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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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북한의 강릉 공연에서 ‘북강원 아리랑’을 듣고 싶다북한의 강릉 공연에서 ‘북강원 아리랑’을 듣고 싶다 우리가 부르지 않는 ‘북강원아리랑’ 7종북한 유네스코 등재 신청서/윤수동의 ‘조선민요 아리랑‘을 통해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kibada@naver.com 등록 2018.01.30 12:14:3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1963년 1월 스위스 로잔르에서 개최된 최초의 남북체육회담에서 이의 없이 ‘아리랑’이 단가(團歌)로 합의되었다. 이 단가는 1991년 일본 지바세계탁구대회에서 남북단일팀(북남유일팀) 단가로 처음 함께 했다. 이때 남북공동 단일팀의 단가 아리랑이 연주되어 주목받게 된다. 이는 ‘아리랑’에 의한 ‘작은 통일’이며 ‘앞당긴 통일’이기도 하다. 이후 남한은 2012년 12월, 북한은 2014년 11월 아리랑을 세계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올린다. 이는 한겨레를 상징하는 아리랑의 소중함을 유네스코가 인정한 것이고, 아리랑의 인류보편 가치를 공인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리랑은 한겨레가 함께 하는 공연에서 우리와 늘 함께 해왔다. 이번 평창올림픽 남북 공연에서도 아리랑은 함께 할 것이라고 믿는다. 남북이 합의한 대로 북측의 삼지연 관현악단 140여명으로 구성된 예술단에게 우리 측은 회담에서 민요나 가곡, 고전음악 등을 연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북측은 이에 남북이 잘 아는 민요나 세계 명곡 중심으로 연주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를 보면 북측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에서 아리랑이 연주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2000년 이후 18년여 만에 북한 예술단이 남한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는 것이다. 남북교류 공연에서 아리랑이 빠진 적이 없다. 1985년 이산가족 북한의 방문공연에서 서울예술단의 아리랑 연주, 1990년 서울 국립극장 <남북송년음악회>에서 평양민족음악단의 아리랑 연주, 2000년 예술의전당에서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아리랑 연주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역사성과 당위성에서 2000년 8월 예술의전당에서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 아리랑 연주회에 참관하고, 아리랑을 연구하는 글쓴이로서는 이번의 남북교류 공연에서 남북 아리랑 중 서로 비교하여 듣고 싶은 아리랑이 있다. 글쓴이의 단견으로는 현재 행정상 북한 강원도 지명을 쓴 아리랑을 ‘북강원도 아리랑’이라고 표현하며 이를 듣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북강원아리랑 분포도 이 ‘북강원도 아리랑’이 강릉과 서울에서 공연되는 북측 작품에 포함되기를 바란다. 또한 금강산에서 개최되는 공연에도 강원도의 아리랑이 포함되어 북측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 아리랑의 중심 전승지는 강원도이고, 북한에서는 이 강원도아리랑을 어떻게 전승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북강원도아리랑은 우리가 부르지 않는 아리랑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번 기회를 통해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북강원도아리랑과 남강원아리랑의 같음과 다름의 차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게 된다. 동시에 우리가 금강산 공연에서 들려줄 필요가 있는 아리랑도 있다. 그것은 전통 선율에 의한 강원도의 아리랑이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강원도의 아리랑은 전통 메나리조의 전통창법으로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음악정치론에 의한 모든 노래는 느리고 처량한 곡조는 노동력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북한창법으로만 부르게 하는 평준화 작업이 시행되고 된다. 메나리조는 시김새가 많고 늘어진다고 해서 ‘유연하게 펴’ 부르게 하고, ‘밝고 고운 소리’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 부르는 강원도의 아리랑은 우리 관점에서 보면 본래의 토속적인 맛을 약화시킨 것이다. 북한의 아리랑은 북한창법으로만 불러야 하는 아리랑이어야 하고, 음악정치에 의해 새로이 만든 통일아리랑, 강성부흥아리랑 같은 창작아리랑이 많은 민중들이 참여하는 집단집체극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위에서 말한 북강원도아리랑의 실상을 간략하게 살피면 7종이 된다. 엮음형 2종과 자진형 5종이 있는데, 평강엮음아리랑(2), 통천아리랑, 고산엮음아리랑, 삼일포아리랑, 고성아리랑(2) 이다. ▲ 고성아리랑 악보 기록에 따르면 북강원아리랑의 후렴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평강엮음아리랑),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로구나 / 아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나 주소”(통천아리랑),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고성아리랑),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삼일포아리랑)이다. 엮음형을 제외하고 모두 ’아리아리 스리스리‘형으로 부르고 있다. 사설은 ’ 산중의 귀물은 머루다래". ‘아주까지 동배야’ 같은 전래되는 사설이 중심이다. 이 중 고성아리랑이 불리는 고성군은 한국 전쟁이후 분단된 군이다. 이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이주하여 고성촌 마을을 형성하고 고향을 그리며 부른 고성아리랑이 전해진다. 북강원도에서 불리는 고성아리랑은 다음과 같다. 고성아리랑 1 (강원도 고성, 창:최현봉, 채보:한시형) 산중의 귀물은 머루다래 인간에 귀중한건 정든님이라 아주까지 동배야 열리지 말아 산골에 큰애기 난봉난다 열라는 콩팥은 아니 열리고 아주까지 동백은 왜 열리느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고성아리랑 2 (강원도 고성/ 창:최동이 /채보: 최기정)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나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가구 싶어서가나 먼동이 튼다네 먼동이 튼다네 님 그려 꾸던 꿈은 다 깨여져버렸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아리랑’이 비록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남북 문화교류와 문화통합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고, 남북통합의 매개체가 되리라는 사실에서 이번 남북 공연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고 아리랑이 주요한 문화교류의 단초가 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번 강릉과 서울에서 개최될 두 차례의 공연은 남북문화예술교류에도 의미가 있지만 평창올림픽이 평화올림픽이 되는데 기여하리라고 본다. (www.arirang21.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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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은! 삼목칼럼 <아리랑에 대한 각주> 제1회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또한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오늘의 것이면서 옛것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전형적인 메타문화이다.아리랑은 중층적 유기체이다. 이미 있었던 것이 새로운 것을 있게 하고, 새로운 것이 이미 있었던 것을 다시 새롭게 한다. 그래서 동시적이고 역동적인 선후 관계의 양상을 띠며 변화와 지속이 이루어지며계속 재생산 된다. 그래서 아리랑은 ‘자기복제에 의한 증식’ 프렉탈이론의 실체이다. 아리랑은 모순적 복합성, 표면과 이면의 주제가다른 양가성을 갖는다. 또한 보편성과 특수성과 통시성까지 내재하고 있다. 나아가 ‘부분의 합은 전체와 동일하다’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앤섬(andsum)적 사고가 아니라, 트랜섬(transum)적 사고로 해석하는 문화이다. 아리랑은 순전한 우리의 인문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노래이다. 뚜렷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4계의 풍토적 조건과 산·강·들·바다가 공존하는 지리적 조건이 문화를 받고, 가두고, 변화시키니, 구심력과 원심력을 작용케 하여, 지속과 변용을 있게 한다. 그래서 아리랑은 말의 사투리대로, 노래의 시김새대로 곳곳에서 형성된 노래다. 아리랑은 민중적 비애와 한(恨)의 정조(情調)를수렴하고,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중의지를 발현하고,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는 미래 의식의 추동체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민요, 노래, 그 이상의 노래이다.모든 아리랑의 후렴에는 ‘아리랑고개’가 위치한다. ‘고개’는 역사적 수난과 고난을 상징하며 극복의대상으로서 상정된 것. 그래서 모든 아리랑에서 반드시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라고 노래한다. ‘아리랑고개’는 아리랑과 고개의 합성어이다. 아리랑의 역사에 등장하는 고개는 ‘문경새재’이다. 새재의 박달나무가 공출되었고 삼남의 부역인들이 새재를 넘나들었다. 그래서 ‘아리랑고개’는 분명 문경새재에서 연유한시어(詩語)이다.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시 소재(所在). 백두대간 소백산맥 주흘산(主屹山)을 넘나든 이들의 고개다. 이들과 함께 고개를 넘나든 노래가 있으니 새재아리랑이다. 그래서 문경의 새재아리랑은 고개를 넘어 기쁜 소식을 듣는 이들의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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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칼럼: 다시 읽는 'Song of Ariran (1)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기찬숙/아리랑학회 연구이사 금년은 아리랑에 관한 책으로 매우 의미있는 ‘Song of Arirang’이 간행된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아리랑 역사의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리랑’을 표제로 한 책은 10여종에 이른다. 1945년까지의 상황으로는 1930년대 초 창가집류가 5종으로 ‘映畵名曲아리랑唱歌’(1930), ‘아리랑民謠集’(1930), ‘現代映畵아리랑唱歌集’(1931), ‘아리랑民謠集’(1931), ‘현대유행신아리랑창가(’1932)가 있고, 1935년 이후 일본어 표기 의 ‘朝鮮民謠アリラン’(1935년 김지연)과 소설 ‘ありらん峠’(1938년 김문집)가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Song of Arirang’이 있다. 이중에 마지막의 영어로 쓰여진 것은 1941년 의외의 미국에서, 의외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Nym Wales. 본명: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조선인 김상의 생애를 전기체로 쓴 책이다. 창가책 5종은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로 서지사항이 밝혀졌고, 일본어 표기 중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에 대해서는 필자의 연구논문이 있고, 김문집의 단편집 ‘ありらん峠’ 역시 최근 연구논문(동의대 신용주)이 발표되어있다. 그러나 ‘Song of Arirang’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서평에 머무르는 듯하다. 필자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Song of Arirang’ 소재 아리랑 연구‘를 제출하면서 이 책을 탐독했다. 2001년 스터디 모임 ‘아리랑아카데미’에서 백선기(소설가 김팔봉의 서랑)선생과 김연갑선생으로부터 님 웨일즈 방문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주인공 김산(1905~1938)의 아들 고영광 선생을 초청, 부친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식 참석을 도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 풀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저자 님 웨일즈가 노벨상에 두 번(1981~2)이나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Song of Arirang'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지의 여부였다. 결과는 중국 속의 조선인 항일투쟁가들을 기록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했다는 평가로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의 후보지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단순한 취재원이었을 뿐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인데, 직접 만난 두 분과 고영광선생의 증언으로는 3개월 간 22회의 ‘밀회 같은 인터뷰’이었을 뿐이고, 고매한 열정의 혁명가를 격려하는 관계였을 뿐, 연인 관계까지 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그 죄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아들 고영광에 의한 복권(1983년) 신청과 심사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즉, 트로츠키(Leon Davidovich Trotsky)파라는 이유와 일본 경찰에서 큰 고초 없이 풀려난 것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복권 심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공산당 문서에서는 "변명하지 않는 미련한 자”란 기록과 일본 기록에는 "결코 변절하지 않을 놈”이란 기록이 나와 결국 무협의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이회성 작가나 중국의 고영광 등에 의해 자료가 발굴되면서 해결되었으나, 정작 ‘아리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아리랑 문제’란 김산이란 인물 연구와 Song of Arirang이란 텍스트 연구의 근본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과연 김산은 언제, 어떤 계기에 아리랑을 접하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돋보이는 아리랑에 대한 명징한 표현들은 단순한 이해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소운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서평이나 김산을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에는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연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지락(김산의 본명)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홍진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무수한 동지들’ 중에 이토록 아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김산 한 사람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유난히도 높고 깊은 고개를 넘고 넘은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 처분을 계기로 도일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혁명동맹’ 편집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7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맡으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교사로 생활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탈출하였다. 이후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님웨일즈를 만날 때까지의 이 굴곡진 역정을 김산 말고 산 이가 또 있는가. 분명 이 파란의 과정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접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언제, 어디서였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 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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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아리랑] 만정 김소희 명창 생가에서 귀명창들만정의 묘소에서 눈물 글썽인 귀명창들 귀명창들의 판소리 유적지 순례-1 김기(mylove991) 기자 ▲ 만정 김소희 명창 생가에서 행사를 마친 귀명창들. © 김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 판소리. 세계에 유래가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음악양식으로 어디서건 마음껏 자랑해도 모자랄 것이 판소리이다. 모노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른, 혼자서 천인의 역할을 하고, 만 번의 감정을 오가야 하는 1인 종합예술의 극치이다.판소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데에는 두 부류의 공헌자가 존재했다. 우선은 명창을 들 수 있겠고 그 다음은 바로 귀명창의 존재이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명창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를 인정할 귀명창이 없었더라면 판소리의 존재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전승되지 못했을 것이다. 명창과 귀명창의 관계는 비단 판소리에만 국한하지 않고 산조, 무용 등 우리 민간예술 전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같은 국악이라고 할지라도 궁중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정악에는 그런 예가 없다. 그러나 민간예술에서는 하나의 연주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주자 외에 귀명창들의 추임새가 적절히 어우러져야 했다. 그렇지 못한 공연은 누구한테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절의 각박함은 귀명창을 판의 중심에서 외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 만정제 춘향가 '어사또 남원 내려오는'대목을 부르는 만정의 친딸 박윤초 명창 © 김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나,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강요된 서양식 공연예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무용과 산조 등의 장르에서 귀명창들의 추임새는 거의 사라졌으며 판소리 무대도 그들의 존재는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어서 소리꾼들은 자주 "추임새 좀 넣어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하는 실정이다.유네스코가 각국의 유무형 문화유산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과 영예를 부여하는 이유의 저변에는 ‘특별한 대책이 없다면 사라질 위기’가 깔려 있다. 귀명창은 예술의 형식으로 지정하거나 양성할 수 없는 것이나, 정작 판소리가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명창 발굴과 더불어 귀명창도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귀명창을 위한 프로그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평론가추천 판소리축제’가 매년 겨울마다 열리고 있고, 작년부터 매월 KBS 1FM <흥겨운 한마당>의 ‘귀명창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 행사로 인해 소외되었던 귀명창의 존재가 공식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 좀 더 독려하고자 하는 행사가 마련되었다. 나라음악큰자치(위원장 한명희)가 14일부터 집중행사로 ‘판소리 명창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시작했다. ▲ 만정제 춘향가 중 '어사또 남원 내려오는 데' 중 이몽룡이 춘향의 편지를 읽는 대목. © 김기 행사에 참가한 귀명창은 45명. 14일 새벽 세종문화회관에 모인 참가자들은 45인승 버스와 승용차 편으로 첫 번째 방문지 만정 김소희 명창의 생가가 있는 전라북도 고창으로 향하였다.10월 중 주말을 이용해 총 3회 방문행사를 갖는 첫 날에 참가한 귀명창들은 설레는 모습이 역력했다. KBS 1FM 귀명창대회 입상자들, 판소리 동호회, 개별 참가자 등으로 구성된 순례단은 우선 판소리의 둘째가라면 서러울 애호가들이었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전라도 인심을 느낄 수 있는 푸짐한 점심상에 고창의 명물 복분자주 반주 한 잔으로 일행들은 짧지 않은 주말 버스여행의 피로를 속였다.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는 식당 마당에서 기념 촬영하는 잠시의 뜸만 들이고 곧바로 김소희 명창의 생가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만정의 생가는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5번지에 위치했다. 읍내에서 차량으로 10 여분 소요되는 거리로 소박한 농촌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동네였다. 만정의 생가가 원래대로 복원된 것은 2002년 5월이었고, 그전에는 마을주민들이 개축하여 관리하였다고 한다. ▲ 신영희, 박윤초 두 명창이 덤으로 불러준 남도민요 진도아리랑에 신명이 난 귀명창들은 덩실덩실 춤으로 화답 © 김기 그러나 아직도 부엌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고, 장독대에 빈 항아리 몇 개만 덩그렇게 놓여 있어 국창에 대해 소홀한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나 일행들은 무엇보다 명창의 생가에 처음 발을 디딘 감격에 겨워했다. 넓지도 않은 소담한 생가를 뭔가를 찾는 것인지 꼼꼼히 둘러보는 모습들이었다. 다시 대할 수 없는 절개 굳고, 자존심 깊은 생존의 모습과 음성을 기대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만정 김소희(본명 김순옥)은 1917년 고창에서 태어났다. 13세에 명창 송만갑의 제자로 입문하고 15세에 서울로 올라가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정정열 등에게 소리, 춤, 기악을 두루 사사했다. 타고난 재주에 노력을 더하여 빠른 시기에 명창반열에 올랐으며, 만정제 춘향가를 완성하여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국립국악고등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국악교육의 양대 산맥을 이룬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국악인을 양성하였고, 1995년 5월 향년 79세를 일기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만정은 여류명창으로는 드물게 국창의 칭호가 따랐으며, 광복 50주년에는 ‘역사를 만든 한반도의 주역 50’에 선정될 정도로 국악계의 큰 별이었다. ▲ 한명희 위원장, 박윤초 명창 등 일행은 헌화와 함께 만정의 명복을 빌었다. © 김기 만정의 생가에서 조촐한 공연이 열렸다. 만정의 친딸 박윤초 명창과 만정의 직계 제자 쓰리랑 아줌마 신영희 명창이 차례로 만정의 춘향가를 이어 불렀다. 오랫동안 두 명창과 호흡을 맞춰온 신규식 고수가 북을 잡았다.비록 생전의 만정 성음은 아닐지라도 장소가 그래서인지 두 명창의 소리는 그대로 만정의 현신처럼 다가왔다. 그리움 때문인지 귀명창들의 추임새는 명창의 소리를 덮을 정도로 장내를 크게 울렸다. 이렇게 명창과 귀명창이 만나지 않고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소리판의 진풍경이었다.자기 대목을 모두 마친 두 명창은 아쉬움이 남았던지 좁은 쪽마루에 나란히 서서 남도민요 두 곡을 구성지게 불렀다. 첫 곡 성주풀이에 이어 진도아리랑을 부르자 구경하던 몇 사람이 흥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소리를 하던 두 명창은 때때로 소리를 놓고, 어머니 혹은 스승의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던 분위기는 어느덧 가시고 짧지만 흥겨운 판으로 생가 일정을 마쳤다. ▲ 묘소에서 만정 김소희 명창을 기리는 시 한명희 작 '판소리 별, 북두의 별'과 박윤초 작 '사모곡'을 낭송한 시낭송가 공혜경 © 김기 생가를 뒤로하고 일행은 만정의 묘소로 향하였다. 버스가 들어가지 못하는 오솔길 앞에서부터 낮은 가을 햇살을 등에 이고 나지막한 산길을 따라 올랐다. 밭 두렁을 지나고 오솔길을 지나 도착한 만정의 묘소는 생각보다 초라한 모습이었다. 전통예인들에 대해 얼마나 소홀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한명희 나라음악큰잔치 추진위원장과 박윤초 명창 내외가 대표로 헌화하고, 일행 모두가 고개 숙여 명창의 명복을 빌었다. 한명희 위원장의 회상과 박윤초 명창의 어머니에 대한 소회가 이어졌고, 낭송가 공혜경이 두 편의 시를 낭송할 때는 참가자 모두의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만정을 위해 한명희 위원장이 써 묘소 한쪽에 시비로 세워져 있는 ‘판소리 별, 북두의 별’과 딸 박윤초 명창이 쓴 ‘사모곡’을 낭송했다.만정의 생가와 묘소를 찾기 위해 새벽에 출발해 서울로 돌아온 시각은 밤 11시. 잠을 설치거나 아예 꼬박 밤을 새우고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모두 밝은 모습으로 귀가를 서둘렀고, 일부는 피로를 아랑곳 않고 짝을 이뤄 뒷풀이로 향하였다. ▲ 묘소에서 만정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한명희 위원장. 왼쪽 비문에 국창 만정 김소희라고 써있다. © 김기 한명희 위원장은 "축제라는 것이 반드시 많은 인파를 끌어 모은다고 다가 아니다.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행사는 어차피 수백 명이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은 인원이지만 판소리 명창의 기리는 동시에 판소리 애호가들의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행사 의의를 설명했다.또한 우리 나라 판소리 동호회 중 가장 오래되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단체 중 하나인 ‘소리랑’ 대표 박종민씨는 "아주 좋았다. 가능하다면 3번 모두 참가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화된 내용으로 지속적으로 추진되길 바란다”고 참가 소감을 밝혔다. 출처: https://eastpeak.tistory.com/4042 [동쪽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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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 유산에 오른 “아리랑”서한범 명예교수 suhilkwan@hanmail.net 등록 2017.06.12 23:26:40 목록 메일 프린트 스크랩 글씨크기 크게 글씨크기 작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불리고 있는 “아리랑”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4인, 즉 미국 유타대학 명예교수 이정면 박사, 사회사업가 류승호 씨, 사진작가 류승률 씨, 그리고 문학작가 서용순 씨를 소개하였다. 이들은 음악 전공자는 아니지만, 고려인들이 지켜온 아리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그들이 답사한 아리랑 로드 10만Km의 생생한 기록을 한 권의 책에 담으면서 6월 7일 인사동 소재 토포하우스에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53만 고려인들이 부르는 아리랑 속에는 과거의 아픈 상처가 묻혀있는데, 그 중에서도 1937년, 스탈린에 의해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영하 30도의 추운 카자흐스탄 벌판으로 강제 추방된 사건은 잊을 수가 없는 탄압이었다.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 질병과 싸우면서도 그들에게 가해진 탄압의 역사를 아리랑을 부르며 견뎌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민족을 하나로 묶어준 강력한 힘의 원동력이었으며 희망이었고, 부모였으며 조국이었고, 생명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번 주에는 그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부르며 지켜온 아리랑이란 어떻게 인식되고 있으며 그 음악적 특징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한국의 아리랑은 지난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 이것은 아리랑이 단순히 한국의 옛 민요였기에 지정된 것이 아니다. 그 노래 속에 한국인의 정신, 한국인의 삶,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음악의 세계, 생활양식,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함축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전통적인 노래였기에 인정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는 북한의 아리랑민요가 역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아리랑은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노래 유산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여 2016년 10월 8부터 ~9일까지 열린 '2016 아리랑대축제' 현재 우리나라에서 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는 노래는 하나 둘이 아니다. 잘 알려진 정선아리랑, 서울 경기지방의 본조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등이 지방의 특징을 살리는 민요로 비교적 유명하지만, 이밖에도 각 지방, 중소 도시의 이름을 붙인 아리랑은 하나 둘이 아닌 셈이다. 예를 들면 문경아리랑, 상주아리랑, 해주아리랑, 대구아리랑, 공주아리랑, 영천아리랑, 용천아리랑, 등 등 그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는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아리랑도 있을 것이나 대부분은 일본제국주의 시절, 아리랑을 금지곡으로 지정하자, 자연발생적으로 각 지방의 중소 도시에서 만들어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들 아리랑은 각각의 지역적 특징을 살린 음악적 어법으로 불리고 있어서 각 지역의 향토성을 자랑하고 있다. 아리랑의 공통된 특징이라면 무엇보다도 간결하면서도 정제되어 있는 형식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노래 형식은 본절과 후렴귀로 구분되어 있으며 후렴귀는 낮은 음역으로 <아리랑>이나 <아라리>가 반복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반면, 본 절은 높은 음역대의 가락으로 다양한 내용의 가사를 짓거나 즉흥적으로 만들어 여러 세대를 이어온 것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노래의 선율형이 복잡하지 않고 간단해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느린 형태와 빠른 형태의 3박자형의 리듬구조, 곧 세마치장단으로 짜여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특징으로는 지역마다 특수한 표출법을 쓰는 시김새의 다양한 표현법이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시김새의 대표적인 요성(搖聲), 즉, 음을 떨어주는 경우에도 서울의 아리랑이 떠는 형태나 진도아리랑의 떠는 형태, 또는 정선아리랑에서 떠는 소리의 형태는 모두 같지가 않고 지역에 따라서는 떠는 폭이 좁거나 넓기도 하고, 가늘기도 하고 굵기도 하는 여러 형태의 표현법을 쓰는 것이다. 네 번째 특징으로는 이러한 음악적 요소위에 풍부한 노래말(가사)을 지어서 부른다는 점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즉석에서 즉흥성을 살리어 새로운 노래말을 지어 부르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속도의 조절이나 감정의 상태에 따라 슬픈 노래로, 또는 기쁜 노래로 음악적 분위기를 바꾸어 부를 수 있는 특징을 안고 있다. 가령, 슬픈 처지에 처해서는 슬픈 감정으로 느리게 부르고, 반대로 기쁘고 즐거울 때에는 기쁜 감정으로 빠르고 신나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또한 아리랑인 것이다. ▲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부하라 사마르칸트 고려인들과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춤을 추는 답사대(아리랑로드 10만km 대장정 답사대 제공) 이러한 음악적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각 지역이나 중소 도시에서는 지역의 이름을 앞에 붙여서 <00아리랑 축제>, <XX아리랑 축제> 등을 매해 열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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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아리랑, 한국인에겐 쌀기미양/아리랑학회 연구이사 "782소절의 아라렁(A-ra-rung)은 한국음식에서 쌀을 빼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라렁은 한국 사람들에게 쌀과 같다. (중략) 즉흥곡의 명수인 조선인에 의해 수많은 곡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인데 곡과 사설을 바꾸기도 했지만, 후렴은 일정하게 다음과 같이 불린다.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오 아라렁 얼싸 배띄어라’ ”아라렁의 뜻은 사랑하는 낭군을 뜻하는 ‘애랑’(愛郞)의 음역이라고도 하고, 러시아를 이르는 ‘아라’(我羅)에서 유래 했다고도 한다.(중략) 이 아라렁은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3,520여 일간 지속되어 왔으며 1883년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이 보다 더 정확하게 밝혀낼 수 없다고 본다.”(『THE KOREA REPOSITORY』에 아리랑을 논한 <Korea Vocal Music> 중에서) 1896년 2월 서양선교사 H. B. 헐버트가 쓴 글이다. 아리랑론으로는 아리랑 역사 첫 머리에 위치하는 이 글은 많은 아리랑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미국 의사로 한국관계사에 의하면 서양과의 외교사 23년(1882~1905)간 알렌, 데니와 함께 3 주역(主役) 중 한 사람으로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1906년 발행한 「대한제국멸망사」를 펴낸 사실은 물론이고, 고종임금의 밀사로서의 활동 일화는 그의 한국 사랑을 알 수 있게 한다. 전해지기로는 그가 1905년 11월 16일,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 대통령 루즈밸트를 만나러 갔을 때 비서관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나라인지 모른다며 면담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 때 헐버트는 "만일 이 노래를 들으면 당신은 오늘 저녁 당신 부인에게 꽃을 사가지고 갈 만큼 사랑스런 노래 ‘아리랑’이란 노래가 있다”고 하며 불렀고, "이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라고 하여 설득시켰다고 한다.(서울대 외교학과 고 강덕동 교수와 1992년 3월 談) 그는 1886년 7월 한국 최초의 관립외국어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교사로 와서 1891년 귀국했다가 1893년 다시 선교사로 파견되어 감리교출판사(Trilingual Press)를 운영했고, 선교잡지『THE KOREA REPOSITORY』에 아리랑을 논한 <Korea Vocal Music>을 쓰는 등 우리문화를 외국에 널리 알렸다. 시조와 같은 상류층이 즐기는 노래를 크래식형(classic style)이라고 했고 아리랑을 일반 대중이 증가는 양식(the hachi or popular style)의 성악곡<vocal music>의 대표라고 했다. 이 글은 아리랑의 유행 시점, 어원, 해외 전파 경로 등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글이다. 특히 아리랑을 쌀에 비유한 소중한 글이다. 다만 선교사로서의 한계를 갖는 글이라서 사양음악계에 작품으로서의 전달에까지 이르지 못해 연주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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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할린 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리뷰]사할린 강제징용 80주년 남·북·러 합동공연 아리랑으로 함께하지 못한 합동무대남북 아리랑 대합창 불발, 사연은? 등록 2018-08-27 17:08:32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서도소리 【사할린=뉴시스】 기미양 연구이사 =지난 6월 한국을 방문한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으로부터 남북러합동공연이 26년 만에 러시아 사할린에서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공식 행사명은 '광복 73주년,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 해방 73주년 기념 우정의 날'이다.사할린 동포 강제징용 80주년을 기리기 위해 사할린주한인협회가 주최하는 남북러합동공연 행사다. 이달 14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을 경유하는 길목에서 북측 통일음악단과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되어 더욱 가슴이 설레었다. 도착하자마자 사할린한국교육원을 방문해 아리랑 음반을 전달하고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연습실로 달려갔다. 연습에 여념이 없는 아리랑무용단 박영자 단장을 만나 본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18일 오전 10시 해방절을 기리는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조선인을 해방시킨 영웅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영예광장 성화 헌화식에 참여하였다.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과 사할린한인협회 림종환 회장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일음악단과 러시아 원동 고려인통일연합회 리규률 위원장도 함께 참여하는 모습을 가까이 보게 되어 반가웠다. 국립남도국악원 판굿 헌화식을 마치고 '러시아는 나의 역사 박물관' 앞 광장 특설무대로 이동하였다. 역사박물관 앞 테라스에는 새고려신문사 이예식 기자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역사로 남은 한인 1세들의 애환을 담은 사진들이다. 우리나라 국립국악원 소속 유지숙 명창을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공연 내용을 확인하였다. 1부에서 북한 지명이 들어간 서도소리, 2부에서는 아리랑과 긴아리랑을 부를 것이고, 피날레는 아리랑을 남북대합창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프로그램 안내서를 찾을 수 없어 북측 공연단이 무슨 노래를 부를지 궁금해졌다.광장에는 인천, 안산, 김포, 양주 등으로 영구 귀국한 사할린1세들이 나와 있었다. 사할린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무더운 여름 두 달 동안 머무르고 다시 한국으로 돌어간다. 한국에서 매년 사할린한마음대회가 이루어지는 음성 행사장에서 만난 사할린동포들을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반갑게 맞이하는 홈스크한인협회 박영순 회장의 손에 이끌려 홈스크 부스에 오니 대형 비빔밥축제 이벤트를 홍보하고 있다. 이날 소수민족들이 준비한 여러 부스 중 가장 많은 관객들이 긴줄을 서서 대형 비빔밥 그릇에서 퍼주는 컵밥을 받아 먹었다.드디어 2018 사할린 광복절 행사의 첫 막이 열렸다. 주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관 사할린출장소 황명희 소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 내용을 일부 발췌해 대독했다. 사할린주 안톤 월로슈코 제1부지사,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시장 대행 나탈리야 쿠프리나, 사할린주 두마 안드레이 하포츠킨 의장, 사할린주 민족연합회 마이야 키릴로와 등이 축사를 했다. 사할린다민족협회 아코뺜 싸르키스 조리코비츠 회장은 "사할린에서 남과 북이 만나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하나의 민족이다"고 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 사전 리허설을 보고 직관적으로 나온 멘트라고 보여진다. 그는 이미 아리랑을 통한 남북교류의 핵심을 알고 있는 것이다. 국립남도국악원 진도북춤 남측에서는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북측에서는 삼지연악단과 모란봉악단 단원으로 구성된 통일음악단, 사할린동포의 아리랑무용단,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이 출현했다. 국립남도국악원 기악단과 무용단과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길놀이로 오프닝 세리머니를 했다. 공연 첫 무대에는 윤민자, 강팔용 사할린 동포가수가 강원도아리랑을 불렀다. 이어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반주로 유지숙, 김민경 명창이 구성진 서도소리로 흥을 돋우고, 마당에서는 국립남도국악원의 판굿과 진도북춤이 5000여 관객을 신명나게 했다.통일음악단(단장 조승권)은 '민족끼리'라는 주제를 내세웠다. 힘찬 전주곡을 울리며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노래를 불렀고 '황성옛터'는 1세 어르신들이 애창곡으로 여가수가 구수하게 불렀다. '아리랑', '사랑의 깃발', '군밤타령', '무정한 그 사람' 외에도 12곡 이상과 러시아의 유명곡들 '카추샤', '사랑의 메아리', '내잘못일 게 뭐야' 등은 러시아어로도 불러 현지 동포들과 러시아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이날 관객 중에는 북조선 사할린 파견 근로자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북한의 해외노동자 파견이 확대되어 사할린에는 약 3000명 내외 북한 노동자들이 있다. 북한은 1950년대 후반 최초로 파견됐던 노동자들이 사할린에 장기체류하게 되자 이들을 귀환시키려 시도, 소련 외교부와 지방당국에 지속적으로 협조를 요청하고 노동자들을 개별 면담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북한 노동자 다수가 사할린에 정착하게 된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사할린은 러시아 내 타 지역보다 개별적 일거리가 많으며 노동조건이 비교적 자유로워서 북한에서 파견 지역으로 인기가 높다. 또한 사할린은 한인이나 조선족이 많아서 러시아어를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개별적 일자리 연결과 자국 언어 소통은 사할린의 북한노동자들이 북한의 감시체계 속에서도 내부인뿐 아니라 현지인 및 한인·조선족 등 재외 한인들과도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즉, 사할린의 북한 노동자들은 역사적, 지리적, 인적, 경제적 조건 등이 다른 러시아 지역들에 비해 유리한 정서적 혜택을 누려왔다. 그러나 파견 노동자들은 임금의 대부분을 북한 당국에 직·간접적 방법으로 강제 상납해야하는 실정에서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이 북한 통일음악단이 사할린에서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게 되는 원인의 일부라고 본다. 사할린동포들이 준비한 아리랑무용단의 초혼무 '사할린아리랑'이 2부에서 펼쳐졌는데, 윤민자 명창의 소리를 따라서 아리랑무용을 새로이 선보이게 되었다. 사할린 1세대의 고통을 담은 사할린아리랑을 주제로 한 창작무는 이 행사를 주최한 사할린주한인협회의 취지에 맞는 작품이다. 이 사할린아리랑은 제1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처음으로 무대화되어 전국아리랑전승자협회가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과 전국 지역 아리랑제 무대에서 사할린 동포 윤민자와 원명운에 의해 불려지게 되다가 사할린에서 동포들이 처음으로 남북러합동공연에서 무대화하였다. 다음 사할린아리랑은 현지 동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해외아리랑제의 거점으로 정하게 된 배경이다. 일부 사할린 동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우리의 노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남화태 징용왔네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 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정치 개방후 햇빛은 밝고/ 우리의 살림엔 경사가 많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정태식 작, 1992년) 이 사할린아리랑은 사할린 한인들이 겪었던 고난을 담고 있는 망향의 노래이다. 국적이 조선-일본-무국적-소련-러시아로 5번이나 바뀌는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북한에 가서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도 있다. 그래서 현재는 한 가족이 남과 북에서 각각 살고 있는 셈이 된다. 남과 북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해외동포는 사할린 동포집단이다. 국내 27지역에 사할린 동포 1세가 영구 귀국하여 살고 있다. 이는 외세에 의한 이중징용에 이은, 자국에 의한 또 하나의 이산이다. 이러한 실정은 아리랑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이처럼 복잡한 민족 모순이 대치하고 있는 사할린이어서 남북합동공연이 이루어질 수 여건이 된다고 본다.이어 북측 통일음악단은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조국 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찬양하는 '사랑의 빛발' '김정은 장군' 등 선전 노래를 불렀다. 이번 행사는 1992년 남북의 통일예술축제 이후 26년 만에 이뤄지는 남북 합동공연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공연장에서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게 되어 걱정이 앞섰다. 드디어 기다리던 북한아리랑도 들을 수 있었다. 북측 통일음악단 공연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 섣달에도 꽃만 핀다/ 달뜨고 별뜨고 해도 뜨네.'벨칸토 창법으로 부른 아리랑은 러시아 동포들에게 익숙한 선율이어서인지 함께 따라 부르면서 박수를 많이 쳤다. 아리랑에 이어 북측 공연단은 러시아 대중가요를 러시아어로 불러주는 열정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북한 전통 민요와 장구춤과 부채춤을 선사했고 특히 러시아어로 부른 대중가요 공연에는 공연장 앞 스테이지에 나가서 댄스로 화답했다. 아쉽게도 사할린동포들은 남한 공연단보다는 북한 공연단에 더 많은 박수를 보냈다. 북한에서 애창하는 '휘파람'도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어 사할린 어린이들의 아리랑 노래에 부채춤을 선보이자 많은 박수를 받았다. 북한과 사할린의 아리랑 향유를 통해 끈끈한 아리랑민족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첫막에서 오프닝으로 사할린팀이 나와서 빠른 템포의 강원도아리랑을 선사했다. 창작무 선율이 사할린아리랑과 본조아리랑이었다.그러나 남북예술단은 전날 리허설에서 남북대합창 '아리랑'을 마지막 곡으로 정했으나 현장에서는 이뤄지지 못해서 아쉬웠다. 관객들이 눈시울을 적시면서 북한 공연단이 부르는 아리랑과 '다시 만나요'라는 곡을 따라 부르는 대합창으로 막을 내렸다. 정작 유지숙 명창이 준비한 아리랑은 다음날 사할린주의 대표적인 탄광촌이었던 토마리 마을 공연에서 불려졌다. 국립남도국악원 에트노스예술학교 길놀이 북측 최철호 통일음악단장은 무대를 마친 뒤 "동포들의 축제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공연이기 때문에 남측과 곡들을 협의할 필요는 없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행사 주최 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돌아와 보니 행사 주최 측은 행사가 끝난 뒤 국립국악원에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하는 보도가 나왔다. 사할린에서 해외동포들과 함께 하는 공연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대합창하는 광경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갔지만 너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피날레에 왜 남한 가수는 안 나오느냐고 동포들이 나에게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에서는 아리랑대합창을 보여주었지만, 본 공연에서는 갑자기 사회체제 선전노래가 나와서 불발이 되었다고···. 1992년 통일예술축제에서 남북 대중가수들이 사할린에서 공연한 이후 26년 만에 만나게 되어 누구나 이번 남북합동공연에 대한 기대도 컸다. 【사할린=새고려신문/뉴시스】 영예광장 성화 헌화식.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을 비롯한 사할린 한인단체 관계자, 북측 통일음악단 대표, 그리고 필자가 참가했다. 20일, 사할린주한인협회 박순옥 회장은 다음 사할린아리랑제에 다시 한번 사할린에서 북한공연단과 함께 남북합동공연을 이루어내자고 나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돌아오는 21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북측 통일예술단을 다시 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오고 가는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같은 시각 사할린발 비행기를 타게 되면서 이번 공연의 의미에 대해 북측 공연단과 나누고 싶은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제3국 사할린을 거점으로 하여 다음 남북합동공연에서는 아리랑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행히 아직 잔존하고 있는 실향민들과 남으로 북으로 흩어진 해외동포들 가족은 통일된 조국의 땅을 밟고 싶다고 한다. 통일이 되어야 북으로 유학을 간 동생이 고향땅에서 다시 우리 형제들과 재회할 수 있다고.한국으로 돌아와 이산가족 상봉 뉴스에서 남으로 북으로 갈라져 눈물짓는 실향민을 접하면서, 우리는 남북문화교류를 활성화하여 제3국에서부터 자주 만나야 하고, 민족 동질성을 입증하는 인자인 아리랑을 통한 남북교류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나아가 아리랑만큼은 남과 북이 유네스코 공동등재를 위해 노력하자고 두 손을 잡고 싶었다. 유지숙 명창은 남북합동공연 전체 콘셉트에서 서도소리보다는 아리랑메들리가 더 나을뻔했다고 토로했다. 앞으로 해외 동포들과 함께 하는 남북합동공연에서는 아리랑을 레퍼토리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나는 20일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학교 특강을 했다. 김주환 원장, 러시아아리랑본부(회장 공노원) 회원, 사할린여성협회(회장 김웨철), 사할린아리랑무용단(단장 박영자), 러시아아리랑본부(자문변호사 브라디미르) 등이 참석하였다. 강의 내용 중 사할린 부분에서는 사할린 동포 윤민자가 사할린아리랑을 시연했다. 윤민자는 18일 남북러합동공연 세리머니에서 아리랑과 사할린아리랑무용단의 헌무 사할린아리랑의 주제곡 불렀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이라는 주제와 사할린을 거점으로 하여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남북합동공연을 해야 하는 배경에 대해 논의했다. 다음 아리랑학교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홈스크한인협회의 초청으로 9월10일 이후 양 도시 한인협회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 아리랑학회 kibada@naver.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쇄하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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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강릉 공연에서 ‘북강원 아리랑’을 듣고 싶다북한의 강릉 공연에서 ‘북강원 아리랑’을 듣고 싶다 우리가 부르지 않는 ‘북강원아리랑’ 7종북한 유네스코 등재 신청서/윤수동의 ‘조선민요 아리랑‘을 통해 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kibada@naver.com 등록2018.01.30 12:14:30 [우리문화신문=기미양 아리랑학회 이사] 1963년 1월 스위스 로잔르에서 개최된 최초의 남북체육회담에서 이의 없이 ‘아리랑’이 단가(團歌)로 합의되었다. 이 단가는 1991년 일본 지바세계탁구대회에서 남북단일팀(북남유일팀) 단가로 처음 함께 했다. 이때 남북공동 단일팀의 단가 아리랑이 연주되어 주목받게 된다. 이는 ‘아리랑’에 의한 ‘작은 통일’이며 ‘앞당긴 통일’이기도 하다. 이후 남한은 2012년 12월, 북한은 2014년 11월 아리랑을 세계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올린다. 이는 한겨레를 상징하는 아리랑의 소중함을 유네스코가 인정한 것이고, 아리랑의 인류보편 가치를 공인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리랑은 한겨레가 함께 하는 공연에서 우리와 늘 함께 해왔다. 이번 평창올림픽 남북 공연에서도 아리랑은 함께 할 것이라고 믿는다. 남북이 합의한 대로 북측의 삼지연 관현악단 140여명으로 구성된 예술단에게 우리 측은 회담에서 민요나 가곡, 고전음악 등을 연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북측은 이에 남북이 잘 아는 민요나 세계 명곡 중심으로 연주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를 보면 북측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에서 아리랑이 연주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2000년 이후 18년여 만에 북한 예술단이 남한에서 아리랑을 연주하는 것이다. 남북교류 공연에서 아리랑이 빠진 적이 없다. 1985년 이산가족 북한의 방문공연에서 서울예술단의 아리랑 연주, 1990년 서울 국립극장 <남북송년음악회>에서 평양민족음악단의 아리랑 연주, 2000년 예술의전당에서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아리랑 연주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역사성과 당위성에서 2000년 8월 예술의전당에서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 아리랑 연주회에 참관하고, 아리랑을 연구하는 글쓴이로서는 이번의 남북교류 공연에서 남북 아리랑 중 서로 비교하여 듣고 싶은 아리랑이 있다. 글쓴이의 단견으로는 현재 행정상 북한 강원도 지명을 쓴 아리랑을 ‘북강원도 아리랑’이라고 표현하며 이를 듣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북강원아리랑 분포도 이 ‘북강원도 아리랑’이 강릉과 서울에서 공연되는 북측 작품에 포함되기를 바란다. 또한 금강산에서 개최되는 공연에도 강원도의 아리랑이 포함되어 북측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 아리랑의 중심 전승지는 강원도이고, 북한에서는 이 강원도아리랑을 어떻게 전승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북강원도아리랑은 우리가 부르지 않는 아리랑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번 기회를 통해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북강원도아리랑과 남강원아리랑의 같음과 다름의 차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게 된다. 동시에 우리가 금강산 공연에서 들려줄 필요가 있는 아리랑도 있다. 그것은 전통 선율에 의한 강원도의 아리랑이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강원도의 아리랑은 전통 메나리조의 전통창법으로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음악정치론에 의한 모든 노래는 느리고 처량한 곡조는 노동력을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북한창법으로만 부르게 하는 평준화 작업이 시행되고 된다. 메나리조는 시김새가 많고 늘어진다고 해서 ‘유연하게 펴’ 부르게 하고, ‘밝고 고운 소리’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 부르는 강원도의 아리랑은 우리 관점에서 보면 본래의 토속적인 맛을 약화시킨 것이다. 북한의 아리랑은 북한창법으로만 불러야 하는 아리랑이어야 하고, 음악정치에 의해 새로이 만든 통일아리랑, 강성부흥아리랑 같은 창작아리랑이 많은 민중들이 참여하는 집단집체극에서 널리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위에서 말한 북강원도아리랑의 실상을 간략하게 살피면 7종이 된다. 엮음형 2종과 자진형 5종이 있는데, 평강엮음아리랑(2), 통천아리랑, 고산엮음아리랑, 삼일포아리랑, 고성아리랑(2) 이다. ▲ 고성아리랑 악보 기록에 따르면 북강원아리랑의 후렴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평강엮음아리랑),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로구나 / 아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나 주소”(통천아리랑),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고성아리랑),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삼일포아리랑)이다. 엮음형을 제외하고 모두 ’아리아리 스리스리‘형으로 부르고 있다. 사설은 ’ 산중의 귀물은 머루다래“. ‘아주까지 동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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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 한민족의 DNA '독점'을 넘어 '공존의 아리랑'으로한민족의 DNA '독점'을 넘어 '공존의 아리랑'으로 아리랑 남한ㆍ북한 단독 등재를 자축하고 용인하는 유네스코위원회라면 권위 인정할 필요도 없고 매달릴 필요도 없다 남북 손을 잡고 유네스코에 아리랑 지정 철회 요청하자 By 게재 2017-07-13 15:00:00 아리랑은 전 세계의 한국계 국민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들에 의해 사랑받는 대중민요다. 아리랑은 한국인들의 문화와 공동체 삶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한국인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아리랑을 노래한다. 아리랑은 한국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한다. 아리랑이 한국인들의 본질 가까이에 유지됨으로써, 한국인들은 아리랑의 보호와 전승에 관여하고 있다. 다양한 단체와 개인들은 이러한 국가적 유산의 보호에 공헌하고 있다아리랑 인류무형문화유산 신청서(국역문, 번역 문경오)의 한 대목이다. 주지하듯이 우리 아리랑은 2012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제목은 한국의 서정민요(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 끝나는 후렴을 가진 노래 전반이 포함되었다. 2년만인 2014년 북한의 아리랑도 등재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리랑 민요(Arirang folk so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공식 표기되었다. 집체극 아리랑을 전제한다. 평양,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자강도 지역의 구전 아리랑을 포함한다.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 등재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논란도 있지만 관심의 중심이 되니 반가운 측면도 있다. 전 세계 한국계 국민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대중민요라는 점 확실해 보인다. 가히 한민족의 DNA다.아리랑이 언제부터 한민족의 DNA가 되었나?회자되는 설이 많다. 설화와 어원 방면의 논의들은 이미 삼십 여개의 전거를 마련해두기도 했다. 모두 그럴싸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근대기 두 개의 시기다. 첫째는 경복궁 중수 때 팔도의 소리꾼들을 모아다 노래자랑 하던 시기다. 아리랑의 1차 확장이 일어난 시기다. 둘째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시기다. 1926년 단성사 개봉 이후로 급격한 확산을 가져왔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순회 상영을 할 때,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만큼 폭발적 인기를 거두었다는 뜻이다. 기미양이 논문 영화 주제가 '아리랑'의 연구에서 다섯 가지로 분석했다. 경복궁과 영화 아리랑 두 시기를 '문화충격' 현상이라 했다. 당장 질문들이 쏟아질 것이다. 아니, 아리랑은 우리 고유의 노래 아닌가? 천년만년 지속되어 온 한민족의 DNA말이다. 맞다. 강원도 아라리를 중심으로 매우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토속민요다. 강등학에 의해 이미 시대구분까지 마친 논의다. 그런데 왜 위의 두 시기를 유독 강조하는 것일까? 이 아리랑이 근대기에 이종교배 형식으로 전국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이 한민족의 DNA를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인가?아리랑의 기원이나 DNA 관련 쟁점은 무엇일까?아쉽게도 아리랑의 기본곡이라고도 하는 '본조 아리랑'은 토속민요의 선율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통속 민요다. 작사자가 있고 작곡자가 있는 특히 전통이라고 호명되는 노래 율격을 깨트려버렸기 때문이다. 신민요 심지어는 가요라고 말할 수 있다. 의문이 생긴다. 한민족의 DNA라는 언설이 이 '본조 아리랑'에서 나온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 토속민요의 선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문화적 유전자를 따져 묻는데 굳이 순혈주의만이 유효하지 않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한반도와 그 주변 민중들이 부여한 아리랑의 DNA적 성격을 주목한다. 본조아리랑이 민요의 전통 선율체계를 훼손했다는 측면을 상기해보면 민요의 선율이나 문학성 자체만을 DNA라 하기 어렵다. 민요 일반이 지니는 DNA 이상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민요 일반을 민족의 DNA라고 말해야 옳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말하진 않는다. 유독 아리랑에 대해서만 이러한 관심을 보인다. 왜일까? 앞서 말한 두 시기의 확장력과 관련되어 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아리랑에 DNA라는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리랑의 논점이자 쟁점이다. 남한 학자들만이 아니요 북한 학자들만도 아니다. 특히 세계 각 나라로 흩어졌던 한인들이 부여했던 아리랑에 대한 권위를 상정할 수 있어야 본질이 보인다. 도대체 누가 이들처럼 처절하고 간절하게 아리랑을 노래했는가 말이다. 이들에게야말로 아리랑은 모국 그 자체였다.독점의 아리랑을 넘어 공존의 아리랑으로지난 2012년 1월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기념 국악방송 특집 다큐멘터리 '자이니치, 공존의 아리랑'의 사례를 참고해본다. 1부 '잃어버린 우리의 이름'에서는 아리랑의 역사적 흐름을 살폈다. 1930~40년대 식민통치 기간 일본에서 꽃피운 아리랑의 흔적과 의미를 되짚었다. 2부 '되찾은 나의 노래'에서는 한국 일본, 북한이라는 3개 국적이 공존하는 재일교포 사회에서 아리랑이 가지는 의미와 정체성을 말했다. 기획자는 말한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확정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아리랑'을 '우리 것'이라는 '소유'의 관점이 아닌 '모두의 노래'라는 '공유'의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그렇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꼭 집었다. 여기서의 소유와 공유는 무엇일까? 북한도 이와 동일한 ‘공유’의 관점에서 아리랑을 생각했던 것일까? 다시 유네스코 지정 문구로 돌아가 본다. '관련된 공동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 세계의 한국계 국민을 포함한 모든 한국인들은 한민족을 말한다. 조선족, 까레이스키, 자이니치 등 해외동포들을 포함한다. 그 중심에는 남, 북한 국민들이 있다. '한국계'라는 전제가 중요하다. "한국인들의 문화와 공동체 삶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언술에도 다양한 수사들이 동원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아리랑은 한민족의 DNA"다. 남한만의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북한만의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아리랑의 재소환, 이데올로기와 한인디아스포라의 경계에서지난 몇 년 나는 남한 단독 유네스코 등재를 비판해왔다. 남, 북은 물론이고 중, 일, 러, 심지어는 미주 한인들까지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2년 후 북한의 아리랑도 유네스코에 이름을 올렸다. 등재되었으니 끝난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중국도 조선족의 이름을 걸고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을 하게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나라들에 아리랑을 대입하니 6자회담 당사국들이다. 놀라운 일이지 않은가? 일명 디아스포라로 호명되는 해외 한인 주축들이, 그래서 아리랑을 모국의 노래로 받아들이는 동포들이 사는 땅이 말이다. 그래서다. 아리랑은 노래 아리랑을 넘어 한민족의 DNA라는 쟁점을 넘어 그 의미가 미래지향적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한 단독 등재나 북한 단독 등재를 자축하고 용인하는 유네스코위원회라면 그 권위를 인정할 필요도 없고 매달릴 필요도 없다. 이미 '국가간 협력을 증진하고 이를 통해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유네스코 본래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국가간 문화충돌이나 급기야는 국가간 문화전쟁을 충동질하는 따위의 위원회는 존재가치가 없다. 궁극적으로는 이 위원회를 해체시키고 '국가간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는' 새로운 조직, 모임에 대해 국가 간 재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남북이 손을 잡고 이따위 유네스코에 아리랑 지정 철회를 요청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너무 낭만적이라고? 글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남북의 문제를 넘어 6자 당사자국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 아리랑만큼 좋은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인문학 시민기자ㆍ남도민속학회장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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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지옥섬 군함도, 아리랑 고개 낳았다···저항·대동·상생인쇄하기 닫기 문화 > 문화일반 지옥섬 군함도, 아리랑 고개 낳았다···저항·대동·상생 등록 2017-07-03 13:24:06 【서울=뉴시스】 나가사키 아리랑고개, 미츠비시 조선소로 향하는 언덕이다.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아리랑 고개’가 일본에서 또 확인됐다. 지도에는 없지만 일본 곳곳에 실재하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현지답사를 마친 아리랑학자 기미양(아리랑학회)은 "나가사키현에 ‘아리랑 고개’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 당한 조선인 탄부와 위안부들이 미츠비시 조선소 공장을 오가며 부른 아리랑에서 유래했다. 인간이하의 처우에 반발하면서 고난을 이겨내고자 아리랑을 노래했다. 나가사키의 평화운동가 기무라 히데토, 시민단체 ‘강제동원진상규명 네트워크’ 연구원 다케우치 야스토 등 일본인들도 인정하는 팩트”라고 밝혔다. 나가사키항에서 18㎞ 떨어진 하시마(端島)는 군함처럼 생긴 인공섬이다. 남북 480m, 동서 160m, 둘레 1200m, 면적은 6.3ha 규모다. 군칸지마(군함도·배틀십 아일랜드)’로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탄광과 군수공장 23곳 중 7곳으로 조선인 5만7900명이 끌려갔다.미츠비시 그룹이 운영한 하시마 해저 1000m 탄광에서 조선인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렸다. 희생자가 속출했다. 800여명 중 확인된 사망자만 122명이다. 【서울=뉴시스】 군함도, 나가사키현 노모반도 서쪽 강제징용 광부와 위안부들은 ‘아리랑 탄광’을 지어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일본땅 좋다고 누가 말했나 일본땅 와보니 배고파 못살겠네. 배고파요 어머니 보고싶어요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내었소. 어머니한테 쌀가루가 왔네 쌀가루 받아들고 눈물만 흘렸네. 보따리 풀어서 쌀가루 집어먹고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불러봤네.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 부르고 감독이 무서워서 가만히 불러봤네.’기미양은 "영어자막까지 단 한국영화 ‘군함도’를 의식한 일본언론은 이 작품을 폄하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군함도를 비롯한 탄광에서 14세 조선소년이 강제노동을 했는데도 16세 이하 노동자를 동원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는 심지어 여성도 갱으로 들여보내 노동력을 착취했다. 유네스코 등재 때 일본당국의 약속과 달리 군함도 안내서나 표지석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고 지적했다.기미양은 한겨레아리랑연합회·공주아리랑보존회·문경아리랑보존회·춘천의병아리랑보존회·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등과 함께 "군함도는 ‘탁월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유산을 발굴·보존하는 유네스코의 실천적 활동, 인류 평화와 안전에 공헌하는 이념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인류 보편의 가치가 훼손당할 우려가 크다. 일본의 ‘특수한 국가 가치’가 아리랑과 같은 탁월한 보편 가치와 상치됨을 유념해 달라”고 이미 3년 전 유네스코에 청원한 바 있다. 【서울=뉴시스】 기미양 연구이사, 아리랑학회 "일본은 진실한 사죄와 처절한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참상과 이에 대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완전성(integrity)과 진정성(authenticity)에도 의문이 든다. 산업 근대화의 상징성과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 세계 평화를 기원하겠다는 명분은 군국주의를 미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군국주의 상징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미화하려는 일본 우경화 행보의 일환일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기미양은 일제강점기 이후 동포가 살고 있는 중국·러시아·일본의 아리랑 유적지에서 3국간 중첩된 고난과 극복의 기억을 아리랑 정신과 결합, 문화공동체 연대를 꾀하고 있다. 한민족 이산·분단 과정과 아리랑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규명하는 ‘아리랑 로드’를 설정 중이다. 2009년 김산독립열사유적을 시작으로 북간도아리랑, 안중근의사의병유적, 조중접경지,오키나와 아카지마, 사할린아리랑 등으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군함도에서 퍼즐 한 조각을 더 맞췄다.기록이 아닌 구비(口碑)로 전승되는 아리랑의 특성은 발품을 요구한다. reap@newsis.com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https://newsis.com/view/?id=NISX20170703_0000029921&cID=10701&pID=10700# 인쇄하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