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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 아리랑 연구자 김연갑 선생님과의 만남 (문학광장, 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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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

[신문방송] 아리랑 연구자 김연갑 선생님과의 만남 (문학광장, 2007-12-18)

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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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에게 배운 일이 없음에도 우리는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가끔 흥얼거린다. 또 그 노래가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아리랑이야말로 우리가 몸으로 들어서 배우고 익혀 또 다시 누군가에게 불러주는 자장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처럼 아리랑은 노래이면서, 아쉬움이면서, 따뜻함이면서 미련이 한데 어우러진 우리들 속의 한 노래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아리랑에 대한 이제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이런 아리랑을 나는 과연 어데서 불러본 적이 있을까? 아직은 아리랑을 목 놓아 부를 만한 어떤 계기가 나에겐 특별히 없었던 듯하다. 그렇게 오래된 노래를 어찌 내가 한 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아리랑은 나와 같은 젊은 세대의 노래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저 아리랑은 전통문화복원을 위한 수많은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쯤으로 듣고 있었던 같다. 그래서 아리랑 연구자이자 운동가이신 김연갑 선생님(아래 사진)을 만난 것은 이전까지 알고 있었던 아리랑에 대한 나의 이런 관념을 수정할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방송(KBS1 라디오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 해설)이다, 원고 집필이다, 공연기획이다 해서 바쁘시지요. 근황이 어떠신지요? 요즘은 어떤 일에 관심을 두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 네, 안녕하세요. 북한은 2002년부터 ‘아리랑 축전’이라는 행사를 준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당시 대집단 체조라는 대규모 행사를 하면서 ‘태양’이라든가, ‘빛’이라든가, ‘별’이라는 것을 상징화하여 북한 통치자들을 부각시켰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상징들을 사용하는 대신에 ‘아리랑 민족’이라는 표현을 썼지요. 이는 엄청난 변화예요. 우상의 대상이 한 개인에서 민족으로 바뀐 것이죠.

1990년 남북이 단일팀으로 구성되어 단가(團歌)를 만들었고 이후 남북한이 ‘제3국에서 함께하는 모든 일에서는 아리랑을 부르자’ 했던 이 단가는 동서독이 통일이 됐을 때 그들의 단가가 어느덧 국가(國歌)가 된 것처럼, 우리에게도 통일 이후에는 이 단가인 아리랑이 국가(國歌)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저는 통일 이후에는 이 아리랑이 새로운 국가(國家)의 국가(國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시절,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과 북의 통일 문제를 넘어 분단으로 인해서 희생된 러시아 동포, 중국 동포, 일본 동포들을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일 것인가의 문제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고 얘기했지요. 다행스럽게도 이들 교포 2세, 3세들은 우리말을 잃어버리긴 했으나 아리랑만큼은 거의 잊지 않았지요. 통일 이후엔 이 아리랑이 이들을 껴안는 어떤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은 아리랑을 국가(國歌)로 하자고 합의를 보았다고 하네요. 다만 가사의 일부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란 표현이 마땅치 않으니, 이 문제는 서로 연구해서 잘 풀기로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얘기 같지만 이런 대화를 나눈 그분들의 위치는 결코 사적이지 않았죠. 이런 것으로 보면 아리랑은 남북문제를 푸는 아주 중요한 ‘동질성의 고리’ 인자가 아닌가 싶어요. 도대체 아리랑이 무엇이기에 그 바쁜 와중에서도 두 분은 아리랑 얘기에 몰두했을까요?

또 판문점이라고 하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냉정한 사안들이 오가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아리랑’이라는 단가(團歌) 문제만큼은 남북 모두의 의견합치를 보았을까요? 이제까지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그 어떤 회담도 1안부터 시작해서 5안까지 이르러서도 합의가 안 된 일이 많아요. 그런데 유독 이 단가(團歌) 문제만큼은 똑같이 1안으로 제출되어 받아들인 것이죠.

1953년 7월 17일 휴전회담 시, 중공군, 북한군과 미군이 휴전협정 사인을 하고 악수도 나누지 않고 묵묵히 헤어져 돌아서는데, 양측 군악대가 동시에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다고 해요. ‘아리랑’이 그날 있었던 휴전협정의 ‘마지막 도장’을 찍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남측이 참여하지 않은 사인, 합의, 휴전협정은 결국 미완성이었는데 양쪽에서 아리랑을 연주함으로써 오늘의 이 역사적인 문제는 중공군과 미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문제’라는 것을 회담장을 차지한 중공군과 미군에게 각인시켜 준 거죠.

민족문제에 있어서도 아리랑은 묘한 염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민족의 문제를 아리랑으로 풀어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매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남과 북이 함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이 아리랑을 ‘어떻게 함께 나눌 것인가’, 그리고 DMZ라고 하는 냉전을 상징하는 공간을 어떻게 새로이 상징화할 것이냐, 하는 등등의 고민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지난해에 ‘제1회 DMZ 아리랑 평화 페스티벌’이라는 축제를 열었죠. 정말로 아리랑만을 가지고 한 공연이었죠. 내리 2시간을요. 역사 이래로 이런 일은 없었죠. 하나의 단일한 노래로 축제를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아리랑은 가능했어요. 왜냐하면 북한 아리랑도 있고 울릉도 아리랑도 있고, 진도, 밀양, 기타 등등 50여 가지의 아리랑이 있었으니까요. 또한 그날의 아리랑은 여러 장르로도 확산이 되는 날이었지요. 소리 공연에서 회화까지 모두 펼쳐졌지요. 타악기 공연, 아리랑 회화, 현대무용, 전통무용 등 동서양 악기가 한데 어우러진 퓨전 아리랑 등이 신명나게 소개되었지요.

 선생님이 하시는 방송 <다큐멘터리 역사를 찾아서>의 해설은 재미있는 일인 것 같은데요?

 김태준의 1934년 지론을 보면, <청산별곡>의 여음(餘音, 후렴)은 결국 아리랑과 상통한다고 보고 있지요. 내용의 선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리랑과 <청산별곡>은 직결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보면 아리랑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불려온 노래입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이 매듭이 좀 단단히 묶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를 풀어내는 어떤 단서를 우리 조상들이 분명 우리에게 남겼을 거라는 것이죠. 단서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랜 기간 방치해 뒀거나(무심했거나) 그 열쇠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 자신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런저런 공부를 하다 보니, 38도선이라는 것도 임진왜란 때 이미 중국과 일본이 암암리에 얘기했던 부분이란 것까지도 알게 됐죠.

역사에 고비가 생기는데 그 고비의 원인은 훨씬 앞선 역사에 이미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못 찾았기에 고비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지요. 지금 하고 있는 라는 프로그램은 고대사 부분부터 다뤄 지금은 신라시대까지 내려오고 있어요. 방송을 하면서 저도 많이 배우고 있는 프로예요.

아리랑에 대한 제 생각은 이래요. 사람들은 아리랑이 자신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잘 안 들어요. 또 아리랑과 관련해서 얘기를 하다 보면, 특히 학술적인 얘기가 나오면 일반인들은 ‘아리랑이 뭐 이렇게 어려워!’ 하면서 불편해해요. 역사에 대한 관심도 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동북공정과 같은 문제는 일반인들은 알기 힘들어요. 연구자들끼리만 소통하는 얘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문제를 다수의 국민과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아리랑 석박사학위자들이 얘기하듯이, 아리랑의 작시법이 따로 있어서 우리 할머니들이 그 옛날의 ‘아라리’를 불렀을까요? 그건 아니지요. 아리랑과 관련한 여러 논문은 언뜻 보면 제 자신도 모르는 얘기가 많아요. 그 논문을 우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죠. 그렇다면 그걸 내가 공부를 해서 마치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주자는 것이 제 소임이지요. 저는 그런 마음으로 역사와 더불어 아리랑을 함께 공부하고 있는 중입니다.

 

2006년에 있었던 ‘제1회 DMZ 평화 페스티벌’은 어떻게 해서 열렸나요?

= 북한의 경우는 아리랑 축전을 하는데, 그럼 우리 쪽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에 상응하는 것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죠. 그런데 이미 우리의 경우 이러저러한 축제를 합쳐서 거의 6백 몇 개가 넘는 축제가 있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아리랑이라는 축제를 던져놓아도 보통 사람들은 시큰둥한 거예요. 다만 북한 아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만 갖고 있더라고요. ‘자, 그럼 우리 남쪽에서 이러한 아리랑 축제를 만들 테니까 당신들이 한번 와서 보시오. 그리고 이 축제를 보고 북한 아리랑과 한번 비교해 보시오.’ 하는 마음이었지요. 기준이 있어야 북한이 잘 한다, 못 한다,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준비를 한 것이 ‘제1회 DMZ 평화 페스티벌’이었죠. 그런데 축제가 열리기 전까지는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장소 마련도 힘들었죠. 아리랑을 사랑하는 이들의 염원이 있었기에 성사될 수가 있었죠. 축제는 2002년부터 준비해서 2006년인 작년에 이뤄졌죠. 그것도 강원도가 DMZ지역을 관광화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어서 가능했지요. 그렇지 않았으면 아리랑 공연은 힘들었어요. 아리랑 축제의 마당에는 장사익, 김영임 선생님을 비롯하여 팔도 아리랑, 진도, 밀양, 정선 아리랑 등이 선보였죠.

 선생님은 언제부터 아리랑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요?

= 전 어려서부터 아주 가난하게 살았어요. 어머니가 피난 와서 절 낳으셨죠. 당시에 할머니는 며느리인 어머니한테 왜 이 어려운 시국에 애를 가졌느냐고 하셨대요. 어서 애를 떼라고 호통을 치셨나 봐요. 농사일로 정신없는데 며느리가 애를 가졌으니 화가 나신 거예요. 어머니는 아이를 떼려고 많은 노력을 한 것 같아요. 결국은 아이를 못 떼고 낳은 거죠. 그 덕에 제가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같고요. 어머니는 보리밭에서 일하시다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절 낳으시고 스스로 태를 잘랐다고 해요. 그리고 다시 밭에 가서 일하셨대요. 그런데 그날 일을 하시다가 목이 말라서 벌컥벌컥 들이켠 찬물 때문에 산모와 저는 한 삼 년을 앓아누웠다고 해요. 그 이후로 젖도 제대로 못 먹고, 전 잔병치레를 참 많이 했고요. 또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는 가난 때문에 불화가 많았대요. 집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까 할머니는 당신의 친정집으로 절 데려가는 일이 많았어요. 할머니의 친정집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가는 아주 먼 곳에 있었지요. 마냥 걷다 날이 저물면 전 할머니와 성황당 같은 데서 잤어요. 또 어떤 날은 절에서 잘 때도 있었고요. 당시의 저는 또래 아이들보다는 일찍 세상을 알아버렸구나 하는 느낌이 있어요. 할머니가 주무시면 혼자서 스님이 염불하는 거나, 혹은 성황당에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것 등등의 일들을 죄다 봤죠. 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절에서 스님이 몇 시에 일어나 뭐 하는지를 세세하게 다 알고 있었죠. 그래서 학교 들어가서도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여선생님이 오늘은 어떻게 꾸미고 오시는지 이런 데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대신 음악은 좀 좋아했던 것 같아요. 당시 제 둘째 형님이 큰형님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서울시청에서 구두닦이 일과 이발 일을 하셨어요. 그 형님이 일 년에 두세 번씩 고향으로 내려오셨죠. 형님은 오실 때마다 인형하고 미군들이 갖고 노는 트럼프 같은 걸 갖고 왔어요. 그런데 하루는 형님께서 하모니카를 내 앞에 꺼내놓는 거였어요. 그 하모니카 소리가 참 좋았어요. 그런데 형님은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올라갔으니까 아는 노래가 없는 거예요. 단 하나, 아리랑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 아리랑이 당시 제가 아는 음악의 전부였죠. 그때 제가 다니던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6. 25때 부상을 입으신 분이었어요. 손가락이 하나도 없는 분이셨죠. 그래서 풍금을 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음악을 들을 수 없었죠. 그리고 전교생이 30명인 시골 학교다보니 2학년부터 졸업할 때가지 한 분이 다 가르쳤죠. 그래서 제가 아는 음악이란 것이 ‘애국가’, ‘3.1절 노래’, ‘8.15노래’, ‘교가’, ‘아리랑’이 전부였지요. 그리고 이 중에서 제가 하모니카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었죠. 이처럼 아리랑은 제 유년기에 있어서 세상의 전부였죠. 지금 생각하면 그 처음의 아리랑은 참 칙칙한 아리랑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아리랑이라는 것은 꼭 그런 느낌만은 아니더라고요. 당시 저는 형님을 생각해서라도 뭔가를 해야지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아리랑을 부르곤 했지요. 아리랑은 내 가슴속으로 칙칙하게 왔지만 결국에는 내가 일어설 때는 반드시 이 아리랑으로 일어서리라 생각했지요. 지금은 할머니들이 3.1운동 현장에서, 또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왜 이 아리랑을 그토록 불렀을까 하는 수수께끼를 조금은 알 듯싶어요.

  ‘아리랑연합회’ 출범과 그동안 협회가 이룬 성과들이 궁금합니다.

 = 1994년 무렵부터 전국적으로 ‘기행문’이 유행이었습니다. 유홍준, 고은, 신경림 선생님 등의 활동이 많았던 시절이죠. 그 무렵 고은 선생님이 주축이 돼서 ‘아리랑 기행단’이 만들어졌어요. 또 국립극장 단장이셨던 허규 선생님과 나운영 선생님 같은 분들은 이미 ‘아리랑 모임’을 만들어 스터디를 하고 있었지요. 이런 분위기의 결과로 1995년 국립극장에서 제1회 아리랑 축제라는 것이 열렸지요. 당시 고은, 허규, 나운영 선생님이 모인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서 이 아리랑을 하나로 통합해서 ‘전국아리랑보존협회’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얘기가 나왔죠. 한 선생님이 그렇다면 젊은 친구인 김연갑이 이 아리랑을 앞장서서 끌고 나가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셨죠. 그래서 회장 없는 사무국장체제로 ‘아리랑보존연합회’라는 것이 만들어진 것에요. 이후 정식으로 발족이 되었고요. 그러니까 ‘아라랑보존협회’는 고은, 허규, 나운영, 최서면 박사, 김연갑, 정선의 김병하, 진도의 박병훈 선생님들, 이런 분들이 아리랑으로 만나 만든 것이죠.

법인 차원에서 한 일들이 참 많아요. 그 중에서 진도, 밀양, 정선, 영천, 울릉도, 제주 지역에서 아리랑 축제가 열릴 수 있도록 했지요. 지역공동체의 한 구심력을 갖는 노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요. 또 아리랑이 보다 많이 불리는 지역의 노래를 축으로 축제 같은 행사를 만들어보자 해서 시작한 일이죠. 아리랑이 주제가 되는 축제를 위해서 저는 전국 팔도를 열심히 돌아다녔죠. 물론 정선 같은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오던 행사였지요. 이런 경우에는 그 축제의 외연이 확대되고 내연이 충실한 축제가 되었지요. 진도아리랑 축제, 밀양아리랑 축제, 성북아리랑 축제, 영천아리랑 축제 등은 원래 다른 이름의 축제였는데 ‘아리랑 축제’라는 이름으로 승격돼서 독립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또 그동안 아리랑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대회를 10여 회 정도 했어요. 이것도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또 개인적 일들이기는 하지만 아리랑 관련 자료집 및 기타 책들을 10여 종 출간했고요. 또 그동안 이곳과 인연을 가지셨던 분들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결과도 있네요. 그동안 여기서 아리랑을 주제로 한 논문을 써서 박사 4명, 석사가 20명이 나왔죠. 협회차원에서 이 분들에게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했으니까요.


  

 <사진 위는 아리랑 음반들>

 ‘아리랑’은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리랑의 맨 끝부분을 이야기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아리랑의 처음을 얘기하라면 못 할 것 같아요. 제 자신도 참 묘하더라고요. 다만 요즘에 이르러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남과 북, 그리고 35개국에 흩어진 우리 동포들에게 너희들이 생각하는 단 하나의 민족의 노래를 꼽으라고 했을 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리랑을 꼽았다는 사실에요. 저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제가 확실히 조사를 해봤어요. 아리랑은 가장 흔한 노래이지만 결국에는 맨 마지막에 우리가 한국인이며 조선인이며 까레이스끼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는 노래, 그런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리랑은 ‘존재 증명의 노래’라고 볼 수 있어요.

노수복이라는 정신대 할머니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숨긴 채, 필리핀에서 40년을 살아오신 분이었죠. 그런 할머니께서 ‘내가’ 조선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마지막 방법으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해요. 또 훈 할머니도 그렇고 심지어는 입양아 수잔 브링크 양도 우리말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아리랑은 기억해서 우리와 같은 민족임을 증언했어요. 결국 우리가 한국인이며 북한인이며 일본에 있는 조선인이며 러시아에 있는 까레이스끼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가 곧 아리랑이라는 것이지요. 어느 누가 그 어디서 아리랑을 부르면 우리는 그를 한국인, 혹은 조선인으로 인정해 줄 거라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리랑이라는 것은 노래, 혹은 민요라는 것에 국한시켜서 해석하지 않아요. 아리랑은 우리의 상징 그 이상이에요.

 그동안 발표하신 ‘연구논문’과 ‘저작들’에선 무엇을 말씀하셨는지요?

 = 남과 북은 1956년부터 단일팀을 만들려고 노력했지요.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단일팀 성사는 쉽지 않았지요. 그런 와중에도 남북의 단가는 아리랑으로 채택되었고요. 북한도 ‘아리랑’만큼은 거부하지 않았지요. 저는 이러한 아리랑이 북한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했어요. 이런 물음을 갖고 2000년부터 시작한 연구는 2005년에 이르러 <북한아리랑>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보았지요. 북한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독립활동을 하시던 분들이 아리랑을 많이 불렀던 점, 아리랑을 곧 항일운동의 동지로 보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아리랑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거예요.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중국동포들이 부르는 아리랑은 북한아리랑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중국과 교류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중국동포들과 북한은 이전부터 계속 교류가 있었던 것이죠. 이런 교류로 인해서 중국동포들이 부르는 영천아리랑, 경상도아리랑, 기쁨의 아리랑, 장백산아리랑 등을 북한이 똑같이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죠. 사실 이런 아리랑들은 우리도 잘 모르는 아리랑들이죠.

북한은 항일운동가들이 부른 아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반면 우리는 해방 후, 광복군이 주력부대로서의 역할을 못 하다 보니 중국에서 활동하던 노래나 그들의 문화가 군대문화로 연결이 안 된 것이죠. 그런데 북한은 중국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이들의 의식이나 체험이 북한에 그대로 접속된 것이죠.

밀양아리랑, 본조아리랑, 그 외에 중국동포들이 만들어 불렀던 영천아리랑, 청주아리랑, 경상도아리랑, 기쁨의 아리랑 이런 것들은 이미 일제 강점기 시절에 광복군들이 불렀던 노래들이에요. 이런 노래들이 북한에서는 그대로 유지가 된 것이죠. 그래서 아리랑을 보는 인식이 북한의 경우는 민족사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요. 반면 우리는 아리랑을 국악의 한 장르로 보죠. 그러다보니까 같은 아리랑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개념이죠. 우리는 예술성에 가치를 둬서 얼마나 전통적으로 부르느냐 하는 데 관점을 두죠.

북한에서는 우리의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에 대해 콧소리 내고 또 느려터진 아리랑이라고 하면서 그런 노래를 누가 따라 부르겠느냐, 부정적인 입장이죠. 그래서 그들은 진도아리랑 같은 경우에는 남도 육자배기조에 탁성을 빼버리고, 또 정선아리랑도 느린 매나리조를 빠르게 고쳐서 불러요. 이것은 북한의 음악 정책이고 그 극단성을 보여주는 사례이죠. 그쪽에서는 제일 먼저 아리랑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요. 북한은 <밀림아 이야기하라>라는 혁명가극을 필두로 모든 중요한 장면에서는 아리랑을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제일 먼저 아리랑을 자신들의 성음에 맞게 고쳐야 했지요. 그들이 아리랑 축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는 ‘아리랑을 민족음악의 복판에 둬라’라는 교시가 있어요. 남북이 단일팀 단가로 아리랑을 제시할 때, 북한은 이렇듯 민족사적 입장에서 제시를 한 것이고 우리 측에서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쉬운 노래이니까 제시를 한 것이지요. 그 의도는 서로 달랐지만 어떻든 결국에는 민족의 노래라고 하는 최종적인 인식은 다 같이한 것 같아요. 이런 점을 저는 북한 아리랑을 연구하면서 재확인하게 되었죠.

 

앞으로 계속해서 연구해야 할 아리랑의 과제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 많은 외국인을 포함하여 우리 스스로도 의심을 갖고 있는 문제인데요, 우리의 아리랑이 과연 그렇게 오랫동안 몇 백 년에 걸쳐서 불러온 노래냐, 하는 의문이에요.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즉, 시대를 거듭해서 내려오게 된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는 숙제가 있는 것이죠.

가사의 적층현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이는 김시업 선생님의 책에도 나와 있지만 아리랑은 그야말로 4천에서 6천수의 노랫말이 적층된 것이거든요. 이것은 오디세이와 비교가 안 되는 이야기죠. 그 옛날의 노래가 지금까지 하나의 노래로 살아왔다는 것이죠. 적층이 마무리돼서 삼국유사에 남아있는 향가가 아니라, 그 시절에 불렸던 노래가 지금까지 변형돼서 지금까지도 정선이라는 그곳에서 불리고 있다는 점이죠. 이처럼 고대의 노래가 살아서 온 경우는 전 세계에 어디에도 없다는 일이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아리랑은 고대의 노래죠. 정선에 가면 아리랑이라고 하지 않고 아라리라고 해요. 하지만 그 아라리를 우리는 아리랑이라고도 하고요. 그렇다면 아리랑과 아라리가 어떻게 같은 노래인가 하는 의문이 남죠. 정선 아라리는 우리가 부르는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월드컵 때 부르던 윤도현 아리랑과 다르다는 것이죠. 물론 가사는 민속음악이라는 것이 들고나는 것이니까 비슷한 것도 있고 같은 것도 있죠. 그럼 무엇으로 같은 노래라는 것을 입증하느냐의 과제가 있죠. 또 정선아리랑은 그 명칭을 아라리라고 한다는 점이죠.

그렇다면 아라리와 아리랑이 어떻게 변해서 지금의 아리랑으로 왔느냐 하는 문제, 선율이 다른데도 어떻게 해서 정선 아라리에서 모든 아리랑이 확산됐나 하는 문제들을 우리 학자들이 계속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늘에서 밀양아리랑 진도 아리랑이 동시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죠. 하나의 노래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적으로 확장되었을 거라는 것이죠. 이와 같은 일이 전 세계에 또 어디에 있냐는 것이죠. 진도 사람들은 노래라고 하면 빠지지 않는데, 왜 우리가 다른 지역에서 부르는 아리랑을 끌어다가 진도아리랑이라고 부르냐는 것이죠. 자신들의 노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밀양 사람들, 경상도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데요. 그 영남 사람들이 왜 굳이 다른 지역의 노래를 가져다가 왜 밀양아리랑이라고 했냐는 것이죠.

이런 문제가 수수께끼로 남아있어요. 어떤 이들은 ‘명칭의 자극전파’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요. 그 명칭이 어떤 유명한 사람이 쓰거나, 충격을 줬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내서 따라서 쓴다는, 명칭의 자극전파설로도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다른 노래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있어야 하는데, 기껏 육자배기하면 ‘자진육자배기’ 그냥 ‘육자배기’ 정도, 난봉가 하면 그냥 ‘난봉가’ ‘자진난봉가’ 정도예요. 그런데 아리랑은 어떻게 해서 50여 종류가 넘게 확산이 되었는가 하는 거예요. 그 옛날 조선에서 쫓겨나간 중국동포, 러시아동포들도 왜 아리랑을 부르냐는 것이죠. 이 수수께끼, 도대체 아리랑이 어떤 힘을 가졌기에 그럴까요? 이는 다양한 분야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풀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진 위는 영화 아리랑 개봉 80년 기념 토론회 참석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리랑 연구자’로서 혹은 아리랑을 널리 알리는 ‘아리랑의 운동가’로서 그동안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 아리랑은 제 가슴 속에 있던 노래예요. 또 지금 하는 모든 일은 처음부터 내 일이라고 여겼던 일이에요. 저의 어려움은 남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어려움과는 좀 달라요. 저의 어려움은 다만 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이라든가 제 스스로에 대한 어떤 좌절감이 오는 때이지요. 지금의 이 일을 어떤 소명의식, 혹은 애국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국고보조를 안 해줘서 무척 서운했을 거예요. 사실 저는 한 번도 지원금을 받은 적이 없어요. 또 신청하지도 않았고요. 지원금을 주는 곳에서 제 생각을 인정하고 돈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보다는 더 중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들을 도와야죠. 결국 이 일을 하면서 오는 어려움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보다 일찍 ‘한자’라든가 ‘역사’라든가 ‘민족’이라든가 ‘현장답사를 통해서 얻어야 할 지식’이라든가 하는 것들에 매달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있을 뿐이에요. 이것이 지금의 제 숙제이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이 숙제를 좀 더 빨리 끝내기 위해서 시간을 아끼고 있어요.

 반대로 이 일을 하시면서 보람 있는 일도 있었을 듯싶은데요?

 = 1986년에 첫 사설집인 <역사의 노래 민족의 노래>를 고은 선생님, 박재삼 선생님의 격려로 출간하게 되었어요. 그 책이 나온 당시만 해도 분위기는 냉랭했어요. 이를테면 어떤 이들은 ‘아리랑 갖고 밥 먹는 사람이 있네.’ 이런 식이었죠. 특히 방송출연하고 나면 이런 식의 비아냥거림이 오랫동안 뒤따라와 곤혹스러웠죠. ‘야, 아리랑 갖고 무슨 연구를 하냐. 우습지 않냐?’ 이랬었죠. 세상 사람들이 아리랑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얘기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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