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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대신 우리음악에 걸맞은 이름을 찾자‘국악’ 대신 우리음악에 걸맞은 이름을 찾자 우리음악 정명(正名)찾기 추진위원회, 창립기념 토론회 열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등록 2019.06.05 11:10:15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세상에 이름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우리 천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몸에 맞는 음악을 우리의 옷처럼 입고 키워왔으나 어느 날 갑자기 밖에서 들어온 옷이 우리 옷이 되어 원래 부르던 이름이 바뀌었다. 어느새 우리 음악은 국악이니 전통음악이니 하는 특수 분야로 불리면서 제대로 된 자식이 아닌 의붓자식 취급을 받는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 이는 <우리음악 정명(正名)찾기> 모임 발기 취지문에 있는 말이다. 어제 저녁 4시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빌딩 20층에서는 국악계를 중심으로 전통문화예술 전문가와 학자, 언론인들이 모인 가운데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의 사회로 "우리음악 정명(正名)찾기 추진위원회> 창립기념 토론회가 열렸다. ▲ "우리음악 정명(正名)찾기 추진위원회> 창립기념 토론회 모습 이날 토론회 시작에서 <우리음악 정명찾기> 모임 추진위원장을 맡은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평소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모임을 통해 우리 전통음악에 붙여진 ‘국악’이라는 이름이 어쩌면 시대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고, 그 점을 다시 점검한다는 모임이 결성된다고 해서 우리 음악도 소중한 문화유산이기에 이 유산이 잘 되기를 마음으로 어려운 직책을 맡았다. 어떤 이름이 되건 바른 이름을 찾아서 우리음악과 문화예술이 이를 통해 크게 일어나기를 고대한다.”며 환영사를 했다. 이어서 예술원 회원 한명희 선생은 "우리음악을 ‘국악’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한 그릇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음악에 대한 새로운 이름을 찾는 것은 당위성이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새로 찾은 이름 쓰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만일 ‘한악’이란 말이 좋다고 결정되었으면 그걸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대중을 향해 실천적으로 써야만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 인사말을 하는 <우리음악 정명찾기> 모임 추진위원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예술원 회원 한명희 선생, 크라운해태제과 윤영달 회장(왼쪽부터) 또 고문을 맡은 크라운해태제과 윤영달 회장은 "전통음악의 위상에 걸맞은 바른 이름을 찾기 위한 오늘 자리가 반가운 것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시작된 활발한 논의는 전통문화예술이 더 큰 세계무대를 향해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모두가 한 방향으로 큰 물결이 되어 나아간다면 전통음악이 머지않아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거대한 문화 패러다임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고 인사했다. 인사말이 있은 뒤 추진간사를 맡은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이 간단한 경과보고를 하고 이후 본격적으로 발제강연이 시작됐다. 먼저 이동식 전 KBS 정책기획본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국악은 바른 이름인가?”라는 제목의 발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국악’이란 말이 한ㆍ중ㆍ일역사 속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확인했으며, "양악ㆍ국악이란 이분법, 음악과 그 하위 개념인 국악이란 이상한 이분법을 벗어나서 음악이란 큰 개념, 국악이니 양악이니 하는 구분이 없는, 음악이란 평등한 개념 안에서 우리 음악이 거듭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면 그 출발점은 우리음악 또는 우리의 음악, 한국음악, Korean Music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 토론회 사회를 맡은 아리랑학교 김연갑 교장, 발제를 하는 이동식 전 KBS 정책기획본부장,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수(왼쪽부터) 이어서 "국악 더 나은 명명(命名)을 위하여”의 제목으로 발제를 한 이광표 서원대학교 교수는 ‘민화(民畵)’와 ‘한민화(韓民畵)’라는 개념 풀이로 논의를 시작했다. 그는 "우리 상황에서 국악 명칭 논의를 바라보는 주요 관점은 식민지 극복 차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에 객관화라는 관점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을 진지하게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를 타자화하고 객관화하는 것이 훨씬 더 민족적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악이라는 명칭의 극복에는 글로벌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발제가 끝난 뒤 참석한 사람들의 토론이 시작됐다. 특히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이사는 "‘국악’이라는 이름은 ‘국민음악’의 약자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과 조선을 통합시키려는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작동된 것이다. 따라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것처럼 국악도 일제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이름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러나 이제 이름을 바꾼다면 통일 뒤 북한 쪽도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내놓아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 "우리음악 정명(正名)찾기 추진위원회> 창립기념 토론회 모습 또 ‘국악’이란 말이 바뀐다면 국립국악원, 국립국악예술고등학교, 국악박물관 등의 반발이 있지 않겠느냐는 한 참석자의 조심스러운 의견이 제시됐지만, 이에 대해 한명희 선생은 "좋은 이름을 찾는데 대해 그런 반발이라 잡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당위성이 담보되고 좋은 이름이 결정되었을 때 대중을 향해 써나간다면 그리고 대중의 호응을 받는다면 그런 반발은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토론은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대표, 최영식 한국가곡연구소 소장, 아리랑유랑단 문현우 단장, 전통예술진흥재단 김대진 기획팀장 등이 함께 했다. 참석자들은 "때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 음악에 대한 올바른 이름 찾는 노력이야말로 민족정체성 차원에서라도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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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도쿄올림픽, 남북일 ’아리랑큰잔치‘ 함께 하자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등록 2019.05.12 12:13:23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우리에게 ‘아리랑’이란 무엇인가? 스포츠경기에서도 남북한이 단일팀을 꾸리면 단가로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현상은 무엇일까? 민족 수난기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국을 떠나 주변국가인 중국, 일본,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에 흩어져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아리랑’은 분명한 변별력이었다. 그와 함께 ‘아리랑’은 배달겨레를 하나로 묶어주는 거대한 ‘끈’이 되고 있음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제(5월 11일) 낮 2시 서울 광화문 센터포인트빌딩 회의실에서는 아리랑다리회(회장 전월선)가 주최하고, 아리랑스프링(대표 김명기)이 주관하는 "2020년 도쿄올림픽, 남북일아리랑축제 함께하자”는 제목의 제1차 아리랑다리회 한일문화교류 간담회가 열렸다. 먼저 사회를 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기미양 이사는 "일본에서 ‘아리랑다리회’를 결성했고, 2020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민간문화교류차원에서 아리랑 행사를 준비하자는 기획사 ‘아리랑스프링’의 제안에, 그 타당성을 검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행사 경과를 설명했고 주관사 ‘아리랑스프링’ 김명기 대표는 개회사에서 "타당성 검토를 통해 추동력을 얻고자 조촐한 모임을 마련했다. 우선 일본의 반응을 파악하기 위해 아리랑다리회 전월선 회장, 한국학자 미야즈카도시오 교수를 초청했다. 경청하겠다.”라고 인사했다. ▲ "2020년 도쿄올림픽, 남북일아리랑축제 함께하자”는 제목의 제1차 아리랑다리회 한일문화교류 간담회 모습 ▲ 발제를 하는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제1발표자 아리랑다리회 전월선 회장, ‘미야쯔까 토시오 코리아연구소’ 미야쯔까 토시오 대표, 국악애호가 정창관 선생(왼쪽부터) 이어서 발제를 한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은 "'디아스포라 아리랑'은 '아리랑고개'와 상통하는 말로 수난을 상징하는 아픈 기억이다. 이를 끌어안고만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 말 속에 숨겨진 '일제' 또는' 일본'을 사이 나쁜 나라가 아닌 문화교류의 대상인 이웃 나라로 적극 수용하여 그 심장부에 가서 판굿을 벌이는 것이 창발적이지 않느냐는 생각을 한다. 이를 실천할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첫 발표는 "나의 체험적 ‘아리랑 다리론’이란 제목으로 아리랑다리회 전월선 회장이 맡았다. 전월선 회장은 "가면 넘어 오지 못한다는 과거의 아리랑고개의 인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쌍방향 소통을 해야 하는 시대, 오늘의 한일 경색관계에서 절실한 요청이다. 바로 아리랑의 다리를 놓아 소통하자. 우선 일본 속에서 이뤄진 아리랑 상황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유명한 성악가 김영철(나가다 겐지로)의 1961년 북송 직전 니이가타항에서 아리랑을 불러 일본을 떠나 조국(북한)으로 간다는 회한을 아리랑으로 표현했듯이, 현 상황에서 남북이 일본에 와 아리랑 축제를 하는 것도 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또 미야쯔까 토시오 ‘미야쯔까 토시오 코리아연구소’ 대표는 "40년 전 한국어를 한마디로 못하는 상태로 한국에 왔을 때 아리랑을 불러 친화력을 얻은 경험은 오늘날 ‘아리랑의 탄생’이라는 연구서를 낼 만큼 아리랑 연구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리랑은 일본 속에서도 관심의 대상임을 알게 하는데 일본 속에는 아리랑 사연이 많다. 가미가재 특공대 탁경현이 마지막 날 아리랑을 불러 조선인임을 밝힌 예는 ‘호타루’라는 영화를 통해 일반화 되었다. 아픈 역사지만, 그만큼 새로운 아리랑 역사를 일본과 함께 써야한다는 당위가 있다.”고 발표했다. 또 마지막 발제는 "유투브(정창관의 아리랑 채널)로 듣는 1945년 이전 일본의 아리랑”이란 제목으로 국악애호가 정창관 선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정창관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불렀다는 ‘이츠키자장가(이츠키아리랑)’, 1929년 콜럼비아레코드가 녹음한 유경이 노래, 성동호 해설의 ‘영화설명 아리랑’, 1930년 1월 역시 콜럼비아레코드가 녹음한 채동원 노래의 ‘유행가 아리랑’, 1930년 3월 빅터레코드가 녹음한 김연실 노래의 ‘영화주제가 아리랑’을 견주어 들려주면서 이 노래들이 지금 우리가 듣는 본조아리랑과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 정창관 선생은 유투브에 올린 1945년 이전 일본의 아리랑을 들려주었다. 정창관 선생은 유투브 ‘정창관의 아리랑‘에는 현재 1,100여개의 아리랑 음원을 올려놨다면서 2022년 8월까지 3,000개를 올릴 목표로 작업하고 있다고 해 참석자들이 탄성을 자아냈다. 정부도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은 선생은 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참석자들이 함께 하는 토론회도 가졌다. 먼저 마이크를 잡은 이창근 에술경영학 박사는 "문화관광부로서도 올림픽 관련 문화예술 행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리랑은 좋은 소재라고 본다. 문제는 언제, 어떤 규모, 어디에선가 빨리 정해져야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김연철 전 판문점 소장(현 평화통일단체총연합 사무총장)은 "세기적인 휴전회담장인 판문점에서 중국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 휴전 조약에 서명을 하고 악수도, 박수도, 웃음도 없이 양측이 각각 동서 문으로 회담장을 나서자 양측 의장대가 동시에 아리랑을 연주한 사실은 아리랑을 각별하게 생각게 한다.”며 판문점과 아리랑을 통한 남북관계를 알려주었다. ▲ 행사 중간에 '왕십리아리랑'을 불러 분위기를 높여준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이혜솔 명창(가운데)과 제자들 ▲ 모임 전체 참석자들 고 윤이상 선생과 함께 평양에서 가서 공연을 했던 민족성악학회 윤인숙 회장은 "북한은 민족을 강조하는 만큼 아리랑을 마다하지 않는다. 북한이 단일팀이든 단독으로든 올림픽에 참가한다면 공동으로 아리랑을 주제로 하는 공연은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게 이루어진다면 참으로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고 얘기했으며, 김도형 다큐멘터리 감독은 "일본에서 아리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이츠키자장가와 아리랑에 관한 관련성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임진왜란 때 끌려갔던 조선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노래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행사 중간에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이혜솔 명창과 제자들이 축가로 ‘왕십리아리랑’을 불러 분위기를 한층 높였다. 그리고 국악애호가면서 한글운동가인 김덕영 씨는 "아리랑축제”가 아니라 "아리랑큰잔치”라고 말해야 한다고 해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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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5] ‘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5]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0.25 11:34:2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후렴이 탄생 된지 120년이 되었다. 곧 오늘의 애국가 후렴이란 점에서 곧 애국가의 출현 120년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120년 전부터 현 애국가가 탄생하는 1907년까지는 ‘무궁화가’, ‘무궁화노래’, ‘애국가’로 그 이름을 달리하며 불렀다. 이 번 회에사는 이 ‘무궁화가의 미디어상의 전승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무궁화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계몽운동으로 국민들의 실력을 향상시켜 자주독립 국가로 가야함을 역설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언론도 이에 앞장섰다. 그래서 애국계몽 노래들을 발표하여 널리 보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가운데 1907년 10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 잡보에 ‘무궁화가’라는 곡명의 4절 노래가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이 역시 이 신문의 자주독립을 각성시키기 위해 ‘무궁화’를 수록했다. 一 셩ᄌᆞ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기리 보젼셰 二. 츙군 일편단심 북악치 놉고 국 열심의긔 동치 깁헤 三. 쳔만인 오ᄌᆞᆨ 나라랑여 농공샹귀쳔업시 직분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황실 황텬이 도으샤 국민동락 만만셰에 태평독립셰 (순한글판) 一 聖子神孫 五百年은 우리 皇室이요 山高水麗 東半島 우리 本國일세 (후렴)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 大韓으로 길이 保全셰 二. 忠君는 一片丹心 北岳치놉고 愛國는 熱心義氣 東海티 기페 三. 千萬人 오ᄌᆞᆨ 한마 나라랑여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皇室 皇天이 도으샤 國民同樂 萬萬歲에 泰平獨立셰 (국한문판)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게재된 전 4절 가사는 앞에서 살핀 1899년 6월 29일자 독립신문 잡보란 방학예식 기사에 수록된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가 한자형 ‘무궁화가’로 바뀐 것이다. 2. 도산본 애국창가집 ‘제14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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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4] 안응권, “새 애국가 필요하다”고 박정희에 건의안응권, “새 애국가 필요하다”고 박정희에 건의 작사자 모른다고 “국가와 새 애국가” 개작 청원[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4]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0.17 11:04:2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963년 안웅권(安雄權)은 “전세계적 강국이 시발되기를 위하여 모순된 애국가부터 개창(改唱)하려 국가(國歌) 제정과 애국가를 개작(改作)····”했다며 자신의 작사 국가와 애국가를 담은 청원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발송했다. 1963년 6월 1일자로 국가재건최고회의 대통령권한 대행 박정희 의장에게 「국가제정 및 애국가선개작공개건의서」를 보냈다. 이 건의서의 핵심은 1955~56년에 문교부가 애국가 작사자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했지만 “안모(安某)와 윤모(尹某) 씨가 유력하다고 했으나 유시무종(有始無終)이어````” 자신이 새롭게 작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경일 등에서 자신이 작사한 국가를 선창(先唱)하고 만세3창 직후 역시 자신이 작사한 애국가를 부르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웅권의 현 애국가에 대한 비판과 개작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애국가(愛國歌)가 아니라 슬픈 국가 애국가(哀國歌)이다. 둘째 누가 시문작사(詩文作詞)했는지 모르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셋째 가사가 비국적(悲國的)이다. 넷째 1961년 들어 여러 개작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다섯째 5.16군사혁명 과업 완성과 새 공화국의 번창을 위해 맞지 않다. ▲ 순흥안씨 안웅권이 1963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대통령권한 대행에게 보낸 「국가제정 및 애국가선개작공개건의서」 표지, 안응권이 제시한 동일 곡조 <愛國歌 選(改)作>. 후렴은 “無窮花 千萬里 다찾아 빛내세/倍達 全世大國 强國繁榮하세”이다.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비판과 이유를 들어 새 국가와 애국가를 지었다고 했다. 주관적인 비판으로 맞지 않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에서 작사자가 확정 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다고 했지만, 사실은 ‘안모와 윤모씨’를 거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윤치호 작사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결국 윤치호로의 확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매우 치밀한 구상 하에서 국가와 새 애국가를 지어 제시했다. 또한 국가와 애국가를 이원화하여 의식 첫 순서에서는 국가를 부르고, 애국가는 행사 끝에서 만세3창과 함께 부르자고 했다. 제시한 선작(選作) 대한민국 국가와 개작 애국가는 다음과 같다. 大韓民國 國歌 高明檀生 弘益祖國 天地間에 으뜸일세 東邦文化 자랑하며 倍達民族 全世太陽 煉燭盈成 寶王疆土 富國安民 永樂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사 天壤無窮 强榮되리 愛國歌 選(改)作 一 東西南三海 白頭山 天上에 닿도록 하나님이 같이하사 우리나라 永存 東山上에 저 美庵들 언제나 보아도 金剛같은 民族正氣 倍達尊嚴 일세 후렴 無窮花 千萬里 다찾아 빛내세 倍達 全世大國 强國繁榮하세 二 높은하날 淸明한데 高曠구름없이 맑은太陽 우리衷心 民族象徵일세 億兆萬代 昌盛토록 廣大자랑하며 樂苦우나 金剛精氣 不變奉國하세 상투적인 한문투가 오히려 비속하게 읽힌다. 당시 박정희 혁명정부가 채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원자 안웅권에 대해서는 다른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안익태, 안창호와 같은 순흥 안씨임과 1985년 2월 청원법 위반 사건에 연류 되어 지상에 이름을 올린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이때의 청원법 위반 사건은 당시 사회문제가 된 ‘상습적 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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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9.03 10:57:5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문화재청은 2011년 초 근대음악유물 등록문화재 3편을 공고했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50년 이상이 지난 것 중 역사, 문화, 예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급격한 멸실,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2001년도에는 건축물 및 시설물, 2005년도에는 동산문화재 분야에 도입한 제도이다. 이에 따라 근대기의 역사적ㆍ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해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보존ㆍ관리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광복군가집 제1집」(1943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 펴냄), 「애국창가 악보집」(1916년 하와이 편찬 등사본),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자필악보」(1949년 필사) 세 가지를 등록했다. ▲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 이상의 3가지 음악자료는 애국가의 수록을 주목한 자료이다. 처음으로 근대 음악인 애국가의 자료를 국가가 관리하게 된 것으로 바람직한 결과이다. 이 세 가지 자료에는 현 애국가의 해외동포사회 확산과 광복군 수용 사실, 그리고 안익태가 작곡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만으로는 현 애국가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부족하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사’으로 시작하는 후렴이 사용된 <무궁화가>가 작사된 것이 1897년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으로 시작하는 가사가 작사 된 것이 1907년이고, ‘애국가’로 민중의 공인을 받은 것이 3ㆍ1만세운동기를 통해서이고, 임시정부 광복군들에 의해 불려 국가적 위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가사 변화와 보급 상황, 특히 3ㆍ1만세운동 기간에 불린 애국가들의 상황, 많은 ‘애국가’들의 정체성도 함께 밝혀져야 함은 당연하다. 앞으로 더 많은 애국가 자료가 발굴, 정리되어 이 맥락적 간극을 메꿔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발굴된 필사자료들을 주목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이중에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을 실례로 삼을 수 있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 발굴된 애국창가집 중 애국가류를 인식하고 정리한 자료인데, 이는 1919년 3ㆍ1만세운동 기간 전국에서 불린 다양한 애국가의 존재를 추정 할 수 있게 해 준다. ▲ 「애국창가집」의 안창호 작사 ‘애국가’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애국가류의 작사자나 수집 정리자를 밝힐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1910년대 이후 필사된 자료에 작사자가 밝혀진 것이 없다. 이 자료집에도 각각의 작품 정보가 없음은 물론, 수집ㆍ정리자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자료의 핵심 가치는 ‘애국가’ 명칭 자료와 일반 애국창가를 구분하여 정리ㆍ수록했다는 점이고, 이는 곧 1917년 전후의 ‘애국가’ 명칭 자료의 실상을 알게 한다는 점이다. 전체 29종을 밝힌 목차는 다음과 같다. 애국가 1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 2 애국가-산고수려 동반도는 3 애국가-긴날이 맛도록 4 애국가-동해의 돌출한 5 애국가-만왕 우리하나님계서는 6 애국가-우리나라 동반도난 7 애국가-화려한 강산 우리대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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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18 11:34:5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우리들의 8월은 ‘애국가의 달’이다. 해방과 광복과 정부수립이란 역사적인 기념의 달이기에 가장 의미있게 애국가가 불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월에는 애국가의 역사를 한 번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현<애국가>를 수록한 첫 문헌은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초판은 1907년으로 추정되나 미확인)이다. 비록 현<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류와 영미(英美) 찬송가 12편을 수록한 18쪽의 소책자지만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 애국가를 수록했고, 개화기 출판물이고, 발행사가 광학서포이고, ‘역술(譯述)’ 같은 출판 용어를 사용한 점 등으로 그렇다. 음악인이 아니면서 학생들을 위해 제한적인 목적으로 발행 된 무곡보(無曲譜) 애국창가집이다. 지금까지 이 자료는 공식적인 영인 출판이 되지 않은 탓인지 창송가사(讚頌歌史)에 한정된 석사 논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찬미가》의 개론적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최초의 서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司書) 윤학구의 <해제 찬미가(解題 讚美歌)>의 일부다. “윤치호(尹致昊) 저(譯述), 융희(隆熙) 2년(1908), 활자본(金屬活字) 1책, 17.5cm x 12.5cm 18p, 장정(裝幀) 적황색(赤黃色) 표지 湖附裝. 이 자료는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의 인쇄도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월간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1970, 7호, 52쪽) 이상의 내용은 《찬미가》에 대한 최초의 해제(解題)로 네 가지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이 책이 1912년 총독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준다는 것이다. 둘은 이 시점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소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원본이 확인되지 않고 사본(寫本)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셋은 초판 발행 시기를 재판 발행 1년 전인 1907년으로 추정한 사실이다. 현재 초판이 발굴 되지 않아 1905년설, 1907년설이 대두 된 상태로 아직 단정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책을 통해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후의 다양한 윤치호 작사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로 애국가 가사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임중빈(任重彬/1939~2005)이 쓴 <새 자료로 보는 좌옹 윤치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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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18 11:34:5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우리들의 8월은 ‘애국가의 달’이다. 해방과 광복과 정부수립이란 역사적인 기념의 달이기에 가장 의미있게 애국가가 불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월에는 애국가의 역사를 한 번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현<애국가>를 수록한 첫 문헌은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초판은 1907년으로 추정되나 미확인)이다. 비록 현<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류와 영미(英美) 찬송가 12편을 수록한 18쪽의 소책자지만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 애국가를 수록했고, 개화기 출판물이고, 발행사가 광학서포이고, ‘역술(譯述)’ 같은 출판 용어를 사용한 점 등으로 그렇다. 음악인이 아니면서 학생들을 위해 제한적인 목적으로 발행 된 무곡보(無曲譜) 애국창가집이다. 지금까지 이 자료는 공식적인 영인 출판이 되지 않은 탓인지 창송가사(讚頌歌史)에 한정된 석사 논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찬미가》의 개론적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최초의 서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司書) 윤학구의 <해제 찬미가(解題 讚美歌)>의 일부다. “윤치호(尹致昊) 저(譯述), 융희(隆熙) 2년(1908), 활자본(金屬活字) 1책, 17.5cm x 12.5cm 18p, 장정(裝幀) 적황색(赤黃色) 표지 湖附裝. 이 자료는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의 인쇄도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월간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1970, 7호, 52쪽) 이상의 내용은 《찬미가》에 대한 최초의 해제(解題)로 네 가지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이 책이 1912년 총독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준다는 것이다. 둘은 이 시점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소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원본이 확인되지 않고 사본(寫本)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셋은 초판 발행 시기를 재판 발행 1년 전인 1907년으로 추정한 사실이다. 현재 초판이 발굴 되지 않아 1905년설, 1907년설이 대두 된 상태로 아직 단정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책을 통해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후의 다양한 윤치호 작사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로 애국가 가사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임중빈(任重彬/1939~2005)이 쓴 <새 자료로 보는 좌옹 윤치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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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1] 윤치호 생애와 애국가류 3가지윤치호 생애와 애국가류 3가지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1]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03 11:02:2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윤치호는 세 가지 애국가류를 작사했다. 1897년 이전에 <KOREA>를, 1897년 <무궁화노래>를,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작품을 애국찬미가 모음집인「찬미가」에 12편의 번역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여 발행한 것이 1908년(재판)이다. 이 때 창작 3편을 12편의 번역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게 됨으로서 「찬미가」 판권(板權)에 윤치호 ‘저(著)’나 ‘저술(著述)’ 또는 ‘역(譯)’이나 ‘번역(飜譯)’ 아닌, ‘역술’(譯述)이라고 밝혔다. 대부분 번역하고 나머지는 창작으로 이뤄졌다는 개화기적 출판 용어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작품은 일본, 중국, 미국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895년부터 1907년 사이에 각기 다른 시기와 목적과 상황에 의해 작사되어 유통ㆍ전승됨으로서 작사자 표기나 작사 당시의 기능이나 작품명도 고정되지 않은 채, 일정 기간 함께 또는 길항(拮抗, 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항함)하며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 전선에서 유통되었다. 특히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는 내놓고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 되어 의도적으로 또는 자연스럽게 작사자도, 작사 시기도, 작품명도 달리 구송(口誦)과 기록(記錄)이 되다 1945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1908년 재판으로 발행된 「찬미가」도 같은 운명이었다. 총독부의 금서 처분으로 유통이 금지되어 개인 소유도 불온자(不穩者)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폐기해 버렸다. 특히 1945년까지 ‘애국가’ 자체가 금지된 노래이었음으로 당연히 이 책의 유통은 폐쇄되어 세 작품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과 각각의 정체성은 발휘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일부에 ‘애국가’로 통칭되거나 윤치호 작이라는 정도만 전해졌고, 해외에서는 1914년 화와이 교민 발행의 《태평양잡지》에서 총독부가 판매금지 처분을 내려 금서가 되었다는 사실과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기록하는 정도였다. 또 한편 임시정부 같은 곳에서는 존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작사자를 ‘실명(失名)’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이 40여년의 세월은 이 세 작품에 대해 왜곡과 와전을 낳아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조차 ‘미상(未詳)’에 빠지게 하였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남기고 윤치호는 애국가를 남긴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김을한, <애국가만으로도 할 일을 하였다>, 연합신문, 1959년 11월 27일자) 그래서 언론인 김을한(金乙漢/1905~1992)이 이렇게 대놓고 선언하게 된 것이 1959년 이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윤치호 작사 3편의 애국가류 작품은 개화기 시가작품으로나 애국가 역사에서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필요성에서 우선 세 작품의 작사 배경으로서 윤치호의 생애를 정리하고자 한다. 작사 배경으로서의 생애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첫 관직생활을 하는 1895년 초부터 「찬미가」가 발행되는 1908년까지가 된다. 첫 작품 <KOREA>는 1897년 8월 13일 낮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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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0] ‘계관시인 윤치호’, 무궁화가 작사‘계관시인 윤치호’, 무궁화가 작사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0]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7.25 11:07:1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애국가>의 후렴은 1897년부터 불린 <무궁화가>에서 쓰인 것이다. 그래서 <무궁화가>를 작사한 이가 <애국가> 작사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논리에서 윤치호가 <무궁화가>를 작사했음이 확인 되어야 한다. 이는 최근 영문판<독립신문>의 발굴에서 확인 되었다. 1897년 8월 8일에는 독립협회 <통상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서재필과 윤치호는 회원들에게 독립협회 활성화를 위해 토론회의 조직체 결성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규칙을 제정하기 위해 위원 3인을 선출했는데 윤치호 등이 선출되었고, 윤치호가 독립협회를 시민들의 참여를 확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는 각종 기념행사에서 강연과 통역은 물론, 기념가를 지어 사용하는 활동이 확인이 된다. 바로 1897년 8월 13일 오후 3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 참여다. <독립관>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 대해서 먼저 당시 독립신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행사 4일 후 17일자의 보도이다. ▲ 독립신문 ‘무궁화 노래’가 불렸다는 기사 1897년 8월 17일자 일젼에 독립관에셔 긔원졀 츅샤 일에 죠흔 연셜이 만히 잇시되 다 긔록 할 슈 업셔 대강 긔록하노라. 한셩 판윤 리채연씨가 연셜 하되 무론 엇던 나라던지 신민이 신민의 직무를 아니 하거드면 졍부에셔 졍부 직무 하기가 어려온지라 그런고로 의졍 대신 이하로 각기 직무를 거드면 그 나라 일이 져졀노 잘 되 법이라.(줄임) 아편셜라씨의 영어 연셜은 후일에 번역 하야 낼터이요. 윤치호씨의 연셜은 긔원졀을 죠션 인민이 경츅하는 일이라. 나라마다 경츅이 잇는 긔원졀이 조선이 경츅졀이라.(줄임) 젼국 인민이 당쵸에 긔원졀이 무엇인지 모르니 엇지 한심치 아니 리요. 죠션 인민이 이럿케 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른 나라 모양으로 자긔 나라 샤긔와 자긔 나라에 유명 인사들의 뎍들과 자긔 나라 디위를 공부 아니 하고 다 쳥국 것을 한즉, 자긔 나라 일은 도모지 모르고 죠션 인사들의 문벌이나 공부 하며 무단 협잡 하면 돈 벌 것이나 알고 자긔 나라에 영광 되고 쟈랑스런 것은 하나도 모로고 다 못된 학문들만 잇시니 국가에 셜령 아무 죠흔 일이 잇드라도 국민들이 그걸 엇지 경츅 하는 걸로 알 것이오. 윤씨의 말이 죠션 인민들이 죠션이 자긔의 나라인줄로 알게 하는 학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 독립신문 1897년 8월 17일자 논설) ▲ 97년 순종의 기부금으로 거립된 독립관 기사에서 윤치호는 교사 아펜젤라와 의사 서재필에 이어 “긔원졀을 죠션 인민이 경츅하는 일이라”라고 시작하는 연설을 했다. 국민들이 조선이 개국한 날인 기원절을 모르는 것은 중국 역사를 공부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모순임을 역설하고, 이제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시대를 맞자는 권고였다. 개화의식과 반청자주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 행사는 국가적 행사였다. 바로 노래가 의례적으로 불린 행사였다. 대죠션국 오백오회 긔원졀 츅사를 팔월 십삼일 오후 셰시에 독립관에셔 국긔를 놉히 달고 그 아래 화쵸로 단쟝 하엿서 졍부 대쇼 관인과 여러 학도와 인민이 만히 모혓시며 각국 공령사와 신사와 부인들이 각기 례복을 가쵸 입고 뎨뎨히 안졋는지라. 그 츅수가 일졀를 보니 쳐음에 학당 학원들이 츅슈가를 불너 오천 여년 우리 왕실 만셰 무궁 도으쇼셔 찬송 하니 외국부인이 악긔로 률에 쫒아 병챵 하더라. 둘 째 회쟝 안경슈씨가 연셜 하고 셋 째 한셩 판윤 리채연씨가 학부대신 리완용씨를 대신 하야 국민의 당연히 할 직무를 연셜 하고, 넷째 배재학당 학원들이 ‘무궁화 노래’를 불으니,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 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하여 보셰 하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병챵 하더라다. 다섯 째 미국 교사 아편셜라씨가 영어로 죠션에 거류 외국 인사들을 대하 야 각기 당연히 할 직무를 연셜 하며, 여셧 째 졔손씨가 죠션 관민들을 대하야 진보 할것을 연셜 하고, 일곱 째 배재학당 학원들이 ‘나라 사랑하는 노래’를 불으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쫒아 병챵 하더라. 여섯 째 젼 협판 윤치호씨가 긔원졀일 문졔를 연셜 한 후에 탁지 대신 심샹훈씨가 졔손씨와 외국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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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9] 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윤치호 ‘애국가는 내가 작사하였다’고 진술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9]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7.17 11:28:31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음악평론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은 1948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고(愛國歌 攷)>(2)에서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한탄하며,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발행된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전》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반론으로 쓴 것이다. “뚜렷한 역사의 사실을 조작할 수는 없다.”라고 전제하고, “윤치호의 처지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통해 그에겐 불리한 관사가 붙게 된 것도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의 작이 아닌 것을 자작으로 위서할 필요는 만무한”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의 근거는 바로 윤치호가 1945년 9월 자필로 애국가 4절을 남긴 <가사지>이다. “고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밝힐 건 바로 밝히고 시정할 것은 바로 시정해야 한다. 위정당국은 이 사실을 규명하여 공포함으로써 국민 교육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게 하여야 될 것”(동아일보, 1948. 10. 7) 이후 이 <가사지>를 주목한 이는 신학자 백낙준(白樂濬/1896~1985)이다. 그는 소론 <윤치호의 애국가 작사고>(윤치호선집 2, 1999)>에서, 윤치호가 작사했다는 외증(外證)으로 “좌옹 자신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자기의 작이라고 서면으로 증언한 바가 있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은 기독교 서지학자 윤병춘(尹春炳/1918~2010) 목사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가 임종하시기 전에 자녀들의 권유로 쓴 친필 애국가는 일제치하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자신임을 알리지 못했던 것을 조국 해방 후에 밝히려 했던 것이며,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큰 뜻을 자손 대에서 이어주기를 바라는 유언장이기도 했다.(윤병춘, <윤치호선집 2>, 1999) 또한 최근에는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도 이 <가사지>를 증거로 다음과 같이 윤치호를 작사자로 인정했다. “애국가 노랫말을 지은 사람이 윤치호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신문은 윤치호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손수 붓으로 써서 '윤치호 작사'라 해 놓은 것을 사진으로 공개한 것이다. 이래서 지금까지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1955년 윤치호 가족으로부터 <가사지>를 사본화 하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제(解題)를 달아 놓았다. “愛國歌 / 분류 書畵 > 筆蹟 / 등록번호 史資 2220 / 본문 愛國歌 /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 佐翁 尹致昊(1865∼1945)가 애국가 가사를 자필로 쓴 원고. 사진 자료의 끝 부분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쓰여 있음. / 1(2), 한글 / 소장; 서울특별시 尹永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종합데이터베이스 검색, ‘애국가’) 현 애국가 가사를 첫 기록인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자필 <가사지>, 그리고 현재 것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1908년 재판 「찬미가」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