개, 망덕고개. 애덕고개 세 고개를 넘는 길이다. 답사 일정은 출발점에서 차를 주치하고 1시간 동안 걸어서 올라가면 아리랑고개라고 불리우는 신덕고개가 나온다. 신덕고개비 옆에 세워진 아리랑노래비까지 가는 것이다. 아리랑노래비의 가사는 김진용 작사의 전체 8절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 주님을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구) 천진암 강악회 진리탐구/반만년 어둠속에 동이 트네 청천 하늘에 잔별도많고/천주교 이백년 박해도 많다 심한박해 모진고충 이겨내고/참된신앙 물려주신 순교자여 금자로 발길재는 천사를 보라/격려하며 순교의길 가신님이여 희광이칼 여덟번째 목숨바치고/천당영복 면류관을 쓰신님이여 순교유해 쌓고쌓여 주춧돌되고/순교선혈 흘러흘러 밑거름됐네 한알의 밀알이 이백년썩어/오백만의 열매가 주님찬미해 제1절에서는 상하 계층 없이 사방팔방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통해 곡조를 제시했다. 2절은 광주 퇴촌의 천진암(天眞菴)에서의 강학회(1771년 자산 정약전 3형제와 만천 이승훈 등의 천주교리 연구모임) 사실을 말하여 천주교 역사를 제시했다. 3절은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네 차례의 박해를 통해 천주교의 수난사를 나타냈고, 4, 5절은 성스런 순교사를, 6~8절은 신앙 승리의 역사를 찬양했다. 이 가사 천체를 보면 3절과 8절에 ‘이백년’이 있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 작사하여 노래비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고, 천주교 신약성서 자체 번역본을 발행하였으니, 이 아리랑 작사도 그만큼 의미를 두어 비로 세운 것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굳은 신념이 뜨겁게 전해온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회장과 회원들은 아리랑학회가 운영하는 아리랑학교에서 배포한 아리랑 가사를 사전에 받고 가창 연습을 해왔다. 아리랑고개에 오르자. 경건하고 신성한 바람이 일어났다. 묵념을 하고 전국에 곳곳에 있는 아리랑고개의 유래와 은이성지 아리랑고개의 유래에 대한 짦은 해설을 듣고 나서 아리랑노래비에 새겨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자 3절에서부터 모두 눈물이 쏟아져서 눈물의 아리랑 공간이 되었다. 이회장은 "코로나로 인해 5월 서울과 제주 지역 아리랑 행사가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참에 경기 서울지역 아리랑고개와 아리랑역사 유적지를 답사하고자 한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이다. 부르는 이도 왜 아리랑을 불렀는지는 알고 불러야 한다.”라는 취지로 아리랑학회 아리랑고개답사에 동참하고 있다. 이회장은 다음주 안성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는 안성의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답사에도 함께 할 계획이다. 전국의 아리랑고개의 유래를 살피면 천주교와 관련된 곳은 아직까지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 역사와 아리랑은 어떻게 만났을까? 현재 밝혀진 아리랑 자료로는 1823년(道光3년) 청석거사(靑石居士) 필사본 ‘佛說明堂아리랑’이란 기록물에서 1839년 천주교 기해박해 전후에 불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문헌자료는 민간신앙에서 수용한 일종의 무경(巫經)으로 "제석천황 관제멸 대범천황 오액명/아라리 사라리 아리사리 아리랑” 같은 사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명과 복록을 기원하며 아리랑 후렴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아리랑의 보편성을 이용하여 무경의 보급을 용이하게 할 방편으로 수용한 것이다. 천주교 교인들도 우리의 전통 시가인 가사체(歌辭體)를 수용하여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교리를 전파했듯 민요 아리랑의 형식도 수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천주교인들이 불교 사찰인 천진암을 거점으로 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통문화를 수용하여 교리전파에 활용하는 것은 포교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초기 교회사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천주교 초기 인물 이승훈이 아리랑을 수용한 사실에서, 이는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에서도 아리랑이 포교를 위해 향유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200년 기념으로 새로운 아리랑이 창작되어 비로 세워지게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조년간에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은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드디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게 하였다. 이 때 민중의 노래 아리랑도 향유되었다. 어떤 공동체에게도 아리랑은 결속력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획득하게 하는 노래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만날 수밖에 없는 노래인 것이다. Tag ##아리랑고개 #아리랑비 #아리랑부르기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
[국악신문] 어버이날, 사할린 동포들과 훈훈한 동포애를 나누다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5020 기미양 객원기자 등록 2021.05.08 17:48 조회수 108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오늘 오후 2시 어버이날, 의정부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지윤주 이사는 양주 옥정동 7단지 아파트에 정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협회(회장:강상용)를 찾아가서 감사의 선물을 전달했다. 지난 해 3월부터 세계 여성의 날, 추석, 성탄절, 설날 등 절기마다 찾아가서 사할린 동포들에게 자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다양한 베이커리를 전 직원들과 함께 나눔하고 있다. 지윤주 이사는 "코로나로 인하여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과 오랫동안 해후하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잠시마나 위로가 되셨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방문하고 있다. 그런데 올때마다 무언가 더 해드리고 싶다. 예전에는 동포애라는 것이 막연하게 느꼈지만 이제는 눈으로 바라만봐도 충분히 느낀다. 강상용 회장님이 언제든지 여름에 우리가 3개월 동안 가족을 만나러 사할린에 가있는 동안 언제든지 오라는 말을 들으니 가족이 된 것 같다."라고 미소를 환하게 머금었다. 강상용 회장은 "우리 사할린 동포를 잊지않고 기념일마다 찾아와 주시는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사장님과 전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셔서 잘 먹겠습니다."라고 치하했다. 최미분 부회장은 " 매 절기마다 찾아와 주는 것도 고마운데,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빵까지 우리들 100명 전원에게 골고루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천 검단 나눔성형외과의원 노승만 원장님 보내주신 선물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서 "어버이날이라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길이 막혀서 못 나오다가 1990년 하늘길이 열려서 조국과 조금씩 왕래가 시작되었지만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는 부모님 대신 조국으로 귀환한 사할린 2세입니다. 그러나 조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하고는 교류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찾아와 주기만해도 반갑고 그래요. 그런데 올때마다 차도 한잔 못 나누고 바삐 헤어져야 하는 코로나가 갑갑합니다."라고 하며 아쉬워하며, 어제 모두 들에 나가서 쑥을 캐가지고 와서 만들어서 나누었다는 쑥떡 한접시를 지윤주 이사의 손에 안겨주었다. 사할린에서는 봄이 되면 쑥을 캐서 쑥떡을 해서 나누어 먹고, 여름이 되면 산에 올라가 버섯과 고사리, 머위. 블루베리도 채취하여 먹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강제이주 시켜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광산이나 산판에 집을 짓고 모여서 카레이스키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래서 여느 국외 동포들보다 공동체 생활이 자연스럽다. 특히 양주 율정마을은 가장 늦게 한국에 정주한 세대이니만큼 가장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화기애애하고 늘 활기차다. 특히 사할린 동포 2세 중 러시아 음악을 전공한 세르게이김 작곡가와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최미분)이 살고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강상용 회장은 사할린 씨름협회 가족이다. 한편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는 매달 고려인 사할린 청소년에게 정기적으로 베이커리를 보내고 있다. 지난 5일 어린이날에도 인천에 거주하는 러시아 청소년들에게 베이커리를 선물했다.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측은 코로나 확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선물만 전달하고 바로 나왔다. Tag ##국악신문 #나블리베이커리카페 #나눔성형외과 #사할린 #사할린아리랑 #지윤주 #최미분 #강상용 #아리랑학회 기미양 객원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라인 네이버블로그 밴드
-
다양한 노랫말의 '밀양 아리랑' 감상하세요다양한 노랫말의 '밀양 아리랑' 감상하세요 기사입력 2010.11.18. 오후 2:54 최종수정 2010.11.18. 오후 4:28 스크랩 본문듣기 설정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공감 댓글 요약봇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음반 '영남 명물 밀양아리랑' 소리꾼들 (서울=연합뉴스) 12월 발매 예정인 음반 '영남 명물 밀양 아리랑'(신나라레코드) 녹음에 참여한 소리꾼들. 왼쪽부터 신인자(69), 김경호(70), 김종엽(63) 씨. 2010.11.18 '밀양 아리랑'의 여러 버전 실은 음반 발매(서울=연합뉴스) 임은진 기자 =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구성진 곡조의 '밀양 아리랑'은 1920년대 당시에도 전국적으로 불리던 민요 중 하나였다.문필가 청오 차상찬(1887-1946)은 잡지 '별건곤(別乾坤)'의 1928년 8월호에 쓴 '밀양의 7대 명물, 구슬픈 밀양 아리랑'에서 '밀양 아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어느 지방이든지 아리랑 타령이 없는 곳이 없지만 이 밀양의 아리랑 타령은 특별히 정조가 구슬프고 남국의 정조를 잘 나타낸 것으로 지금은 전국에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중략) 특히 화악산 밑에 해가 떨어지고 유천역에 저녁연기가 실낱같이 피어오를 때 낙동평야 갈수통 속으로 삼삼오오 목동의 무리가 소를 몰고 돌아오며 구슬픈 정조로 서로 받아가며 부른다. 이렇게 하는 소리를 들으면 참으로 구슬프고도 멋이 있고 운치가 있다. 아무리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라도 그 누가 길을 멈추고 듣고 싶지 않으랴."'밀양 아리랑'은 시대 변화에 따라 본래 곡조에 가사만 바뀌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1920년대 중반 국내에서는 신민요로, 해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광복군 군가인 '광복군 아리랑'으로, 1950년대 한국전쟁 때는 중공군의 선무공작(적국의 영토를 점령한 군대가 지역 주민에게 군에 협력하도록 하는 선전 혹은 원조 등의 활동) 노래인 '파르티잔 유격대 아리랑'으로 불렸다.1960년대 이후로는 국가적 의전 음악인 '행진곡 밀양 아리랑'으로, 1970년대 '밀양 백중놀이' 과장의 중요 소리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는 '신 밀양 아리랑'과 '통일 아리랑' 등으로 연주됐다.그동안 '밀양 아리랑'의 다양한 버전은 문헌으로 가사만 전해져왔지만 조만간 이들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밀양 아리랑 곡조에 이들 가사를 붙여 부른 노래를 담은 음반 '영남 명물 밀양 아리랑'이 신나라레코드를 통해 발매되는 것.마당극 배우 김종엽 등이 창자(唱者)로 참여한 이 음반에는 모두 9곡이 수록된다.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18일 "'밀양 아리랑'은 이 같은 중요성에도 지금까지 독립적인 음반이 제작되지 못했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녹음해 음반으로 발매하게 돼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engine@yna.co.kr
-
반론제기1 -진도아리랑은 “문전~세재로 불러야 한다” -(기미양)반론제기1 -기미양(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사무국장) 김상유의 논의는 진도아리랑의 형성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씌여진 것으로 논의의 여지가 많다. 진도아리랑비에도 기록되어진 문경아리랑 첫수인 "문경새재 고개는 웬고개인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에서 문경새재를 문전세재로 바꿔서 불러야 한다.라는 것은 이미 1930년에 지역 공동체에서 공인한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진도 지역 사회에서는 일부에서 '문전세재'로도 불려지기도 하지만, 고쳐 부른다는 것은 민속학적으로 볼때, 자연스럽지 않은 전승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문경새재와 문전새재 모두 같이 부르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하나의 사설에 또 하나의 사설을 더하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진도아리랑은 1930년대 전후에 진도출신 음악인들에 의해 남도의 산아지타령과 1910년대에 유행했던 구조아리랑의 첫절을 재구성하여 형성된 아리랑이다. 그러므로 '문경새재'라는 시어를 문전세재로 바꾸어 부르자는 것은 1930년대 진도출신 음악들의 생각을 왜곡시키는 것이므로 재고하여야 한다. 한 세기동안 전국적으로는 문경새재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지역 사람들도 공유하오고 향유해 온 민속문화라는 차원에서 이러한 제의는 다시 한번 깊게 되짚어 보아야 한다. -------------------------------------------------------------------------------------------------------------------------- 진도아리랑 '문경새재'는 크나큰 잘못! 글쓴이 : 섬동백번호 : 542조회수 : 502005.06.18 00:35 "문전~세재로 불러야 한다”진도아리랑 가사 왜곡 지적광주 정강중학교 김상유교사 논문에서 주장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첫 소리로 알려진 ‘문경세재는 왠 고갠고~’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제기되고 있어 진도군 및 문화예술단체, 국립국악원, 군민등이 사실조사에 착수해 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첫소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 광주정강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김상유교사는 ‘민요의 생성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중학교 교과서와 인터넷등 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노랫말로 알려진 ‘문경 세재는 왠 고갠고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는 소리는 왜곡됐다고 자신의 논문을 인용해 지적했다. 김교사는 진도아리랑은 순수한 서민들의 삶으로 희노애락의 노래인데 하필이면 수백여수의 가사중 특정지역의 이름이 게재된 ‘문경새재(경상북도 문경새재)는~’라는 가사를 진도아리랑을 대표하는 첫마디로 교과서에 게재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한 것은 특정목적에 의한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또 각종 인터넷 자료검색에서도 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가사로 ‘문경새재~’가 입력되어 있다는 것.김교사는 현행 중학교 음악교과서에서 30년이상 지도되어 오고 있는 이 진도아리랑의 "문경 새재(경상북도 문경새재)는 왠 고갠고" 의 가사는 "문전 세재(인생살이 세 고개)는 왠 고갠고" 라는 본래의 가사에서 왜곡된채 지도되었다고 지적했다. 김교사는 ‘문경’이 아닌 ‘문전’이 본래 가사였다는 내용을 뒷받침할수 있는 몇가지 근거를 제시했다.동부지방 사람들은 동부지역에 위치한 지역이름을 넣은 가사를 언어의 특성상 남도민요 가락에 얹어 부를 수가 없고, 남도사람들은 남도민요 가락에 남도에서 500백리, 진도에서는 1,000리나 멀리 위치한 동부지역 고개이름의 가사를 붙여 노래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500여수가 되는 진도아리랑의 가사 중에서 "문경" 이라는 지역이름을 빼고는 어느 가사에도 지명 이름이 없으며 모두가 인생의 희노애락에 대한 내용 뿐이라고 ‘문경’이 왜곡된 가사임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직도 진도지역60세에서 90세가량의 진도 아리랑 보존회원들은 "문경"이 아닌 "문전세재(태어나는 첫번째 고개, 인생살이 두번째 고개, 북망산으로 가는 세번째 고개)는 왠 고갠고" 라고 노래하고 있다는 것.민요란 오랜세월을 거쳐 내려오는 노래임에도 군사정권이 시작되기 이전(1961년) 어느곳에서도 "문경 새재는 왠고갠고" 라는 문헌의 자료가 없다. 특히 진도아리랑은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가사를 붙여 부를수 있는 민요이기때문에 특정지명을 붙여 1회성 여흥으로 끝났다면 문제가 없으나 수백 수가 넘는 가사중 그것도 1절에 나타내어 교과서까지 게재하여 지도하게 하는 것은 민요가 발생한 지역의 고유한 음악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김교사는"누군가에 의하여 고유하게 전래되는 민요가 왜곡되었다면 순수하게 발전해야 하는 예술을 훼손하는 것이며 이를 지역문화의 침탈행위로도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인이나 이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김교사는 17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진도아리랑은 서민들에 의해 불려져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민요라는 점을 이용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문경이라는 지명을 넣은 것으로 판단이 된다”며"이제는 잘못된 가사를 즉각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진도고향인 김교사는 대학에서 서양음악을 전공한후 현재 광주 정강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석사과정으로는 국악작곡을 마쳤다. 한편 최근 진도군이 군과 기관단체장간에 협의회자리에서 제작중인 관광홍보영상물을 시연, 참석자들중 일부는 첫배경과 함께 진도아리랑 첫 가사가 왜 하필 ‘문경새재’가 나왔느냐며 개선을 요구하기도해 진도지역에서는 이미 '문경새재'가사에 대한 거부반응이 널리 퍼져 있다.
-
남도정서의 정수박이, 그 보배로운 3대의 소리 <진도아리랑>1. 진도아리랑(3:49) 창:이근녀(무반주 진도아리랑)2. 진도아리랑(1)(3:56)창:이근녀. 후렴:강송대 강은주. 장고:김오현. 대금:정회완. 아쟁:서영호3. 진도아리랑(2)(25:45)창/후렴:강송대 강은주. 장고:김오현. 대금:정회완. 아쟁:서영호4. 진도아리랑(3)(25:56)창/후렴:강송대 강은주. 장고:김오현. 대금:정회완. 아쟁:서영호 총 59:26소리이근녀(90세,진도아리랑 명창)강송대(63세,무형문화재34호 <남도잡가> 예능보유자·진도아리랑보존회 회장)강은주(19세,남도잡가 전수자·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입학)반주장고-김오현(진도군립민속예술단 수석 단원)대금·징-정회완(전 광주시립국극단 악장)아쟁-서영호(전주 대사습 기악부 장원-문광부장관상 수상)찬조사설정리-기미양(사단법인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사무국장)정보제공-강은영(씻김굿 이수자·진도군립민속예술단 단원) <가족 3代가 부른 '진도아리랑' 60수>(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맛깔스런 후렴으로 유명한 '진도아리랑'을 이 지방 출신의 가족 3대(代)가 함께부른 음반「진도 아리랑」이 신나라뮤직에서 출시됐다.진도아리랑 명창인 이근녀(89) 할머니, 그의 장녀인 강송대(62. 남도잡가 무형문화재 제34호 예능보유자, 진도아리랑보존회 회장), 증손녀인 강은주(18. 남도잡가전수자)로 이어지는 '3대'가 바로 이들이다.이번 음반은 진도 토박이 명창으로 이제 아흔의 나이인 이 할머니의 육성을 '더늦기 전에' 녹음, 남도 정서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진도아리랑의 토속적 전통을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특히 음반에는 그동안 전승돼 온 진도아리랑 사설 56수가 담겨 있는데, 집안의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는 60수에 가까운 사설이 한 음반에 수록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녹음은 지난달 경기도 파주에 있는 스튜디오와 전남 진도군 의신면 돈지마을에있는 이 할머니의 자택을 오가며 이뤄졌다.녹음 작업을 하는 도중 이 할머니로부터 진도아리랑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 나왔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 하다.할머니가 15세쯤 됐을 무렵 진도 출신의 대금산조 명인인 박종기(1879-1939) 선생이 진도아리랑을 처음 만들어 지역 사람들에게 가르쳤으며, 이 아리랑을 배운 사람들이 당시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는 것.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이 할머니의 증언이 정확한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던 진도아리랑의 근원을 밝히는 중요한증언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고(故) 김소희 명창도 생전에 '박종기 선생과 함께 일본에 음반을취입하러 가던 도중 진도아리랑을 정리했다'는 증언을 한 바 있다"며 "이는 그동안막연히 진도아리랑을 '아주 오래된 것'으로 여겨 온 지역주민들과 향토사학자, 연구가들 사이에 또 하나의 논란거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이번 음반은 무형문화의 전승 과정에서 바람직한 형태로 여겨지는 가족간 전승체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강송대 선생은 모친에게서 잡가를, 5촌 고모뻘인 명창 강숙자로부터 춘향가를배우고 김한수, 공대일 등을 사사했으며, 목포와 광주에서 20여년간 활동하다 최근에는 고향에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증손녀 강은주는 5살때부터 소리를 시작, 1995년 제2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학생부 최우수상 수상에 이어 2004년학도 중앙대 국악대학에 특례입학한 국악영재다.-------------------------------------------------------* 아리랑연합회로 부터 보도자료 :남도 정서의 정수박이 진도아리랑, 그 보배로운 3대의 소리이근녀,강송대,강은주1986년이었을 것이다. 종로 3가 <신나라레코드> 라이브 홀에서 일제시대 아리랑 복각 CD 발매를 기념하여 <팔도아리랑>공연을 벌렸을 때, 마침 지나가는 시위대를 향해 쏜 체류탄 연기가 공연장으로 들어와 눈물 콧물을 흘리는 상황에서도 진도아리랑의 감칠 맛으로 우리를 꼼작 못하게 붙들어 맨 이가 이근녀(李根女) 할머니셨다. 그 때 연세가 70을 넘기셨을 때인데도 밖의 함성과 싸이렌 소리를 제압하고도 남는 성음이셨다. 그후 세월이 흘러 할머니의 연세가 90이 되신 지금 우리는 뒤늦게나마 할머니의 진도아리랑을 담게 되었다. 이미 할머니는 아리랑 10수를 부르시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약해지셨지만 진도아리랑의 살아있는 깊은 속이 절절 묻어있었다. 할머니의 아리랑이 3대를 걸쳐 이어져가는 놀라운 현실이 개성을 강조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것이바로 아리랑의 생명력이요 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노래임을 자부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신나라라이브홀에서의 첫 만남 후 18년만에 나타나신 할머니는 할머니의 분신의 소리꾼을 2명이나 대동하고 당당하게 스튜디오의 문을 들어선 것이다. 할머니가족의 녹음을 마치고 일주일이 지나서, 음악을 다듬던 우리는 이근녀할머니의 소리가 너무 아쉬워서 녹음기를 걸쳐메고 다시 땅끝 진도로 달려갔다. 진도군 의신면 돈지마을에 있는 할머니자택에 들어서자 백년이나 된 작은 고옥에서 하얀 웃음을 머금고 나오시는 이근녀할머니는 혼자서 집을 지키고 계셨다. 마루가 딸린 작은 토방에는 할머니의 손때묻은 소박한 장롱과 소품이 우리를 반겼다. 그날 저녁 우리는 진도아리랑에 얽힌 할머니의 증언과 고담스런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특히 진도아리랑외에 할머니가 남기신 자장가와 육자배기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을 것 같다. 특히 육자배기를 부르시면서 자신도 모르게 초연히 나를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그 깊고도 편안한 눈속에는 인생을 다 담고도 남을만한 넓은 세상이 펼쳐있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아련히 다가오는 이별의 아픔이 우리 둘 사이를 말없이 오갔다.할머니의 진도아리랑에 관한 증언중에는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때(15세경으로기억함), 진도 출신의 대금의 명인이었던 박종기씨가 진도아리랑을 처음 만들었으며 진도에서 그가 만든 아리랑을 가르쳤다는 사실과 이 진도아리랑을 배운 진도사람들이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는 증언이 그것이다. 이근녀 할머니의 이 증언이 사실인지는 누구도 증명할 길이 없지만 진도아리랑에 대한 여러 학설을 일축하고 가장 신뢰할 만한 증언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진도아리랑의 가장 특이한 후렴인< 아리랑 응-응-응-아라리가 났네>의 이 부분은 대금가락의 독특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목이기도 하다.본 음반이 진도아리랑의 진수를 담은 기록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진도아리랑 60여수가 담기기도 이번이 처음이다. 진도아리랑이 한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는 이 생생한 기록은 우리의 아리랑의 살아있는 역사성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 할머니의 뒤를 잇는 소리꾼들을 살펴보자.장녀 강송대(1941년생)선생은 어려서 모친으로부터 잡가를 배웠고, 5촌 고모 뻘인 명창 강숙자로부터 춘향가 등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소리 인생을 시작해서 김한수 공대일 등으로부터도 사사했다. 이후 목포와 광주에서 20여년 간 여러 무대에서 소리를 하며 진도를 오가다 아예 고향에 눌러 앉아 후진양성과 모든 공연의 어른역을 맡게 되었다. <진도아리랑보존회> 회장 등의 활동을 하며 각 지역의 아리랑축제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001년 9월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4호 <남도잡가> 부문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아 '상청이 좋고 한이 배어있는 성음의 소유자'로 인정을 받았다.증손녀 강은주는 5살 때부터 소리를 해서 주위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1995년 제2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학생부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여러 경연대회와 주요공연에 참가해 재능을 발휘했고 2004년도 대학 특례입학 한 국악영재이다. 역시 가계의 내력인 듯, '짠짠하게 걸어 넘기는 목 구성이 예뿐' 것이 특징이다. 이상의 가족사는 이미 진도 안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99년 제2회 남도민요경창대회에서 강송대선생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선생의 여동생 딸 노부희양이 신인부 장려상을 수상했고, 큰오빠의 손녀인 강은주양이 학생부 최우수상을 받아 3대가 입상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런가하면 2003년 9월에는 강은주, 증조할머니(이근녀), 고모할머니(강송대), 아버지(강충원), 이렇게 4대가 합동공연을 하여 화제에 오른 적도 있다.반주에 동참 한 세 연주자도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 이들로 이 분들의 소리를 제대로 집어 '찔러' 준 명연주자들이다. 오랫동안 진도의 연행공간에서 함께 한 탓도 있겠지만 "잡가 반주는 또 잡가반주 대로 제(制)가 있다"고 말 할 만큼 잡가 반주에 자신을 갖고 있음은 물론 남도잡가의 특성을 잘 아는 이들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예컨대, 장고(김오현), 대금(정해완), 아쟁(서영호)만을 쓴 것은 진도아리랑에는 이들 세 악기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경험에서 그렇게 택했다는 것인데, 이는 음악성을 강조한 측면이고, 장고와 '어정 징', 여기에 아쟁을 피치로 연주한 것은 창자의 성음과 목구성을 그대로 살려 주려는 배려에서 일 뿐만 아니라 사설을 명확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악기 소리를 앞세우려는 것이 연주자들의 성향이고 보면 이런 반주도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아무나 부를 수는 있지만 아무나 잘 부를 수는 없는 노래이고, "남도 황토 밭이랑에 너풀거리는 여인의 머리수건 마냥 살랑이는 맛도 있어야 하지만, 추사체(秋史體)의 그 힘차고 굳건한 맛도 있어야 제 소리"라는 진도아리랑은 참으로 맛깔스런 노래다. 그래서 진도아리랑에 대해서는 그 연원이 어떻고, 그 어원이 어떻고를 따져 묻는 것은 가당치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비록 진도아리랑의 역사가 허풍떨어 말 할 만큼 옛적이 아닐지라도 자신들의 토속적 정서를 응축시킨 소리요 삶의 소리로 부르고 있고, 혹여 '소리 길'을 알아 추임새 붙여 청하는 외지 손이 있으면 신명을 얹어 들려줄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문의:사무국장 기미양(725-1945/016-261-5014)
-
[새고려신문] 위기 맞은 '사할린 한글학교' 회생 운동 전개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주축 후원회 결성27년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글교육협회(한국)가 매년 2차례 시행하던 사할린 한글학교 한국 문화체험 연수가 코로나로 중단되어 있다. 주 원인은 경제적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사할린 한글학교 한국 문화체험 연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27년 동안 사할린에 한국어 교육과 차세대들의 모국 방문을 후원해왔다. 이는 임태식 사할린 한국어교육협회장의 헌신으로 이어져왔는데, 코로나로 운영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임 회장은 최근 아리랑학회 회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사명감을 갖고 사할린 한국어 교육을 도와줄 개인이나 단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라고 밝혔다. 서울 혜화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임 회장이 사할린의 한국어 교육 문제에 열정을 품게 된 것은 가족사와 연결된다. 바로 사할린에 거주하는 고종사촌을 만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을 때 사할린 공식 한글학교 제9동양어문학교를 방문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임 회장의 회고 속에는 앞으로의 운영에 대한 걱정이 절실하게 전해졌다. "한글 교육 수업 장면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어 교육이 재개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태도만큼은 정말 열성적이었어요. 그 흔한 스티커도 없어서 성적이 올라가는 아이들에게 색종이로 별을 오려서 노트에 부쳐주는 모습을 보고 돌아와서 스티커를 당장 한 보따리 보냈습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는 한국어 교사들의 열정에 감동을 받고 귀국 후 친분이 있는 각 학교의 교장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사할린 동포를 위한 한복 700여 벌을 모아 수선해서 보내기도 했다. 사할린 내 유치원 3곳에 한국어반을 설립해 운영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할린 현지에선 한국어를 가르치는 상급 학교가 많지 않아서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어 학교 설립이 시급하지만 당장은 여력이 없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맥을 이어가게 하고 싶습니다. 교사들에게도 아이들이 한국말을 잊지 않게만 도와달라고 하고 있죠." 임 회장은 비영리단체인 사할린 한국어교육협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아프리카 난민을 돕는 단체에는 후원이 많이 들어온다는 데 사할린 문제에는 관심있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불행한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할린 한인의 후손들이 우리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설명을 했지만 협회를 함께 이끌어 나갈 사람(동지)을 찾는 일도, 후원자를 모으는 일도 쉽지는 않다고 했다. 26년 동안 이어져온 후원사업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후원자들이 노년을 맞이하여 양로원이나 병원생활을 하게 된 탓이다. 그 결과 후원자는 3분지 1로 줄어들었고, 여기에 코로나로 해서 더욱 힘들어졌다. 차기 한국어 교사를 구할 수 없는 현실에서 현지 한글 교육을 맡은 교사들의 부족 현상이 있게 되었다, 26년 전에 책정한 차비 정도의 월급과 지원은 경제적으로 너무나 협소해서 계속되는 코로나로 이 교육사업이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런데 2016년부터 매년 '사할린 아리랑제'를 주관하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논의를 하게 되었다. 최근 이에 동조하는 아리랑학회, 국악신문 등이 동조하고 나섰다. 지난 3월 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최근 모임에서 "일제강정기 강제동원으로 사할린에 끌려간 조선인 중 경상도 출신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을 잊지 않고 아리랑까지 부르는 동포들은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우리말을 잊어버리면 아리랑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1차 후원회 결성에 이어 제2차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문제를 측면 지원해 온 공노원 부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류바람을 타고 불어온 한국의 인기는 사할린에도 주기적으로 한국 문화가 움트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사할린에는 남북한 문화가 각각 공존해 있었지만 냉전 이념 속에서도 한국 풍습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어서 '사할민국'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한글 교육이 사라지면 다음 세대는 러시아 문화에 동화되어 정체성 문제에 혼란이 올 것이다" 라고 한글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임 회장은 이 같은 논의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본회의 설립 취지를 이해해 주시고 후원회원으로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총장님께서 많은 지원을 해 주셔서 큰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보존과 발전을 위해 수고하시는 전국 아리랑전승단체 회장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국악신문 전직원의 관심 표명에 대해 감사합니다. 특히 이번 공노원 부회장의 사할린 현지 공개수업 참관과 지도하는 기간에 후원을 해 준 나눔성형외과 (원장 노승만)에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임태식 회장 메세지 러시아 사할린! 일제강점기 통한의 상흔이 1,2세대에 머물지 않고 3,4세대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침식되어가는 아픔이 있습니다. 나라 잃어 천대받던 4만 3천여 우리 동포들은 광복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반세기를 부당한 영어의 몸으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핍박과 허기로 고향을 그리다가 세상을 떠난 수많은 우리 동포들도 있습니다. 1990년 한ㆍ러 수교로 꿈에 그리던 모국을 왕래하게 되었지만 우리말과 글을 쓰던 1세대들의 영주귀국과 타계는 2세대들의 모국어 사용을 중단하게 했고 3,4세대들의 한국어 교육 부재는 이제 문맹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63년 한국어 교육 폐지 이후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러시아어로 교육을 받아야만 해서, 3세대가 모이면 중간에 있는 2세가 1세와 3세의 소통을 위해 통역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현실입니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어 교육이 재개되었지만 1963년 이전 양성한 한국어 교사는 영주귀국을 하였거나 고령으로 타계하였습니다. 1996년부터 현재까지 사할린 국립대학에서 양성한 300여 명의 한국어 교사는 열악한 보수체계로 거의 전원이 한국어 교사임용을 기피한 실정입니다. 현재 사할린에는 정규교육을 이수한 한국어 교사는 전무한 편입니다. 질 높은 교육을 위해 교사 양성과 연수, 교재ㆍ교구확충 등에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협회는 아직은 어렵지만 사할린에 한글학교가 설립되고 우리 동포가 우리말과 한글을 잊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3월 1일.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임태식 올림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사무총장은 "매년 2차례 모국방문을 하는 학생들의 답사일정을 각 지역 지자체가 주최하는 아리랑축제와 연계시켜 모국의 정서와 문화를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후원단체는 다음과 같다. 후원단체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영남아리랑보존회(정은하). 아리앤랑무용단(김채원), 서울아리랑보존회(유명옥). 영남민요연구회(배경숙), 구미아리랑보존회(임규익), 제주도아리랑보존회(강소빈), 울릉도아리랑보존회(황효숙), 제주아리랑연구회(장경숙), 연변아리랑보존회(김은희). 가평아리랑보존회(최승녀), 군포아리랑보존회(한영숙), 진도아리랑보존회(박숙영), 예천토속아리랑보존회(최수인),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기연옥), 부산동래아리랑보존회(김희은),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 서귀포아리랑보존회(유재희), 연변아리랑보존회(김은희), 문경민요연구원(진미애) 러시아아리랑 본부 본부장(공노원), 하바롭스크아리랑 지부(김석복)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 홍보대사(스텝핀 블라디미르) 아리랑학회 (김연갑, 기미양, 이정하, 이강연, 이정홍, 김니은, 지철호, 정정숙, 김미숙) 국악신문 (김지연.김한나.김하늘) 나눔성형외과의원(노승만), 나블리베이커리 카페(지윤주) (본 기사 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사무총장 제공) [출처] 2021년 4월16일(음력 3월5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 작성자 bplus7
-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이트 1980-2018년,www.arirangsong.net http://kibada.cafe24.com/bbs/index.php http://kibada.cafe24.com/bbs/zboard.php?id=arirang_board15
-
<정선아리랑>의 참맛 보여 드립니다.<정선아리랑>의 참맛 보여 드립니다. [오마이뉴스 2006-02-16 11:14] [오마이뉴스 김영조 기자] ▲ '아리랑 명가 3대의 정선아라리' 음반 표지 ©2006 신나라 우리에게 아리랑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 겨레는 전 세계 어디서나 아리랑을 들으면 눈물이 찔끔거린다고 할까? 일제강점기에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보면서 배달겨레의 아픔과 울분을 같이 느꼈을까?신나라 김기순 회장은 "아리랑의 참된 의미"라는 글에서 "아리랑 속에는 인간의 모든 아픔과 갈등, 그리고 용서와 화해, 그리고 강력한 저항과 울분이 녹아 있습니다. 아리랑은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아리랑은 삶과 죽음의 소리입니다. 아리랑은 정신을 토해 내는 울부짖음이요, 천하를 가슴에 품고 용서하는 해원의 소리인 것입니다"라고 말한다.우리 겨레의 4대 아리랑은 누구나 서울의 <본조아리랑>,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을 꼽는다. 또 이 가운데 강원도의 <정선아리랑>을 아리랑의 원형을 간직한 본류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기록상 4천여 수의 가사가 전해 오고 있고, 노래의 전승체계도 변함없이 이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선아리랑>을 사람들은 "아리랑 중의 아리랑"이라고 한다.<정선아리랑>을 주제로 한 고숙경의 석사논문 '정선아리랑에 관한 연구'에도 "동부지방의 민요에 속하는 강원도 지방의 정선아리랑을 택한 이유는 정선아리랑은 각 지방의 많은 아리랑 중에서 그 기원이 가장 오래되었고, 가락과 선법에서 한국 민요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감정 또한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특히 <정선아리랑>은 다른 노래들과는 달리 가사가 고정되지 않고, 삶 속에서 꾸준히 창조되어 온 노래이다. 또, 삶 그 자체임은 물론 사람들의 감정이나 마음에 맺힌 것을 걸러 주고, 풀어 주는 노래라고 말한다.그런 <정선아리랑>을 독자성을 가지고 3대를 이어온 가족이 있다. 1989년 83세로 사망한 1대 정옥선, 61살로 투병 중인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명예예능보유자 2대 김병하, 그리고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예능보유자이며, (사)정선아리랑보존회 이사장인 3대 김길자가 그들이다.1대 정옥선은 많은 일화가 있다. 예를 들면 소를 몰던 사람이 모친의 정옥선의 아라리 소리에 넋을 잃어 그만 소가 귀리 밭에 들어가 밭을 다 절단낸 적이 있다는 얘기나 돌다리를 건너던 이가 모친의 소리에 취해 그만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 버렸다는 얘기 등이다. 이런 소리의 소유자였으니 두말할 나위 없이 나라가 인정하는 예능보유자가 된 아들과 손녀의 소리내력을 짚어 준다.또 2대 김병하는 시인 고은이 말했듯 "김병하의 낭낭한 목청은 우리가 넘어온 성마령 쪽에 대고 정선아라리 청승의 극치를 보여준다"라는 평가를 듣는다.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 있어도 아라리 한 자락 멋들어지게 하고 나면 가슴이 확 트입니다. 아라리를 부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신명이나요. 알 수 없는 기운이 쑥쑥 올라오는 듯하지요"라는 김병하에게서 우리는 신명으로 가득 찬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렇게 아리랑에 발자취가 뚜렷했던 김병하는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더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대신 3대 김길자에게 아리랑은 넘어갔다.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본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그녀를 투병 중인 아버지와 신경통 등의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성 지극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는 "그녀를 참으로 아름답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그의 소리는 감동을 준다. 가슴을 아프게도 하고 눈물을 짓게도 한다. 그렇다고 청승맞지는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이 3대 김길자가 와병 중인 아버지의 회갑을 맞아 헌정하는 음반 <아리랑 명가 3대의 정선아라리>(신나라)를 통해 내놓았다.이 음반의 첫 장에는 할머니 정옥선과 아버지 김병하 그리고 할머니의 이종과 고종 사촌들과 함께 벌인 소리판이다. 특히 장고 반주에 의한 소리와 향피리 연주도 있다. 사설은 약 80여 수인데 이들 자료는 거의 80년대 말에 카세트에 담은 것으로 상태가 고르지는 못하다. 두 번째 장은 김길자씨의 소리로 부친에게 바치는 헌정곡을 먼저 담고, 무반주와 반주에 의한 긴소리, 자즌소리, 엮음소리를 담았다. 특히 잦은 소리는 물박장단(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치는 장단)과 함께했다.겨레여! 우리는 아리랑의 민족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 정선아라리를 듣고, 한겨레로서의 감흥을 흠뻑 느껴보길 권한다. 그리고 온 세상에 퍼져있는 배달겨레의 모든 이들과 하나 된 마음을 가져보면 좋을 일이다. 어쩌면 이 <정선아라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통일을 앞당길지도 모를 일이다."맨드라미 줄봉숭아는 토담이 붉어 좋고요앞남산 철쭉꽃은 강산이 붉어 좋다봄철인지 가을철인지 나는 몰랐더니뒷동산 행화춘절이 날 알려주네"(<정선아리랑>의 한 대목) 아버지의 회갑에 효심으로 바치는 아리랑 [인터뷰]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연갑 당연히 음반평이니 소리를 부른 김길자를 인터뷰했어야 했다. 하지만, 여러 번 김길자씨와의 만남을 시도하다 번번이 실패했다. 그것은 그녀가 극진히 간병하고 있는 아버지 김병하씨의 병이 깊어져 도저히 짬을 낼 수가 없다는 말에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이 음반을 기획하여 제작한 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에게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아리랑은 무엇인가? 왜 아리랑에 미쳐있는가? "나라밖 동포들은 아리랑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글썽인다. 그리고 아리랑 얘기를 먼저 하지 않으면 다른 이야기로 나아가지 못한다. 중앙아시아에 가면 우리 동포는 그냥 고려인이고, '까레이스키'이다. 남과 북 어디도 고국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헤어질 때면 으레 아리랑을 부른다. 그래서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다. 아리랑에는 한민족의 동질성, 정체성이 있고, 신앙심이 있다. 아리랑 고개의 상징성은 발병이 아니라 고개를 넘으려 하는 것이다. 수난을 많이 겪은 우리 겨레가 아픔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부른 노래일 것이다. 나는 이를 깨닫고 아리랑의 순서를 맞추고,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군대에 갔는데 휴전선 근처에서 근무했던 탓에 북한군의 선무방송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네'라는 북한 아리랑을 들을 수 있었는데 가사가 좋다는 생각을 했다. 제대 뒤 사북에서 진폐증 환자가 부르는 아리랑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때 아리랑을 연구해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후 20년 넘게 미쳐왔다." - 그렇게 오래 지탱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다면. "이 일을 인정하고, 노력에 대해 대가를 주는 데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신나라는 이번 음반의 제작뿐 아니라 나의 20년 아리랑 작업을 같이해왔고, 11번째 음반을 내주었다. 음반사가 한 장르에 그것도 돈도 되지 않는 데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은 그 예가 없을 정도이다. 이는 신나라가 아리랑의 역사성, 전통성과 현재적, 미래적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랑에 관한 한 신나라의 공로는 높이 기릴 만 한다." - 정선아라리 3대와 이번에 내놓은 음반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 "김길자 가족은 아리랑을 내림 직업으로 가진 가족이다. 스승과 제자가 이어간 경우는 종종 있지만 가족이 3대를 이어간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김길자의 아버지 김병하가 말을 할 줄 알고, 활동력이 있었던 탓에 정선아라리를 외부에 알릴 수 있었고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이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에 가난까지 겹쳐 고통을 받다가 급기야 목을 쓸 수 없는 중풍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김길자가 아버지의 소리를 물려받아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길자는 단언컨대 20년 귀명창인 내가 아리랑 소리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길자는 투병중인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딸이다. 그 김길자의 소리뿐 아니라 효성에 반한 나와 신나라가 협력하여 김병하 회갑맞이 헌정 음반을 내게 되었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당장 통일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통일이 된 뒤 전 세계 135 나라의 동포가 같이 아리랑을 부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에 박물관을 지었으면 좋겠다. 만일 지어진다면 내가 20여년 모아온 아리랑 자료를 모두 내놓겠다. 그래서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아물기를 기대한다." 어떤 책의 글쓴이가 '미쳐야 미친다'라고 했던가? 그는 그렇게 아리랑에 미쳐 있었다. 온 나라 땅의 9할을 발로 밟아봤다고 할 정도로 미쳐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신앙처럼 말하고 있었다. 다만, 그로 인해 가족들을 힘들게 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 김영조 출처 : 오마이뉴스
-
제9회청주아리랑제-인류무형문화유산, 청주아리랑!인류무형문화유산, 청주아리랑! 행사명: 제9회청주아리랑제주 제: 인류무형문화유산, 청주아리랑!일 시:2018. 06. 16. 오후 1시장 소: 청주 예술의 전당주최:청주문화재단주관:청주청주아리랑보존회(회장:강옥선)후원: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아리랑학회.해설:김연갑/한겨레아리랑연합회 연출 :기미양//아리랑학회 축사- 인류무형문화유산, 청주아리랑! 김연갑(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일제강점기 청주에서 정암촌으로 이주한 청주인들이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부르던 노래가 청주아리랑이다. 중국 교포사회 민요연구가인 김봉관선생에 의해 고향 청주로 귀환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지시로 1952년부터 조선족 민간예술을 발굴하기 시작한 김봉관선생에 의해 1978년 그 존재가 확인된 노래다. 이후 2000년에 들어 임동철 충북대교수가 청주아리랑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있게 되었고, 청주의 명창 강옥선선생에 의해 전승이 본격화 되었다. 강명창은 중국 정암촌을 찾아 현지답사를 했고, 현지 동포들과 합동공연을 하고 왔다. 이후 청주아리랑보존회를 조직하고 전승을 본격화 했다.이후 강옥선 회장은 청주에서 시민 대상의 공연을 통해 정착에 노력했고, 국내외 아리랑 관련 행사에 참가해 청주아리랑을 알려왔다. 이런 노력으로 2012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신청서에 현재적 향유와 지속적 전승에 대한 아리랑전승 공동체 단체로 참여했다. 이로부터 충북을 대표하는 아리랑 전승단체로 오늘에 이르렀다.내년은 청주아리랑제 10회를 맞게 되었다. 강옥선회장의 노고와 청주아리랑의 토착화를 확인하는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다. 청주아리랑 얼쑤! 축사- 고향의 노래, 청주아리랑. 강옥선(청주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정암촌에서 청주아리랑을 들었을 때,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정암촌 주민들은 아이들에게 밥을 먹기 전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대답을 들어서야 할머니가 밥을 퍼주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청주아리랑이 할머니에게서 손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서 중국속의 청주인 정암촌에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2000년 중국 민요연구가이신 김봉관 선생께서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청주아리랑을 청주에서 계승하여 주기를 당부하셨다. 중국사회가 개방의 물결을 맞아 인구의 상당수가 큰 도시로 빠져 나가고 연변지역에서 더 이상 청주아리랑의 보존을 정암촌에 맡겨 둘 수 없다는 것이다.사명감을 가지고 청주아리랑을 청주에서 되살리기 위해 지역의 국악인들과 함께 2003년 청주아리랑보존회를 결성하였다. 2007년부터 매년 청주아리랑제를 개최하여 오고 있다. 청주아리랑의 귀환은 청주 지역민의 정체성을 찾는 노래이다. 청주 지역민에게 오래 오래 기억되고 계승되기를 바란다. 앞으로 지역민들과 힘을 모아서 청주아리랑전국경창대회를 준비하고자 한다. 아리랑의 위상을 위해 힘써 온 한겨레아리랑연합회와 아리랑학회,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님, 함께 청주아리랑 고개를 넘어간 보존회 회원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렉쳐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청주아리랑! 해설이 있는 청주아리랑진행:기미양/아리랑학회 연구이사해설:김연갑/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기획의도주제: 시민과 함께 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청주아리랑!>1.일제강점기 북간도로 이주한 청주아리랑은 2000년 중국 정암촌 마을에서 청주로 귀환했다. 이 청주아리랑은 현재 청주아리랑보존회 강옥선 회장에 의해 음반과 방송, 청주아리랑제를 통해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2.강옥선 회장의 전승활동에 의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신청서에 청주아리랑이 등록되었다. "민속이란 현재 전승하는 사람이 없으면 가짜민속이 된다.” 청주아리랑 전승자 강옥선의 전승 활동을 주목하게 된다. 이에 초점을 맞춰 ‘해설이 있는 청주아리랑’을 준비했다.3. 강옥선 회장이 북간도 정암촌에서 확인한 청주아리랑을 소극 ‘정암촌댁의 하루’에서 재현한다. 더불어 강회장이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일노래 ‘아라리’도 소개된다.4. 강제징용80주년 기념으로 사할린아리랑도 불러본다. 사할린할머니로 유명한 정성애 명창의 아들 원명운 님이 어머니가 조국과 고향을 그리며 불렀던 '망향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을 재현한다. 프로그램 개막공연-신명의 소리, 청주농악 1. 소극-정암촌 청주댁의 하루-중국 정암촌 청주민들이 삶의 노래, 청주아리랑을 일상에서 재현했다.2 정암촌의 청주아리랑-일제강점기 중국 정암촌으로 집단이주 한 청주인이 고향을 그리며 부른 청주아리랑3. 강옥선의 청주아리랑-어머니가 불렀던 청주 아라리4. 충청아리랑-일제강점기 북간도로 집단 이주한 충청인이 고향을 그리며 부른 충청도아리랑5.문경새새아리랑-송옥자/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5. 축무-오인오색/한국전통무용6. 사할린아리랑-원명운(사할린동포)7. 충청아리랑/밀양아리랑 청주아리랑어린이합창단 24인 8. 휘나레-청주아리랑 대합창
-
강옥선 아리랑연보(2018년) (사단법인 청주아리랑보존회 회장)강옥선(청주아리랑보존회 회장) 아리랑연보 충북중요무형문화제 1호 청주농악 전수자청주아리랑 전승자(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등록단체)무형문화제 제27호 경기민요 김금숙 선생님 사사무형문화제 제29호 서도소리 이은관 선생님 사사국악강사 교육지도사 1급現 청주아리랑보존회 회장 現 청주농악보존회 회원前 (사)충북국악협회 민요분과 위원장(1999.~2015.)제1기 아리랑학교 수료(주관:아리랑학회)제2기 아리랑학교 수료(주관:아리랑학회) 1998.8.26. 청주문화방송 전국민요대회 우수상2000년 09월 12일 중국 지린성 정암촌 청주아리랑답사 및 청주아리랑 시연2000.10.21. 박팔괘 추모경창대회 대상 –청주아리랑2000.10.25. 청주시우수예술인상 수상2002년 11월 11일 중국 정암촌 청주아리랑답사 및 청주아리랑 공연2003년 08월 10일 청주고인쇄박물관 "청주아리랑한중학술대회"-청주아리랑 재현2003년 10월 1일 청주아리랑보존회 결성2004년 01월 01일 청주아리랑보존회 회장 취임2006년 11월 11일 청주MBC 청주아리랑 음반CD제작 참여2006년 [문화재청] 전국아리랑종합실태조사보고서-청주아리랑 전승자 강옥선 수록2007년 이창식교수의 [충북의 구전민요] 청주아리랑보존회와 전승자 강옥선 수록2007년 07월 15일 중국 정암촌 청주아리랑답사 및 청주아리랑 공연2007년 10월 30일 제1회청주아리랑발표회 -강옥선의 청주아리랑2010년 11월 15일 중국 지린성 정암촌 청주아리랑보존회 강옥선 초청 공연2011년 05월 07일 제2회청주아리랑발표회 -강옥선의 청주아리랑2011년 08월 20일 청주아리랑 음반 제작(기획:청주아리랑보존회)2011년 10월 27일 한국악협회 향토민요 및 청주아리랑 발표회(청주아리랑보존회)2011년 12월 27일 <2011아리랑한마당> 초청공연/주관:(재)전통문화예술진흥재단2012년 01월 11일 문화재청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아리랑 전승단체 신청2012년 10월 21일 제3회 청주아리랑 한마당 /후원:충북문화재단2012년 12월 05일 세계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아리랑 등재 –청주아리랑보존회 전승단체 등록2013년 07월 19일 제3회호서포럼 「청주아리랑의 전승과 보존」청주아리랑 시연(호서문화연구소)2013년 08월 08일 중국문화관광축제 『2013청주농악 두만강축제』 청주아리랑 공연2013년 11월 10일 제4회 청주아리랑 한마당 공연2014년 09월 22일 '2014아리랑세계화-지역아리랑 음반 및 영상 제작사업' 초청공연 (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주관2014년 10월 18일 제5회 청주아리랑제 (청주중앙공원 특설무대)2015년 06월 05일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의 공동기획전 <아리랑 그리고 信念의 鳥人!> 개막 축하공연-청주아리랑 한마당2015년 09월 24일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초청공연-청주아리랑 한마당2015년 10월 31일 제6회 청주아리랑제 (청주중앙공원 특설무대)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창립식 참가2016년 08월21일 제7회 청주아리랑제(장소:청주예술의 전당) 제1회 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강옥선의 청주아리랑 (주관: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2017년 11월 26일 2017아리랑심포지움 참가(주관:아리랑학회)2017년 09월 22일 제10회문경새재아리랑제 전국아리랑워크샾 초청단체 위촉 제10회문경새재아리랑제 팔도아리랑거리퍼레이드 초청단체 위촉2017년 11월25일 제8회청주아리랑제 (후원:청주문화재단.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아리랑학회)2018년 06월16일 제9회청주아리랑제 (후원:청주문화재단.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아리랑학회) 제8회청주아리랑제(주관:청주아리랑보존회/강옥선)-해설:기미양/아리랑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