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갑의 애국가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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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러시아 동포와 함께, 겨레기념일 ‘아리랑의 날’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러시아 동포와 함께, 겨레기념일 ‘아리랑의 날’ 등록 2017-10-01 16:10:49 | 수정 2017-10-01 16:15:46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아리랑’이 러시아에 울려퍼졌다. 현지동포도 ‘아리랑의 날’을 기념했다.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협회 최영구 회장과 미하일로프나, 니콜라예미츠, 박영자씨 등 현지 문화인들이 1일 제5회 아리랑의날을 기렸다. 지난달 성료된 제2회 러시아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주목받은 유즈노사할린스크 아리랑무용단,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리랑합창단, 라빈카 무용단 등이 참여했다.사할린아리랑제 기미양 추진단장(아리랑학회 이사)과 공노원 러시아아리랑본부장(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그리고 한겨레아리랑연합회(이사장 차길진)가 성사시켰다.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아리랑’이 러시아에 울려퍼졌다. 현지동포도 ‘아리랑의 날’을 기념했다. reap@newsis.com 기미양 단장은 "2018 사할린아리랑제를 앞두고 아리랑 로드의 러시아 거점을 더욱 다졌다”며 "내년 3회 사할린아리랑제는 러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 미국 등 170개국 이상 한인 700만명이 저항·대동·상생의 아리랑 정신으로 하나가 되는 현장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아리랑의날은 2013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의 주도로 탄생했다. "겨레 기념일로 아리랑의날을 제정해 지속가능하고 미래적인 민족문화운동을 실천하고자 한다. 누가 부르는가와 어떤 아리랑인가보다 왜 부르는가가 더 중요함을 실증하는 연구와 공연을 통해 모두가 함께하고, 나아가 아리랑정신을 세계 보편정신으로 확산시켜 미래적 지향 가치를 구현하고자 한다”는 의지를 담았다.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아리랑’이 러시아에 울려퍼졌다. 현지동포도 ‘아리랑의 날’을 기념했다. reap@newsis.com 10월1일은 영화 ‘아리랑’ 개봉일로 주제곡 ‘아리랑’이 공개된 날(1926)이다. reap@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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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안중근 아리랑, 월간영웅 주목…기미양 작 '아무르 아리랑'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안중근 아리랑, 월간영웅 주목…기미양 작 '아무르 아리랑' 등록 2015-10-29 10:47:35 | 수정 2016-12-28 15:49:19 【서울=뉴시스】왼쪽부터 기미양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안중근 의사의 증손자 토니 안, 유명옥 서울아리랑보존회 회장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기미양 아리랑학회 연구이사가 만든 '아무르 아리랑'이 월간 '영웅'이 창간 기념으로 진행한 '안중근 문학작품 공모'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아무르 아리랑'의 아무르는 러시아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해 중국 둥베이 국경 등을 따라 흐르는 아무르 강을 가리킨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 아무르 강을 건너 단지동맹을 맺었다. 월간 '영웅'을 발행하는 도서출판 '꼬레아 우라'는 아무르강 4000㎞의 유장함과 안 의사의 깊은 한을 민족어 아리랑에 반영한 '아무르 아리랑'을 높게 평가했다. 이 아리랑은 윤은화(양금연주자)가 편곡하고, 유명옥(서울아리랑보존회 회장)이 창을 맡아 음반으로 제작할 예정이다. 월간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뜻과 사상을 되살려 통일 대한민국과 세계 평화의 길잡이로 삼겠다'는 취지로 창간됐다. 안중근의거 106돌 기념일인 지난 26일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월간 '영웅' 창간 기념식을 열었다. 【서울=뉴시스】'아무르 아리랑' 이날 배포된 창간호는 안 의사 증손자 안도용씨의 글, 3대에 걸쳐 안 의사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 온 윤자성 미국 안의사기념사업회 회장 인터뷰, 김월배 중국 다롄(大連)외국어대 교수의 논문 등으로 채워졌다. 월간지 제호 공모전에는 초등학생부터 80대까지, 남녀노소가 참여해 232편이 응모됐다. 발행인은 박창재 에픽소프트 대표다. 2013년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주관하는 '안중근 아카데미' 강의(15주)를 수강한 뒤 사비를 털어 잡지를 창간했다. realpaper7@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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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사할린 홈스크시 시장 축사 대독하는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사할린 홈스크시 시장 축사 대독하는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등록 2018-12-21 17:29:43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주최, 전국아리랑전승자협회의 주관 제14회 아리랑상 시상식이 열린 21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가 사할린 홈스크시 시장 축사를 대독하고 있다. 2018.12.21. chocrystal@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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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뉴시스] 바야흐로 아리랑 시대, 기미양이 만난 ‘아리랑꾼’들인쇄하기 취소 바야흐로 아리랑 시대, 기미양이 만난 ‘아리랑꾼’들 [뉴시스] 입력 2014.11.18 11:27 【서울=뉴시스】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 문화의 달인 10월, 그리고 11월에 들어서도 아리랑은 전국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이런 현상은 이달 25일 전후 유네스코 북한 아리랑 등재와 문화재청의 국가주요무형문화재로 아리랑이 지정되는 내년 5월까지 계속 이어질 듯하다.역대 우리의 무형유산이 유네스코 등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세계무대에서까지 조명을 받는 경우는 아리랑 말고 달리 없었던 듯하다. 가히 아리랑 시대를 맞이하여 아리랑의 계절을 살고 있다고 할만하다.이런 계절에 필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국을 다니며 박수치고 환호하며 아리랑을 만끽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꼭 기록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전국의 ‘아리랑꾼’들의 활동상이다.‘아리랑꾼’이란 말은 일찍이 김연갑 선생이 1990년 발행한 ‘팔도아리랑 기행’에서 1980년대 지역에서 아리랑을 실연하고 연구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꼽아 표현한 것이다. 이 호칭을 지금까지 수용하고 있기에 필자도 그대로 사용하여, 지역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아리랑 전승주체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 ‘아리랑시대’의 역할을 기록하고자 한다.◇진도아리랑의 역사, 박병훈-서울 ‘아리랑판’ 공연 3회 참여진도아리랑보존회 향전(鄕田) 박병훈(79) 회장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달부터 서울에서 개최되는 연속공연 ‘아리랑판’에 3회나 출연하여 진도아리랑의 진가를 알렸다. 박 회장은 환영하는 관객을 향한 제1성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발언보다는 "인류 보편적 문화가치인 아리랑, 우리 진도아리랑의 가치를 모두가 공유하는데 일조를 하려고 왔습니다. 진도는 육지와 단절된 섬이라는 특수성으로 진도아리랑의 원형보존이 용이했는데, 1984년 진도대교가 개통되며 외지 영향을 갑자기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듬해 진도아리랑보존회를 조직한 뒤 멸실돼 가는 가사를 발굴·채록하고 뿌리를 캐냈지요. 현재 진도아리랑 가사는 770여 수에 이릅니다”고 했다.이런 자세는 이미 최초의 아리랑 가사집(1986)을 발간하고 18t 위용의 진도아리랑노래비 건립을 주관하면서 명실공히 아리랑 인물로서 전국에 큰 자극을 주었다. 현재 진도 민속기행 명소인 울림산방 입구 ‘진도아리랑노래비’는 바로 박 회장이 전남향토문학상(1990) 상금 전액을 기부하고, 군과 군민들의 지원으로 진도문화원장 재임 시인 1995년 건립한 것이다.이번 ‘아리랑판’에는 아리랑이 관심을 갖게 된 1980년대부터 활동한 아리랑 역사의 증인이라는 배경으로 서울 초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승활동을 증언으로 전달하고자 6~7명의 회원과 가족까지 참여했는데, 특히 도쿄에서 활동하는 장녀도 참여하여 공연의 의미를 더하였다. 총 3회에 걸친 공연에서 특기인 육자배기 독창으로 박수를 받았고, 회원들의 진도아리랑·흥타령·강강수월래로 무대를 장악했다. 70대로 이상 3인과 진도 출신 국립창극단 단원이 함께하여 흥과 신명을 선사했다.9월 첫 공연의 해설과 진행을 맡은 덕분에 많은 질문을 할 수 있었는데, 아리랑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진도아리랑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음은 행운이었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차원에서 전국 아리랑 인물을 대상으로 전기 를 쓴다면 대상 1호인데, 내년 팔순기념으로 출간을 기획하고 있다. 김연갑 한겨례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지목한 ‘아리랑꾼’ 1세대 중 정선 김병하, 중원 지남기, 강릉 동기달 선생이 작고한 상황에서 더욱 소중한 분임을 이번 만남에서 인식하게 되었다.◇영남, 아리랑 제1 전승지역으로 일군 대구 정은하-영남아리랑연합회 결성지난 5월 경상북도가 아리랑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자 많은 이들이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아리랑의 도(道) 단위 전승지 중 중심지는 영남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 10월 영남지역 아리랑 전승단체가 연합한 영남아리랑연합회를 결성하여 중심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 중심에서 역할을 한 이가 정은하 선생이다. 현재 대구아리랑축제를 12년 이끌어 온 사단법인 영남아리랑민요보존회 이사장인데, 참으로 활동량이 놀라울 만큼 크고 넓은 ‘아리랑꾼’이다.매년 8월15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대구아리랑제’(13회)부터 10월 ‘영남아리랑경창대회’, 제3회 ‘대구아리랑경창대회’ 행사장에서 활동성을 확인하였지만, 열정을 넘어 신앙처럼 아리랑을 떠받들고 사는 인물임을 실감하고 있다. 이는 필자만의 평가가 아니다. 지난 11월1일 대구 중구청 대강당에서 결성된 영남아리랑연합회에 9개 지역 아리랑 단체가 참여, 회장으로 추대한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사제 관계로서, 지회 관계로서 전격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대구아리랑제 개최를 통해 영남지역 아리랑 전승 실상을 드러낸 것과 그의 레퍼토리인 대구아리랑의 성공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이미 영남지역 언론에서 평가해 알려져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대구아리랑’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제1회 대구아리랑제를 준비하며 정은하 작창으로 음반화돼 확산된 아리랑이다. 영남 메나리제에 후렴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는 넘어가네’이고, ‘어데에 아니라예 핑계만 말고/ 좋으면 좋다고 눈만 껌뻑하이소’라는 정감어린 기사이다. 또 하나는 2009년 대구지역에서 활동한 최계란이 1936년 취입한 대구아리랑이다. ‘남도잡가 大邱아리랑’으로 후렴에 ‘아롱아랑 아라리야’를 쓴 것으로 10대 후반의 청초한 육성으로 녹음된 것이다. 정은하 회장은 이 두 아리랑을 통해 대구를 전국에 알리는데 기여했다. 이는 영남지역 아리랑 전체를 동반 상승시킨 효과를 거두게 되었고, 그 공로로 지지와 신뢰를 얻고 있는 것이다. 정 회장은 "영남아리랑경창대회, 영천아리랑경창대회, 대구아리랑경창대회를 성공시키는 것이 남은 일”이라며 그의 역할을 기대하게 한다. ‘아리랑꾼’으로서 공로를 공인 받는 날을 기대하게 한다.◇진정성으로 의병정신 선양하는 기연옥-‘해설이 있는 의병아리랑 순회공연’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또한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오늘의 것이면서도 옛것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한국의 메타문화이다. 그런가하면 아리랑은 중층적 유기체이기도 하다 ‘이미 있었던 것이 새로운 것을 있게 하고, 새로운 것이 이미 있었던 것을 다시 새롭게 한다.’ 그래서 동시적이고 역동적인 양상을 가지고 변화와 지속이 이루어지면서 확대 재생산된다. 즉 ‘자기복제에 의한 증식’이라는 프렉탈 이론의 실체이다. 이를 실증하는 아리랑 중의 하나가 의병아리랑이다. 이 의병아리랑을 들고 나온 ‘아리랑꾼’이 바로 사단법인 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 기연옥 이사장이다.기연옥 회장은 내가 만난 ‘아리랑꾼’으로서는 개인적 연고가 있는 인물이다. 호남 의병장 기우만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춘천지역에서 아리랑의 1절로 불리는 사설을 독립적으로 하고, 의병들의 사연을 사설로 하여 재구성한 의병아리랑을 가지고 전국 의병 관련 기념 공연에 발벗고 달려나가 참여하고, 기능 기부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기연옥 회장의 진정성에 대해서 주목하게 한다. 특히 영천호국원 공연, 안중근의사숭모회 및 광복회, 의병의 날 및 순국선열의 날 기념공연 등 관내 봉사대상 행사나 보훈행사에 재능 기부로 참여하고 있다. 이는 아리랑정신(저항·대동·상생)과 의병정신(정의수호·자발적 희생)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금년 후반기에는 강원도와 춘천시 후원으로 도내 10개 시군 축제현장과 군부대, 경로대상 공연으로 ‘해설이 있는 의병아리랑 순회공연’을 주관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의병아리랑제’를 매년 개최해 오고 있다. 그야말로 ‘아리랑 시대’를 뜻 깊게 한 행사이다. 특히 이런 기회장의 활동은 아리랑이 누가, 언제 불리는 것보다 왜 부르냐가 더 중요함을 깨우쳐 주는 활동이란 점에서 괄목할만한 특별한 전승활동이다.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 동포사회의 의병관련 유적지에 공연과 의병아리랑을 심는 일을 하겠다고 하여 기대를 갖게 한다.◇문경아리랑 붐, 주인공 송옥자-‘문경아리랑제’의 진수지난 13일 저녁 문경문화예술회관에서 제7회 문경아리랑제가 개최되었다. 이보석 화백과 함께 문경의 특산품인 문경약돌한우를 맛있게 먹고 행사에 참석하였다. 문경새재가 ‘한국인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1위’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경새재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기대를 갖고 두 시간 반의 행사를 주목했다.무용, 아리랑메들리, 판소리 등 지방 공연으로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공연이었다. 그런데 백미는 후반에 출연한 문경아리랑과 ‘찻사발아리랑’이었다. 실제 생활에서 쓰는 물래와 다듬이가 등장하고 지게다리 장단 등으로 소박한 산촌 정서를 표현한 지역성을 무대화하여 아리랑의 진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대의 서사구성은 주인공인 송옥자 회장의 연출에 의해 올려졌다. 사단법인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를 이끌고 있는데, 몇 번의 지병을 딛고 문경아리랑의 멋과 맛을 통해 확산에 역할을 하고 있는 ‘아리랑꾼’이다. ]2010년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제5회 ‘아리랑상’ 시상식 심사평이 떠올랐다. "송옥자 선생의 특유의 떨림 소리는 다른 국악인들의 성음과는 다른 오지의 산촌 여인의 소리로 독보적이다. 앞으로 지자체가 지정하는 ‘문경시 무형유산 제1호 문경새재아리랑 제1호 전승자’로 지정되어 전수되기를 바란다.” 이번 공연에서도 주창을 송 선생이 맡아서 그 특유의 떨림이 전해져서 좋았다. 특히 찻사발 제작과정을 축약 표현한 것은 강진, 이천 같은 도자기 관련 축제에서 공연 요청을 받을 것으로 기대할만 했다.2010년부터 주목을 받은 문경아리랑 붐의 주역이 송옥자 회장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적 전승 중심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는 25일 전후 북한이 유네스코에 ‘조선민요 아리랑’으로 등재되고 내년 5월 문화재청이 아리랑을 국가주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 각 지역 아리랑의 위상이 논의될 것이다. 이에 선제적으로 문경시가 선제적으로 ‘무형문화유산 제1호 문경새재아리랑’을 지정하고, ‘전승자 제1호’로 송옥자를 지정한다면 우위를 점할 것으로 본다. 물론 필자의 소견이지만 어느 지자체가 자체 아리랑의 위상을 정하느냐는 관심의 척도가 되리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아리랑꾼’들에 대해 지역에서 위상을 부여하는 것은 국가적 위상을 유도하는 효과를 거두리라고 보아 기대하게 된다.kibad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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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인천서 노래하면 日서 듣는다…사투리도 쓰는 '고래의 비밀'아름다운 '고래의 노래'를 부르기로 유명한 혹등고래.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국제자연보호연맹·국제포경위원회·세계자연기금 어둡고 고요한 바다를 가로질러 뱃고동처럼 낮은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듣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이 소리의 주인공은 혹등고래입니다. 몸길이 11~16m, 체중은 30톤 넘게 나가는 이 거대한 동물의 노래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애니띵] 요즘 뜨는 ASMR '고래의 노래' 유튜브에선 바닷속 고래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영상이 힐링 콘텐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고래 울음소리만 반복되는 한 영상(Underwater Whale Sounds)은 800만 회 넘게 재생됐죠. 8년 전 올라온 영상이지만 최근까지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반복되는 소리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의 유행에 힘입어 고래 울음소리도 때아닌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고래 울음소리를 들으며 편안함을 느낄까요? 또 고래가 울음소리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이 편안해지는 고래 ASMR을 영상으로 확인하세요. '고래의 노래' 명상·심리치료 음악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는 혹등고래. AP=연합 고래 울음소리의 인기는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해양생물학자 로저 페인은 혹등고래의 울음소리에 리듬감 있는 패턴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죠. 페인은 1970년 하와이 혹등고래 울음소리를 녹음한 음반 '혹등고래의 노래'(Songs of the Humpback Whale)를 발매했습니다. 약 34분 분량의 이 음반은 미국에서 12만5000장 넘게 팔리는 등 성공을 거뒀습니다. 고래의 울음소리는 최근까지도 명상이나 심리치료용 음악으로 자주 이용되고 있죠. 고래의 노래가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고래가 내는 낮은 주파수의 소리에 사람의 뇌가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정의필 울산대 IT융합학부 교수는 "저주파 소리를 들으면 사람의 뇌파도 주파수가 낮아지면서 잠자는 상태와 비슷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소리로 소통하고 사투리까지 쓴다 대왕고래의 울음소리는 최대 188dB(데시벨)로 비행기 엔진 소리보다 크다. IFAW 고래는 다른 고래들과 소통하기 위해 일정한 패턴의 소리를 계속 냅니다. 수면 아래로 23m만 잠수해도 태양 빛의 99%가 사라지는 어두운 바닷속에서 소리는 고래들의 거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죠. 사실 사람은 고래가 의사소통을 위해 내는 소리의 대부분을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주파수 영역대는 약 20~2만Hz(헤르츠)이지만, 고래가 멀리 떨어진 상대와 소통하기 위해 내는 소리의 주파수는 이보다 낮기 때문이죠. 지구 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대왕고래는 저주파를 이용해 800㎞ 넘게 떨어진 다른 고래와 대화를 나눕니다. 만약 인천 앞바다의 고래가 소리를 내면 일본 오사카 앞바다에 있는 고래가 들을 수 있다는 뜻이죠. 몇 마리씩 짝을 지어 생활하는 고래는 무리마다 서로 다른 '사투리'를 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15년 캐나다 댈하우지대학 연구팀은 태평양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두 향유고래 집단이 내는 소리를 비교했는데요. 같은 지역에 사는 고래들이라 해도 속한 집단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와 음색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공해에 묻히는 고래의 노래 고래의 음파 소통을 방해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공해들. IFAW 하지만 고래의 노래는 점차 잦아들고 있습니다. 인간이 일으킨 공해 때문이죠. 음파가 유일한 소통 수단인 고래에게 바닷속 소음공해는 치명적인 장애물입니다. 대형 선박의 엔진 돌아가는 소리, 수중 물체를 찾는 음파탐지기(SONAR), 바닷속 석유나 천연가스 탐사에 쓰이는 '공기 대포' 등이 고래의 울음소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지난 5일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게재된 논문(The Soundscape of the Anthropocene Ocean)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인간의 해상 이동량이 늘면서 주요 항로의 저주파 소음은 32배 증가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로 인해 해양동물들이 짝짓기와 먹이 찾기, 포식자 회피 등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했죠. 지난 2018년 스페인 남쪽 해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 향유고래의 뱃속에서 발견된 플라스틱 쓰레기들. The Telegraph 매년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도 고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발표된 호주 정부 과학기관 CSIRO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해저에 약 1440만 톤의 미세플라스틱이 쌓여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18년에는 스페인 남부 해변으로 떠밀려온 향유고래의 사체에서 비닐봉지, 그물, 병뚜껑 등 29㎏에 달하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견되기도 했죠. 인간에게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 주는 고래의 노래를 어쩌면 더는 들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인간처럼 말하고, 듣고, 살아가는 고래. 그들에게 조용하고 깨끗한 바다를 돌려주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 아닐까요. 박건 기자, 이수민 인턴 park.kun@joongang.co.kr영상=왕준열·우수진·황수빈 PD [출처: 중앙일보] 인천서 노래하면 日서 듣는다…사투리도 쓰는 '고래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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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 유산에 오른 “아리랑”서한범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등록 2017.06.12 23:26:4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불리고 있는 “아리랑”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4인, 즉 미국 유타대학 명예교수 이정면 박사, 사회사업가 류승호 씨, 사진작가 류승률 씨, 그리고 문학작가 서용순 씨를 소개하였다. 이들은 음악 전공자는 아니지만, 고려인들이 지켜온 아리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그들이 답사한 아리랑 로드 10만Km의 생생한 기록을 한 권의 책에 담으면서 6월 7일 인사동 소재 토포하우스에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53만 고려인들이 부르는 아리랑 속에는 과거의 아픈 상처가 묻혀있는데, 그 중에서도 1937년, 스탈린에 의해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영하 30도의 추운 카자흐스탄 벌판으로 강제 추방된 사건은 잊을 수가 없는 탄압이었다.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 질병과 싸우면서도 그들에게 가해진 탄압의 역사를 아리랑을 부르며 견뎌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민족을 하나로 묶어준 강력한 힘의 원동력이었으며 희망이었고, 부모였으며 조국이었고, 생명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번 주에는 그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부르며 지켜온 아리랑이란 어떻게 인식되고 있으며 그 음악적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의 아리랑은 지난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이것은 아리랑이 단순히 한국의 옛 민요였기에 지정된 것이 아니다. 그 노래 속에 한국인의 정신, 한국인의 삶,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음악의 세계, 생활양식,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함축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전통적인 노래였기에 인정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는 북한의 아리랑민요가 역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아리랑은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노래 유산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여 2016년 10월 8부터 ~9일까지 열린 '2016 아리랑대축제' 현재 우리나라에서 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는 노래는 하나 둘이 아니다. 잘 알려진 정선아리랑, 서울 경기지방의 본조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등이 지방의 특징을 살리는 민요로 비교적 유명하지만, 이밖에도 각 지방, 중소 도시의 이름을 붙인 아리랑은 하나 둘이 아닌 셈이다. 예를 들면 문경아리랑, 상주아리랑, 해주아리랑, 대구아리랑, 공주아리랑, 영천아리랑, 용천아리랑, 등 등 그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는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아리랑도 있을 것이나 대부분은 일본제국주의 시절, 아리랑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자, 자연발생적으로 각 지방의 중소 도시에서 만들어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들 아리랑은 각각의 지역적 특징을 살린 음악적 어법으로 불리고 있어서 각 지역의 향토성을 자랑하고 있다. 아리랑의 공통된 특징이라면 무엇보다도 간결하면서도 정제되어 있는 형식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노래 형식은 본절과 후렴귀로 구분되어 있으며 후렴귀는 낮은 음역으로 <아리랑>이나 <아라리>가 반복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반면, 본 절은 높은 음역대의 가락으로 다양한 내용의 가사를 짓거나 즉흥적으로 만들어 여러 세대를 이어온 것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노래의 선율형이 복잡하지 않고 간단해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느린 형태와 빠른 형태의 3박자형의 리듬구조, 곧 세마치장단으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특징으로는 지역마다 특수한 표출법을 쓰는 시김새의 다양한 표현법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시김새의 대표적인 요성(搖聲), 즉, 음을 떨어주는 경우에도 서울의 아리랑이 떠는 형태나 진도아리랑의 떠는 형태, 또는 정선아리랑에서 떠는 소리의 형태는 모두 같지가 않고 지역에 따라서는 떠는 폭이 좁거나 넓기도 하고, 가늘기도 하고 굵기도 하는 여러 형태의 표현법을 쓰는 것이다. 네 번째 특징으로는 이러한 음악적 요소위에 풍부한 노래말(가사)을 지어서 부른다는 점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즉석에서 즉흥성을 살리어 새로운 노래말을 지어 부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속도의 조절이나 감정의 상태에 따라 슬픈 노래로, 또는 기쁜 노래로 음악적 분위기를 바꾸어 부를 수 있는 특징을 안고 있다. 가령, 슬픈 처지에 처해서는 슬픈 감정으로 느리게 부르고, 반대로 기쁘고 즐거울 때에는 기쁜 감정으로 빠르고 신나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또한 아리랑인 것이다. ▲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부하라 사마르칸트 고려인들과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춤을 추는 답사대(아리랑로드 10만km 대장정 답사대 제공) 이러한 음악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각 지역이나 중소 도시에서는 지역의 이름을 앞에 붙여서 <00아리랑 축제>, <XX아리랑 축제> 등을 매해 열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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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가 채보한 ‘구아리랑’과 나운규의 ‘신아리랑’/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홈 우리문화 톺아보기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헐버트가 채보한 ‘구아리랑’과 나운규의 ‘신아리랑’ [국악속풀이 320] 서한범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등록 2017.06.19 23:50:4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한국의 아리랑은 지난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4년에는 북한의 아리랑민요가 역시 등재되었기에 아리랑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인의 노래 유산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지난주에 하였다. 정선아리랑을 비롯하여 서울 경기지방의 본조(本調)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외에도 문경아리랑, 상주아리랑, 해주아리랑, 대구아리랑, 공주아리랑, 영천아리랑, 용천아리랑, 등등 지역의 특징적인 아리랑은 수도 없이 많다는 이야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도 했지만, 식민지 시절, 아리랑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각 지방에서 부르기 시작했으리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또 무엇보다도 아리랑의 음악적 특징은 간결하면서도 정제되어 있는 형식과 선율형이 간단해서 쉽게 부를 수 있다는 점, 3박자형의 리듬구조, 지역마다의 시김새가 다양하다는 점, 그 중에서도 특히 떠는 소리의 형태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즉석에서도 지어 부를 수 있는 풍부한 노래말이라든가, 박자의 조절이나 감정의 상태에 따라 슬픔과 기쁨 등 음악적 분위기를 바꾸어 부를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이처럼 한국인이 좋아하고 잘 부르는 민요, 아리랑은 누가 지었고, 언제부터 불러온 노래일까? 하는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찾기 어렵다. 다만, 1800년대 중반,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각 지역에서 차출된 인부들을 위한 연희에 사당패들이 초청되어 각 지역의 아리랑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아리랑은 그 곳에 참여한 일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파급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 이후 1896년에 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가 당시 부르던 아리랑을 서양의 5선보로 채보하였는데, 이 곡은 현재의 아리랑이 아닌 그 이전에 불러오던 <구 아리랑>이다. ▲ 아리랑을 서양의 5선보로 채보한 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 ▲ 헐버트의 아리랑이 수록된 `The Korean Repository`(1896년) 악보(문경시 옛길박물관 제공) 당시 불려지던 아리랑은 박자도 느리고, 가락도 부분적으로는 현재의 아리랑과 다른 형태이다. 가령 현재의 아리랑은 시작부분의 “아리랑, 아리랑”이란 노래말에서 앞에 것은 쏠(sol)로 낮게 시작하고, 뒤에 것은 도(do)로 4도 높게 내서 <쏠-도>의 서로 다른 음높이로 부르지만, 구아리랑은 시작부분의“아리랑, 아리랑,”을 동일한 음높이로 반복하는 차이를 보인다. 구아리랑이 채보된 30년 뒤, 1926년, 단성사에서는 나운규의 <아리랑>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여기에 주제곡으로 쓰인 아리랑은 헐버트가 채보했던 <구아리랑>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새롭게 편곡된 <신아리랑> 이었다. 그러니까 현재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아리랑이 바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속의 아리랑이란 노래가 영화와 함께 관람객의 민족 감정을 폭발시킨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애절한 장면을 목격하면서, 동시에 배경 음악인 아리랑을 가슴으로 듣게 되면서, 억압받으며 살던 관객은 항일감정을 여지없이 폭발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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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7] 3ㆍ1만세운동 기간 애국가는 국가(國歌)였다3ㆍ1만세운동 기간 애국가는 국가(國歌)였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7]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8.03.02 11:13:4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3ㆍ1만세운동 초기 ‘애국가를 불렀다’를 ‘national cry’로 표기한 세브란스의전 오웬스가 1919년 3월 24일 <브리스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가 보낸 보고서 일부 애국가 역사에서 고유 곡명 ‘애국가(愛國歌)’ 시대와 ‘국가 애국가(國歌 愛國歌)’는 구분 된다. 1902년 대한제국이 윤용선을 책임자로 하여 <대한제국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를 제정하게 했다. 당시 일본 <기미가요>를 작곡, 정착, 일반화 시키고 독일로 귀국한 후란츠 에케르트(FranzEckert/1852~1916)를 초청하여 작곡한 것이다. 이를 고종에게 천거한 이는 민영환으로 이미 유치호 등을 인솔하여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갔다 근대식 의전(儀典) 절차를 보고 군제를 러시아식으로 삼으며 국가의 필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어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작사자를 악보의 서문을 쓴 민영환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 않고 작곡자는 악보 표지에 분명하게 에케르트를 작곡자로 밝혔다. 이 애국가는 1902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의 국가로 공립학교와 군대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서양정서에 장중한 분위기로 또한 가사의 난해함으로 일반화 되지는 못했다. 이런 까닭으로 윤치호의 <무궁화가>가 애국가로 불리게 되었고, 1907년에 와서 새롭게 작사된 <애국가>가 널리 불리게 되었다. 이런 길항(拮抗 서로 버티어 대항함) 관계는 1909년 전후까지로 추정된다. 이런 정황으로 공식적인 국가(國歌)는 약 7년 정도 존재한 <대한제국애국가> 뿐이다. 그러므로 임시정부 이전까지 나라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지닌 ‘애국가’는 존재했어도 나라가 제정한 또는 나라가 인정한 ‘국가 애국가’는 없었다고 본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학계의 인식이었다. 그러니까 현 <애국가>가 단순한 명칭으로서의 ‘애국가’를 넘어 나라가 인정한 ‘국가로서의 애국가’는 1919년 3ㆍ1만세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에서 불림으로서 부터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필자가 발굴한 자료를 통해 보면 적어도 현 애국가가 이미 <대한제국애국가>의 생명이 끝나는 1909년말부터 그 정통성을 계승하여 ‘나라가 인정한 국가 애국가’로 불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는 유감스럽게도 3ㆍ1만세운동 정황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외국 선교사의 보고서에서 확인이 되는데, 당시 세브란스의전(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선교사들의 소속 <브리스 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 목사(Donald D. Owens, 한국명 오은수)가 작성한 보고서이다. 1919년 3월 24일 위원회에 보낸 것이다. ▲ 3ㆍ1만세운동 초기 ‘애국가를 불렀다’를 ‘national cry’로 표기한 세브란스의전 오웬스가 1919년 3월 24일 <브리스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 소속 오웬스가 보낸 보고서 일부 내용은 일본의 식민정책, 일본의 개혁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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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서재필이 기사로 밝힌 ‘애국가’ 작사자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6]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2.18 11:40:42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1897년 7월 17일 낮 3시, 서대문 독립문 옆 <독립관>에서 조선 개국 505회 경절회(慶節會) 행사가 있었다. 이날은 조선이 개국한 날이라 기념식을 한 것으로, 사상최초의 민관합동 개국 기념식이었다. 강단에는 국기(태극기)를 게양하고 꽃 장식을 하고 하단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외국 공관원과 정부 고관들이 자리했고, 객석에는 관인들과 학생들, 그리고 일반인들도 자리했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사가 주최했고 정부 재산을 관리하는 탁지부가 재정지원을 했고, 진행은 배재학당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했다. 강연은 서재필(독립신문 발행자/1864~1951), 아펜젤라(배재학당 설립자/1858~1902), 윤치호(전 외부 협판/1865~1945) 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의 애국가 후렴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을 쓴 <National Flower>가 불렸다. 이 노래는 이후 ‘무궁화노래’ 또는 ‘무궁화가’로 표기되어 전승되었다. ▲ 영자신문 1897년 8월 17일자 가운데 ‘무궁화노래’ 기사 갈무리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에 기록되었다. 기록자는 Jaishon, P, 곧 서재필이다. 이 기록은 그동안 영문판 독립신문 <editorial note>에 실렸는데 최근에야 필자가 발굴한 기사이다. 애국가 사료로서는 일대 획을 긋는 사료이다. 이 날의 기념식을 위의 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120년 전 기념행사는 낮 3시에 시작하여 5시에 마쳤는데, 배재학당 학생들의 ‘찬양’(Praise)으로 시작되었다.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먼저 인사말을 했고, 외국인 참석자들을 소개했다. 이어 병중인 학부대신 이완용을 대신하여 한성판윤 이채연이 국가주의를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 배재 학당원들은 ‘무궁화노래’(National Flower)를 불렀다. 이어 당시 연희전문을 설립한 아펜젤러 목사가 등단, ‘조선거주 외국인들의 의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이어 서재필 박사가 ‘한국의 발전’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리고 마지막 강연자인 윤치호가 나와 강연을 했다. 윤치호의 강연 제목은 <우리가 기념하는 날>로 주제는 “청국의 역사는 잘 알면서 우리 역사는 모르는 것이 현실”이라는 요지로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리고 서재필은 이 날 부른 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 영자신문 에 ‘무궁화 노래’ 기사를 올린 서재필의 만년 모습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하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다.” 다른 노래에 대해서는 ‘배재 학생들의 찬양’과 같이 의례적인 표현을 했는데, 두 번째 노래는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특히 윤치호를 ‘계관시인’(Poet Laureate)이라고 칭하여 작사자임을 명확히 했다. 이 기록은 거의 120년간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현 애국가를 윤치호로 인정한다 해도 동일 후렴이 이미 1897년부터 불려 왔으니 그 후렴이 포함된 <무궁화노래>가 윤치호 작사라는 증거가 없는 한 애국가 작사자를 단정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1970년대부터 중요한 논거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사실은 1897년 8월 17일자 영자신문 <independent> 서재필 기사가 2015년에 밝혀짐으로서 애국가 작사자를 명확하게 밝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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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5] ‘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무궁화가’에서 ‘애국가’로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5]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0.25 11:34:2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 이 후렴이 탄생 된지 120년이 되었다. 곧 오늘의 애국가 후렴이란 점에서 곧 애국가의 출현 120년을 맞은 것이다. 그런데 120년 전부터 현 애국가가 탄생하는 1907년까지는 ‘무궁화가’, ‘무궁화노래’, ‘애국가’로 그 이름을 달리하며 불렀다. 이 번 회에사는 이 ‘무궁화가의 미디어상의 전승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무궁화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계몽운동으로 국민들의 실력을 향상시켜 자주독립 국가로 가야함을 역설했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언론도 이에 앞장섰다. 그래서 애국계몽 노래들을 발표하여 널리 보급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가운데 1907년 10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 잡보에 ‘무궁화가’라는 곡명의 4절 노래가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이 역시 이 신문의 자주독립을 각성시키기 위해 ‘무궁화’를 수록했다. 一 셩ᄌᆞ신손 오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기리 보젼셰 二. 츙군 일편단심 북악치 놉고 국 열심의긔 동치 깁헤 三. 쳔만인 오ᄌᆞᆨ 나라랑여 농공샹귀쳔업시 직분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황실 황텬이 도으샤 국민동락 만만셰에 태평독립셰 (순한글판) 一 聖子神孫 五百年은 우리 皇室이요 山高水麗 東半島 우리 本國일세 (후렴) 無窮花 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 大韓으로 길이 保全셰 二. 忠君는 一片丹心 北岳치놉고 愛國는 熱心義氣 東海티 기페 三. 千萬人 오ᄌᆞᆨ 한마 나라랑여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만다셰 四. 우리나라 우리皇室 皇天이 도으샤 國民同樂 萬萬歲에 泰平獨立셰 (국한문판) 한글판과 국한문판에 게재된 전 4절 가사는 앞에서 살핀 1899년 6월 29일자 독립신문 잡보란 방학예식 기사에 수록된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가 한자형 ‘무궁화가’로 바뀐 것이다. 2. 도산본 애국창가집 ‘제14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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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의 가치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3]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9.03 10:57:57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문화재청은 2011년 초 근대음악유물 등록문화재 3편을 공고했다. ‘등록문화재’ 제도는 50년 이상이 지난 것 중 역사, 문화, 예술, 사회 등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급격한 멸실,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2001년도에는 건축물 및 시설물, 2005년도에는 동산문화재 분야에 도입한 제도이다. 이에 따라 근대기의 역사적ㆍ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해 문화재로 등록함으로써 보존ㆍ관리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광복군가집 제1집」(1943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 펴냄), 「애국창가 악보집」(1916년 하와이 편찬 등사본), 「안익태 대한국애국가 자필악보」(1949년 필사) 세 가지를 등록했다. ▲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 이상의 3가지 음악자료는 애국가의 수록을 주목한 자료이다. 처음으로 근대 음악인 애국가의 자료를 국가가 관리하게 된 것으로 바람직한 결과이다. 이 세 가지 자료에는 현 애국가의 해외동포사회 확산과 광복군 수용 사실, 그리고 안익태가 작곡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자료만으로는 현 애국가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부족하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사’으로 시작하는 후렴이 사용된 <무궁화가>가 작사된 것이 1897년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으로 시작하는 가사가 작사 된 것이 1907년이고, ‘애국가’로 민중의 공인을 받은 것이 3ㆍ1만세운동기를 통해서이고, 임시정부 광복군들에 의해 불려 국가적 위상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가사 변화와 보급 상황, 특히 3ㆍ1만세운동 기간에 불린 애국가들의 상황, 많은 ‘애국가’들의 정체성도 함께 밝혀져야 함은 당연하다. 앞으로 더 많은 애국가 자료가 발굴, 정리되어 이 맥락적 간극을 메꿔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동안 발굴된 필사자료들을 주목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이중에 1917년 수집ㆍ정리된 「애국창가집」을 실례로 삼을 수 있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 발굴된 애국창가집 중 애국가류를 인식하고 정리한 자료인데, 이는 1919년 3ㆍ1만세운동 기간 전국에서 불린 다양한 애국가의 존재를 추정 할 수 있게 해 준다. ▲ 「애국창가집」의 안창호 작사 ‘애국가’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애국가류의 작사자나 수집 정리자를 밝힐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까닭으로 1910년대 이후 필사된 자료에 작사자가 밝혀진 것이 없다. 이 자료집에도 각각의 작품 정보가 없음은 물론, 수집ㆍ정리자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자료의 핵심 가치는 ‘애국가’ 명칭 자료와 일반 애국창가를 구분하여 정리ㆍ수록했다는 점이고, 이는 곧 1917년 전후의 ‘애국가’ 명칭 자료의 실상을 알게 한다는 점이다. 전체 29종을 밝힌 목차는 다음과 같다. 애국가 1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 2 애국가-산고수려 동반도는 3 애국가-긴날이 맛도록 4 애국가-동해의 돌출한 5 애국가-만왕 우리하나님계서는 6 애국가-우리나라 동반도난 7 애국가-화려한 강산 우리대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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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4] 안응권, “새 애국가 필요하다”고 박정희에 건의안응권, “새 애국가 필요하다”고 박정희에 건의 작사자 모른다고 “국가와 새 애국가” 개작 청원[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4]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10.17 11:04:2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963년 안웅권(安雄權)은 “전세계적 강국이 시발되기를 위하여 모순된 애국가부터 개창(改唱)하려 국가(國歌) 제정과 애국가를 개작(改作)····”했다며 자신의 작사 국가와 애국가를 담은 청원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발송했다. 1963년 6월 1일자로 국가재건최고회의 대통령권한 대행 박정희 의장에게 「국가제정 및 애국가선개작공개건의서」를 보냈다. 이 건의서의 핵심은 1955~56년에 문교부가 애국가 작사자를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했지만 “안모(安某)와 윤모(尹某) 씨가 유력하다고 했으나 유시무종(有始無終)이어````” 자신이 새롭게 작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경일 등에서 자신이 작사한 국가를 선창(先唱)하고 만세3창 직후 역시 자신이 작사한 애국가를 부르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안웅권의 현 애국가에 대한 비판과 개작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애국가(愛國歌)가 아니라 슬픈 국가 애국가(哀國歌)이다. 둘째 누가 시문작사(詩文作詞)했는지 모르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셋째 가사가 비국적(悲國的)이다. 넷째 1961년 들어 여러 개작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다섯째 5.16군사혁명 과업 완성과 새 공화국의 번창을 위해 맞지 않다. ▲ 순흥안씨 안웅권이 1963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대통령권한 대행에게 보낸 「국가제정 및 애국가선개작공개건의서」 표지, 안응권이 제시한 동일 곡조 <愛國歌 選(改)作>. 후렴은 “無窮花 千萬里 다찾아 빛내세/倍達 全世大國 强國繁榮하세”이다.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비판과 이유를 들어 새 국가와 애국가를 지었다고 했다. 주관적인 비판으로 맞지 않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에서 작사자가 확정 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다고 했지만, 사실은 ‘안모와 윤모씨’를 거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윤치호 작사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결국 윤치호로의 확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매우 치밀한 구상 하에서 국가와 새 애국가를 지어 제시했다. 또한 국가와 애국가를 이원화하여 의식 첫 순서에서는 국가를 부르고, 애국가는 행사 끝에서 만세3창과 함께 부르자고 했다. 제시한 선작(選作) 대한민국 국가와 개작 애국가는 다음과 같다. 大韓民國 國歌 高明檀生 弘益祖國 天地間에 으뜸일세 東邦文化 자랑하며 倍達民族 全世太陽 煉燭盈成 寶王疆土 富國安民 永樂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사 天壤無窮 强榮되리 愛國歌 選(改)作 一 東西南三海 白頭山 天上에 닿도록 하나님이 같이하사 우리나라 永存 東山上에 저 美庵들 언제나 보아도 金剛같은 民族正氣 倍達尊嚴 일세 후렴 無窮花 千萬里 다찾아 빛내세 倍達 全世大國 强國繁榮하세 二 높은하날 淸明한데 高曠구름없이 맑은太陽 우리衷心 民族象徵일세 億兆萬代 昌盛토록 廣大자랑하며 樂苦우나 金剛精氣 不變奉國하세 상투적인 한문투가 오히려 비속하게 읽힌다. 당시 박정희 혁명정부가 채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원자 안웅권에 대해서는 다른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안익태, 안창호와 같은 순흥 안씨임과 1985년 2월 청원법 위반 사건에 연류 되어 지상에 이름을 올린 인물로 추정될 뿐이다. 이때의 청원법 위반 사건은 당시 사회문제가 된 ‘상습적 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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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18 11:34:5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우리들의 8월은 ‘애국가의 달’이다. 해방과 광복과 정부수립이란 역사적인 기념의 달이기에 가장 의미있게 애국가가 불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월에는 애국가의 역사를 한 번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현<애국가>를 수록한 첫 문헌은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초판은 1907년으로 추정되나 미확인)이다. 비록 현<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류와 영미(英美) 찬송가 12편을 수록한 18쪽의 소책자지만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 애국가를 수록했고, 개화기 출판물이고, 발행사가 광학서포이고, ‘역술(譯述)’ 같은 출판 용어를 사용한 점 등으로 그렇다. 음악인이 아니면서 학생들을 위해 제한적인 목적으로 발행 된 무곡보(無曲譜) 애국창가집이다. 지금까지 이 자료는 공식적인 영인 출판이 되지 않은 탓인지 창송가사(讚頌歌史)에 한정된 석사 논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찬미가》의 개론적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최초의 서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司書) 윤학구의 <해제 찬미가(解題 讚美歌)>의 일부다. “윤치호(尹致昊) 저(譯述), 융희(隆熙) 2년(1908), 활자본(金屬活字) 1책, 17.5cm x 12.5cm 18p, 장정(裝幀) 적황색(赤黃色) 표지 湖附裝. 이 자료는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의 인쇄도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월간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1970, 7호, 52쪽) 이상의 내용은 《찬미가》에 대한 최초의 해제(解題)로 네 가지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이 책이 1912년 총독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준다는 것이다. 둘은 이 시점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소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원본이 확인되지 않고 사본(寫本)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셋은 초판 발행 시기를 재판 발행 1년 전인 1907년으로 추정한 사실이다. 현재 초판이 발굴 되지 않아 1905년설, 1907년설이 대두 된 상태로 아직 단정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책을 통해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후의 다양한 윤치호 작사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로 애국가 가사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임중빈(任重彬/1939~2005)이 쓴 <새 자료로 보는 좌옹 윤치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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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애국가, 최초의 곡명은 ‘찬미가 14장’이다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2]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18 11:34:59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우리들의 8월은 ‘애국가의 달’이다. 해방과 광복과 정부수립이란 역사적인 기념의 달이기에 가장 의미있게 애국가가 불리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월에는 애국가의 역사를 한 번쯤 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을 살피기로 한다. 현<애국가>를 수록한 첫 문헌은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초판은 1907년으로 추정되나 미확인)이다. 비록 현<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류와 영미(英美) 찬송가 12편을 수록한 18쪽의 소책자지만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 볼 가치가 있다. 애국가를 수록했고, 개화기 출판물이고, 발행사가 광학서포이고, ‘역술(譯述)’ 같은 출판 용어를 사용한 점 등으로 그렇다. 음악인이 아니면서 학생들을 위해 제한적인 목적으로 발행 된 무곡보(無曲譜) 애국창가집이다. 지금까지 이 자료는 공식적인 영인 출판이 되지 않은 탓인지 창송가사(讚頌歌史)에 한정된 석사 논문의 대상이 되었을 뿐 특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제 《찬미가》의 개론적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최초의 서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국립중앙도서관 사서(司書) 윤학구의 <해제 찬미가(解題 讚美歌)>의 일부다. “윤치호(尹致昊) 저(譯述), 융희(隆熙) 2년(1908), 활자본(金屬活字) 1책, 17.5cm x 12.5cm 18p, 장정(裝幀) 적황색(赤黃色) 표지 湖附裝. 이 자료는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의 인쇄도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월간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1970, 7호, 52쪽) 이상의 내용은 《찬미가》에 대한 최초의 해제(解題)로 네 가지 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된다. 하나는, 이 책이 1912년 총독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려 준다는 것이다. 둘은 이 시점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이 책이 소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현재 이 책은 원본이 확인되지 않고 사본(寫本)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셋은 초판 발행 시기를 재판 발행 1년 전인 1907년으로 추정한 사실이다. 현재 초판이 발굴 되지 않아 1905년설, 1907년설이 대두 된 상태로 아직 단정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이 책을 통해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단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후의 다양한 윤치호 작사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로 애국가 가사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임중빈(任重彬/1939~2005)이 쓴 <새 자료로 보는 좌옹 윤치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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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1] 윤치호 생애와 애국가류 3가지윤치호 생애와 애국가류 3가지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11]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7.08.03 11:02:2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윤치호는 세 가지 애국가류를 작사했다. 1897년 이전에 <KOREA>를, 1897년 <무궁화노래>를, 1907년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작품을 애국찬미가 모음집인「찬미가」에 12편의 번역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여 발행한 것이 1908년(재판)이다. 이 때 창작 3편을 12편의 번역 찬송가와 함께 수록하게 됨으로서 「찬미가」 판권(板權)에 윤치호 ‘저(著)’나 ‘저술(著述)’ 또는 ‘역(譯)’이나 ‘번역(飜譯)’ 아닌, ‘역술’(譯述)이라고 밝혔다. 대부분 번역하고 나머지는 창작으로 이뤄졌다는 개화기적 출판 용어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작품은 일본, 중국, 미국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895년부터 1907년 사이에 각기 다른 시기와 목적과 상황에 의해 작사되어 유통ㆍ전승됨으로서 작사자 표기나 작사 당시의 기능이나 작품명도 고정되지 않은 채, 일정 기간 함께 또는 길항(拮抗, 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항함)하며 국내와 해외에서 독립운동 전선에서 유통되었다. 특히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는 내놓고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 되어 의도적으로 또는 자연스럽게 작사자도, 작사 시기도, 작품명도 달리 구송(口誦)과 기록(記錄)이 되다 1945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1908년 재판으로 발행된 「찬미가」도 같은 운명이었다. 총독부의 금서 처분으로 유통이 금지되어 개인 소유도 불온자(不穩者)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폐기해 버렸다. 특히 1945년까지 ‘애국가’ 자체가 금지된 노래이었음으로 당연히 이 책의 유통은 폐쇄되어 세 작품의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과 각각의 정체성은 발휘되지 못했다. 국내에서는 일부에 ‘애국가’로 통칭되거나 윤치호 작이라는 정도만 전해졌고, 해외에서는 1914년 화와이 교민 발행의 《태평양잡지》에서 총독부가 판매금지 처분을 내려 금서가 되었다는 사실과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기록하는 정도였다. 또 한편 임시정부 같은 곳에서는 존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작사자를 ‘실명(失名)’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이 40여년의 세월은 이 세 작품에 대해 왜곡과 와전을 낳아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조차 ‘미상(未詳)’에 빠지게 하였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남기고 윤치호는 애국가를 남긴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김을한, <애국가만으로도 할 일을 하였다>, 연합신문, 1959년 11월 27일자) 그래서 언론인 김을한(金乙漢/1905~1992)이 이렇게 대놓고 선언하게 된 것이 1959년 이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윤치호 작사 3편의 애국가류 작품은 개화기 시가작품으로나 애국가 역사에서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필요성에서 우선 세 작품의 작사 배경으로서 윤치호의 생애를 정리하고자 한다. 작사 배경으로서의 생애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첫 관직생활을 하는 1895년 초부터 「찬미가」가 발행되는 1908년까지가 된다. 첫 작품 <KOREA>는 1897년 8월 13일 낮 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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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6] 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2)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2)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6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3.28 08:52:1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일제강점기 ‘애국가 사건’은 주로 학생들과 관련한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이 애국가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검거된 경우나 교사가 애국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사실이 들켜 사건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신문과 총독부 조사보고서류에 기록된 애국가 사건들이다. 하동 보통학교 ‘애국가’사건 1923년 10월 2일자 「조선일보」에는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준 이두석(李斗錫)이란 인물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두석이 하동군 량보면 여의리 주재소에 근무하는 홍판일(黃判日)이란 주재소원에게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 주었는데, 그것이 다른 주재소원의 눈에 띄어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만으로는 위의 보도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사건은 지방 곳곳에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학습장조차도 철저하게 검색했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 필자 소장 자료 중 「공민학교 교장 시험 문제집」<제1종․2종>이란 공책에 ‘애국가’ 1절이 연필과 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런 노래는 인쇄 될 수 없었음으로 이같이 잡기장 속에 기록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총독부는 잡기장까지도 검색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앞에서 살핀 소안도 민족 운동기에 투옥자가 많았음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사립학교 학생 중 소안도내에서 일경에 피검되어 고문을 당한 사례에서 창가책이 매개가 된 사건이 제일 많았던 점으로 보아 소안도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민족운동 노래를 열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철필이나 연필로 애국가를 써서 한복바지 가랭이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그가 베껴준 창가 책을 학교 옆 주재소 앞을 지나다가 빠뜨렸다. 주재소 순사가 보니까 애국가가 많이 써졌는데, 한쪽에 김만득이라고 쎠져서…” 이 증언에서 이들이 특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애국가’ 명칭의 것이었고 일제는 역시 이를 단속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의 ‘애국가’ 1928년 4월 27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애국가’가 불렸다. 이때 사회를 보았던 3학년 학생 김형규(金炯奎)가 평양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매일신보> 기사를 살펴본다. ▲ 신입생 환영회에서 애국가를 불렀다고 일본 경찰은 학생을 구속하였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평양-부내 사립숭실전문학교 생도 모난 지난 3일 평양서에 검속되야 취조를 당하는데 동학생은 수일 전에 동교강당에서 열린 신입학생환영회에 구한국시대의 애국가를 부른 것이 발견되야 검속되었다더라.”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이다. “신입생 환영회를 마친 후 다과회를 시작할 때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창가를 일동이 불렀는데 이 창가는 본래 조선애국가로 '조선xxx'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야 그 사회자이든 전기 김형규씨를 구인하고 엄중한 취됴를 하는 중 지난 2일은 동교 학생회의 수명을 증인으로 심문하였다더라.” 이 기사로 보아 당시 일본 경찰은 요시찰 대상 학교에 신입생 환영회까지도 사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를 '조선xxx'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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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5] 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1)애국가 탄압, ‘애국가 사건’들(1)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5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3.13 11:42:51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일제는 애국가와 태극기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3.1운동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항일시위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총독부는 <애국가>류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바로 1910년 10월 내무부 학무국 명의로 <축제일 약해>를 만들어 태극기나 애국가에 대한 검속을 강조했던 것이다. ▲ 2011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475호. <애국창가>. 이 책에는 무궁화가·애국가 등 70여 편의 애국창가가 수록되었다. “사립학교 중에서는 창가나 그 외의 다른 것으로 독립을 고취하며 일본으로의 반항을 장려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사용을 허락지 않았으므로 취체(取締)상 가장 주의를 요한다.” 또한 총독부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모든 교육과정에 학습케 했고, 일장기 게양을 의무화 했다. 이와 함께 ‘황국신민의 서사’를 아침마다 제창케 하고 ‘애국일(愛國日)의 노래’(일본군에 감사하는 황국신민이 되자는 내용을 담은 노래)’ 부르기와 궁성요배(일왕의 황궁을 향해 절 하는 것), 정오의 묵도(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묵념), 신사참배, 가미다나(집안에 놓는 신을 모시는 신단)의 설치, 일어상용, 시국 좌담회 개최 등을 정례화하여 일상화 시켰다. 뿐만 아니라 학교의 교가나 교명이 민족적인 뜻을 담고 있으면 그것도 폐지시켰다. 실례로 <보성전문학교>의 ‘보성’(普成)이 일본어로는 ‘후세이’로 한자음으로는 “부정(不正)”이란 뜻이 되어 이를 개명하라고 강요하여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바꾸게 한 사실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화’(梨花)가 이왕가(李王家)의 문장(紋章)이므로 민족적인 뜻이 담겨 있다고 트집을 잡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도록 했다. 그런가하면 ‘사립.(私立)이라는 말에 자주의식이 배어 있다는 이유로 쓰지 못하게 했고, 학교 모표(帽標)를 무궁화로 했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못하게 강요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찍이 창가(음악)분야에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1910년에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부곡(附曲) 창가집으로 조선시대의 창가집이기도 한 《보통학교 창가집》 제1집에 우리의 전통 민요는 한 가지도 담지 않고 일본 창가 교육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는 음악 교재에서 마저도 민족의식을 말살하려한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창가 집은 1881년에 일본에서 발행한《소학창가집》 가운데서 27곡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당연히 통감부의 관여에 의한 결과였는데, 이것은 다시 명치(明治) 44년에 정정판(訂正版)으로 발행될 때 일부를 바꿔 조선총독부 편으로 내기도 했다. 또한 1914년 총독부가 발행한《신편창가집》에서는 기미가요 등을 게재하여 본격적으로 학습을 강요했던 것이다. 또한 찬송가도 세세히 감찰하였다. 당연히 민족주의를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기준으로 삭제 하거나 사용을 금지시한 것인데, ‘주의군대’(개편「찬송가」․381장)가 그 한 예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애국가를 부르도록 그냥 두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애국가를 탄압한 사건들이 수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해외 교민사회나 임시정부 그리고 독립운동 단체에서 국가(國歌)를 대신하여 불리는 상황이었기에 국내에서 더욱 탄압을 했다. 두말 할 여지없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곧 항일, 애국, 독립운동이었다(<선언서 낭독, 애국가 고창>, 조선일보, 1926, 11, 6) 이제 애국가 사건들을 통해 그 탄압상을 확인하기로 한다. 애국가 사건 1924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애국가 사건”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애국가 사건으로 잡힌 로희성(盧熙星. 30) 시내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근일에 시내 종로 삼정목 구십삼 번지 사는 로희성을 체포하야 비밀리에 취조 중이라 하며 시내 청진동 청진여관에서도 한명을 인치하야 취조한다는 데 들은 바에 의하면 모다 지난번 애국가 사건에 관련된 것인 듯하다 더라.” ▲ 1924년 5월 12일 동아일보에 난 "애국가 사건" 기사 기사 제목 자체가 ‘애국가 사건’이라고 한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 ‘애국가’와 관련하여 체포되거나 취조당하는 것 자체를 모두 애국가 사건이라 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런 사건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앞선 보도는 확인이 되지 않아 구체적인 배경을 알 수는 없으나 ‘범인’의 나이가 30세가 된 것으로 보면 보통학교나 전문학교 학생은 아니다. 또한 지방이 아닌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조직적인 항일운동단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해주형무소 애국가 사건 1923년 임시정부의 연락 업무를 갖고 국내에 잠입 했다 체포, 수감된 요원 20여명이 1923년 4월 10일 임시정부 창립 일을 맞아 옥중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것이 문제가 된 사건이다. 해주 형무소 서흥 분서에 수감된 이들이 ‘임시정부 구립 기념식을 하는 것이 옳다 하고 22명이 일제히 ‘대한애국가(大韓愛國歌)’를 높이 불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간수들이 이중 세 명을 폭행하여 중상을 입혔고 이에 수감자들은 단식 투쟁으로 저항하여 나흘이 지나 거의 실신하게 된 사건이다. 그래서 ‘감옥 관리가 빌어 단식을 중단’했다. 한편 이 자료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1920년대 ‘애국가’를 ‘대한애국가’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대한’ 또는 ‘한국(韓國)’이란 국호를 붙인 것은 그것이 국가의 의미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소안도(所安島)의 항일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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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2] ‘애국가’인가 ‘국가’인가?‘애국가’인가 ‘국가’인가? 김연갑의 애국가를 찾아서 2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art-arirang@hanmail.net> 등록 2015.01.24 09:00:06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국가(國歌/National Anthem)는 국호 대한민국·국기 태극기․국화 무궁화와 함께 노래로서 나라를 표상하는 국가 상징물의 하나이다. 추상적인 대한민국을 구체적으로 역사성과 이념을 가사와 선율로 나타낸 것이다. 이로서 국가는 부르는 이에게 민족 정서를 통해 이념을 일체화 시켜 연대감과 동질감을 갖게 하는 것을 첫 째의 기능으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기능음악이거나 정치음악이지 감상을 위한 절대음악은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가는 ‘애국가’(愛國歌)다. 이 애국가는 국가 고유 곡명이면서 동시에 나라를 사랑하자는 계몽가로서의 명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기능상으로는 ‘나라의 유일한 제도적 노래’인 국가이면서 ‘나라를 사랑하자는 계몽적 노래’(Patriotic Hymn)의 하나인 애국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National Anthem인 동시에 Patriotic Hymn이고, 명칭은 <Ae-kuk-ga>인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 국가와의 차이이기도 한데, 그러므로 정확한 표기는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라고 하고, 식순에서도 ‘국가 제창’이라고 해야 옳다. 우리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라고 하지 않고 ‘국기에 대한 경례’라고 하듯이 ‘국가 제창’ 또는 ‘국가 애국가 제창’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을 하면 오늘날 우리가 의식에서 표현하는 ‘애국가 제창’이라고 하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에서부터 ‘아리랑’은 물론 북한의 ‘애국가’도 포함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나라든 국가는 하나지만 애국가는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일각에서는 ‘우리는 국가(國歌) 없는 국가(國家)’라며 국가를 빨리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 했고, ‘애국가는 차라리 아리랑으로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런 주장은 다른 이유와 명분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가 ‘애국가’라는 곡명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곧 ‘국가 애국가’라는 표현에서 느끼듯이 제도적 기능(위상)명과 곡명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국가 아닌 애국가일 뿐’이라고 잘못 이해한 결과라는 것이다. 굳이 국가와 애국가를 동일시하는 중의적 표현을 쓴 데는 구한말 민족 구성원들 나름의 합의가 있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상황에서 애국하여 나라는 지키는 것이 우선이지 권위적인 국가의 필요성은 두 번째라는 인식이 강하여 ‘애국가’를 ‘국가’로 동일시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명확한 증거는 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자 논설에서도 공공장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불러야 한다고 했고, 이를 전후하여 독립신문이나 각종 학교나 교회에서도 많은 애국가류를 창작하여 불렀던 것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1897년 8월 17일자 독립신문의 ‘대조선 개국 오백오회 기원절 축사’ 기사에 나타난 ‘무궁화노래’(윤치호 작사)를 이후 민중들이 이를 부르면서 곡명을 ‘애국가’로 고처 불렀다는 사실이다. ▲ -1902년 대한제국 반포 <대한제국애국가> 독일어 본 표지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양악식으로 편곡하고 귀국하여 궁정음악가로 복귀한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를 초빙하여 작곡하였다. 또한 조정이 독립신문 등의 애국가 운동을 받아들여 1902년 공식 제정 반포한 국가 명칭이 ‘대한제국 애국가’(Koreanischen National Hymne)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독립신문 편집진 같은 지식 그룹이나 이를 수용한 민중들이나 이를 반영한 대한제국 정부도 국가를 애국가로 동일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애국가에 대해 부연하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후렴이 쓰인 최초의 명칭은 ‘무궁화노래’였다. 이 후렴을 계승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가사로 고처 발표한 것은 1908년 ‘찬미가14장’이다. 그러니까 작사자는 ‘무궁화노래’와 ‘찬미가14장’이란 곡명으로 발표했지만 민중들은 이를 ‘애국가’로 주체화 하였다는 말이 된다. 즉, 대한제국 시대나 임시정부 시대나 해방 후나 오늘이나 완전한 독립(통일) 국가를 이룰 때까지는 먼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합의인 것이다. 이는 오늘의 우리가 애국가를 단순히 의례적이거나 또는 ‘강요된 애국심’으로 부르는 것에서 매우 무거운 역사의식을 갖고 불러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