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활동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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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빨래를 소변에 빨았다고?조선시대에는 빨래를 소변에 빨았다고? 세탁기는커녕 마땅한 세제도 없었을 것 같은 옛날, 우리 선조들은 어떤 방법으로 옷을 빨고 관리했을까?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연에서 얻은 천연의 재료로 세제를 만들고, 빨래 방망이로 옷을 두드려 때를 뺐으며, 햇볕을 이용해 옷감을 표백했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생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를 통해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으로 터득한 조선시대 옷 관리 비결을 들여다보았다. 천연의 재료로 만든 조선의 세제 청계천 빨래터 ©국립민속박물관 냇가나 우물가의 빨래터에서 빨래 방망이를 두들기는 동네 아낙들의 모습은 현대인들에게 낯선 풍경이다. 우리는 지금 온갖 다양한 종류의 합성세제를 비롯해 세탁기, 건조기를 이용해 편안하게 옷을 세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탁기는 고사하고 변변한 빨래비누 조차 없었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빨래를 했을까? 그 실마리는 18세기 말에 편찬된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여성 실학자로 알려진 빙허각 이씨다. 그가 저술한 조선 최초의 생활 백과사전 <규합총서>에는 옷의 세탁법을 비롯해 요리, 살림, 농사, 육아 등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지식들이 망라되어 있다. 규합총서 ©국립민속박물관 <규합총서> 세의편에 따르면 당시에도 세탁을 위해 여러 가지 재료를 세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에 얼룩진 자국을 없애기 위해 오미자, 매실물, 치자물, 식초, 살구씨, 소금물, 소뼈를 태운 잿물까지 수백 년 전 사람들은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세제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천연 세제들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의 산물이다. 최근까지도 많이 사용되었던 잿물은 나무를 태운 재에 물을 부은 뒤 걸러서 나오는 물을 가리킨다. 잿물에는 나트륨, 칼륨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성분은 옷에 묻은 단백질 때를 분해하는 효과적인 천연세제였다. 이러한 재료들 외에 삭힌 오줌을 이용해 빨래를 하기도 했다. 빨래 방망이는 인력을 이용한 공기방울 세탁기 방망이로 두들겨 빨래의 찌든 때를 빼던 풍속은 세탁기가 보급되기 전인 수십 년 전까지도 이어져 내려온 한국의 전통이다. 빨래 방망이로 옷가지를 두드리면 어떤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세제만으로도 어느 정도 때가 빠지기는 하지만 방망이로 두드릴 경우 세탁 효과는 배가 된다. 옷가지 사이에 숨은 공기방울이 방망이에 맞아 밀려나면서 그 압력으로 옷에 밴 얼룩을 지워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때 유행했던 공기방울 세탁기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빨래 방망이 ©국립민속박물관 무명치마 ©국립민속박물관 지금처럼 건조기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아무 때나 빨래를 말리기가 어려웠기에 주로 낮 시간에만 빨래를 널어 말렸다. 해가 저물도록 마르지 않은 빨래는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가 이튿날 다시 말렸는데 이는 밤이슬에 빨래가 다시 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옷을 말릴 때 강한 햇볕을 이용해 표백하는 방법도 있다. 본래 누런 색깔을 띠고 있는 무명은 우선 잿물에 빨아서 삶은 뒤 해가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 널어 말린다. 밤에는 이슬을 맞지 않도록 걷어다가 실내에 두었던 무명천을 다시 물에 적셔 너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면 햇볕에 바래 하얗게 표백이 되었다고 한다. 풀 먹여 다듬이질한 옷은 조선시대 멋쟁이의 기본 홍두깨와 홍두깨 틀 ©국립민속박물관 <규합총서>에는 여러 가지 옷감에 따른 다듬이질과 손질법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우선 도침(擣砧)이라는 한자어로 기록된 부분에서 옷감의 종류나 색에 따라 다듬이질 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풀을 먹여 다듬이질을 하면 옷감이 새것처럼 말끔하게 펴지고 윤기가 난다. 고급 옷감이었던 비단의 경우 ‘대왐풀(난초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을 먹여서 다듬이질을 해야 하는데 특히 쪽빛 옷일 경우 이렇게 해야 빛이 난다. 또한 진홍색은 대왐풀에 아교를 섞어 먹인 뒤 밟아서 물기가 마르면 홍두깨에 감아 다듬었다고 한다. 무명과 모시는 잇꽃(국화과에서 속하는 식물)을 담갔던 누런 물과 오미자물에 풀을 섞어 먹여야 푸른빛이 나지 않으며, 자주색은 풀을 묽게 해서 먹인 뒤 다듬이질을 해야 한다. 다듬이질을 할 때는 풀기가 마르기 전 주름을 펴서 홍두깨에 말아 다듬거나 편평한 다듬잇돌에 놓고 다듬이질했다고 한다. 다듬이질을 위해 준비해야 할 도구로는 다듬이 방망이, 홍두깨, 다듬잇돌 등이 있는데 다듬이 방망이는 배가 불룩한 곤봉과 비슷한 형태이며 단단한 성질의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옷감을 감아서 다듬는 홍두깨는 칼국수 밀대처럼 생겼다. 옷 관리에서도 빛나는 선조들의 지혜 포산항견취도 ©부산근대역사관 철지난 옷을 보관할 때도 풀을 먹여 보관하고는 했는데, 무명옷의 경우 풀을 먹였지만 모시옷은 깨끗하게 빨아 건조시킨 뒤 보관했다가 이듬해 다시 꺼내 입을 때 풀을 먹여 손질했다고 한다. 또 좀이 먹어 옷감이 망가질 수 있는 명주옷은 좀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약초의 일종인 마른 궁궁이잎을 옷 사이사이에 넣어 보관했다. 의복을 깨끗하게 관리해 입는 습관은 우리 조상들의 오래된 습관이다. 1123년 송나라 사절로 고려에 왔던 서긍의 견문록 <고려도경>에는 "고려의 풍속은 깨끗한 것인데 지금도 여전하다”라며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목욕을 한 뒤에야 문을 나서며 여름철에는 낮에 개울물에서 거듭 목욕을 하며 옷을 깨끗이 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보다 앞선 옛 문헌들에도 삼한 사람들이 깨끗한 옷차림을 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이 땅의 옛 사람들이 의복의 청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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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 플래시몹(초등부 버전)"밀양아리랑 플래시몹"은 2012년 12월 6일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됨을 기념하고 전 국민의 건강증진과 아리랑의 저변확대 및 국제화를 위해 밀양아리랑 콘텐츠 사업단(김금희,장병수)과 밀양교육지원청과의 협력으로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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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건강체조(성인버전)/밀양아리랑"아리랑 건강체조"는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됨을 기념하고 전 국민의 건강증진과 아리랑의 저변확대 및 국제화를 위해 밀양아리랑 콘텐츠사업단(김금희,장병수)에서 밀양아리랑의 음원을 활용하여 개발되었다. 새천년 체조와 국민체조의 장,단점을 보안하여 중간 지점의 난이도로 구성된 "아리랑 건강체조"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작 : 밀양아리랑 콘텐츠사업단 후원 : 밀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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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이야기(The Story ARIRANG)아리랑 이야기(The Story ARI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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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씨구TV] 아리랑열전 #유네스코무형유산아리랑 #강송대 #정은하 #이금미 #김길자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록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유산 '아리랑'. 지역별로 다른 맛을 자랑하는 한국의 4대 아리랑을 모았습니다. 송가인의 첫 소리 선생님 강송대 명창이 부르는 진도 아리랑, 정은하 명창이 부르는 밀양 아리랑, 이금미 명창이 부르는 경기 아리랑, 김길자 명창이 부르는 정선 아리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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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제4회서울아리랑페스티벌 전국아리랑경창대회-대구아리랑 은상 수상2016 제4회서울아리랑페스티벌 전국아리랑경창대회-대구아리랑 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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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_밭매는소리(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2019)2부_밭매는소리(배경숙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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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_구미의병아리랑(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2019)구미의병아리랑(배경숙 아리랑 그리고 영남의 소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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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제44회 정선아리랑제 전국아리랑 경창대회 1부/ 2부[동영상] 제44회 정선아리랑제 전국아리랑 경창대회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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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회 정선아리랑제 전국아리랑 경창대회 1부제44회 정선아리랑제 전국아리랑 경창대회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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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강연 - 아리랑을 통해 본 경산아리랑의 가치 재발견/김연갑특별 강연 - 아리랑을 통해 본 경산아리랑의 가치재발견 - 창작아리랑의 형태로 세계인류무형유산 등재 아리랑의 곡으로 포함되어 있는 경산아리랑의 가치를 영상화된 강연으로 만나볼 수 있는 강연과 강연 실황 영상콘텐츠 작업 진행. - 경산아리랑의 가치 확산과 대중화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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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칼럼: 다시 읽는 'Song of Ariran (1)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찬숙/아리랑학회 연구이사 금년은 아리랑에 관한 책으로 매우 의미있는 ‘Song of Arirang’이 간행된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아리랑 역사의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리랑’을 표제로 한 책은 10여종에 이른다. 1945년까지의 상황으로는 1930년대 초 창가집류가 5종으로 ‘映畵名曲아리랑唱歌’(1930), ‘아리랑民謠集’(1930), ‘現代映畵아리랑唱歌集’(1931), ‘아리랑民謠集’(1931), ‘현대유행신아리랑창가(’1932)가 있고, 1935년 이후 일본어 표기 의 ‘朝鮮民謠アリラン’(1935년 김지연)과 소설 ‘ありらん峠’(1938년 김문집)가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Song of Arirang’이 있다. 이중에 마지막의 영어로 쓰여진 것은 1941년 의외의 미국에서, 의외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Nym Wales. 본명: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조선인 김상의 생애를 전기체로 쓴 책이다. 창가책 5종은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로 서지사항이 밝혀졌고, 일본어 표기 중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에 대해서는 필자의 연구논문이 있고, 김문집의 단편집 ‘ありらん峠’ 역시 최근 연구논문(동의대 신용주)이 발표되어있다. 그러나 ‘Song of Arirang’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서평에 머무르는 듯하다. 필자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Song of Arirang’ 소재 아리랑 연구‘를 제출하면서 이 책을 탐독했다. 2001년 스터디 모임 ‘아리랑아카데미’에서 백선기(소설가 김팔봉의 서랑)선생과 김연갑선생으로부터 님 웨일즈 방문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주인공 김산(1905~1938)의 아들 고영광 선생을 초청, 부친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식 참석을 도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 풀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저자 님 웨일즈가 노벨상에 두 번(1981~2)이나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Song of Arirang'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지의 여부였다. 결과는 중국 속의 조선인 항일투쟁가들을 기록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했다는 평가로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의 후보지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단순한 취재원이었을 뿐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인데, 직접 만난 두 분과 고영광선생의 증언으로는 3개월 간 22회의 ‘밀회 같은 인터뷰’이었을 뿐이고, 고매한 열정의 혁명가를 격려하는 관계였을 뿐, 연인 관계까지 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그 죄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아들 고영광에 의한 복권(1983년) 신청과 심사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즉, 트로츠키(Leon Davidovich Trotsky)파라는 이유와 일본 경찰에서 큰 고초 없이 풀려난 것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복권 심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공산당 문서에서는 "변명하지 않는 미련한 자”란 기록과 일본 기록에는 "결코 변절하지 않을 놈”이란 기록이 나와 결국 무협의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이회성 작가나 중국의 고영광 등에 의해 자료가 발굴되면서 해결되었으나, 정작 ‘아리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아리랑 문제’란 김산이란 인물 연구와 Song of Arirang이란 텍스트 연구의 근본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과연 김산은 언제, 어떤 계기에 아리랑을 접하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돋보이는 아리랑에 대한 명징한 표현들은 단순한 이해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소운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서평이나 김산을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에는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연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지락(김산의 본명)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홍진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무수한 동지들’ 중에 이토록 아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김산 한 사람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유난히도 높고 깊은 고개를 넘고 넘은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 처분을 계기로 도일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혁명동맹’ 편집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7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맡으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교사로 생활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탈출하였다. 이후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님웨일즈를 만날 때까지의 이 굴곡진 역정을 김산 말고 산 이가 또 있는가. 분명 이 파란의 과정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접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언제, 어디서였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 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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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vention of Tradition: Modernization, Nationalization, and Popularization of Arira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in KoreaArirang1 has been regarded as the representative Korean folk song that expresses the ethos of the Korean people. Koreans adore this song as the 'national song'. Koreans abroad sing it in 'memory of their mother country. Whenever two Koreas (of South and North) agree to organize a unified sport team in International-level sports competitions, this song represents the 'national anthem' as does the Flag of the Korean Peninsula. In fact, Arirang is the cultural icon of 'Koreaness.' Most Korean people believe that Arirang songs2 have a long history. Some scholars trace the root of the word 'arirang' back to the establishing myths of ancient states. Many people believe that the Arirang song originated from the 14th-century tale of 'seven wise men in a bamboo forest,' as shown in Kang'w6n-do Arirang, which is popular in Kang'w6n-do, the mid-eastern province, or the legend of Arang in the middle of the Chosun Dynasty (1392-1910), as exemplified in Miryang Arirang, which is originated in Miryang City in southeastern area. However, the Arirang song is not just a century-old traditional song. It emerged as a popular folk song during the Japanese annexation (1910-1945). Many local versions of Arirang have become 'modern' folk songs in the last century. I use the term 1 In this paper, I romanize the Korean terms by the conventional McCune-Reischauer Romanization system, except with familiar names like Seoul and Chosun. I do not italicize the title of songs. 2 I use the term "Arirang song(s)" as a collective term to designate many versions of Arirang songs widespread in the Korean peninsula and neighboring countries where Korean immigrants have settled. The term "Arirang" defines a specific song which is popular in the Seoul area. [Provider:earticle] Download by IP 203.253.173.42 at Saturday, February 6, 2021 4:40 AM 'modern' for they were made by specific individuals in a short period of time in contrast to traditional folk songs which are the result of the communal product for a long period of time (Herzog 1949-50:1034). Among the four representative Arirang songs- Arirang, Kang'won-do Arirang, Chindo Arirang, and Miryang Arirang representing each region in Korea, that is, Seoul, the mid-eastern province, the southwestern province, and the southeastern province, respectively - three evolved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Kang'won-do Arirang is the exceptional, ancient version sung by the folk in mountainous areas and known as the 'genuine' folk song from which many other versions derived (Yi P.H. 1997).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countless local Arirang songs were made. It was the result of modernity and the historical context of colonization in the last century. I do not mean that all of the Arirang songs were 'composed' by the musician but it became widely popular among the people, reflecting the social and cultural condition of the time. In this paper, I will examine how the Arirang song emerged to become the 'song of the Korean people' during the colonial period in Korea. Modemizaton of Arirang The Arirang song was first made 'public' by an American missionary, Homer B. Hulbert, in 1896. In his article, entitled "Korean Vocal Music," Hulbert (1896) provided a version of Arirang in the Western staff notation (Mus. Ex. 1), which is the first notated folk song in the Korean music history. It is a version of local Arirang songs widely sung in Seoul and the Central Province at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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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사할린한글학교 후원회 가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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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하의 대구아리랑 전승활동 연보 (1983-2020년)정은하 대구아리랑 전승활동 연보 (1985-2018년) <대구아리랑제(소리극) 연보>(주관:(사)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이사장:정은하) 2003.8.23~24 제1회대구아리랑제-팔도아리랑축제 (대구시민회관 대강당) 2003,10.23 제1회대구아리랑제(앙콜공연)-팔도아리랑축제(계명대학교 노천당) 2004,08.25~26 제2회대구아리랑제-팔도아리랑 대구에 다 모였네 (대구시민회관 대강당) 2005,08.15~16 제3회대구아리랑제-통일아리랑(대구오페라하우스) 2006,08,15 제4회대구아리랑제-김삿갓의 팔도아리랑(대구오페라하우스) 2007,08,15 제5회 대구아리랑제-대구의 노래. 대구아리랑(대구오페라하우스) 2008,08,15 제6회 대구아리랑제-김구의 아리랑 2009.08,15 제7회 대구아리랑제-김산의 아리랑(대구오페라하우스) 2010.08,15 제8회 대구아리랑제-아리랑을 부른다 영남의 아리랑 2011.08,15 제9회 대구아리랑제-아리랑을 부른다 팔도아리랑축제 2012.08,15 제10회 대구아리랑제-안중근아리랑 (대구오페라하우스) 2013.08.15 제11회 대구아리랑제-김산의 아리랑 2014.08.15 제12회 대구아리랑제-유관순아리랑 2015.08.15 제13회 대구아리랑제-안중근아리랑 (대구 아양아트센타) 2016.08.15 제14회 대구아리랑제-아라리가 났네 (대구 아양아트센타) 2017.08.15 제15회 대구아리랑제-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대구 아양아트센타) 2018.08.15 제16회 대구아리랑제 -국가중요문화재 제129호! 대구아리랑 2019.08.15 제17회 대구아리랑제 - 2020.08.15 제18회 대구아리랑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네 정은하 대구아리랑 전승과정 연보 출판 정은하, 달성의 소리, 민속원. 2015 음반 영천아리랑(2000) 탄생, 대구아리랑(2003) 영남아리랑의 재발견(2006) 1976. 07,16~ 이창배, 안비취 사사 1980,12,23 kbs 민요백일장 장원 1983 한국구비문학대계 대구 불로동 최양환 -불로동 아라리(대구아리랑) 채록 1985, 대구에서 영남민요조사 시작 /불로동 아리랑 발굴 1986.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영남민요와 경기민요 선율과 사설 대비 1986 대구시 국악협회 민요분과장 위촉 1986 아시안게임기념 공연-대구시민회관: 대구아리랑과 아리랑메들리 공연 1988. 88올림픽게임; 거리퍼레이드- 대구아리랑 합창 한국민요연구원 개원 1991. 대구문화방송 창사28주년기념[다큐] ‘영남아리랑’-대구아리랑 공연 1991 음반 <최양환의 대구아리랑> 녹음 10.20.달구벌 예술축제 -아리랑한마당 (사회 및 해설:김연갑/한겨레아리랑연합회 사무국장) 정은하:대구아리랑 공연/김병하.김길자:정선아리랑/박병훈:진도아리랑 / 김연갑:아리랑선언문 낭독 1994.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 2000. 영남민요연구회 설립/영남민요발표회 2002. 상주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통령상 수상 2002 음반 <영천아리랑> 발매 2004 팔도아리랑경창대회 문화관광부 장관상 수상 2003 정은하 작창 대구아리랑 음반 발매<탄생, 대구아리랑> 2006 <영남아리랑의 재발견>음반 발매-대구아리랑 수록 2003-현재 대구아리랑제 개최 (통상14회) 대구아리랑전국경창대회 개최 2006 대구아리랑보존회 설립 아리랑한마당(서울:국립민속박물관) 정은하의 대구아리랑 2007 사단법인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창립 2009 제1회영남아리랑학술대회 개최-<영남아리랑의 재발견> 2010 최계란의 대구아리랑 음반(1936년) 발굴기념 재현 공연 참관(주관:서울소리보존회) 2012 제12회 아리랑상 공로상 수상-정은하 (주최: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주관:아리랑학회)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회장 취임 2014 판아리랑(서울 창덕궁소극장)(통산3회) 정은하의 대구아리랑과 영남아리랑 제1회대구아리랑제 공연(최계란기념공연, 대구 불로동) 2015 제4회서울아리랑페스티발-전국아리랑경창대회 <컬러플 도시 대구, 대구아리랑!> 공연 (은상 수상) 제2회대구아리랑제 공연(최계란기념공연, 대구 불로동) 남북한공동유네스코등재아리랑통일운동 출범식(한국유네스코본부)-대구아리랑 공연 2015 제1회영남아리랑학술대회 개최-<대구아리랑의 오늘과 내일> 2016. "2015지역아리랑활성화지원사업 선정단체 지정",<대구, 영남아리랑 얼씨구 한마당 공연> 2016 제1회사할린아리랑제-대구아리랑 공연 (러시아 사할린) <2016전통아리랑 공연 ‘아리랑, 삶을 노래하다>-대구아리랑 공연(국립무형유산원) 2017 제5회 아리랑의 날 기념공연 -대구아리랑 한마당 2017아리랑학회학술대회 공동주관(아리랑학회/전국아리랑전승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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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영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 및 영천아리랑 대축제 열려제7회 영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 및 영천아리랑 대축제 열려 기사 입력 : 2019-11-04 13:27:51 최종 수정 : 2019-11-04 17:12 박웅호 Share 제7회 영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 및 영천아리랑 대축제가 지난 2~3일 영천시민회관에서 열렸다.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 주최로 열린 영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명창부 9팀, 일반부 29팀, 단체부 7팀, 학생부 8팀 등 모두 200명의 참가자가 열띤 경연을 펼쳤다.대회에서 명창부에서 영천아리랑(지정곡)과 정선아리랑을 부른 임창수(63·강원도 평창군)씨가 대상을 안았다. 일반부는 지정곡 외 본조아리랑을 부른 조수자(59·여·부산시)씨, 단체부는 지정곡 외 해운대아리랑·태종대아리랑을 부른 조윤희씨 외 8명(부산시), 학생부에서는 지정곡 외 정선아리랑을 부른 신정인(9·강원도 정선군)양이 각각 금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또 아리랑 대축제는 영남국악관현악단과 이언화무용단의 콜라보 무대와 강원무형문화재 제1호 보유자 김길자씨의 정선아리랑, 국악인 곽동현의 신명나는 민요무대가 펼쳐졌다.박웅호 기자 park8779@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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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8회 영천아리랑전국경창대회제8회 영천아리랑전국경창대회 11.07 *요강,신청서 변경 편집부 기자 등록 2020.10.22 14:58 조회수 6,691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 본 대회는 코로나-19 및 감염병 예방을 위해 방역수칙을 준수하여 객석거리두기 및 비대면 영상심사(학생부)를 운영합니다. 또한 학생부 외 참가자분들은 대회 당일 방역에 관련한 진행요원의 요구에 적극 협조 부탁드립니다.(비협조시 퇴장조치) ■ 행사 개요 ○ 행 사 명 : 제8회 영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 ○ 일 시 : 2020. 11. 07.(토) 10:00 ○ 장 소 : 영천시민회관 스타홀 ○ 참가대상 : 명창부, 일반부(대학생 포함), 단체부(5인이상), 학생부단체(5인이상) ○ 주 최 : (사)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 ○ 주 관 : (사)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 제8회 영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 추진위원회 ○ 후 원 : 경상북도, 영천시, 영천시의회, 영천교육지원청,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경북TV, 영천역사문화박물관 ■ 행사 내용 가. 경연부분 1) 명창부 : 영천아리랑(1소절)과 아리랑(5분 이내) 2) 일반부 : 영천아리랑(1소절)과 아리랑(5분 이내) 3) 단체부 : 영천아리랑(1소절)과 아리랑(3~5분 이내) 4) 학생부 : 영천아리랑(1소절)과 아리랑(3~5분 이내) 5) 지정곡(필수사항) : 영천아리랑 1소절 (단 • 영천아리랑 선곡시 지정곡 제외) ※ 영천아리랑 음원 : 영천시민회관 홈페이지 및 국악신문에서 다운로드 나. 경연방법(※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수위에 따라 변경 가능※) 1) 명창부 : 예선, 결선(동일곡 가능하며 대면심사) 2) 일반부 : 단심(대면심사) 3) 단체부 : 단심(대면심사) 4) 학생부 : 단심(영상심사) 다. 경연 및 심사 : 11. 7.(토) 10:00 ※ 학생부 외 대면심사 경연순서는 참가신청 순서에 따라 개별공지 라. 축하 공연 : 2020. 11. 8(일) 14:00~15:30(가수 조명섭 축하공연) 마. 공연 장소 : 영천시민회관(스타홀) 바. 심사 발표 : 당일 각 부별 심사 후 즉시 영천시민회관 정문에 공고문 부착 (학생부는 영천시민회관 홈페이지 공고문 개시) 및 수상자 개별연락 사. 시상식 : 각 부분 별 시상내역 참조 (단체부는 대표자만 참석) ■ 대회 요강 가. 참가 자격 아리랑을 사랑하는 전 국민 명창부, 일반부(대학생 포함), 단체부, 학생부단체 단. 1인 중복신청 불가(단체, 개인 중 선택) 나. 제출 서류 1) 참가신청서 1부(소정양식) 2) 증명사진 1부(결선시 본인확인 가능한 신분증 필참) 3) 학생부는 녹화영상 첨부 ※ 영천시민회관 홈페이지 및 국악신문에서 다운로드 다. 신청서 교부 및 접수처 1) 교부 및 접수일자 : 2020. 10. 19(월) ~ 11. 4(수) 18:00까지 2) 신청서 교부 · 영천시민회관 홈페이지 http://ycac.yc.go.kr: 커뮤니티 → 공지사항 → 다운로드 · 국악신문 홈페이지 www.kukak21.com: 제8회영천아리랑전국경창대회 → 다운로드 3) 접수처 • Fax 접수 : 054)330-6649(※학생부 제외) • 이메일 접수 : marines923@korea.kr ※ 당일 신청접수 불가 (접수기한 내 신청접수 마감) 4) 문 의 054)330-6650, 010-8853-6384 5) 참가비 : 없음 6) 고 수 : 지정고수 동반가능 (희망자에 한해 고수 무료 지원가능 신청서에 사전 신청 요망) 7) 지원사항 : 동상이상 수상자는 시상식 참여자에 한해서 숙박, 조식 제공합니다. ※ 명창부 대상수상자는 11월 8일 시상 후 축하공연에 공연하여야함. 8) 학생부 영상 촬영 방법 ① 동일한 조건의 평가를 위하여 휴대폰으로 촬영 및 녹음함 해상도 1920×1080(FHD) 설정해 주시길 바랍니다.(마이크 및 필터 사용 불가) ② 첫 화면은 A4용지에 대회명, 녹화일, 참가명을 크게 작성하여 화면에 제시 한 후 녹화 시작함 (예시)영천아리랑전국경창대회(대회명) / 20년10월13일(녹화일) / 홍길동 또는 단체명(참가명) (대회요강 마지막 페이지 별첨 참고) ③ 출전자는 본인의 정면에 거치대를 고정하여 전신 촬영함, 반주자는 영상 안에 노출되지 않아야 됩니다. (장구장단 및 소리 북 반주 외 다른 악기반주 불가) ④ 인사 생략, 한복착용 촬영 ⑤ 영상의 화질과 음질은 심사가 가능 할 정도의 소음이 없고 밝은 공간에서 촬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촬영장소의 배경은 심사에 영향을 주지 않음. (거울 및 유리 앞 촬영 삼가) ⑥ 공고기간 촬영한 동영상만 인정, 영상 및 사운드 등 편집 절대 불가 9) 학생부 영상 및 참가신청서 접수방법 ① 접수기간 내에 "신청서”와 "동영상 파일” 함께 이메일로 제출 ‘이메일 제목’ - ‘신청서 파일명’ - ‘동영상 파일명’은 동일하게 학생부 ○○○”로 작성하여 이메일 발송 (예시) 학생부 홍길동, 홍길순 또는 학생부 팀명 ■ 시상내역(단위:원) 부 문 내 용 시상 훈격 시상금 시상일 계 7 11,900,000 26명(팀) 명창부 대 상 경상북도지사상 3,000,000 11월 8일 금 상 영천시장상 1,000,000 은 상 국회의원상 700,000 동 상 영천시의장상 500,000 일반부 금 상 영천시장상 1,000,000 은 상 국회의원상 700,000 동 상 영천시의장상 500,000 장려상 대회장상 600,000 (30만×2명) 11월 7일 인기상 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장상 200,000 (10만×2명) 단체부 금 상 영천시장상 1,000,000 11월 8일 은 상 국회의원상 700,000 동 상 영천시의장상 500,000 장려상 대회장상 400,000 (10만×4팀) 11월 7일 학생부 금 상 영천교육장상 300,000 우편발송 은 상 대회장상 200,000 동 상 영천아리랑연구보존회장상 600,000 (10만×6팀) ※ 대회 사정상 시상내역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대면 심사 이의 제기 시 심사위원회에서 결정(당일 이의 제기에 한함) 편집부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제8회-영천아리랑경창대회모집요강수정.hwp (22.0K)다운로드 영천아리랑전국경창대회 참가신청서.hwp (15.5K)다운로드 영천아리랑녹음파일.avi (2.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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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아리랑학교] 우리가 모르는 이별의 이야기' - 이산의 섬 러시아 사할린 [ YTN기획특집 다큐멘터리 ]'우리가 모르는 이별의 이야기' - 이산의 섬 러시아 사할린 [ YTN기획특집 다큐멘터리 ] [인터뷰: 서진길 / 1944년생] "라디오 보듬고 울고 고향 생각이 나지 아무래도." [인터뷰: 김정자 / 1942년생] "누가 누구누구를 찾는다 그런 소리만 들었습니다." [인터뷰: 조영제 / 1932년생] "막 아버지가 쫓아와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네 사촌 동생이 너를 찾고 있다'. 일어나라고 쫓아 나오니 방송 끝나버렸지." [내레이션] 1945년 8월, 온 한민족이 기쁨에 넘친 한반도 해방.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산의 아픔을 뜻하기도 했다. 여기, 애끓는 그리움 속에서 가족을 찾는 동포들의 이야기가 있다. [내레이션] 러시아 극동의 섬, 사할린. 자작나무 숲과 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이곳에 한인들의 애절한 역사가 묻혀 있다. [인터뷰: 이경숙 / 1952년생] "(아버지는) 언제든지 날마다 말했습니다. (한국에) 가고 싶다고, 고향 이야기했죠. 그래도 뭐 편지도 못 쓰고 가보지도 못하고 다 돌아가셨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내레이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사할린의 북위 50도 이남을 차지했다. 석탄과 목재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사할린. 일본은 이곳의 자원을 전쟁에 활용하기 위해 한인 3만여 명을 사할린 탄광과 벌목장으로 징용했다. 징용된 이들은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땅에서 나무를 베고 석탄을 캐야 했다. [인터뷰: 김윤덕 / 1923년생] "(전등이) 무거워요. 그래도 날이 되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요. 처음에는 해 놓으면 계속 앞으로 떨어지지." (탄광에서) 앉아서 엎드려 일하는 데도 있고. 뒤로 누워서 일하는 데 있단 말이요. 여기 봐. 전부 새카매. 이렇게 엎드려서 올라가다 보니 모두 굳은살이 됐어, 전부." [인터뷰: 서진길 / 1944년생] "겨울에 일한 때 산에서 일한 사람은 얼어 죽은 사람도 있고. 추우니까 산에 가다가 돌아가신 사람도 있고." [인터뷰: 이쾌임 / 1935년생] "내 남편이 여기 끌려와서 2년 동안 일본인 밑에서 일하면서, 탄광에 일하면서 2년 동안 월급 하나도 못 탔어. 하나도 못 타고 그냥 다 (45년에) 해방되고 (월급) 다 없어졌지." [내레이션] 1941년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일본, 연합군이 반격에 나서자 갈수록 수세에 몰리게 된다. 사할린 한인들에게 닥친 시련도 더욱 가혹해졌다. [인터뷰: 안복순 / 1934년생] "41년, 42년, 43년도에 일본이 좀 약해졌네. 소련(연합군)이 강해지고. 그래서 남자들을 다 일본 규슈로 끌고 갔죠." [내레이션] 1944년 연합군이 일본 해상을 장악했다. 일본과 사할린 간 석탄 운반 길도 끊어졌다. 일본은 사할린에서 운영하던 탄광 일부의 문을 닫고 한인 3천여 명을 군함도를 비롯한 각지 탄광으로 동원했다. 두 번째 징용, 이중징용이다. [인터뷰: 조영제 / 1932년생] "학교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낮 12시쯤 되어서 (일본으로) 떠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아버지한테서 편지 연락도 없고 아무 소식이 없었지요." [인터뷰: 이수진 / 1942년생] "남사할린 북쪽, 우글레고르스크, 레소고르스크, 보쉬니아코보. 여기서 제일 많이 (이중징용) 갔어요. 그때 빨리 데려가야 한다고, '(일본에) 먼저 가라, 식구들 다음에 보내준다'고 거짓말하고 데려갔지. 그때 그 시대 안 가면 죽여 버리지 말도 못 하지. 그렇게 밤에 빨리 가라고. 그렇게 싹 데려갔지" [내레이션] 가족을 데려갈 수 없었던 이중징용 광부들. 패전 후 일본은 이들을 사할린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YTN KOREAN 유튜브 채널구독: https://goo.gl/gcKeTs ▶ [APP] Android: https://goo.gl/6Pg6j3 ▶ [APP] iOS: https://goo.gl/Qxm7rz ▶ Facebook : https://www.facebook.com/ytnworld ▶ Twitter : https://twitter.com/ytnworld ▶ Website : http://ytn.co.kr/ytnkorean [더 큰 한민족 네트워크 / YT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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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대구아리랑경창대회 지정곡 대구아리랑 음원제10회 대구아리랑경창대회 지정곡 대구아리랑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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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문경새재아리랑제 #러시아아리랑본부(공노원)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