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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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농요.논매기소리 매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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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아리예술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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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솔 회장 매년 사할린 동포에게 한복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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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숙/경산아리랑보존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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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부이사장. 특별회원 이무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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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새마을 아리랑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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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왕십리아리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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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아리랑, 등재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보도자료-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 작성자기 * *등록일2012-11-29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보도자료수신-문화·학술·통일 담당발신-아리랑포럼제목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문의-010-7447-5030 (기미양 총무이사)<아리랑포럼> 토론회주제-<아리랑, 등재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일시-2012. 11. 30(금). 오후 3시~장소-인사동 태화기독교회관(1919년 3.1독립선언 장소) 소회의실(B1)주관/주최-아리랑포럼·후원 신나라레코드사(회장 김기순)발표주제와 발표자진행-기미양(<아리랑아카데미> 운영자)기조발제-아리랑 등재와 남·북·중 관계(김연갑/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1. <문화재보호법>과 아리랑의 문제(김승국·서종원/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2. 해외 동포사회 아리랑 공연(박경란/<이지뮤직> 대표)3. 국립<아리랑박물관> 건립계획(엄원식/문경시청)4. 관련단체의 의견(사,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이사장 정은하/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송옥자 회장 外)주제발표 요지김연갑-<아리랑 등재와 남·북·중 관계>"이번 세계유네스코 아리랑 인류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등재 신청은 우리 내부적인 자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중국 자국 문화재 지정에 대한 대응 차원인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므로 등재 자체가 이미 우리가 등재한 14가지 유산과는 의미가 다르고, 그 효력도 다르다고 본다. 요는 등재 이후가 문제인데, 과연 이번 등재가 중국의 자국 문화재 지정이 갖는 부정적 요소를 어느 정도로 억제 할 수 있느냐와 북한이 이를 이번 등재를 이해하고 있느냐이다.”김승국-<문화재보호법> 아리랑"문화재로 지정된 유산만을 신청할 수 있게 되어 우리는 한글·김치·된장·아리랑 등을 세계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아니면 이를 보완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이번에 아리랑이 세계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 돤 것을 계기로 문화재법을 개정하여 모든 지역의 아리랑을 포괄적으로 묶어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길이며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다.”박경란-<해외 <한국문화원> 순회 공연> "해외동포들에게는 아리랑 등재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공연이 필요하고, 외국인들에게는 아리랑의 보편적 가치를 전해주어 한국의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공연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중국·러시아·일본의 공연은 동포사회라는 점을 감안하여 ‘국악 아리랑’이 중심이 되게 하고, 유럽 지역 문화원 공연은 기악연주와 양악기 연주 중심으로 구성하여야 한다.현재 일본 동경 한국문화원 아리랑공연은 확정된 상태이다.”엄원식-국립<아리랑박물관> 문경은 중요한 시점에서 약 1,200억원을 들여 아리랑 박물관을 짓자고 부르짖고 있다. 국내에서 아리랑에 관한 인지도가 없던 문경에서 왜 아리랑 관련 박물관을 건립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밝힌 근대 아리랑의 시작으로의 문경의 역할(아리랑 고개 문경새재설 등)과, 국토에 중심에 위치한 문경, 지역성을 최대한 제거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문경의 아리랑 박물관의 건립은 그 타당성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문경시는 『아리랑 우리의 소리를 넘어서 세계의 소리로』 라는 테마로 문경새재가 보이는 문경읍 진안리의 도자기 박물관 인근에 아리랑 박물관 부지로 1만 3천여제곱미터의 부지를 확보해 놓았으며, 문경 시민 및 문경시의 아리랑에 관련된 의지는 매우 높다는 점이다. (현재 계속되고 있는 문경 아리랑 축제 및 기타 아리랑 관련 학술 세미나 등에서 문경의 아리랑에 관한 관심과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문경은 국립아리랑박물관을 지하1층 지상2층 규모로 전수관 및 공연장, 영상실, 휴식공간, 숙박공간 등의 아리랑 관련 다양한 시설물을 설치한다는 안을 제시하고 있다. 문경에 건립될 아리랑 박물관은 지역적인 아리랑을 제외한 순수 아리랑으로의 박물관 및 전수관으로 건립을 계획 중이며 전국 아리랑 투어, 아리랑 힐링 프로그램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및 국외의 관광객 및 방문객에게 아리랑의 아름다움을 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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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아리랑 전국 확산…방송·음반 발매 기록 발견문경새재아리랑전국확산…방송음반발매기록발견 매일신문입력2017-11-0300:05:01수정 2017-11-03 00:05:01 문경고도현기자dory@msnetcokr 조선일보1939년1월19일자에실린문경새재아리랑음반광고 1896년 서양 악보로 최초로 채록돼 세계에 알려진 문경새재아리랑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전국적으로 라디오 방송을 타고 음반으로도 발매됐다는 기록이 무더기로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와 기미양 한국아리랑학회 이사는 2일 문경새재아리랑이 1938년 7월 17일 오후 8시 KBS라디오 전신인 조선방송JODK에 방송됐고 영국의 레코드사가 취입해 음반으로도 내놓았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와 광고를 비롯한 방송자료를 발견해 매일신문에 공개했다. 이들 자료는 조선일보 ▷1930년 7월 12일 자 김재철 씨의 글 ▷1938년 7월 17일 자 라디오방송 프로그램 표 ▷1939년 1월 19일 자 레코드사 포리도루Polydor Records의 문경새재아리랑 음반 광고 등이다 22. 10. 26. 오후 6:27 문경새재아리랑 전국 확산…방송·음반 발매 기록 발견 자료를 종합하면 조선방송의 제2조선어 방송 국악 프로그램에서 문경새재아리랑의 국악 곡명 문경새재가 진도아리랑과 함께 당시 최고 연주자의 반주와 명창의 소리로 방송됐다. 방송 몇 개월 후 포리도루 레코드사가 문경새재 곡명으로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김 이사는 당시 음반 유통 방식은 음반 취입 전후 방송을 통해 알리고 음반과 축음기를 판매하는 관례 그대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음반 발매 시점은 1938년 7월부터 11월 사이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레코드사 포리도루는 1924년 영국에서 설립된 회사로 1926년 일본에 진출했고 1931년부터 조선에 진출해 조선 음악을 발매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문경새재의 음반 취입자는 영남지역 소리꾼으로 유명했던 임소향(1918-1978)이다. 경북 김천 또는 성주군 초전면 출신으로 알려진 임소향은 해방 이후 월북해 북한의 민족성악가수로 활동했다 문경새재 박달나무는으로 시작하는 문경새재아리랑은 문경새재는 몇 구비드냐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로고나 등 3절까지 소개되면서 방송과 음반발매 등으로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널리 불렸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김 이사는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문경새재아리랑은 헐버트 선교사가 서양 악보로 채보하기 시작한 1890년대부터 1930년대 방송을 타고 임소향이 음반을 낸 이후인 1940년대까지 서울 경기 지역에서 널리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만일 임소향이 월북하지 않았다면 문경새재아리랑은 해방 후에도 전국에서 널리 불렸을 것"이다고 했다. 문경시는 7일부터 시작되는 제10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 이 자료들을 전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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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매일신문 사설] 문경새재아리랑, 이대로 둘 것인가? (2021.04.06)(사)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기미양[문경매일신문 사설] 문경새재아리랑, 이대로 둘 것인가? (2021.04.06)(사)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기미양 등록일2021-04-07 11:26:13 작성자 기미양 작성자 IP 210.178.**.*** 내용 [문경매일신문 사설] 문경새재아리랑, 이대로 둘 것인가? (2021.04.06)(사)아리랑연합회 사무총장 기미양http://www.mgmaeil.com/detail_mobile?number=25298&thread=22r06[문경매일신문 사설] 문경새재아리랑, 이대로 둘 것인가? (2021.04.06) 문경새재아리랑을 포함한 우리나라 아리랑이 2012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난 후, 문경시는 ‘국립아리랑박물관 유치’, ‘아리랑도시 선포’ 등 우리나라 아리랑 역사에 길이 남을 청사진을 제시했다.그러면서 ‘아리랑세계화포럼’을 결성해 분위기를 잡아나갔고, 아리랑대장경이라는 ‘아리랑일만수’ 가사집을 만들어 옛길박물관에 안치하는 거대한 행사도 실행했다.일반 시민들이야 손에 잡히지 않는 아리랑 사업으로 체감하는 바가 미약했지만, 막연하나마 기대는 가졌고, 뜻 있는 시민들은 문경시에 발맞춰 문학,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아리랑 드높이기에 동참했다.특히 그 모든 아리랑 사업의 씨앗이었던 ‘문경새재아리랑’ 종사자들은 기대를 모았고, 이를 보존해 온 전승자와 전승단원들은 더더욱 기대가 컸다. 전국의 각 지역 아리랑전승자들은 이런 문경을 부러워했고, 어떤 이들은 문경으로 이주해 오기도 했다.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문경시에서는 아리랑일만수 이후 이렇다 할 아리랑 정책을 추진하지도, 발굴하지도 않고 있다. 아니 있는 아리랑조차 7년째 지원을 끊어 이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초라한 아리랑도시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거기다 13년 이상 몸부림치듯이 문경새아리랑 대중화와 전국적인 이미지 향상에 주력해 온 ‘문경새재아리랑제’도 올해 예산이 반으로 줄었다.그동안 기대를 걸었던 문경시의 문경새재아리랑에 대한 내외부의 시선은 어느새 지쳤고, 이제는 지친 것을 넘어 증오의 빛으로 변하고 있다.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시기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문경새재아리랑’이 좋아 이를 부르고, 채록하고, 전승하고, 무대화하는 등 생의 절정기에 오로지 아리랑 사랑에 몸 바쳐 온 송옥자 전승자가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 문경새재아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그리고 이를 발굴하고, 지지하고, 가꾸어 온 문화원이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의 문경새재아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문경새재아리랑 정책의 출발은 여기부터이며, 이를 인정한 후부터라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아리랑전승 단체를 일반 단체 개념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재고돼야 한다.문화재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국가나 지자체가 나서서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 문경의 무형문화재 1호로 손색없던 문경새재아리랑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너무 아쉽고 애석한 일이다.외지 행사 때마다 문경시를 알리는 도구로 활용해 온 문경새재아리랑이 언제 어느 때부터 이렇게 무대접을 받게 됐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아리랑도시 문경’은 존재하는 건지? 묵은 질문을 문경시에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