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아리랑연합회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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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과 함께 45년, 김연갑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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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아리랑 기념비 건립 고유문(낭독 김연갑 이사장)헤아려 살피건데 오늘은 2022년 12월 초이틀. 산 강 들 바다 햇볕 바람 모두 순후함으로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아우라지 강가에 터를 잡아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를 세우게 되었음을 고하나이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는 유네스코 아리랑 등재10년을 맞아 아리랑의 고향 정선군과 정선아리랑이 맏형으로서의 포용력을 발휘하고 국내외 자발적 전승단체의 대합류로 아리랑의 창조적 계승을 다짐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옵니다. 이에 12월 초 닷새날 여기에 세워지는 비를 통해 우리 고장과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이 향유함은 물론이려니와 인류 모두가 향유하는 노래로 온 누리에 스미고 번지게 하여 주시옵기를 크게 기원하는 바입니다. 정선군과 정선아리랑보존회 그리고 아리랑연합회와 국내외 전승단체가 준비였습니다. 작은 정성이오나, 흠향 하 시 옵 소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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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 김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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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 이사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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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이사장] 무세중#박창수의프리토크 #무세중3월, 문화예술계 선생님들과 함께한 #박창수의프리토크 마지막 게스트는 시대를 앞서간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님이십니다. ⠀ 무세중 선생님은 민족 연극의 모체인 굿과 놀이를 현대적 안목으로 풀어내면서, 작품을 통해 사회와 예술계에 날카로운 비판을 던져 왔습니다. ⠀ 무세중과 박창수, 두 전위예술가의 이야기를 오늘 프리토크에서 함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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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아리랑 찾아 40년… "전국에 70종, 그 시대의 소셜미디어였죠"서울 안국역에서 북쪽으로 오르막을 15분쯤 올랐다. 내장 같은 골목길 오른쪽으로 창덕궁이 저만치 보였다가 사라지곤 했다. 스마트폰으로 주소를 확인하는데 "이쪽입니다!"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김연갑(65)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이 서지학자가 들어앉은 원룸에는 누렇게 빛바랜 책이 가득 차 있었다. 네 평쯤 되려나. 방이라기보다는 창고, 과장하면 토굴에 가까웠다. 그는 '막다른 집'이라 불렀다. 문헌·악보·음반·사진 등 자료 4000여 점은 어수선했지만 나름대로 질서가 있었다. 아리랑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40년을 바쳤다는 김씨는 고서점 주인처럼 무엇이든 척척 찾아냈다. "이게 1926년 10월 1일 자 조선일보입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돼 기념식을 한 날이었어요. 여기 광고를 보세요. 단성사에서 나운규 영화 '아리랑'이 개봉됐습니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다 웬일인가~'라는 가사 보이지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좋은 땅에 길 내고 다 빼앗으니까 아리랑으로 저항한 거예요. 사흘 뒤엔 '가사가 불온하여 전단 1만장을 압수했다'는 기사가 실립니다." 아리랑 박사, 아리랑 독립군, 아리랑에 미친 사람…. 그에게 붙은 별명들은 아리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아리랑이 뭐기에 한 사람의 인생을 지배할까. 출발선에 선 육상 선수처럼 김씨가 심호흡을 했다. 아리랑을 찾아 헤맨 40년이 풀려나올 참이었다. 1979년 정선군 사북읍 -20대 중반에 왜 하필 아리랑에 꽂혔나요. "단국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다 강원도 철원에서 군 복무를 했습니다. 최전방 대남방송으로 들리는 북한 아리랑은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네~'처럼 가사가 낯설었어요. 해는 김일성, 달은 김정일이었지요. 제대하고 동두천 재건학교(일종의 야학)에서 국어를 가르치는데 어느 날 미군이 찾아와 질문을 던졌어요." -무엇을요? "호랑이, 태권도, 아리랑이 한국의 상징이라는데 아리랑을 사전적으로 짧게 설명해달라는 거예요. 그때는 즉답을 못 했어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 질문이 저를 움직였어요." -지금 다시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한민족의 노래라고 하겠지요. 1979년 말 강원도 정선으로 아리랑 답사를 갔는데 버스를 잘못 타 사북읍에 내렸습니다. 탄광 노동자들이 어용 노조와 저임금에 분노해 봉기한 사북사태(1980년 4월) 직전인데 그곳에서 상상도 못 한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남양군도 검둥이는 얼굴 손이 검지만/ 우리네 탄쟁이들은 얼굴 손 가슴까지 검다네~'." -남양군도는 어디고 가슴이 검다는 건 또 무슨 뜻인가요. "태평양 적도 부근 남양군도(南洋群島)로 끌려가 탄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광복 후 돌아왔습니다. 고국의 막장에 다시 들어갔는데 진폐증에 걸려 가슴까지 까맣다는 울분을 아리랑에 실은 거예요. 아, 이게 아리랑이구나. 친구들과 '아리랑 기행단'을 조직해 수집과 연구를 시작했어요." -정선, 밀양, 진도… 지역마다 아리랑이 참 많은데. "모두 70종이 넘어요. 강원도 인제에는 뗏목 아리랑이 있습니다. 나무를 베어 뗏목으로 강을 타고 서울에 내다 팔던 사람들을 떼꾼이라 부르잖아요. '떼돈'이 거기서 나왔고요. 울릉도 아리랑은 '울릉도 고개는 자물통 고개/ 한번 들어오면 나갈 줄 모르네~'로 흘러갑니다. 아리랑은 곡보다 가사가 더 중요해요. 경상도는 투박한 맛이 있고 전라도는 껴안는 즉흥성이 강하지요." -노래 채록 다닐 때 일화라면. "전남 진도에선 강아지 옆구리를 찔러도 아리랑이 나온다는 말이 있어요. 진도 옥주여관에서 그날 녹음한 아리랑을 들려줬더니 '나보다 못 부르네' 하는 겁니다(웃음). 여주인이 막걸리 한잔 걸치곤 불러 젖히는데 과연 가락을 잘 뽑아요. 어디에 가면 누가 최고로 잘한다고도 알려줬지요. 전국에 아리랑 가락이 활어처럼 펄펄 살아 있었습니다. 민초들이 불만을 토해내고, 시어머니를 욕하고, 항일 감정을 담고, 삶의 교훈을 들려주고…. 요즘 시대의 SNS(소셜미디어) 같은 역할을 아리랑이 한 겁니다. 아리랑에 얹기만 하면 확산이 됐으니까요."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남북한이 공동 입장하고 응원할 때도 아리랑을 썼지요. "1991년 남북 탁구 단일팀 때부터 아리랑을 단가로 사용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나운규 아리랑이죠." "아리랑에는 파벌도 순위도 없어" 아리랑 역사에서 대격변은 1865년부터 7년간 경복궁을 중수(重修)할 때 일어났다. 부역꾼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흩어졌다. 함경도·강원도·경상도 일대에서 부르던 노래 아라리가 이 과정에서 아리랑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김씨는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노래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정탐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며 "나운규의 '아리랑' 이후 아리랑이 탄압을 받으면서 가사가 지하로 흘러들었다"고 했다. -일본은 아리랑을 어떻게 탄압했나요. "유명한 가수를 데려와 아리랑 음반을 내면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가사를 뺐어요. 민족적 울분을 억누른 겁니다. 총독부가 1935년 유포한 '비상시 아리랑'은 모두 황군(皇軍)이 돼 비상사태를 막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내용이었어요. 1940년대엔 예술인을 동원해 군수공장에서 악극을 올렸는데 제목을 '아리랑'으로 붙였습니다. 아리랑 수난사지요." -숨어 있는 자료를 찾는 데 도사라고 하더군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일제강점기 신문을 20년 동안 훑었어요. 기사든 광고든 연재물이든 '아리랑'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왔습니다. 구한말 외국인 대사 부인들의 모임이 '아리랑클럽'이었어요. 1999년 첫 다목적 실용위성도 아리랑 1호잖아요. 우리 문화에서 그만한 지분을 차지하는 게 또 있을까요?" -잡지 창간호 모으는 일도 하셨더군요. "1980년대 초 서울 상계동은 보물창고였어요.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망한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였고 헌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고물상들 틈에 끼어 잡지 창간호를 수집했어요. 1984년 서지학자 최서면 박사의 한국학연구소에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헌 공부를 시작했지요. 서울올림픽 덕도 좀 봤습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자문하기 시작하면서 방송국들이 아리랑 전문가 김연갑을 찾았으니까요." -아리랑으로 생계가 해결되나요? "회원들이 쌀과 콩을 보내줍니다. 수입이 박하니 가족에겐 면목이 없고요. 고종의 헤이그 밀사 호머 헐버트(1863~1949)가 1886년 아리랑 후렴구를 기록한 편지를 발굴했고, 2012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아리랑을 등재했다는 데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지학을 믿어도 될까, 하는 의구심도 있습니다만. "저는 최서면 박사 등에게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해요. 문헌을 꼼꼼하게 대조하고 교차 점검을 합니다. 중국이 2011년 동북공정 논리로 조선족 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재로 만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아리랑을 내팽개치고 있을 거예요. 당시 중국 대사관 앞에서 제가 시위를 하자 '한국은 아리랑을 길거리 음악으로 내버려뒀는데 왜 이제 와서 중국에 문제를 삼느냐'고 했습니다." -진부하고 쉰내 난다며 아리랑을 배척하는 사람도 많은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요. 제가 1993년 사할린에 처음 갔습니다. 아리랑을 부르면 동포들이 알아듣고 다들 울어요. (이 대목에서 그는 울컥했다) 우리말도 모르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들었다는 거예요. 사할린 아리랑은 우리가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달라요. 흥이 나질 않고 응어리가 터져 나와요. 아리랑 하나만이라도 껴안고 있어야 나중에라도 조선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나, 하는 존재 증명 같았습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우리말은 몰라도 김치는 먹더라고요. "11월 15일부터 사흘간 축제를 하러 또 사할린에 갑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나는 언제나 고향에 갈까~'에는 그리움과 억울함이 겹쳐 있어요. 저를 포함해 아리랑을 하는 사람들도 국내에선 대우를 못 받아요. 오히려 해외 동포들과 부둥켜안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이라면. "아리랑은 그냥 서정민요가 아녜요. 우리 문화가 응축돼 있습니다.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정선 아리랑을 해당 지자체가 3대 아리랑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리랑 정신에 어긋납니다. 시야를 넓혀야 해요. 아리랑에는 파벌도 순위도 없어요." -아리랑 정신이란 무엇인가요. "저항과 대동, 상생입니다. 아리랑은 여럿이면서 하나이고 옛것이면서도 새것입니다." 그는 "씨름만큼만이라도 아리랑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숱하게 넘었을 마음속 아리랑 고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리랑 고개는 문경새재?… "경복궁 중수 때 아리랑 전파한 부역꾼들이 넘은 고개" 시인들은 "마음속의 고개일 뿐" 임권택 감독 영화 '서편제'에서 송화(오정해)는 아리랑을 육자배기로 구성지게 부른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진도아리랑에 왜 문경새재가 등장할까? 나운규 영화 '아리랑'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이 아리랑 고개에서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에선 "나를 위해 울지 마십시오. 나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나와 함께 아리랑을 부른 생각을 하며 불러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관객을 울렸다. 김연갑씨는 "아리랑에서 '아리랑 고개'가 없다면 영화와 시, 연극이 만들어졌을까"라며 "문경새재가 아리랑 고개라는 게 내 지론"이라고 주장했다. "삼남에서 부역꾼들이 올라올 땐 대부분 문경새재를 넘어야 하잖아요. 거기 박달나무가 많았는데 지금 가보면 없어요. 경복궁 중수 7년 동안 다 공출당한 거예요.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는 게 그 말입니다. 학정을 비웃는 소리, 상실감의 표현이지요." 아리랑 고개가 어디인가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 시인들은 '마음속 심상의 고개일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여럿이 흥겹게 아라리를 불러야 하니까 후렴이 필요해졌고 음감이 좋은 말(아리랑)이 있어야 했다"고 설명한다. 밀양아리랑에도, 진도아리랑에도 문경새재 박달나무가 나온다. "1920년대 말까지는 여러 지역에서 그렇게 수용했습니다. 문경 사람들이 박달나무를 다 베어 가는 불만을 노래한 거죠." 경복궁 중수 때 강제 부역을 한 사람들이 흩어질 무렵 개항이 시작됐다. 상당수가 철도 노동자로 변했다. "회령 출신인 나운규는 철도 노동자들이 부르는 아리랑이 절절해 가슴에 담았다 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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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작사자규명 학술심포지움[윤치호 애국가작사연구 -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애국가작사자규명 학술심포지움[윤치호 애국가작사연구 - 김연갑 아리랑학교 교장] ('17.06.23 한국프레스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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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 이사장 특강-원고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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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제4대 이사장 한완상 박사아리랑은 민요 그 이상의 '역사의노래'요, '노래의역사'요, '민족의노래'입니다.하여 노래로서의 민요 아리랑 보다는 민족의 상징(Symbol), 민족 동질성의 인자로서의 아리랑 또는 '아리랑문화'를 주로 다루게 됩니다. 특히 아리랑의 역사성과 아리랑의 정신, 그리고 아리랑의 위상을 제시하는데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아리랑의 넓고 깊고 큰 세계를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노래로서 한국의 심볼이다" 너무 입에 발린 말 같기도 하고 진부한 표현 같기도 하지만 이 말 만큼 아리랑의 위상을 제격으로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남과북이 아리랑을 단일 팀 단가로 합의하여 대외적으로는 'KOREA'의 국가로 부르고 있는 것이나, 125개국 교민사회 모두가 아리랑을 '조국의 노래'로 부르고 있는 것이나,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가치있는 문화유산의 보존 지운책으로 제정한상 이름을 '아리랑상' (Ariring Master Pieces)으로 한 것도 모두 그 위상을 말해주는 것 일 것이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 아리랑만큼 민족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고 인정하는 단 하나의 노래를 갖고 있단 말인가!그럼으로 우리는 이 아리랑을 통해 민족동질성 회복의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리랑을 주제로한 작품을 만들어 세계에 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아리랑'이 영화만이 아니라 웅장하게 짜여진 그랜드 오페라의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는 일찍이 「SONG OF ARIRANG」의 공동 저자인 님웨일즈 여사의 유언이기도 하지만 이 말에공감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아직 우리는 내 놓을 만한 영화나 오페라 한편을 갖고 있지 못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리랑에 대한 인식 부족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아리랑을 단지 "전통민요의 하나로 한의 노래" 고 만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같은 인식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99정선아리랑축제는 본 연합회가 '88년부터 주최해 온 행사이다. 비록 8도 아리랑만의 잔치마당이지만 그런대로 <아리랑제전>의 정례화와 민족축제로서의 <아리랑제전>모델 개발이라는확고한 목표로 계속 해온 사업이다. 금년의 행사 역시 <정선아리랑제>와의 공동 주관 이긴 하지만 목표는 역시 민족축제로서의 <아리랑축제>모델 개발에 있다. 그런만큼 퍼포먼스, 연극, 시 낭송회, 영화상영 같은 장으와 <아리랑 문화의 세계화 방안>이란 주제의 국제학술 세미나가 있게 된다. 물론 이번 행사의 경우 기존의 <정선아리랑제>와 어떻게 조화를 이뤄 아리랑 문화를 확산 시키고 새로운 축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라는 숙제를 얼마나 풀수 있을 런지는 궁금하지만 본 연합회로서는 큰 기대를 갖고 있다. 특히 이번에 펼쳐지는 각 장르의 작품 중에서 의미있는 작품은 다시 다듬어 독자적인 무대작품화 할 예정이다. 그래서 내년 행사에서는 더 다듬어진 작품들을 선보이게 될 것이다. 아리랑을 말하면서 꼭 떠올리는 인물들이 있다.혹한의 시절에 영화로서 민족혼을 일깨운 나운규 선생, 불꽃같은 혁명의지로 조국해방을 노래한 김산(장지락)선생, 그리고 '광복군아리랑'을 군가로 채택한 김구 선생 등등...... 이 분들의 열정만큼 혼이 담긴 아리랑 작품들이 이 시대에도 탄생되기를 기대해 본다. 1998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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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제 5대 이사장 이윤구 박사「아리랑」을 사랑하고 노래하기를 즐기는 한겨레아리랑연합회 회원 여러분께 두손 모아 인사를 드립니다. 부끄럽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 동지들의 맏머슴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장이란 중책을 맡을 만한 힘이 제게는 없습니다만 여러 회원들의 추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무거운 짐을 지기로 결심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뜻 깊은 일을 위해 애써 오신 여러분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을 믿기에 조금은 안심이됩니다. 경향각지에 계신 아리랑 동지들께서 부족함을 메꾸어 주시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아리아리랑은 우리 한겨레 역사를 깊은 가슴으로 노래해 온 씨올(民衆)의 피눈물, 타는 가슴이었습니다. 그 많은 아리랑이 예외 없 이 슬픈 우리 농민, 서민,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의 한을 표현한 비장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어느 아리랑도 눈물 없이 기쁘게 부를 노래가 없습니다. “아리랑 넘는 길 몇만리던가? 가면 오지도 못하는 고개 아리랑 스리랑 가면은 오지를 못하는 고개아리아리 얼싸 쓰리쓰리 얼싸 아리랑 고개는 눈물고개...”(추야월「아리랑고개는 눈물의 고개」첫 首)두 세 사람이 불러도 슬프고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노래해도 목이 메이고 오십만이 합창해도 눈물바다를 이룰 이 아리랑은 놀라운 민족혼의 통일노래입니다. 남북이이 아무리 갈라 지고, 싸움으로 미워해도 아리랑 노래만 나오면 하나가 될 것을 믿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우리 모두 아리랑 마음에 새겨 아리랑 통일을 이 뤄 보세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어절씨구 아라리가 났네. 한국에도 아리랑 조선에도 아리랑아리랑은 우리의 통일의 노래이 아 리랑이 삼천리 강산 모든 고을에서 울려 퍼지는 날이 올 것을 믿는 우리에게는 낙망이란 없습니다. 그 날이 속히 오기를 빌면서 우리는 아리랑을 민족 통일의 노래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 하기로 합시다. 저에게는 하나의‘아리랑 꿈’이 있습니다. 먼 후일의 일이라고 꾸짖으실 수도 있겠지만,제게는 그리 먼 장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겨 레는 이미 세계가 우러러 보는 아주 특별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아주 중하고 귀한 자산이 많습니다. 그 중에 참으로 금보다 값지고 공유하기 쉬운 것이 아리랑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아리랑’은 세상 온 누리에 나가 살고 있는 한겨레 교민들이 이미 부르고 있습니다. 어느모임에서든 이 노래만 나오면 모두 하나가 됩니다. 저는 세계 1백 여 국가에서 아리랑을 들었습니다. 그 때마다 구슬프지만 사 람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시키고, 애틋하지만 평화와 희망을 솟구치게 하는 힘을 저는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리랑을 70억 인간가족이 어디서나 함께 부르는 지구촌의 총가가 될 날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 아프리카의 저개발국 사막에서도 아리랑만 부 르면 굶주림·헐벗음·아픔과 슬픔도이겨내는 힘이 솟아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인간을 존앙하는 혼의 노래가 아리랑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너무도 쉽게 부를수 있으면서도 너무 너무 깊은 사람의 속마음을 흔 들어 깨우는 능력이“아리랑”속에는 신비롭게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아리랑의 위상과 가치를 한겨레아리랑연합회가 세계 곳곳에 확산시키고 , 이를 통해 남과 북은 물론 한겨레가 공동체를 이뤄가는 소임을 본인과 전 회원이 함께하기를 소망합니다. 평강을 빕니다. 아리랑은 민요 그 이상의 '역사의노래'요, '노래의역사'요, '민족의노래'입니다.하여 노래로서의 민요 아리랑 보다는 민족의 상징(Symbol), 민족 동질성의 인자로서의 아리랑 또는 '아리랑문화'를 주로 다루게 됩니다. 특히 아리랑의 역사성과 아리랑의 정신, 그리고 아리랑의 위상을 제시하는데 힘을 기울일 것입니다. 아리랑의 넓고 깊고 큰 세계를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노래로서 한국의 심볼이다" 너무 입에 발린 말 같기도 하고 진부한 표현 같기도 하지만 이 말 만큼 아리랑의 위상을 제격으로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남과북이 아리랑을 단일 팀 단가로 합의하여 대외적으로는 'KOREA'의 국가로 부르고 있는 것이나, 125개국 교민사회 모두가 아리랑을 '조국의 노래'로 부르고 있는 것이나,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가치있는 문화유산의 보존 지운책으로 제정한상 이름을 '아리랑상' (Ariring Master Pieces)으로 한 것도 모두 그 위상을 말해주는 것 일 것이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 아리랑만큼 민족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고 인정하는 단 하나의 노래를 갖고 있단 말인가!그럼으로 우리는 이 아리랑을 통해 민족동질성 회복의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리랑을 주제로한 작품을 만들어 세계에 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아리랑'이 영화만이 아니라 웅장하게 짜여진 그랜드 오페라의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이는 일찍이 「SONG OF ARIRANG」의 공동 저자인 님웨일즈 여사의 유언이기도 하지만 이 말에공감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아직 우리는 내 놓을 만한 영화나 오페라 한편을 갖고 있지 못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리랑에 대한 인식 부족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아리랑을 단지 "전통민요의 하나로 한의 노래" 고 만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같은 인식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99정선아리랑축제는 본 연합회가 '88년부터 주최해 온 행사이다. 비록 8도 아리랑만의 잔치마당이지만 그런대로 <아리랑제전>의 정례화와 민족축제로서의 <아리랑제전>모델 개발이라는확고한 목표로 계속 해온 사업이다. 금년의 행사 역시 <정선아리랑제>와의 공동 주관 이긴 하지만 목표는 역시 민족축제로서의 <아리랑축제>모델 개발에 있다. 그런만큼 퍼포먼스, 연극, 시 낭송회, 영화상영 같은 장으와 <아리랑 문화의 세계화 방안>이란 주제의 국제학술 세미나가 있게 된다. 물론 이번 행사의 경우 기존의 <정선아리랑제>와 어떻게 조화를 이뤄 아리랑 문화를 확산 시키고 새로운 축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라는 숙제를 얼마나 풀수 있을 런지는 궁금하지만 본 연합회로서는 큰 기대를 갖고 있다. 특히 이번에 펼쳐지는 각 장르의 작품 중에서 의미있는 작품은 다시 다듬어 독자적인 무대작품화 할 예정이다. 그래서 내년 행사에서는 더 다듬어진 작품들을 선보이게 될 것이다. 아리랑을 말하면서 꼭 떠올리는 인물들이 있다.혹한의 시절에 영화로서 민족혼을 일깨운 나운규 선생, 불꽃같은 혁명의지로 조국해방을 노래한 김산(장지락)선생, 그리고 '광복군아리랑'을 군가로 채택한 김구 선생 등등...... 이 분들의 열정만큼 혼이 담긴 아리랑 작품들이 이 시대에도 탄생되기를 기대해 본다 2001년 11월 4일