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문광부 청원서 2005-2021장관과의 대화방 답변보기 의견등록 열린장관실 장관과의 대화방 답변보기 답변보기 동명이인의 게시물 목록도 함께 보여집니다. 본인의 이메일이 맞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저속한 표현, 남을 헐뜯는 말, 올바르지 않은 이야기, 상업성 짙은 글은 곧바로 지울 수 있습니다. ♣ 담당부서 : 문화체육관광부 운영지원과 민원실(044-203-2161~2) 검색 검색대상 제목 내용 기간별 검색 2021년2020년2019년2018년2017년2016년2015년2014년2013년2012년2011년2010년2009년2008년2007년2006년2005년2004년2003년2002년2001년 010203040506070809101112 01020304050607080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 ~ 2021년2020년2019년2018년2017년2016년2015년2014년2013년2012년2011년2010년2009년2008년2007년2006년2005년2004년2003년2002년2001년 010203040506070809101112 01020304050607080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2728293031 검색 총 9건 [0/1 쪽] 번호 접수번호 제목 게시일 처리만료일 게시자 진행상태 이메일 19 204 청원서 유네스코 ‘아리랑문화’로 남북 공동 재 등재하자! 2021. 6. 15. 기미양 진행중 ar*********@daum.net 18 138 청원서 ‘DMZ아리랑길’ 명명을 청원함 2019. 4. 15. 2019. 4. 18. 기미양 진행중 ar*********@daum.net 17 271 [보도자료]제2회 ‘아리랑의 날’ 기념 행사 2014. 8. 28. 2014. 9. 4. 기미양 완료 ar*********@daum.net 16 823 [성명서] 정부에 묻는다 2011. 6. 27. 2011. 7. 4. 기미양 완료 ki****@hanmail.net 15 <02통일아리랑축제>을 대비한 제1차 학술세미나 2002. 2. 1. 기미양 완료 ki****@hanmail.net 14 664 8.15손님, 아리랑으로 맞읍시다 2002. 7. 29. 기미양 완료 ar********@hanmail.net 13 일본으로 간 아리랑 2002. 9. 23. 기미양 완료 ki****@hanmail.net 12 896 행사명:춘사나운규 탄생 1백주년 기념 자료전 2002. 11. 11. 기미양 완료 ki****@hanmail.net 11 288 <렉쳐 김순녀 정선아리랑 전 바탕> 발표회에 초대합니다 2005. 3. 11. 2005. 3. 18. 기미양 완료 ki****@hanmail.net
-
2005 전국아리랑답사-정선 편<연합초대석> 아리랑 기행서 낸 지리학자 이정면 박사 기사입력 2007.05.15. 오후 4:00 최종수정 2007.05.15. 오후 4:00 스크랩 본문듣기 설정 좋아요 좋아요 평가하기공감 댓글4 요약봇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을 펴낸 이정면 박사 정선ㆍ서울ㆍ진도ㆍ밀양 등 답사한 땀과 애정의 결실"아리랑은 우리가 알고 사랑해야 할 세계의 노래죠"'아리랑문화센터' '아리랑박물관' 설치 필요성 역설(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지리학자 이정면(李廷冕ㆍ83ㆍ미국 유타대학교 명예교수) 박사가 겨레의 노래인 아리랑의 숨결을 찾아나선 기행서를 펴냈다.15일 출간된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이지출판)은 이 교수가 2005년부터 3년 간 강원도 정선을 시작으로 서울, 밀양, 진도 등 아리랑의 4대 유적지를 세 차례 답사한 땀과 애정의 결과물이다.한 학자가 일관되게 아리랑 유적지를 직접 찾아 일반독자 대상의 체계적 기행서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 음악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지리학자가 사명감을 갖고 아리랑 알리기에 나선 것이어서 더욱 눈길을 모은다.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을 펴낸 이정면 박사 이 교수는 서울대 지리학과를 나와 경제지리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한국의 제1세대 지리학자다. 아시아 지리학을 50여년 동안 연구하며 경희대, 경북대 등 국내 대학은 물론 일본 쓰쿠바대학, 호세이대학, 교토대학, 리스메이간대학,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유타대학, 말레이시아대학 등에서 후학을 양성해왔다.이런 지리학자가 아리랑에 깊이 빠져든 까닭은 뭘까? 이 교수는 여러 학문을 두루 아우르는 '통섭'(統攝ㆍconsilience)의 관점에서 아리랑은 인문지리의 또하나의 귀착지라고 설명한다. 자연과학, 인물과학, 사회과학을 통합해 아리랑으로 민족 전통문화의 가치를 규명하고 싶었다는 것이다."유년 시절, 고향에서 들었던 아리랑 가락이 80년 가까운 세월 속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 정서적 유전자로 살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전남 광주 외곽의 잣고개를 지게꾼들이나 보부상들이 넘어가며 불렀던 시름과 고단함의 노래였죠. 지난 3년 동안 나이를 잊고 그 아리랑의 발자취를 찾아 다녔어요."해외동포의 이민사를 연구하며 그 단서가 아리랑에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도 아리랑 기행을 떠난 동기다. 아리랑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민사의 밑바닥에 흐르는 눈물과 한의 정체를 발견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본격탐험'에 나섰다. 가장 가까운 계기는 동포 이민사가 잘 정리되고 있지 못한 미국 중서부 산간지역의 교포신문 '유타 코리안 타임스'에 시리즈물 '민족의 아리랑을 찾아서'를 2005년께 집필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한 것이었다.젊은 날부터 외국 학생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쳐 부르게 했던 그이지만 막상 아리랑을 체계적이고 깊이있게 알지 못함을 깨닫고 귀국해 현장과 자료실을 부지런히 찾아 다녔다. 현장답사는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길잡이가 돼줬고, 현지 전문가 등의 도움도 컸다.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같은 곳에서 얻은 각종 자료와 관련서 역시 요긴한 밑거름이 됐다.답사와 조사 과정에서 아리랑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은 세계였고, 이민사의 단서나 음악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나의 문화코드였다고 이 교수는 털어놓는다. '인문지리의 또하나의 귀착지는 민족전통문화의 가치규명이다'는 자신의 금언을 확인했다는 얘기다.아리랑 유적지를 돌아본 결과 강원도 정선의 아리랑이 가장 오래됐고, 다른 지역의 아리랑도 이곳을 본향으로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비봉산 '정선아리랑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백두대간의 깊은 산간에서 탄생한 아리랑이 이제는 한국의 노래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노래로 불릴 만큼 자랑스런 문화어가 됐다고 그는 말한다.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의 표지 "아리랑이 전국으로 퍼져간 계기는 조선조 말엽에 진행된 경복궁 중수였어요. 1865년부터 1872년까지 7년 간 계속된 공사장에서는 강원도 아라리의 하나인 '문경아리랑'이 불렸고, 이것이 부역을 마치고 전국 각지의 고향으로 돌아간 젊은이들에 의해 그 지역의 음악어법으로 변이됐던 거죠. 이런 사실은 1896년에 채보된 호머 H. 헐버트 아리랑과 1910년에 조사된 총독부 아리랑으로 알 수 있어요."이 교수에 따르면, 경복궁 중수공사 때 문경의 박달나무가 베어져 나가고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을 통해 아리랑은 상실감을 담아내는 대표적 노래로 승화됐다. 이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환골탈태한 뒤 박승희 원작의 연극 '아리랑', 최승희의 춤 '아리랑환타지', 가곡 '아리랑강남', 유행가 '아리랑동동' 등 모든 장르로 퍼져나갔다. 특히 해외 동포들에겐 망국의 한을 달래고 공동체의 회복을 꿈꾸는 노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민족의 노래'로 탄탄히 자리잡았다.현재 아리랑은 저항과 대동, 해원상생의 정신을 담은 가운데 세계구비유산의 상징으로 인정받고 있다. 유네스코가 '아리랑상'을 제정해 시행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아리랑은 오늘날 국제경기에서 남북 단일팀의 '단가'로 국가처럼 연주되고 있을 뿐 아니라 세계 147개국 동포사회와 한국전쟁 참전 19개국에서 애창됨으로써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이 교수는 "전국에서 열리는 아리랑 축제들은 아리랑이 민족의 원형 속에 얼마나 농밀하게 녹아 있나를 잘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지난 3년 동안 영천아리랑축제, 철원의 DMZ아리랑축제를 직접 참관하고 정선아리랑제, 진도아리랑제, 대구아리랑축제, 밀양아리랑제, 성북아리랑제 등을 자료로 접해오며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임을 다시금 깨달았다는 것이다."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한국의 대표적 문화 트렌드인 아리랑의 자료를 구할 수 있는 공식 통로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한국에 온 외국인이 '국기원'으로 가자며 택시를 탔는데, 서울 명동 입구의 한 중국식당으로 데려다 줬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잖아요. 아리랑도 마찬가지예요. 아리랑 자료가 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면 인사동의 한 식당이나 어느 노래방 앞에 내려줄지 모르지요."누구나 잘 알 것 같은 아리랑이지만 막상 아는 게 별로 없어 당황하기 마련인 것이 또한 아리랑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한다. 아리랑이 뭐냐는 외국인의 질문에 명쾌하고 자신있게 설명해줄 한국인이 뜻밖으로 드물다는 얘기다. 이는 2002년 독일에서 열린 한 음악인 대회에서 아리랑이 '세계 100대 노래' 중 으뜸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더라도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다. 외국인들이 그처럼 가치있게 여기는 아리랑을 정작 주인인 우리는 잘 모르는 현실을 시정해야 한다고 이 교수의 간절하게 외친다.또 아리랑의 세계적 브랜드 가치를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방략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후지산을 국가 이미지로 연결하는 일본처럼 아리랑을 한국의 대표 문화 이미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리랑의 세계화' 같은 거창하고 막연한 구호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리랑문화센터'나 '아리랑박물관' 같은 공적 기관을 운영하고, 외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인사동에 공연ㆍ자료ㆍ전수 기능을 아우르는 가칭 '아리랑의 집'을 세우자는 것이다. 그는 국제행사가 줄줄이 한국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이 아리랑의 필요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고 말한다. 개최가 확정된 2011년 대구세계육상경기대회,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과 유치가 추진 중인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등을 염두에 둔 말이다."한국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만큼 그 활용도는 매우 높아요. 88서울올림픽과 2002월드컵대회 때처럼 새로운 아리랑 버전들이 탄생할 것이고, 해외유명음악인의 공연에서 레퍼토리로 연주될 가능성도 커요. 세계인들에게 우리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창문 구실을 아리랑이 하고 있는 거죠."이 교수는 통일 염원을 안고 우리 민족에게 대동과 해원상생의 정신을 담고 있는 아리랑은 여전히 강력한 문화 이념이자 코드라고 역설한다. 아리랑으로 마음통일, 사람통일, 땅통일을 성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리랑은 소통의 도구로 유용하다. 그래서 부르고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이번 기행에서 얻은 사실은 바로 이 한 마디다"라고 정리했다."아리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 민족에겐 어머니와 같아요. 그 품에서 아픔을 덜고 상처를 치유하고 위안을 얻으며 새로운 희망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번 답사길에서 '내가 정말 한국사람이 돼가는구나' 하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호미로 밭을 매고 있는 할머니의 손을 맞잡았을 때 느껴진 따스함과 소박함에서 민족의 저변에 흐르는 아리랑의 정서를 공유할 수 있었지요. 아리랑은 전공과 직업을 떠나 우리 민족 모두가 알고 사랑해야 할 세계의 노래입니다."이 교수는 현재 '아리랑의 세계'를 영문판으로 집필 중이다. 올해 말에 나올 이 책은 서양인들이 좀더 쉽게 아리랑을 이해하고 부를 수 있게 하는 안내서 겸 해설서 구실을 하게 된다. 더불어 이번 '한 지리학자의 아리랑 기행'을 바탕으로 더욱 깊이있게 아리랑을 파고든 학술서의 집필도 구상 중이다.ido@yna.co.kr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636891
-
안성시,안성아리랑 발굴 조사를 위한 간담회http://www.gugakpeople.com/sub_read.html?uid=21487&section=sc29&section2= 안성시,안성아리랑 발굴 조사를 위한 간담회 이나혜기자 ㅣ 기사입력 2016/08/24 [23:40] [한국전통예술신문 전통문화=이나혜기자]8월 23일 오전 11시 안성문화원에서 의미있는 간담회가 개최되었다 ▲ 배성범이사 감탸민이사장 서명주교수 기미양이사 양장평원장 김연갑상임이사 홍원의학예사 ©아시아문예일보 간담회 주제는 발굴ᆞ보전ᆞ전승을 위한 전문가 모임으로 매천야록 소재 아리랑타령 중 일부 가사가 죽산 ( 현 안성)지역에서 불렸음이 확인되었고 ,1911년 조선총독부 조사 <리언리언급통속적독물등조사>에 보고된 기록을 근거로 안성아리랑에 대한 조사를 위한 모임이다참가자는 양장평 안성문화원장 ᆞ김태인 사무국장 ᆞ안성시 홍원의 학예연구사 ᆞ사)아시아문예진흥원 김태민 이사장 ᆞ한국방송직업전문학교 서명주 교수ᆞ사) 아시아문예진흥원 배성범 이사 ᆞ사)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상임 이사ᆞ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 한국문예지도자교육원 한국무용교수 정형숙씨가 참석했다안성아리랑에 대해서는 이미 2010 년부터 아리랑학회와 한겨레아리랑연합회가 문헌조사를 실시했고 동국대 한상일 교수가 선율분석 을 하였다. 당시 조사된 텍스트는 고 김기범 과 조명숙 명창의 아리랑을 대상으로 했다이후 기미양 이사에 의해 서강대학교 성균관대 학 학생들과 함께 현지조사가 이어졌다오늘 모임에서는 이와 같은 조사에 기반하여 안성지역 전통문화 ᆞ문화분야 전문가들을 확장시켜 조사단을 결성하는 문제, 그리고 명목뿐인 안성아리랑 보존회를 활성화 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간담회에서 기미양이사는 " 1894년 문헌기록 이후 지금까지 그 존재가 유지되는 존재는 죽산( 안성) 아리랑이 거의 유일하다고 본다 이 역사성을 간과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고 하여 .앞으로의 조사 의지를 강조했다.
-
이사장 김연갑
-
2021아리랑학교 하계세미나2021아리랑학교 주최: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주관:아리랑학회 아리랑학교(교장:김연갑) 특강: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의 가치성과 위상/기미양(아리랑학회 연구이사) 수강자는 제1기 수강을 하신분. 전승자협의회 가입단체. 초청을 받으신분만 해당합니다. 수강자는 수료식 후 수료증 수여함 (일련번호와 수강자 이름을 기입해야하기에 예약자만 참가할 수 있음) 일시: 2021-06-06 오후 2~4시 장소: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45 대종빌딩 4F 국악신문 세미나실 연락처:기미양/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01074475030) 아리랑학교 연혁 (2017-2021) 기 수 주 최 주 관 일 시 수 료 증 발행 제1기 문경문화원 아리랑학교 2017년-2018년 2018년 제2기 사할린주한인협회 아리랑학교 2018년-2021년 미발행 제3기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아리랑학교 2017년-2021년 2021년 6월 예정 ...
-
[국악신문] 용인 은이성지 아리랑노래비를 찾아서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5057 기미양 객원기자 등록 2021.05.13 15:54 조회수 18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사)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은 ‘2021아리랑학교’가 주최한 ‘경기지역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아리랑답사를 위해 길을 떠났다. 월간 잡지 ’길벗‘에 실린 ’천주교와 아리랑(기찬숙)‘을 읽고 나서, 필자(아리랑학회)에게 용인시 남곡리 아리랑고개에 대한 답사 안내 및 강연요청을 하고 회원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회장은 지난 주 가평아리랑답사에서 보납산(법업산)에서 의병들이 이승에서 넘었던 마지막 고개 아리랑고개 답사에 이어 이번 주는 용인 지역 아리랑고개를 찾아서 길을 나셨다.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는 ‘은이(隱里) 성지’가 있다. 천주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목한 본당이며 순교 후 유체의 이장 경로이기도 하다. ‘은이’라는 지명은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숨어 살던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여기에는 ‘삼덕(三德)의 길’이라는 고갯길이 있다. 세 개의 덕(德)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하나는 신덕(信德)고개인 ‘별미 고개’, 둘은 망덕(望德)고개인 ‘해실이 고개’, 셋은 애덕(愛德)고개인 ‘거문정 고개’길을 말한다. 오늘에도 인적이 드믄 산길이 포함되어 있는데, ‘120 나무계단 길’과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때 호랑이도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는 ‘기적의 길’도 있다. 그런데 은지성지 순례길 첫 번째 신덕고개 ‘별미고개’에는 뜻밖에도 ‘아리랑’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천주교 초기에 아리랑이 신앙공동체에서도 불렸음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결속과 포교를 위해 민중의 노래에 신앙심을 얹어 불렀다고 본다. 이 비에 새겨진 가사가 당시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만한 유래를 담보했기에 비로 새겨졌다고 보게 된다. 은지성지 성지순례길은 총 14km 5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인데 신덕고개, 망덕고개. 애덕고개 세 고개를 넘는 길이다. 답사 일정은 출발점에서 차를 주치하고 1시간 동안 걸어서 올라가면 아리랑고개라고 불리우는 신덕고개가 나온다. 신덕고개비 옆에 세워진 아리랑노래비까지 가는 것이다. 아리랑노래비의 가사는 김진용 작사의 전체 8절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리랑 주님을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구) 천진암 강악회 진리탐구/반만년 어둠속에 동이 트네 청천 하늘에 잔별도많고/천주교 이백년 박해도 많다 심한박해 모진고충 이겨내고/참된신앙 물려주신 순교자여 금자로 발길재는 천사를 보라/격려하며 순교의길 가신님이여 희광이칼 여덟번째 목숨바치고/천당영복 면류관을 쓰신님이여 순교유해 쌓고쌓여 주춧돌되고/순교선혈 흘러흘러 밑거름됐네 한알의 밀알이 이백년썩어/오백만의 열매가 주님찬미해 제1절에서는 상하 계층 없이 사방팔방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통해 곡조를 제시했다. 2절은 광주 퇴촌의 천진암(天眞菴)에서의 강학회(1771년 자산 정약전 3형제와 만천 이승훈 등의 천주교리 연구모임) 사실을 말하여 천주교 역사를 제시했다. 3절은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네 차례의 박해를 통해 천주교의 수난사를 나타냈고, 4, 5절은 성스런 순교사를, 6~8절은 신앙 승리의 역사를 찬양했다. 이 가사 천체를 보면 3절과 8절에 ‘이백년’이 있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 작사하여 노래비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고, 천주교 신약성서 자체 번역본을 발행하였으니, 이 아리랑 작사도 그만큼 의미를 두어 비로 세운 것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굳은 신념이 뜨겁게 전해온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회장과 회원들은 아리랑학회가 운영하는 아리랑학교에서 배포한 아리랑 가사를 사전에 받고 가창 연습을 해왔다. 아리랑고개에 오르자. 경건하고 신성한 바람이 일어났다. 묵념을 하고 전국에 곳곳에 있는 아리랑고개의 유래와 은이성지 아리랑고개의 유래에 대한 짦은 해설을 듣고 나서 아리랑노래비에 새겨진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하자 3절에서부터 모두 눈물이 쏟아져서 눈물의 아리랑 공간이 되었다. 이회장은 "코로나로 인해 5월 서울과 제주 지역 아리랑 행사가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참에 경기 서울지역 아리랑고개와 아리랑역사 유적지를 답사하고자 한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이다. 부르는 이도 왜 아리랑을 불렀는지는 알고 불러야 한다.”라는 취지로 아리랑학회 아리랑고개답사에 동참하고 있다. 이회장은 다음주 안성아리랑보존회가 주관하는 안성의 아리랑고개를 찾아가는 답사에도 함께 할 계획이다. 전국의 아리랑고개의 유래를 살피면 천주교와 관련된 곳은 아직까지는 이곳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 역사와 아리랑은 어떻게 만났을까? 현재 밝혀진 아리랑 자료로는 1823년(道光3년) 청석거사(靑石居士) 필사본 ‘佛說明堂아리랑’이란 기록물에서 1839년 천주교 기해박해 전후에 불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문헌자료는 민간신앙에서 수용한 일종의 무경(巫經)으로 "제석천황 관제멸 대범천황 오액명/아라리 사라리 아리사리 아리랑” 같은 사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명과 복록을 기원하며 아리랑 후렴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아리랑의 보편성을 이용하여 무경의 보급을 용이하게 할 방편으로 수용한 것이다. 천주교 교인들도 우리의 전통 시가인 가사체(歌辭體)를 수용하여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교리를 전파했듯 민요 아리랑의 형식도 수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천주교인들이 불교 사찰인 천진암을 거점으로 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통문화를 수용하여 교리전파에 활용하는 것은 포교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초기 교회사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천주교 초기 인물 이승훈이 아리랑을 수용한 사실에서, 이는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에서도 아리랑이 포교를 위해 향유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200년 기념으로 새로운 아리랑이 창작되어 비로 세워지게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조년간에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은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드디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게 하였다. 이 때 민중의 노래 아리랑도 향유되었다. 어떤 공동체에게도 아리랑은 결속력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획득하게 하는 노래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만날 수밖에 없는 노래인 것이다. Tag ##아리랑고개 #아리랑비 #아리랑부르기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
[국악신문] 어버이날, 사할린 동포들과 훈훈한 동포애를 나누다http://www.kukak21.com/bbs/board.php?bo_table=news&wr_id=15020 기미양 객원기자 등록 2021.05.08 17:48 조회수 108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오늘 오후 2시 어버이날, 의정부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지윤주 이사는 양주 옥정동 7단지 아파트에 정주하고 있는 사할린동포협회(회장:강상용)를 찾아가서 감사의 선물을 전달했다. 지난 해 3월부터 세계 여성의 날, 추석, 성탄절, 설날 등 절기마다 찾아가서 사할린 동포들에게 자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다양한 베이커리를 전 직원들과 함께 나눔하고 있다. 지윤주 이사는 "코로나로 인하여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과 오랫동안 해후하지 못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잠시마나 위로가 되셨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방문하고 있다. 그런데 올때마다 무언가 더 해드리고 싶다. 예전에는 동포애라는 것이 막연하게 느꼈지만 이제는 눈으로 바라만봐도 충분히 느낀다. 강상용 회장님이 언제든지 여름에 우리가 3개월 동안 가족을 만나러 사할린에 가있는 동안 언제든지 오라는 말을 들으니 가족이 된 것 같다."라고 미소를 환하게 머금었다. 강상용 회장은 "우리 사할린 동포를 잊지않고 기념일마다 찾아와 주시는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사장님과 전 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셔서 잘 먹겠습니다."라고 치하했다. 최미분 부회장은 " 매 절기마다 찾아와 주는 것도 고마운데,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빵까지 우리들 100명 전원에게 골고루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천 검단 나눔성형외과의원 노승만 원장님 보내주신 선물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서 "어버이날이라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길이 막혀서 못 나오다가 1990년 하늘길이 열려서 조국과 조금씩 왕래가 시작되었지만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는 부모님 대신 조국으로 귀환한 사할린 2세입니다. 그러나 조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하고는 교류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 찾아와 주기만해도 반갑고 그래요. 그런데 올때마다 차도 한잔 못 나누고 바삐 헤어져야 하는 코로나가 갑갑합니다."라고 하며 아쉬워하며, 어제 모두 들에 나가서 쑥을 캐가지고 와서 만들어서 나누었다는 쑥떡 한접시를 지윤주 이사의 손에 안겨주었다. 사할린에서는 봄이 되면 쑥을 캐서 쑥떡을 해서 나누어 먹고, 여름이 되면 산에 올라가 버섯과 고사리, 머위. 블루베리도 채취하여 먹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강제이주 시켜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광산이나 산판에 집을 짓고 모여서 카레이스키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래서 여느 국외 동포들보다 공동체 생활이 자연스럽다. 특히 양주 율정마을은 가장 늦게 한국에 정주한 세대이니만큼 가장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화기애애하고 늘 활기차다. 특히 사할린 동포 2세 중 러시아 음악을 전공한 세르게이김 작곡가와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최미분)이 살고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강상용 회장은 사할린 씨름협회 가족이다. 한편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는 매달 고려인 사할린 청소년에게 정기적으로 베이커리를 보내고 있다. 지난 5일 어린이날에도 인천에 거주하는 러시아 청소년들에게 베이커리를 선물했다. 나블리 베이커리 카페 측은 코로나 확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선물만 전달하고 바로 나왔다. Tag ##국악신문 #나블리베이커리카페 #나눔성형외과 #사할린 #사할린아리랑 #지윤주 #최미분 #강상용 #아리랑학회 기미양 객원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라인 네이버블로그 밴드
-
반론제기1 -진도아리랑은 “문전~세재로 불러야 한다” -(기미양)반론제기1 -기미양(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사무국장) 김상유의 논의는 진도아리랑의 형성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씌여진 것으로 논의의 여지가 많다. 진도아리랑비에도 기록되어진 문경아리랑 첫수인 "문경새재 고개는 웬고개인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에서 문경새재를 문전세재로 바꿔서 불러야 한다.라는 것은 이미 1930년에 지역 공동체에서 공인한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진도 지역 사회에서는 일부에서 '문전세재'로도 불려지기도 하지만, 고쳐 부른다는 것은 민속학적으로 볼때, 자연스럽지 않은 전승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문경새재와 문전새재 모두 같이 부르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다. 하나의 사설에 또 하나의 사설을 더하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진도아리랑은 1930년대 전후에 진도출신 음악인들에 의해 남도의 산아지타령과 1910년대에 유행했던 구조아리랑의 첫절을 재구성하여 형성된 아리랑이다. 그러므로 '문경새재'라는 시어를 문전세재로 바꾸어 부르자는 것은 1930년대 진도출신 음악들의 생각을 왜곡시키는 것이므로 재고하여야 한다. 한 세기동안 전국적으로는 문경새재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지역 사람들도 공유하오고 향유해 온 민속문화라는 차원에서 이러한 제의는 다시 한번 깊게 되짚어 보아야 한다. -------------------------------------------------------------------------------------------------------------------------- 진도아리랑 '문경새재'는 크나큰 잘못! 글쓴이 : 섬동백번호 : 542조회수 : 502005.06.18 00:35 "문전~세재로 불러야 한다”진도아리랑 가사 왜곡 지적광주 정강중학교 김상유교사 논문에서 주장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첫 소리로 알려진 ‘문경세재는 왠 고갠고~’가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제기되고 있어 진도군 및 문화예술단체, 국립국악원, 군민등이 사실조사에 착수해 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첫소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일고 있다. 광주정강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김상유교사는 ‘민요의 생성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중학교 교과서와 인터넷등 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노랫말로 알려진 ‘문경 세재는 왠 고갠고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는 소리는 왜곡됐다고 자신의 논문을 인용해 지적했다. 김교사는 진도아리랑은 순수한 서민들의 삶으로 희노애락의 노래인데 하필이면 수백여수의 가사중 특정지역의 이름이 게재된 ‘문경새재(경상북도 문경새재)는~’라는 가사를 진도아리랑을 대표하는 첫마디로 교과서에 게재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한 것은 특정목적에 의한 것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또 각종 인터넷 자료검색에서도 진도아리랑의 대표적인 가사로 ‘문경새재~’가 입력되어 있다는 것.김교사는 현행 중학교 음악교과서에서 30년이상 지도되어 오고 있는 이 진도아리랑의 "문경 새재(경상북도 문경새재)는 왠 고갠고" 의 가사는 "문전 세재(인생살이 세 고개)는 왠 고갠고" 라는 본래의 가사에서 왜곡된채 지도되었다고 지적했다. 김교사는 ‘문경’이 아닌 ‘문전’이 본래 가사였다는 내용을 뒷받침할수 있는 몇가지 근거를 제시했다.동부지방 사람들은 동부지역에 위치한 지역이름을 넣은 가사를 언어의 특성상 남도민요 가락에 얹어 부를 수가 없고, 남도사람들은 남도민요 가락에 남도에서 500백리, 진도에서는 1,000리나 멀리 위치한 동부지역 고개이름의 가사를 붙여 노래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500여수가 되는 진도아리랑의 가사 중에서 "문경" 이라는 지역이름을 빼고는 어느 가사에도 지명 이름이 없으며 모두가 인생의 희노애락에 대한 내용 뿐이라고 ‘문경’이 왜곡된 가사임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직도 진도지역60세에서 90세가량의 진도 아리랑 보존회원들은 "문경"이 아닌 "문전세재(태어나는 첫번째 고개, 인생살이 두번째 고개, 북망산으로 가는 세번째 고개)는 왠 고갠고" 라고 노래하고 있다는 것.민요란 오랜세월을 거쳐 내려오는 노래임에도 군사정권이 시작되기 이전(1961년) 어느곳에서도 "문경 새재는 왠고갠고" 라는 문헌의 자료가 없다. 특히 진도아리랑은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가사를 붙여 부를수 있는 민요이기때문에 특정지명을 붙여 1회성 여흥으로 끝났다면 문제가 없으나 수백 수가 넘는 가사중 그것도 1절에 나타내어 교과서까지 게재하여 지도하게 하는 것은 민요가 발생한 지역의 고유한 음악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김교사는"누군가에 의하여 고유하게 전래되는 민요가 왜곡되었다면 순수하게 발전해야 하는 예술을 훼손하는 것이며 이를 지역문화의 침탈행위로도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인이나 이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김교사는 17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진도아리랑은 서민들에 의해 불려져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민요라는 점을 이용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문경이라는 지명을 넣은 것으로 판단이 된다”며"이제는 잘못된 가사를 즉각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진도고향인 김교사는 대학에서 서양음악을 전공한후 현재 광주 정강중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석사과정으로는 국악작곡을 마쳤다. 한편 최근 진도군이 군과 기관단체장간에 협의회자리에서 제작중인 관광홍보영상물을 시연, 참석자들중 일부는 첫배경과 함께 진도아리랑 첫 가사가 왜 하필 ‘문경새재’가 나왔느냐며 개선을 요구하기도해 진도지역에서는 이미 '문경새재'가사에 대한 거부반응이 널리 퍼져 있다.
-
남도정서의 정수박이, 그 보배로운 3대의 소리 <진도아리랑>1. 진도아리랑(3:49) 창:이근녀(무반주 진도아리랑)2. 진도아리랑(1)(3:56)창:이근녀. 후렴:강송대 강은주. 장고:김오현. 대금:정회완. 아쟁:서영호3. 진도아리랑(2)(25:45)창/후렴:강송대 강은주. 장고:김오현. 대금:정회완. 아쟁:서영호4. 진도아리랑(3)(25:56)창/후렴:강송대 강은주. 장고:김오현. 대금:정회완. 아쟁:서영호 총 59:26소리이근녀(90세,진도아리랑 명창)강송대(63세,무형문화재34호 <남도잡가> 예능보유자·진도아리랑보존회 회장)강은주(19세,남도잡가 전수자·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입학)반주장고-김오현(진도군립민속예술단 수석 단원)대금·징-정회완(전 광주시립국극단 악장)아쟁-서영호(전주 대사습 기악부 장원-문광부장관상 수상)찬조사설정리-기미양(사단법인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사무국장)정보제공-강은영(씻김굿 이수자·진도군립민속예술단 단원) <가족 3代가 부른 '진도아리랑' 60수>(서울=연합뉴스) 이윤영 기자 =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맛깔스런 후렴으로 유명한 '진도아리랑'을 이 지방 출신의 가족 3대(代)가 함께부른 음반「진도 아리랑」이 신나라뮤직에서 출시됐다.진도아리랑 명창인 이근녀(89) 할머니, 그의 장녀인 강송대(62. 남도잡가 무형문화재 제34호 예능보유자, 진도아리랑보존회 회장), 증손녀인 강은주(18. 남도잡가전수자)로 이어지는 '3대'가 바로 이들이다.이번 음반은 진도 토박이 명창으로 이제 아흔의 나이인 이 할머니의 육성을 '더늦기 전에' 녹음, 남도 정서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진도아리랑의 토속적 전통을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특히 음반에는 그동안 전승돼 온 진도아리랑 사설 56수가 담겨 있는데, 집안의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는 60수에 가까운 사설이 한 음반에 수록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녹음은 지난달 경기도 파주에 있는 스튜디오와 전남 진도군 의신면 돈지마을에있는 이 할머니의 자택을 오가며 이뤄졌다.녹음 작업을 하는 도중 이 할머니로부터 진도아리랑의 근원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 나왔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 하다.할머니가 15세쯤 됐을 무렵 진도 출신의 대금산조 명인인 박종기(1879-1939) 선생이 진도아리랑을 처음 만들어 지역 사람들에게 가르쳤으며, 이 아리랑을 배운 사람들이 당시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는 것.한민족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는 "이 할머니의 증언이 정확한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던 진도아리랑의 근원을 밝히는 중요한증언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고(故) 김소희 명창도 생전에 '박종기 선생과 함께 일본에 음반을취입하러 가던 도중 진도아리랑을 정리했다'는 증언을 한 바 있다"며 "이는 그동안막연히 진도아리랑을 '아주 오래된 것'으로 여겨 온 지역주민들과 향토사학자, 연구가들 사이에 또 하나의 논란거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이번 음반은 무형문화의 전승 과정에서 바람직한 형태로 여겨지는 가족간 전승체계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강송대 선생은 모친에게서 잡가를, 5촌 고모뻘인 명창 강숙자로부터 춘향가를배우고 김한수, 공대일 등을 사사했으며, 목포와 광주에서 20여년간 활동하다 최근에는 고향에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증손녀 강은주는 5살때부터 소리를 시작, 1995년 제2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학생부 최우수상 수상에 이어 2004년학도 중앙대 국악대학에 특례입학한 국악영재다.-------------------------------------------------------* 아리랑연합회로 부터 보도자료 :남도 정서의 정수박이 진도아리랑, 그 보배로운 3대의 소리이근녀,강송대,강은주1986년이었을 것이다. 종로 3가 <신나라레코드> 라이브 홀에서 일제시대 아리랑 복각 CD 발매를 기념하여 <팔도아리랑>공연을 벌렸을 때, 마침 지나가는 시위대를 향해 쏜 체류탄 연기가 공연장으로 들어와 눈물 콧물을 흘리는 상황에서도 진도아리랑의 감칠 맛으로 우리를 꼼작 못하게 붙들어 맨 이가 이근녀(李根女) 할머니셨다. 그 때 연세가 70을 넘기셨을 때인데도 밖의 함성과 싸이렌 소리를 제압하고도 남는 성음이셨다. 그후 세월이 흘러 할머니의 연세가 90이 되신 지금 우리는 뒤늦게나마 할머니의 진도아리랑을 담게 되었다. 이미 할머니는 아리랑 10수를 부르시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약해지셨지만 진도아리랑의 살아있는 깊은 속이 절절 묻어있었다. 할머니의 아리랑이 3대를 걸쳐 이어져가는 놀라운 현실이 개성을 강조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것이바로 아리랑의 생명력이요 천년을 이어온 민족의 노래임을 자부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신나라라이브홀에서의 첫 만남 후 18년만에 나타나신 할머니는 할머니의 분신의 소리꾼을 2명이나 대동하고 당당하게 스튜디오의 문을 들어선 것이다. 할머니가족의 녹음을 마치고 일주일이 지나서, 음악을 다듬던 우리는 이근녀할머니의 소리가 너무 아쉬워서 녹음기를 걸쳐메고 다시 땅끝 진도로 달려갔다. 진도군 의신면 돈지마을에 있는 할머니자택에 들어서자 백년이나 된 작은 고옥에서 하얀 웃음을 머금고 나오시는 이근녀할머니는 혼자서 집을 지키고 계셨다. 마루가 딸린 작은 토방에는 할머니의 손때묻은 소박한 장롱과 소품이 우리를 반겼다. 그날 저녁 우리는 진도아리랑에 얽힌 할머니의 증언과 고담스런 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특히 진도아리랑외에 할머니가 남기신 자장가와 육자배기는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을 것 같다. 특히 육자배기를 부르시면서 자신도 모르게 초연히 나를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그 깊고도 편안한 눈속에는 인생을 다 담고도 남을만한 넓은 세상이 펼쳐있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아련히 다가오는 이별의 아픔이 우리 둘 사이를 말없이 오갔다.할머니의 진도아리랑에 관한 증언중에는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때(15세경으로기억함), 진도 출신의 대금의 명인이었던 박종기씨가 진도아리랑을 처음 만들었으며 진도에서 그가 만든 아리랑을 가르쳤다는 사실과 이 진도아리랑을 배운 진도사람들이 경연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는 증언이 그것이다. 이근녀 할머니의 이 증언이 사실인지는 누구도 증명할 길이 없지만 진도아리랑에 대한 여러 학설을 일축하고 가장 신뢰할 만한 증언이라고 생각되었다. 특히 진도아리랑의 가장 특이한 후렴인< 아리랑 응-응-응-아라리가 났네>의 이 부분은 대금가락의 독특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목이기도 하다.본 음반이 진도아리랑의 진수를 담은 기록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진도아리랑 60여수가 담기기도 이번이 처음이다. 진도아리랑이 한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는 이 생생한 기록은 우리의 아리랑의 살아있는 역사성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 할머니의 뒤를 잇는 소리꾼들을 살펴보자.장녀 강송대(1941년생)선생은 어려서 모친으로부터 잡가를 배웠고, 5촌 고모 뻘인 명창 강숙자로부터 춘향가 등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소리 인생을 시작해서 김한수 공대일 등으로부터도 사사했다. 이후 목포와 광주에서 20여년 간 여러 무대에서 소리를 하며 진도를 오가다 아예 고향에 눌러 앉아 후진양성과 모든 공연의 어른역을 맡게 되었다. <진도아리랑보존회> 회장 등의 활동을 하며 각 지역의 아리랑축제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001년 9월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4호 <남도잡가> 부문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아 '상청이 좋고 한이 배어있는 성음의 소유자'로 인정을 받았다.증손녀 강은주는 5살 때부터 소리를 해서 주위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1995년 제2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학생부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여러 경연대회와 주요공연에 참가해 재능을 발휘했고 2004년도 대학 특례입학 한 국악영재이다. 역시 가계의 내력인 듯, '짠짠하게 걸어 넘기는 목 구성이 예뿐' 것이 특징이다. 이상의 가족사는 이미 진도 안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99년 제2회 남도민요경창대회에서 강송대선생이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선생의 여동생 딸 노부희양이 신인부 장려상을 수상했고, 큰오빠의 손녀인 강은주양이 학생부 최우수상을 받아 3대가 입상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런가하면 2003년 9월에는 강은주, 증조할머니(이근녀), 고모할머니(강송대), 아버지(강충원), 이렇게 4대가 합동공연을 하여 화제에 오른 적도 있다.반주에 동참 한 세 연주자도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 이들로 이 분들의 소리를 제대로 집어 '찔러' 준 명연주자들이다. 오랫동안 진도의 연행공간에서 함께 한 탓도 있겠지만 "잡가 반주는 또 잡가반주 대로 제(制)가 있다"고 말 할 만큼 잡가 반주에 자신을 갖고 있음은 물론 남도잡가의 특성을 잘 아는 이들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예컨대, 장고(김오현), 대금(정해완), 아쟁(서영호)만을 쓴 것은 진도아리랑에는 이들 세 악기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경험에서 그렇게 택했다는 것인데, 이는 음악성을 강조한 측면이고, 장고와 '어정 징', 여기에 아쟁을 피치로 연주한 것은 창자의 성음과 목구성을 그대로 살려 주려는 배려에서 일 뿐만 아니라 사설을 명확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악기 소리를 앞세우려는 것이 연주자들의 성향이고 보면 이런 반주도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아무나 부를 수는 있지만 아무나 잘 부를 수는 없는 노래이고, "남도 황토 밭이랑에 너풀거리는 여인의 머리수건 마냥 살랑이는 맛도 있어야 하지만, 추사체(秋史體)의 그 힘차고 굳건한 맛도 있어야 제 소리"라는 진도아리랑은 참으로 맛깔스런 노래다. 그래서 진도아리랑에 대해서는 그 연원이 어떻고, 그 어원이 어떻고를 따져 묻는 것은 가당치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비록 진도아리랑의 역사가 허풍떨어 말 할 만큼 옛적이 아닐지라도 자신들의 토속적 정서를 응축시킨 소리요 삶의 소리로 부르고 있고, 혹여 '소리 길'을 알아 추임새 붙여 청하는 외지 손이 있으면 신명을 얹어 들려줄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문의:사무국장 기미양(725-1945/016-261-5014)
-
[새고려신문] 위기 맞은 '사할린 한글학교' 회생 운동 전개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주축 후원회 결성27년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글교육협회(한국)가 매년 2차례 시행하던 사할린 한글학교 한국 문화체험 연수가 코로나로 중단되어 있다. 주 원인은 경제적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사할린 한글학교 한국 문화체험 연수는 1990년대 중반부터 27년 동안 사할린에 한국어 교육과 차세대들의 모국 방문을 후원해왔다. 이는 임태식 사할린 한국어교육협회장의 헌신으로 이어져왔는데, 코로나로 운영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임 회장은 최근 아리랑학회 회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사명감을 갖고 사할린 한국어 교육을 도와줄 개인이나 단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라고 밝혔다. 서울 혜화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임 회장이 사할린의 한국어 교육 문제에 열정을 품게 된 것은 가족사와 연결된다. 바로 사할린에 거주하는 고종사촌을 만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을 때 사할린 공식 한글학교 제9동양어문학교를 방문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임 회장의 회고 속에는 앞으로의 운영에 대한 걱정이 절실하게 전해졌다. "한글 교육 수업 장면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어 교육이 재개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태도만큼은 정말 열성적이었어요. 그 흔한 스티커도 없어서 성적이 올라가는 아이들에게 색종이로 별을 오려서 노트에 부쳐주는 모습을 보고 돌아와서 스티커를 당장 한 보따리 보냈습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는 한국어 교사들의 열정에 감동을 받고 귀국 후 친분이 있는 각 학교의 교장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사할린 동포를 위한 한복 700여 벌을 모아 수선해서 보내기도 했다. 사할린 내 유치원 3곳에 한국어반을 설립해 운영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할린 현지에선 한국어를 가르치는 상급 학교가 많지 않아서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어 학교 설립이 시급하지만 당장은 여력이 없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맥을 이어가게 하고 싶습니다. 교사들에게도 아이들이 한국말을 잊지 않게만 도와달라고 하고 있죠." 임 회장은 비영리단체인 사할린 한국어교육협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아프리카 난민을 돕는 단체에는 후원이 많이 들어온다는 데 사할린 문제에는 관심있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불행한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할린 한인의 후손들이 우리 정체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설명을 했지만 협회를 함께 이끌어 나갈 사람(동지)을 찾는 일도, 후원자를 모으는 일도 쉽지는 않다고 했다. 26년 동안 이어져온 후원사업은 갈수록 힘들어졌다. 후원자들이 노년을 맞이하여 양로원이나 병원생활을 하게 된 탓이다. 그 결과 후원자는 3분지 1로 줄어들었고, 여기에 코로나로 해서 더욱 힘들어졌다. 차기 한국어 교사를 구할 수 없는 현실에서 현지 한글 교육을 맡은 교사들의 부족 현상이 있게 되었다, 26년 전에 책정한 차비 정도의 월급과 지원은 경제적으로 너무나 협소해서 계속되는 코로나로 이 교육사업이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런데 2016년부터 매년 '사할린 아리랑제'를 주관하는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논의를 하게 되었다. 최근 이에 동조하는 아리랑학회, 국악신문 등이 동조하고 나섰다. 지난 3월 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최근 모임에서 "일제강정기 강제동원으로 사할린에 끌려간 조선인 중 경상도 출신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을 잊지 않고 아리랑까지 부르는 동포들은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우리말을 잊어버리면 아리랑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1차 후원회 결성에 이어 제2차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문제를 측면 지원해 온 공노원 부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류바람을 타고 불어온 한국의 인기는 사할린에도 주기적으로 한국 문화가 움트고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사할린에는 남북한 문화가 각각 공존해 있었지만 냉전 이념 속에서도 한국 풍습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어서 '사할민국'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한글 교육이 사라지면 다음 세대는 러시아 문화에 동화되어 정체성 문제에 혼란이 올 것이다" 라고 한글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였다. 임 회장은 이 같은 논의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본회의 설립 취지를 이해해 주시고 후원회원으로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총장님께서 많은 지원을 해 주셔서 큰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보존과 발전을 위해 수고하시는 전국 아리랑전승단체 회장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국악신문 전직원의 관심 표명에 대해 감사합니다. 특히 이번 공노원 부회장의 사할린 현지 공개수업 참관과 지도하는 기간에 후원을 해 준 나눔성형외과 (원장 노승만)에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임태식 회장 메세지 러시아 사할린! 일제강점기 통한의 상흔이 1,2세대에 머물지 않고 3,4세대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침식되어가는 아픔이 있습니다. 나라 잃어 천대받던 4만 3천여 우리 동포들은 광복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반세기를 부당한 영어의 몸으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핍박과 허기로 고향을 그리다가 세상을 떠난 수많은 우리 동포들도 있습니다. 1990년 한ㆍ러 수교로 꿈에 그리던 모국을 왕래하게 되었지만 우리말과 글을 쓰던 1세대들의 영주귀국과 타계는 2세대들의 모국어 사용을 중단하게 했고 3,4세대들의 한국어 교육 부재는 이제 문맹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63년 한국어 교육 폐지 이후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러시아어로 교육을 받아야만 해서, 3세대가 모이면 중간에 있는 2세가 1세와 3세의 소통을 위해 통역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현실입니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어 교육이 재개되었지만 1963년 이전 양성한 한국어 교사는 영주귀국을 하였거나 고령으로 타계하였습니다. 1996년부터 현재까지 사할린 국립대학에서 양성한 300여 명의 한국어 교사는 열악한 보수체계로 거의 전원이 한국어 교사임용을 기피한 실정입니다. 현재 사할린에는 정규교육을 이수한 한국어 교사는 전무한 편입니다. 질 높은 교육을 위해 교사 양성과 연수, 교재ㆍ교구확충 등에 많은 관심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협회는 아직은 어렵지만 사할린에 한글학교가 설립되고 우리 동포가 우리말과 한글을 잊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3월 1일.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임태식 올림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사무총장은 "매년 2차례 모국방문을 하는 학생들의 답사일정을 각 지역 지자체가 주최하는 아리랑축제와 연계시켜 모국의 정서와 문화를 함께 공유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후원단체는 다음과 같다. 후원단체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영남아리랑보존회(정은하). 아리앤랑무용단(김채원), 서울아리랑보존회(유명옥). 영남민요연구회(배경숙), 구미아리랑보존회(임규익), 제주도아리랑보존회(강소빈), 울릉도아리랑보존회(황효숙), 제주아리랑연구회(장경숙), 연변아리랑보존회(김은희). 가평아리랑보존회(최승녀), 군포아리랑보존회(한영숙), 진도아리랑보존회(박숙영), 예천토속아리랑보존회(최수인),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기연옥), 부산동래아리랑보존회(김희은),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 서귀포아리랑보존회(유재희), 연변아리랑보존회(김은희), 문경민요연구원(진미애) 러시아아리랑 본부 본부장(공노원), 하바롭스크아리랑 지부(김석복)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 홍보대사(스텝핀 블라디미르) 아리랑학회 (김연갑, 기미양, 이정하, 이강연, 이정홍, 김니은, 지철호, 정정숙, 김미숙) 국악신문 (김지연.김한나.김하늘) 나눔성형외과의원(노승만), 나블리베이커리 카페(지윤주) (본 기사 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사무총장 제공) [출처] 2021년 4월16일(음력 3월5일) 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 작성자 bplus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